- 줄 위의 남자
다니엘 켈만 지음, 박종대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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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비웃는 풍자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필요하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마냥 웃을 일만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 더 이상 반복적인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 된지 오래다. 서로 가지고 있는 생각의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오늘도 계속 벌어지고 있으니 경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이 책은 이러한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대의 권력자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비운의 풍운아라는 말이 있다. 딱 이 말에 어울리는 자가 이 소설의 주인공인 틸이 것이다. 틸은 전쟁과 전염병이 휘몰아친 절망의 시대, 가장 밑바닥에서 누구보다 거침없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온 인물 ‘틸’의 생애를 따라가는 거대한 모험기다. 권력자의 위선에 아버지를 잃는 비극을 눈앞에서 경험한 틸은 안락한 삶을 내려놓고 평생을 떠도는 위험천만한 광대의 삶을 선택한다. 황제를 머저리라고 부를 수 있고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을 수 있는 단 한 사람,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크게 세상을 비웃을 수 있는 공중의 제왕 틸의 이야기는 암울한 세상에 던지는 농담이자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진 수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이 시대의 안부다.


틸은 권력 투쟁의 장이 된 30년 전쟁에서 소모품처럼 희생된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는 14세기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인물 틸 울렌슈피겔이다. 중세 독일의 민담으로 전해 오는 악동이자 어릿광대인 울렌슈피겔은 온갖 장난으로 사람들을 골탕 먹이고 성직자나 권력층을 조롱하는 캐릭터다. 악마처럼 무모하고 예수처럼 사심 없는 자, 안락한 삶을 내주고 자유를 얻은 예술가 틸은 권력투쟁의 장 속에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희생된 수많은 민중을 대신해 강인한 생명력으로 끈질기게 삶을 이어간다.


이 책의 저자는 틸이라는 인물의 시선을 통해 전쟁과 질병, 기아 속에서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과 절망을 세심하게 포착해낸다. 또한 거대한 역사 앞에서 드러나는, 권력과 지위를 가진 자들-교황과 왕, 제후와 성직자-의 어리석음과 유약함을 한껏 비웃는다. 이것이 다름 아닌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과 꼭 닮아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종교 갈등은 멈추지 않았고, 계급 또한 타파되지 못했으며, 극단주의나 배타주의 또한 극성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또한 당시 페스트가 기승을 부렸듯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덮었다. 종교와 전쟁, 배타주의로 분열된 유럽의 이 잔혹한 이야기는 거울처럼 지금 우리 시대를 비춘다.


“남들이 우리를 기억해주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억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고, 우리는 산 자들의 일에 무심하지 않다. 모든 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시대의 아픔(불평등, 젠더, 빈부의 격차 등)을 떠안으며 살고 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민중을 해방시킬 자가 생겨난다. 틸처럼 어떤 영웅을 만들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젠 나 자신이 그 역할을 해야 할 때다. 즉 우리 자신을 스스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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