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
조현 지음 / 민음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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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단정적일까?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시가 세상을 바꿔왔다면, 세상이 지금의 모습은 아니어야 한다. 충분히 아름답지는 않아도, 비유와 은유가 넘치는 그런 세상이어야 할 텐데,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시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가장 큰 증거, 세상을 보라.

말하자면, 시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 바에야, 그건 애당초 불가능한 상상이다. 문학은 줄곧 세계의 창이나 거울 노릇을 자임해 왔지만, 사람들은 문학을 통해 투과되거나 반사된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길 더 좋아했다. 아니면 현실에 매몰돼 현실 밖에 보질 못했다. 문학의 자리는 좁아졌고, 앞으로도 좁아질 것이다. 하물며 시는, 말할 것도 없고.

문학이나 시가 처한 현실이 암담하긴 하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세상엔 여전히 시의 힘을 믿는 이들이 있다. 적어도 시인들은 그럴 것이고, 시 애호가들은 그럴 것이다. 그들에겐 대다수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다는 현실은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 이미 그들의 세계는 시로 요동치고 있으므로, 그 운동을 어떻게 전이할 것인가가 진정 문제일 따름이다.
그런 믿음은 상상력이 더해져 어떤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조현의 소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와 같은 작품이 그런 노골적인 믿음을 숨기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는 이른바 평행우주를 다룬 작품이다. 작가가 다소 뻔뻔하게 전개해 나가는 작중의 우주는, 우리가 사는 우주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전혀 다르다. 비틀스의 멤버가 네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라는 것은 오히려 사소한(?) 차이일 뿐이다. 이 우주에 태어난 마이클 햄버거라는 시인은, 이본 마멜이라는 편집자의 완전히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펭귄현대시인선집’에 이름을 올리게 되고, 대형 햄버거 프렌차이즈 때문에 경영난에 허덕이는 소형 햄버거집 아들이었던 커닝스 주니어는 서점에서 가서 ‘햄버거’란 키워드가 들어간 모든 책을 사들이게 됐다. 그 속에 마이클 햄버거의 시선집이 끼어 있었던 것도 우연이었고, 이 책이 이태원 헌책방으로 굴러 오게 된 것도 우연이었고, 맥도널드 햄버거의 새로운 광고기획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기획c 부팀장 김경주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도 전적으로 우연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우연이 빚어낸 우주의 모습은 참으로 시적이다. 비록 시가 대형 패스트푸드 프렌차이즈의 홍보 수단으로 쓰이는 모습이 한편으로 애처롭기도 하지만, 결국 정크푸드 회사는 이를 계기로 친환경·친인간적 기업으로 거듭하게 된다. 하여간, 시가 세상을 바꾸긴 한 것이다.

비록 우연으로 점철되긴 했지만, ‘미시적 사건의 연속’이야 말로 ‘역사적 필연’이라고 누군가 주장할지도 모른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시가 세상을 바꾸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들, 그걸 꿈꾸는 것 조차 불가능할까. 조현은 이른바 ‘시적 상상력’으로 시가 세상을 바꾼 평행 우주를 그린다. 한편으로 애처롭지만, 또 한편으로 경이롭다. 우연이 낳은 우연은 필연이 되고, 그 시점에서 기형(畸形)의 음식인 햄버거는 오히려 모든 사물의 역사를 대변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니’지만, 사실은 모든 것의 역사를.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아무래도 인간에게 세계는 사랑의 기억에 대한 애틋한 연민이나 가족에 대한 이해심, 혹은 시적 상상력과 진보에 대한 점진적인 확신이 적절하게 버무려지면서 조금씩 사랑스러워지는 모양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우주도 있을 터이지만 말이다.

소설이 그렸던 그 모든 필연적 우연과 만유하는 시적 상상력에도 불구하고, 독자가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지점이 일장춘몽이고, 불가능함이라니! 그러나 조현 작가는 ‘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단정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음속 깊이 시가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우연의 우연을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다만 이 우주에선 아직 시적 필연이 될만한 애틋한 삶의 ‘얼룩’들이 부족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바꾸려거든, 시인이 되던가 아니면 사랑하던가. 어쩌면 난해할지도 모르는 그의 사유 속에 깃든 메시지는 이 한가지일 지도 모른다. 하여간, 사랑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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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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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6 우리는 맹신자가 아니라 비판적 지지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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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안단테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지음, 김병순 옮김 / 돌베개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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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친구는 도대체 무슨 권리로 달팽이의 삶에 끼어들었단 말인가?’    

유럽여행 중에 얻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병으로 병상에 누워 지내던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는 친구가 제비꽃 화분과 함께 가져온 달팽이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평생 건강하게 살았지만 원인불명의 병으로 전신 마비가 왔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누워서 숨 쉬는 것밖에 없었던 그녀였다. 원인 모를 병이 베일리의 신체를 구속한 것처럼, 달팽이 역시 영문도 모른 채 전혀 다른 환경에 던져졌다. 그녀는 달팽이집에 꽁꽁 숨어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던 달팽이의 모습이 자신과 겹쳐져 영 마뜩잖았던 것이다. 

그런데 며칠 뒤,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던 달팽이가 더듬이를 부드럽게 흔들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분에서 화분 밑 접시로, 화분 옆 전기스탠드로, 그리고 마루바닥에 까지. 달팽이는 느리고 우아한 움직임으로 산책하고 관찰하듯 끊임없이 돌아다녔고, 광고지며 편지지를 파먹기 시작했다. 베일리는 대신 꽃잎 하나를 건넸다. 달팽이는 먹는 건지 안 먹는 건지 모르는 속도로 꽃잎을 먹었다. “귀를 바싹 기울였다. 달팽이가 먹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나는 달팽이가 보라색 꽃잎 하나를 저녁밥으로 꼼꼼히 다 먹어 치우는 한 시간 동안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숨 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던 베일리는 달팽이 덕분에 새로운 할 일이 생겼다. 달팽이를 관찰하고 먹이를 챙겨주고, 이 친구에 대해서 더 잘 알아보는 것. 

『달팽이 안단테』는 투병 생활 중에 달팽이를 키우게 된 저자가 달팽이를 관찰하면서 쓴 일종의 관찰일지이자, 에세이다. 그렇다고 ‘관찰’이라는 행위에 집중하여 쓴 것도 아니고, 달팽이에 관해 생물학적으로 깊이 들어가지도 않는다. 병으로 일그러진 자신의 일상을 절망적으로, 또 덤덤하게 써내려간 부분은 투병 에세이 같기도 하다. 달팽이와 저자 자신의 이야기는 책 속에 절묘하게 맞물려 있다. 절망 속에 우연히 찾아온 달팽이, 달팽이 특유의 느리지만 부지런한 움직임은 베일리에게 큰 위로이자 감동을 주었다. 베일리는 그 감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달팽이의 타고난 느린 걸음걸이와 고독한 삶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어둠의 시간 속에서 헤매던 나를 인간세계를 넘어선 더 큰 세계로 이끌어주었다. (…) 그 아주 작은 존재가 내 삶을 지탱해주었다.” 

원인 불명의 병, 전신 마비, 달팽이라는 작은 친구. 베일리가 처한 상황은 상투적인 감동으로 이어질 법도 한데, 오히려 베일리는 달팽이를 통해서 깨달은 생명의 감동을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그 관조의 태도에선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투병과 달팽이 관찰을 통해 생명의 존귀함에 도달하는 이 책에 대해 사회 생물학자인 에드워드 O. 윌슨은 딱 한 문장으로 평가했다. “아름답다”고. 이 책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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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러셀을 말하다 - 세계를 해석하는 것에 대하여, 세계를 변혁하는 것에 대하여
노엄 촘스키 지음, 장영준 옮김, 김한조 삽화 / 시대의창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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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출판계에 노엄 촘스키버트런드 러셀의 인기는 좀 각별한 데가 있다. 일찍이 2000년대 초부터 촘스키는 다수의 저작을 통해 미국과 거대 언론에 반항하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알려졌었고, 러셀의 경우 그간 철학자와 에세이스트로만 알려졌었지만, 최근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등이 소개되면서 촘스키와 마찬가지로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대중에 알려지게 됐다. 그들에 대한 대중의 인기는 비록 그들의 전공 분야와는 무관한 특정한 정치적 입장과 실천적 태도 때문이라는 한계도 있지만, 이를 통해 시대와 대중이 요구하는 지식인의 참모습을 가늠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서평작인 『촘스키, 러셀을 말하다』의 제목은 강렬한 호기심을 유발한다. 과연 후대의 지식인 촘스키는 전대의 지식인 러셀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이 책은 1970년 사망한 버트런드 러셀의 추모 1주기를 맞아 1971년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촘스키가 강연한 내용을 옮긴 것이다. 러셀을 추모한 강연이긴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강연의 주제가 러셀은 아니다. 촘스키는 1강에서 ‘세계를 해석하는 것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에 대한 러셀의 인식론과 자신의 언어학적 입장 설명하고, 2강에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에 대해여’란 제목으로 1강을 통해 인식한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 다뤘다. 정리하자면 1강은 세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이론적인 작업이라면, 2강은 세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인 노력을 담고 있다. 그렇다고 이 일련의 작업이 촘스키 개인의 성과는 아니다. 그는 강연에 들어가기 앞서 러셀이 설파했던 교육관을 언급한다. 러셀은 진보적 교육의 과제가 “통제가 아니라 사물의 가치를 파악하는 능력을 길러 자유로운 공동체의 현명한 시민들을 양성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고, 또 개인의 자유로운 창조성과가 시민정신을 결합함으로써, 오직 소수만이 성취할 수 있었던 가치를 사람마다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교육이란 세계를 ‘해석하는 일’과 ‘변혁하는 일’을 하나로 잇는 일이다.

우리가 러셀과 촘스키를 언급할 때는 주로 후자, ‘변혁하는 일’에만 골몰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세계를 ‘해석’하는 이론적인 작업 없이는 ‘변혁’도 미완성에 머무른다. 러셀의 교육관에 충실하게 따른 촘스키는 이 책의 1강에서 ‘해석하는 일’을 심도 있게 다뤘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에 대한 언어학적인 접근은 분명 우리에게 생소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하지만 이론 작업을 거친 뒤 우리의 ‘변혁’에는 확고한 신념이 더 해 진다. 그 신념이 촘스키와 러셀이 오랜 세월 세계를 변혁하는 일에 매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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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트 서부해안 연대기 3부작 1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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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에 대한 대가의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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