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창비세계문학 40
마리오 베네데티 지음, 김현균 옮김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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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일 금요일


나는 일기 쓰는 걸 관둔지 20년도 훨씬 지난 사람이라, 날짜를 적는 걸로 글을 시작하려니 퍽 어색하다. 그러나 마리오 베네데띠의 휴전을 소개하는 이 글 만큼은 이렇게 시작하리라 진작 마음먹은 터였다. 비단 내가 일기 형식의 이 소설에 깊이 매료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설을 읽으며 어느새 나는 글 앞에 특정한 시간을 못 박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 글은 일기는 아닐지라도, 내 일대기(그런 게 있다면)에 지금 이 시간이 하나의 기록으로 남을 터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휴전을 읽고 313일에 이 글을 씀’ (그러고 보니 이게 바로 일기(日記)인 것 아닐까?)


소설 휴전은 이제 퇴직을 6개월여 앞둔 중년 남성, 마르띤 산또메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 전체가 마르띤 산또메가 쓴 일기로 이루어 졌다는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인데, 그렇다면 소설의 형식으로써 일기라는 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그게 그냥 1인칭 시점의 변주 정도는 아닌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나는 이러한 형식이 소설의 서사 뿐 아니라 독자의 태도에 영향을 준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독자는 마르띤 산또메라는 이름의 남자가 쓴 일기로 소설의 서사를 접하게 되는데, 이 서사라는 것은 결국 마르띤 산또메가 무료한 일상을 반복하며 그가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기록한 것이다. 타인의 일기는 그냥, 몰래, 훔쳐보듯 읽는 것이지, 진지한 비평의 대상은 못 된다. 그러니 이 소설, 휴전을 읽다 보면, 진지한 독자로서의 태도는 일부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판단하고, 기대하고, 예측하기보다, 그저 무언가 일어나길 기다리게 된다. 나는 이것이 독특한 독서 경험이라 생각하는데, 게다가 이것은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도 거의 근사한 것이다.

 

마르띤 산또메는 법정 퇴직연령에 따라 퇴직을 반년 앞둔 남자이다. 또 오래전에 상처하여 홀로 세 남매를 키운 홀아비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는 젊어서부터 어지간히 세파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인물로, 이제는 삶에 애착이나 미련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시점에 이른 것이다. 그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소설의 전반부는 삶에 대한 권태와 무감각으로 무겁게 침잠해 있다. 만약 이 소설이 그의 젊었던 한 때, 즉 아내를 잃기 전과 후를 다루었다면, 휴전은 인생의 부조리에 관한 아주 뜨거운 이야기가 되었을 법도 하다. 그랬다면 소설의 제목도 휴전이 아닌, ‘전쟁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휴전은 마르띤 산또메가 세파에 정신적·육체적으로 완전히 고갈되길 기다린 다음,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211일 월요일

이제 퇴직까지 6개월 28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 지 어느덧 5년이 넘었다. ()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이 권태와 무료함으로 가득하리라는 것은 지당한 예측이다. 그리고 실제로 소설 전반부는 그렇게 진행된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소설의 분위기는 독자가 전혀 기대 못한 방식으로 반전된다. 우리의 마르띤 산또메 역시 자신의 인생이 이런 식으로 전개될지는 예상하지 못 했다.

 

52일 목요일

() 그전에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한다. 이 나이에 갑자기 나타난 딱히 예쁘지도 않은 아가씨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내가 사춘기 소년처럼 안절부절못한다는 것이다. ()

 

이 시점에서 소설은, 다소 부적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낭만을 느낄 수 있는 사랑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아주 극적이란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기까지 마르띤 산또메가 감정을 새로이 쌓아가는 모습을, 그가 쓴 글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 소설이 일기 형식인 것이 특징이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일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이라 말해볼 수도 있다. 일기란 매일의 기록이 쌓여서 커다란 일대기를 만들어 내는 글타래이다. 이 일대기의 결말이 어떤 모습일지, 일기 초반이나 중반에는 결코 알 수 없다. 하루라는 시간 단위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형식의 소설은 특별히 시간의 흐름에 강박적으로 매달리지 않는 이상, 소설의 초반과 결말이 쉽게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서술자는 넌지시 결말을 암시하기 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마르띤 산또메는 어떤가? 그저 퇴직을 간절히 기다려온 이 남자가 또 다른 사랑과, 행복과, 절망을 과연 꿈꿔보기나 했을까? 또 다시 운명에 휘말릴 걸 알았을까? 그는 몰랐다. 만약 알았으면 그는 결코……. 소설을 다 읽고 덮은 지금에서 나는, 휴전이 인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이야기이며, 우리의 인생과도 무척 닮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마르띤 산또메에게 동지애마저 느끼는 것이다.


인생이 전쟁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흔한 비유라고 생각되지만, 또 그만큼 적절한 비유도 없다. 마르띤 산또메는 이 전쟁을 꽤 오랫동안 치룬 사람이다.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잠시 허락된 휴전일 뿐이었다. 퇴직으로도 그의 전쟁은 끝나지 않은 듯하다. 그는 계속 불행과 싸울 것이고, 나는 또 나의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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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8개월이 된 딸이 오늘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뭔가를 열심히 시도 중이다. 그 작은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데, 적어도 그 뭔가를 할 때만큼은 깜짝 놀랄 만한 집중력과 끈기를 발휘하곤 한다. 최근에는 두 팔로 상체를 일으키곤, 두 발로 서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다리가 채 여물기 전이라 그 가벼운 몸도 제대로 지탱하지는 못한다. 일어서려다 쓰러지기 일쑤다. 한 번은 내가 출근하고 없을 때, 딸이 아내의 무릎을 짚고 서려다 넘어지면서 어디 잘못 부딪혔는지 입안을 다친 일이 있었다. 어린 딸이 입에서 피를 흘리며 울자, 깜짝 놀란 아내는 그 길로 딸을 안고 병원으로 뛰어갔더란다. 다행히 의사 말로는 큰일은 아니라고 했다. 그날 퇴근하여 딸아이의 얼굴을 보니, 그때까지도 입안에 피를 조금 머금고 있었다. 그 낯으로 아빠가 반갑다고 웃어 보인다.

부모 된 특권으로써, 나는 딸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8개월은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많이 컸다곤 하나, 엄마와 아빠 품을 벗어날 정도는 아직 아닌 것이다. 그러나 딸은 분명히 크고 있고, 언젠가는 이 품을 벗어나게 될 터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안다. 입안이 찢어지는 정도는 저리 가라 할 만큼 더 큰 상처를 입는 일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또 어떤 상처는 몸이 아닌 마음 위로 깊은 자국을 남기기 마련이다. 나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 자국들이 오히려 딸아이의 고투를 증명해 주리라 믿는다. 그걸 지켜보는 마음이 아주 편치는 않겠지만, 딸이 겪을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닌 것이다. 그날 딸은 웃었고, 그래서 나도 따라 웃었다.

 

동일한 딜레마를 청소년 성장 소설을 읽으면서도 느낀다. 청소년 성장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소설 속 주인공이 성장하는 걸 지켜보는 일이다. 소설 속 아이들은 자주 외부 세계로부터 시련을 부여받아 고통에 시달리곤 하는데, 그럴 때면 순수한 독자라는 지위를 망각하곤 지독한 연민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설 속 인물을 위해 딱히 뭔가를 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저 꾹 참고 이 서사를 묵묵히 따라갈 뿐이다. 다행인 것은, 이 이야기가 성장 소설이라는 이유로, 시련과 갈등은 어느 순간 해소될 것이며, 주인공은 결말에 이르러 성장을 완성하리라는 어떤 확신은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성장 소설이 청소년 세대의 성장을 아주 낙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걸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법은 없다. 어떤 고난에도 불구하고 성장은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성장 소설이 줄곧 던져온 메시지였다. 나는 이 성장 가능성을 현실로 이어가는 것이, 성장 소설을 위한 올바른 독법이라 믿는다.

 

 

 

 

 

 사람이 성장하는 데 있어 기기, 걷기, 말하기 같은 특정한 행동이 발달되는 결정적 시기가 있다고 합니다. 이 시기를 놓치면 다음 시기에 이런 발달과업이 보완되기 어렵다는 거지요. 이처럼 여러분이 성장하는 데 있어서도 특정 시기에 반드시 응답하고 넘어가야 하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어린 시절 나름의 질문, 청소년기에는 청소년기 나름의 질문 말이지요.

- 유영진, 문학동네, 관계의 온도의 발문 중에서

 

 

문학동네에서 청소년 테마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세 권의 소설집을 내놓았다. ‘관계’, ‘콤플렉스’, ‘미래(진로)’라는 세 개의 테마로, 21명의 작가가 한 편씩 쓴 단편 소설을 엮은 것이다. 대단한 기획력과 여러 사람의 품이 들어간 책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청소년 세대가 지닌 고민의 방향을 관계, 콤플렉스, 미래, 이 세 가지로 묶은 것이 아주 명쾌하고 또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응답한 21명의 작가가 내놓은 이야기들도 더없이 좋다. 청소년 소설을 빙자한 어떤 이야기들은 꼰대의 잔소리이기 쉬운데, 이 책에선 그러한 태도는 찾기 어렵다. 오히려 정답이 없는 이 고민을 앞에 두고 물음표와 말줄임표를 잔뜩 찍는 작품들이다.

  

  

 

 

 

 

나나가 없을 때 나는 누구하고 점심을 먹었을까, 쉬는 시간에는 멍청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거나 문제집만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걸까, 음악실이나 체육관으로 이동할 때 나는 혼자였을까, 나나 없이 학교로 가는 언덕길을 텅 비어 있었다. 눈앞에 아이들 없이 햇살만 가득한 교실이 보이는 것 같았다. 거기에는 나도 없었다.

- 김민령, 너를 기다리는 동안, 관계의 온도

 

는 나나가 아침 등굣길에서 만나 함께 다니는 사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나가 맹장 수술 때문에 결석하는 날이 길어지자, ‘모든 거리 풍경이 15도 정도 각도를 튼 것처럼느낀다. 나나의 부재가 로 하여금 세계 속 자기 존재를 재인식하게 한다.

혈연이나 가족 관계가 아닌 이상, 우리가 맺은 관계를 딱히 뭐라고 정의하긴 힘들다. ‘와 나나가 그랬듯. 다만 그 복잡한 관계 속에서는 우리는 다양한 감정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좋은 것은 늘 좋고, 나쁜 것은 늘 나쁜 것도 아니다. 좋았다가 나빠지기도 하고, 나빴다가 좋아지기도 하는 것이, 무릇 관계의 온도이다. 여기 7개의 단편이 관계의 다채로운 모습을 그렸다. 그 관계가 불러일으키는 온도변화에 깜짝 놀라게 된다. 아이들도 이렇게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구나, 하고 아주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다.

 

 

 

 

 

 

 아무도, 모른다. 내가 학교를 결석한 걸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엄마한테 왜 연락이 없지? 혹시 담임이 내가 결석한 걸 모르고 있나? 유나와 서연이는? 무슨 일인지 걱정도 안 되나?

저 아래서 울컥하고 뭔가가 올라왔다. 이게 아니다. 내가 기대했던 건, 이게 아니다.

- 김혜정, 학교에 안 갔어, 콤플렉스의 밀도

 

자타공인 모범생의 표본으로 평가받은 서은수는 어느 날 학교를 땡땡이치기로 마음먹는다. 비슷한 건 이름뿐인 같은 반 소은수 탓이다.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예쁜 소은수와 사사건건 비교 당하고 엮이던 차에, 어떤 사건을 계기로 열등감이 폭발하고 말았던 것. 그런데 왜 아무도 서은수가 학교를 땡땡이쳤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사건의 전말은 다음 날 밝혀진다. 전날 소은수도 감기로 학교를 빠졌는데, 선생님이 소은수네 엄마가 한 전화를 서은수네 엄마가 한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평소 소은수의 좋지 못한 행실이 낙인효과로 작용했던 것. 교무실에서 자신의 열등감 대상이었던 소은수가 짓는 허망한 표정을 보고, 서은수는 그만 아연해진다.

콤플렉스 관계가 뒤집히는 반전에 어리둥절했다. 통쾌하다기 보다 가슴이 꽉 막히는 반전이다. 누구에게나 콤플렉스가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 이야기가 아닌가.

이 책의 나머지 이야기에 대해 말하자면, 계속하여 콤플렉스의 부정적 측면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칼 융에 따르면, 콤플렉스는 또 다른 가능성 위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고재현의 곰이 춤춘다와 송미경의 젤잘르 헤어는 그런 의미에서 놓쳐서는 안 될 작품이다.

 

  

 

 

 

  

건물로 들어서자 급격히 낮아진 온도에 나는 카디건을 꺼내 입었다. 견디기 힘겨운 바깥의 더위와는 달리 학교 내부는 몹시 서늘했다. 어젯밤, 얼어붙은 J의 육체가 발견된 중앙 현관을 나는 무감하게 지나쳤다. 중앙 현관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던 냉기가 콧구멍을 통해 들어와 내 두개골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비정한 냉기는 그런 방식으로 학교 전체를 야금야금 장악하고 있었다.

- 최서경, 4%, 내일의 무게

 

지금 빙하기가 시작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아니, 현실의 학교는 이미 빙하기를 방불케 할는지 모를 일이다. 빙하기 교실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다가 종국에는 자기 안의 냉기를 이기지 못하고 얼어붙어 버리고 만다. 그 정경이 현실에서도 본 듯하여 섬뜩하다.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내일의 무게를 내려놓으라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내일의 무게를 내려놓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두지 않았다. 그러니 그 말도 해서는 안 된다. 21인의 작가는 그래서 말을 아주 아낀다. 소설 속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대신 열렬한 응원과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그것이 이 세 권의 책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하나의 태도이다.

 

성장을 지켜보는 올바른 태도가 무엇인지, 나 역시 잘 알지 못한다. 그저 그날 보여준 딸의 미소에서 어렴풋하게나마 느낀 건 있다. 그건 내 무릎과 어깨를 기꺼이 딸에게 내어주는 일이다. 딸이 계속 시도하고 실패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일이, 내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 믿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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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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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근사한(또는 거의 정확한) 해석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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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라디오, 그의 슬픔과 기쁨

이야기의 공동체

 

각자의 인생을 바탕으로 쓴 한 편의 소설에 대해 상상해 본다. 전 세계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전부 소설가가 되어 자신의 인생에 관한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거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느냐에 따라 그 소설의 성격은 달라질 터이다. 어떤 소설은 희극이고, 또 어떤 소설은 비극이 될 것이다. 모험물일 수도 있고, 연애물일 수도 있다.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소설이 있는가 하면, 완전히 세속적인 소설도 있을 것이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어떤 이에 관한 소설은, 그 모든 성격을 다 가지고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잘 팔려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이 있는 것처럼, 어떤 이의 소설은 특별히 많은 주목을 받을 테고, 또 어떤 소설은 전혀 주목받지 못할 것이다. 소설 주인공이 유일한 독자인 불행한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 또한 소설이 된 인생의 숙명이다.


그때 나는 어떤 소설을 쓰고 있을까, 내 아내는 어떤 소설을 쓰고 있으며 내 아이는 어떤 소설을 쓰게 될까, 내가 잘 모르는 어떤 이는 또 어떤 소설을 쓰고 있을까. 그렇게 집필이 끝나고 나면, 다른 사람이 쓴 소설을 읽고 대신 내 소설을 건네는 것이다. 잘 부탁드린다, 꾸벅 인사하면서. 되도록이면 많은 소설을 읽고 싶다.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소설의 주인공을 전심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내 소설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서로를 잘 알기 위해서 소설책을 돌려보는, 그런 마술적 공동체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불가능한 공동체

 

각자의 인생을 바탕으로 한 소설 같은 것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갑자기 소설가가 될 수 없으니, 이건 그냥 공허한 상상일까? 몇몇 사람은 실제로 작가가 되어 자기 인생에 관한 몇 권의 책을 쓰기도 하지만, 대개 그런 책들은 자기 인생에서 특별히 빛났던 시기만을 담은 것이지, 인생 그 자체가 글감인 것은 아니다(그럼에도 그 책을 읽고 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소설이 아니라 영화나 노래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생이 한 권의 소설이든, 한 편의 영화든, 한 곡의 노래가 되는 일은 불가능할 터이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다른 무언가가 되기에 대체로 너무 평범하지 않은가.


아니, 평범한 게 문제일 수는 있어도, 평범하기 때문에 소설이 못 되는 건 아니다. 평범하므로 오히려 가능한 이야기들, 보편적이라 강렬한 이야기도 분명 있다. 이를테면 19세기 러시아 문학이 황금기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도, 당대 러시아의 현실과 민중의 삶을 사실주의의 방식으로 묘사해냈기 때문이다. 푸시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레르몬토프, 고골……. 세계는 이 이야기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이야기를 어떻게 소설로 만들 것이며, 타인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어쩌면 우리는 한 번도 쓰인 적도 없는 소설을 놓고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한 번 써보고 나면 멋진 이야기일지 누가 알겠는가. ‘사연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라는 말 속에 담긴 주장도 바로 그러하다. 평범함 속에 상상력을 뛰어넘는 사연이 담겨있기도 한 것이다. 스스로 듣기전문가라고, 듣기 위해서 살았다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말도 들어 봄 직하다.

 

박스팝은 보이스 오브 피플, 즉 민중의 목소리란 뜻이야. 피디가 되면 제일 먼저 훈련받는 게 바로 거리로 나가서 박스팝을 따 오는 거야. (……) 임진강에서 실향민 백 명을 만나서 고향과 가족에 대한 기억과 통일에 대한 의견을 녹음해 오는 것이었는데, 나중엔 너무 지쳐서 뭐라고 물어볼 힘도 없어졌어. (……) 나는 반복적인 질문에 대해서 좀 알게 되었을 수도 있어. 질문은 같아도 대답은 다양하더라는 말이 아니야. 질문은 같아도 예상을 벗어나는 말은 늘 있었어

우리의 타인에 대한 상상력은 늘 우리를 배신해. 타인은 우리의 상상력보다 클 수 있어. 나는 예측할 수 없음에 열광하게 되었어. 반복적인 질문을 몇천 번이나 던져본 다음에 말이야.

- 23, 마술 라디오, 정혜윤, 한겨레출판

 

이야기는 특정한 인물이 특정한 상황에 던져졌을 때 어떤 특정한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는 작업이라고 한다. 정혜윤 피디는 임진강의 실향민 백 명을 만나 동일한 질문을 던지는데, 말하자면 실향민들은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선택을 한 사람들인 셈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 예상을 벗어나는 대답을 내놓는데, 이유는 물론 그들이 서로 다른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묻고 듣고 다니면서 제일 놀라운 것,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려 하나는 바로 그 점이야. (……) 난 이 이야기들을 다 방송하지는 못 했어. 그래서 남아도는 이야기가 있었어. 차고 넘치는 이야기들이 혀 끝에, 가슴속에 남았어. 나는 그 남아도는 이야기들에 애정이 있었어. 수년 전 버려진 릴테이프 조각들에게 그랬듯이. 사실 우리는 어떤 인물들의 연대기를 좋아해. 그리고 이력서들을 참고해. 이루어진 것들과 드러난 것들의 정산! 이걸로 인생을 생각하기도 해. 그러나 잠시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거야. 우리의 소심함, 차마 어쩌지 못함. 좌절된 계획들, 부끄러운 실수들, 우리가 포기하거나 버린 모든 것,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어하는 것, 겁나서 피하는 것, 심지어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순간들이 인생을 이루고 있어. 연대기나 이력서, 성공담에 결코 포함되지 않는 가슴의 이야기,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저마다의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있어.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가슴의 이야기들을 들었던 거야.

- 49~50, 같은 책

 

각자의 인생을 바탕으로 쓴 한 편의 소설 같은 건 사실 없지만, 아마 그 비슷한 것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가 보다. 정혜윤 피디는 사람들 마음속에서 그걸 발견했고,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는 듣기의 전문가답게, 사람들이 마음속에 담은 사연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마술적인 재능이 있었게 아닐까. 라디오 피디로서 그 이야기들을 그러모아 다듬었고, 그걸 바탕으로 몇 권의 책을 펴내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도 마술 라디오는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어떤 공동체를 꿈꾸는 책이 되었다.

 

 

마술 같은 이야기

 

“(……)내가 뱃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좀 있어서 뱃일을 배웠지. 그러다가 군대를 갔는데 누구 하나 면회 올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외로웠어. 그런데 어느 날 한 여고생에게 편지가 오기 시작한 거야. 국군 장병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편지 있잖아.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나에겐 고마운 사람이지. 2년 반 넘게 그 편지에 의지해서 살았던 것 같으니까. 사진만 한 번 주고받고 만나지는 못했어. 제대하고 쭉 여기 살았는데 이상하게 그 여고생이 생각날 때가 있어. 언제냐면…… 언제냐면 저녁 뉴스를 볼 때야. 뉴스 중에서도 일기예보를 들을 때야. 처음 내 귀를 잡아끈 것은 전북 전주에 폭설이 내린다는 뉴스였어. (……) 나는 한번쯤 편지를 보내보고 싶었어. 하지만 결혼해서 살 테고 내 편지가 누가 될까 걱정되었어. 나는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어. 그렇게 기다리다가 그 편지를 받은 지 30년 좀 안 되었을 때 이 구절을 편지에 옮겨 적어봤어. 다른 말은 암것도 안 적었어. 그냥 그 구절이랑 내 전화번호만 적었어. 이름도 안 적었어. 옛 주소로 보냈어. 거기 살고 있다면 받겠지 싶었어. (……) 이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남편도 이해를 해주지 않겠나 싶어서 보냈지만 보내놓고 나서도 편지 보낸 게 후회되었어. 좀 더 있다가 보낼걸 좀 빠른 것 같다고 생각했지. (……) 저기서 고기 잡느라 배 위에 있을 때 통화했어. 나는 내 이름을 대면서 물었지. 나를 기억하시겠습니까? 한참 말이 없대. 그 시간이 엄청 길대. 한참 있다가 전화기 너머로 대답이 들렸어. ‘알고말고요.’”

- 70~72, 같은 책

 














정혜윤 피디는 다큐 <무지한 스승>을 준비하면서 만난 통영의 어부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일대에서 믿을 만한 사람의 상징이자 정확한 사람으로 통한다는 노인이었다. 위문편지로 시작된 만남이 3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기다린 끝에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는, 어디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늙은 어부가 어망 던지듯 툭 던져 놓는다. 그런데 그렇게 허황된 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고아로 태어난 어부는 평생을 고독하게 살았는데, 고독한 그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꼭 한 명 있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그렇다고 너무 늦지 않은 시점에 둘은 서로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고,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이 서로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 뚜렷한 이유나 조건 따위 없다고 믿지만, 이 경우 두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 경우를 상상할 수 없다. 서로의 고독을 알아보는 상대를 만났는데,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런 멋진 이야기를 당사자에게 듣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정혜윤 피디는 무척 은밀하게 에로틱한이 부부의 모습을 보며, 어부가 자신의 자유를 사랑하듯, 삶을 사랑하듯, 삶을 위한 투쟁을 사랑하듯사랑한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어부는 어떻게 그렇게 오래 고마움을 간직하고 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있었을까 궁금해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 자체가 사랑에 관한, 또 인생에 관한 하나의 질문이 된다.


이런 마술과도 같은 이야기가 또 있다. 이 역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긴 한데, 이번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실종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어려서 병약했어요. (……) 한번은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노란 위액을 토할 정도로 아팠어요. 병실 침대에 눕자마자 아버지가 얼른 귀에 라디오 이어폰을 꽂아주더라고요. (……) 통증을 잊게 딴생각하라고 얼른 라디오 이어폰을 귀에 꽂아주었던 아버지의 얼굴이랑. 참 피곤하고 여윈 얼굴이었죠. (……) 그런 말 많이 했죠. 최고의 불효는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거라고. 아버지가 덜컥 병에 걸려버린 거예요. 처음 병원에 갔을 때 앞으로 석 달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 입원한 아버지에게 최고급 티볼리 라디오를 선물했어요. 이번엔 내가 아버지 귀에 이어폰을 꽂아드렸어요. (……) 한번은 내가 밖에 나갔다 들어오는데 병실 문밖으로 아버지가 옆 환자에게 라디오를 자랑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이 라디오 스테레오야. 소리가 아주 빵빵해. 이 라디오 좋아.’ (……) 그게 내가 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였어요. ‘이 라디오가 좋아가 유언이 된 거죠.”

(……) 그는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라디오를 끔찍이 아꼈어. 늘 머리맡에 두고 살았어. 당시 남자는 동거 중이었어.

자존심과 의지와 생활력이 강하고 성격이 깔끔한 여자였는데 3년 정도 살다가 헤어지기로 했어요. (……) 여자 친구가 떠나는 날, 짐을 편히 싸라고 집을 잠깐 비웠어요. 몇 시간 뒤 집에 돌아왔더니 여자 친구가 진짜로 떠나고 없더라고요. (……) 누우면서 습관처럼 라디오 쪽으로 손을 뻗었어요. 그런데 늘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아버지의 라디오가 없어진 거예요. 식탁에 메모지가 한 장 있었어요. ‘오빠, 라디오는 내가 당분간 빌려 갈게요. (……) 목소리가 필요해요. 하지만 반드시 돌려드릴게요.’ 그 뒤로 우리 둘은 만난 적이 없으니 라디오도 돌려받지 못했죠. (……) 헤어진 지 2년이 지났을 때 그녀의 친구가 전화를 했어요. (……)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요. (……) 혹시 그녀 스스로? 나는 다시 택시를 타고 그녀가 지내던 방으로 갔어요. 혹시 무슨 유서라도 있나 찾아봤어요. (……) 저는 방안에 라디오가 없단 걸 발견했어요. (……) 그 방 안에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인 거죠. (……) 그녀는 어둠 속에서 뭔가 찾아 헤매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내게 라디오를 전해주지 않은 걸까요? 그녀는 당시에 가족을 빼놓고는 내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안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 그녀는 제가 눈을 부릅뜨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뭘 찾아내길 바란 것 아닌가 싶어요.”

- 161~169, 같은 책

 

어릴 때 얻은 불치병으로 한쪽 눈을 실명한 사진가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어부의 이야기가 영화 같다면, 사진가의 이야기는 어딘가 문학적인 부분이 있다. 이 이야기 속 라디오는 마치 작가에 의해 잘 설계된 문학적 은유처럼 읽힌다. 라디오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한쪽 눈이 먼 사진가는 평생 그 수수께끼를 안고 살 것이다. 무척 슬프면서도, 한 편으로 그것이 그가 감당해야 할 숙명처럼 느껴진다. 눈도, 라디오도, 사랑하는 이도 잃었으므로, 그는 이제 결여된 존재다. 사진가인 그는 앞으로 세상을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볼 것이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그가 보는 세상이 어떤지 상상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려 노력할 것이다.


이런 경험을 우리는 주로 문학을 통해서 얻어 왔다. 그런 점에서 이 사진가의 인생은 거의 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래는 문학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거의 문학인 채로 그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었을 뿐이다. 정혜윤 피디를 만나 이야기 나눈 이후 비로소 문학이 되었다. 그런데 정혜윤 피디는 구태여 이 이야기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꽤 충실하게 타인의 말을 옮기면서도 의도적으로 이곳저곳에 여백을 남긴다. 독자가 각자의 생각과 이야기로 여백을 채우라는 듯이 말이다. 대체로 훌륭한 소설들이 그런 전략을 취하곤 한다.


마술 라디오에서 정혜윤 피디는 이처럼 아직 문학이 되지 못한, 그러나 곧 문학이 될 이야기를 주인공들을 대신하여 들려준다. 마술 라디오가 전체적으로 대화체로 쓰였다는 점도 중요한데, 정혜윤 피디에게 이 책은 자신과 독자 사이에 벌어지는 길고 긴 대화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를, 말을 다르게 쓸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힘을 얻는 것을 숱하게 봐왔어(그 반대도 물론 숱하게 봤지. 남을 위협하고 세를 과시하는 데만 말의 힘을 쓰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자신도 같은 칼날에 상처를 입지). 지금 내가 바로 그것을 해보려 해. 나는 언제부터인가 힘없는 사람들을 만나면 자꾸만 이야기를 들려줘. 나는 의견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나는 이야기로 노를 저어서 힘없는 사람들을 다른 편 기슭에 옮겨놓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 54, 같은 책

 

저 힘없는 사람들이 도착한 기슭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 앞서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어떤 마술적 공동체가 있지 않을까?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각자의 소설책을 돌려 보는……. 물론 정혜윤 피디가 노 저은 배를 타고 도착한 공동체에서는 소설을 돌려 보는 대신 서로 대화를 나누겠지만 말이다. 나는 이 버전의 공동체도 마음에 든다.

 


평범하기 때문에 위대한 서사


마술 라디오에 담긴 이야기 대부분은 폭넓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 몇몇 이야기들은 아주 특수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이 공동체 안에서 모든 이야기들이 보편적일 필요는 없지만, 너무 특수한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일으키는 파문과는 무관하게 상대적으로 공감의 폭이 좁은 것이 사실이다. 공동체 의식을 공고하게 만드는 것은 역시 누구나 쉬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들이다. 보편적인 이야기란, 보편적인 인물이 보편적인 상황에서 어떤 보편적인 선택을 내리는 이야기로 정의내릴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보편적인 이야기란,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선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노라 이야기함으로써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정혜윤 피디의 또 다른 책인 그의 슬픔과 기쁨은 바로 그런 보편성의 층위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201367일 저녁 7, 나는 모터쇼에 참석했다. 그 모터쇼의 이름은 H-200000이었다. ‘20000’은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품 개수를 가리키고 ‘H’HEART 혹은 HOPE 혹은 사다리를 뜻한다고 들었다. 그 모터쇼에 나온 차는 달랑 한 대였다. 그 차를 만든 사람들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었다. 그 모터쇼의 작은 역사는 이렇다. 해고된 지 5년째에 접어들자 노동자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제일 하고 싶은 것은 뭐였지?’

왜 우리는 매일 투쟁만 하고 있는 거지?’

맞아. 우리 원래 자동차를 만들던 사람이었잖아.’

(……)

대략 8천만 원이 모였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노동자들은 중고 자동차 가게에서 2004년산 코란도 밴을 한 대 구입했다. (……) 그들 서른 명가량의 노동자들은 용인의 정비소에서 코란도 한 대를 24시간 해체했다. 그리고 해체한 것들을 다시 24시간에 걸쳐서 조립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사진과 영상으로 보았다. (……) 그 영상을 보는 동안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영상 속에서 노동자들의 얼굴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웃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그전에 몇 번이고 본 얼굴과는 달라 보였다. 그 순간 그들에겐 한 점 그늘도 없었다. 내가 본 것은 바로 그들이 잃어버린 얼굴이었다. 그들이 잃어버린 평범함이었다.

(……) 그날 저녁 나는 허름한 맥줏집에서 열린 모터쇼 뒤풀이에 참석했다. (……) 내 앞에 한 동자가 앉았다. 영상에서 본 얼굴이었다. (……) 그는 몽롱한 행복감 속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자꾸만 이렇게 말했다.

또 하고 싶다.”

나는 그 말에 통증을 느꼈다. 그를 좀 더 알고 싶어졌다.

- 9, 그의 슬픔과 기쁨, 정혜윤, 후마니타스

 














쌍용 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을 다룬 르포에세이 그의 슬픔과 기쁨마술 라디오와 거의 같은 시기에 출간되었다. 작가도 이 두 권의 책을 거의 동시에 집필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니 이 두 권이 내용이나 형식적인 면에서 대구를 이루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마술 라디오는 다소 꿈결 같은 이야기이다. 사실에 기반을 두지만 때로 물리 법칙과 인과 법칙을 거스르는, 말하자면 마술적 사실주의에 가깝다. 반면 그의 슬픔과 기쁨은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목을 맨다. 노동자들의 인터뷰 녹취를 엮었으니 그런 것이기도 하거니와, 노동자 개개인이 처한 상황이라는 것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으면 결코 실감할 수 없는 절망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225일 무급 휴직자 임무창은 집에서 잠이 들었다. 평범한 날이었을 수도 있었다. (……) 아내는 1년 전 봄 425일 그에게 전화를 했었다. 그날 아내는 보고 싶으니 빨리 집으로 오라고 했었다. 아내는 쌍차 파업 이후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에 그때 그는 허겁지겁 집으로 갔었다. 아내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내는 무사했다. 그는 옷을 벗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 아내는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아이들은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는 그날로 몇 번이나 돌아가 봤을까? 수십 번일까 수백 번일까? 어떻게 해야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까? 옷을 갈아입지 말았어야 했을까? () 그가 시간을 되돌리고 되돌리면서 얼마나 많은 상상을 했을지 우리는 영원히 알 수가 없을 것이다.

226일 그는 엎어진 자세로 자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빠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나 아빠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 숨지기 하루 전날 그는 친구를 만났었다. “아이들 등록금만 생각하면 가슴이 숯덩이가 된다.”고 말했다. ‘숯덩이 가슴은 그냥 하소연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사인은 생활고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심근경색이었다.

- 138~139, 같은 책

 

쌍용 자동차 노동자 해고 이후 노동자와 노동자 가족 23명이 사망했다. 생활고에 의한 자살과 스트레스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한 사망이 대부분이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살인 계속됐고, 남은 자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죽음에 애써 무관심하려고 했어요. 의지박약이라고 했어요. “왜 죽어? 열심히 살면 되지.” 그런데 스물두 번째 죽음은 달랐어요. 저는 그 소식 듣고 이 일을 그만하려고 했었어요. (……) 엄청 열심히 쉬지 않고 희망 텐트’, ‘희망 뚜벅이같은 투쟁을, 어렵지만 어떻게든 만들어 냈는데 또 죽은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77일간 싸운 사람인 거예요. 유일하게 우리에게 있던 확신은, 그 어려운 싸움을 한 사람은 자살하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그게 다 무너졌어요. 광주로 도망갔어요. 집사람한테도 연락 끊고 날랐어요. (……) “너만 힘든 것 아냐, 이 새끼야. 나도 죽을 것 같아.” 다들 걱정한 거죠. 내가 죽을까 봐. 집사람은 계속 어디야? 어디야?” 하고, 창근이 형은 내가 너에게 너무 큰 짐을 맡겼나 보다. 나도 포기할 거야.” 하고. 할 수 없이 올라가 평택역에서 버스 타고 공장 가서 버스 내리는 순간부터 내리 네 시간을 울었어요. 엉엉하며 울었더니 우리 형들이, 정우 형이 그만 울어, 새끼야.” 그러는 거죠. 다들 저 없을 때 엄청 울어서, 저 울 때쯤엔 눈물도 말라 버린 거죠.”

- 151~152, 고동민, 같은 책

 

그들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해고 통보를 받은 뒤 홀가분하게 공장을 떠날 수도 있었을 텐데, 다른 방법으로 생계를 꾸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힘든 투쟁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일까? 사실 그의 기쁨과 슬픔이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하는 책이다. 그래서 노동자 한 명 한 명을 만나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당신은 누구였지요?”, “왜 생계 활동을 하지 않지요?”, “무엇 때문에 5년간의 길거리 생활을 버티지요?”, “대체 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지요?”


스물여섯 명의 노동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구례에서, 완주에서, 임실에서, 고흥에서, 평택에서 각자 사연을 품고 쌍용 자동차에 입사한다. 2005년 상하이자동차가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더니 4년 뒤에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얼마 안 있어 사측이 2,646명의 정리 해고안을 발표한다. 설마 설마 하던 노동자들은 산 자(해고되지 않은 자)와 죽은 자(해고된 자)로 구분됐고, 곧 해고를 무효로 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된다.


일부 산 자도 징계 해고를 감수하고서 죽은 자들의 투쟁에 참여한다. 그러면서도 산 자든 죽은 자든 위 질문에는 똑 부러지게 대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쌍차 투쟁이 정연한 논리에 기반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저 이렇게밖에 말 할 수 없다.

 

저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 ‘, 동생하면서 같이 다녔는데, 95퍼센트 정도가 같은 동네에 사는데, 게다가 진짜 형제들도 다니는데 죽은 자들만 싸우고 산 자들은 가만히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차가워도 분명한 현실이라는 것, 나도 거기 일조하는 사람 중 하나라는 것, 이런 것들을 우선 저부터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 35, 박호민, 같은 책

 

나는 나를 알아요. 나는 나만 살기 위해서 냉정해지질 못해요. 나는 나를 알아요. 나는 어울려야 사는 사람이에요. 파업에 참여 안 하고 그러면 꼭 배신자 같잖아요. (……) 말한 거 바꾸면 쪽팔리잖아요.”

- 127, 김정운, 같은 책

 

왜 우리가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요? 이 공장에서 차가 한 대 한 대 나가고 그러면서 우리가 한솥밥 먹었던 기억들의 소중함 때문이었습니다. 이게 우리를 버티게 했던 힘이었습니다.”

- 45, 김정욱, 같은 책

 

정리 해고 안 되었으면 내가 그렇게 공장 점거할 생각이나 해보았겠어요? 죽은 사람들도 정리 해고 되지 않았으면 죽었겟어요? 정리 해고 되지 않았다면 우린 지금하고 다르게 살았겠죠.”

- 91, 정형구, 같은 책

 

불온서적 있었지?” 그래서 우리는 좌익 용공이 아니다. 우리는 이명박 정권에 맞서 싸운 게 아니다. 우린 그냥 아저씨들이다, 그냥 아저씨. 해고 안 되려고 그런 거다.” 했죠.

- 92, 고동민, 같은 책

 

이선균이 영화 속에서 해야만 할 것 같아서라고 말해요. 저한테도 해야만 할 것 같은 일들은 자꾸만 있었어요. (……) 해야만 할 것 같아서. 해야 될 것 같은 일을 다 하지는 못했겠지만, 그리고 주저하거나 발 빼려는 심정 속에서 갈등도 많았지만, 결국 행동으로 표현했던 것 같아요.”

- 97, 이창근, 같은 책

 

의리 때문에, 억울해서, 화가 나서, 쪽팔려서, 추억 때문에, 그냥 해고되기 싫어서,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아서……. 투쟁의 이유치고는 너무 사사롭다. 그런데 사사롭기 때문에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었고, 힘든 투쟁의 길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너무 특수한 이유는 우리를 놀라게 할 수는 있어도, 공감을 불러일으키진 못 한다. 의리 때문에 버티고, 억울해서 버티고, 화나서 버티고…… 나도 그럴 수 있겠다는, 혹 나는 그럴 수 있겠냐는 반응이 비로소 생긴다.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창근 씨는 책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렇게 하는 이유가, 조명이 꺼지지 않아서예요. 그 빛이 밖에서 오는지 안에서 오는지 모르겠어요. 빛이 안 꺼져서 해요. 빛이 꺼지면 저도 어딘가 도망가겠지만 빛이 안 꺼져서 도망 못가요.”

- 281, 이창근, 같은 책

 

이창근 씨가 봤다는 빛은 뭘까? 말 그대로 조명 빛을 말하는 걸 수도 있다. 그런데 꺼지지 않는 빛이라는 건 뭘 의미하는 걸까? 내가 알기로 그건 인간말고 다른 것일 수 없다.

 


다시, 이야기의 공동체로 가다

 

우리는 작가가 소설을 쓰듯이, 내 삶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내 뜻대로 정해서 쓸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 운명의 장난에 무방비로 노출된 비극적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내 서사를 내가 통제하지 못할 때, 힘없는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냥 운명의 장난이라는 서사의 흐름에 그냥 몸을 맡겨버리거나, 아니면 끝까지 흐름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이 제3의 방법이 있기 마련인데, 바로 힘없는 주인공들이 모여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마술의 라디오그의 슬픔과 기쁨은 비유하자면 저마다의 공동체를 꿈꾸며 나아가는 한 척의 배다. 그렇다면 정혜윤 피디는 제일 선두에서 노를 젓는 사람(선장이 아니라)이라 할 수 있다. 배가 너무 노골적인 상징이라 생각된다면, 그냥 방향이라고 해도 좋겠다. 어쨌거나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다. 혼자일 때에 비해 이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이 특별히 많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을 때, 그 절박함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 속 누군가일 것이다.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하나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어떻게 역사에 각인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개인의 서사가 세계의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는 없다. 서사의 내용이 빈약해서 라기 보다, 파급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공동체가 비슷한 서사를 여럿 공유한다면, 파급력은 훨씬 강력하다. 이야기의 공동체가 크고 단단할수록 세계는 이 서사에 결코 반응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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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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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을 읽고, 문득 이념(이상)의 의미와 쓸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안토니오라는, 한때 아나키스트였다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변절했던 노인이 90세의 나이로 노인 요양원 5층에서 뛰어내리면서 시작되는(끝나는) 이 이야기에, 다음의 질문을 필연적으로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념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그것은 좋은 영향인가, 나쁜 영향인가? 이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책으로 들어가 봐야 한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자살을 전하는 작가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작가인 안토니오 알타리바는 20세기 스페인의 현대사를 살았던 아버지의 인생 역경을, 그 자신이 아버지와 융해하여 따라간다. 안토니오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농사일에 애착을 느끼지 못했다. 가난한 농부들은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담을 쌓았고, 폭력을 일삼았다. 결국 안토니오는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지만, 도시에선 가난이라는 시련을 더 혹독하게 겪을 뿐이었다. 운전면허도 따고 재봉틀 외판원으로 자리를 잡아갈 즈음, 스페인에 공화정이 시작된다. 안토니오는 그제서야 사회로 눈을 돌리고,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야만과 폭력이 어디서 비롯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당시 아나키즘의 출현은 시대적 흐름 위에 있었다. 안토니오가 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는 아나키즘적 삶을 꿈꾸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안토니오가 쉽게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첨예한 이념 대립으로 발발한 스페인 내전, 그리고 이어진 2차 세계대전. 안토니오는 전쟁에서 자신과 같은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면서 아나키스트로서의 자신의 이념을 확고히 한다. 그러나 납탄 동맹을 맺었던 동지들 중 일부는 전쟁에서 죽고, 일부는 전쟁이 끝난 뒤 변절하여 자본가의 삶을 택한다. 안토니오 역시 전쟁이 끝나도 변하지 않은 사회를 보며 환멸을 느낀다.살아남으려면 체제에 맹목적으로 순응해야만 했다. () 이런 변절은 고백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 숨겨 둔 개개인의 비극을 배신하는 것이다. 아니, 배신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자살을 의미한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선 과거를 묻어야 했고, 육체의 생존을 위해선 마음을 죽여야 했다.” 결국 안토니오는 아나키즘을 버리고 가정을 이룸으로써 위안을 얻기로 한다. 그러나 결혼생활마저 안토니오의 뜻대로 되지 않는데…….


안토니오의 불행은 사회적 불의와 야만에서 비롯되었다. 안토니오는 아나키즘이 그에 저항할 보루라고 믿었지만, 그 이상이 그를 결코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이쯤에서 다시, 서두에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념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 질문이 이 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묻는 게 필요하다. 이 이야기가 특정 이념을 선전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념 따위 쓸모없다고 주장하는 이념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위 질문은 이 책이 오용되는 걸 막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 나면, 오히려 섣불리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안토니오는 이념 때문에 더 불행해진 것일까? 아니 이념이 없었다면 안토니오는 더 이른 시점에서 무너지지 않았을까? 문제는 이념이 아니라 이념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 있지 않나? 이 시대에 이념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렇게 질문은 지속되게 된다. 전 세대에서 답하지 못한 이 질문은 현세대로 이어지고, 현세대에서도 답하지 못한 이 질문은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그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것이다. 답을 유예하는 동안 우리는 계속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이상을 추구할 수 있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아들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아버지의 시점으로 이끌어 가는 책이다. 마치 삶에 대한 질문들이 대를 이어 계속되듯이 말이다. 작가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만화라는 매체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책에는 만화라는 매체가 가진 시각적 은유법이 적절히 구사되고 있다. 팔당헤 당원들을 재봉해버리는 전투기, 안토니오의 눈을 쪼는 프랑코 정권의 독수리 문장, 늙은 안토니오의 가슴을 파는 두더지……. 비록 이 책이 유럽 현대사를 관통하는 동시에 한 개인의 무거운 일대기를 조망하고 있지만, 이런 만화적 표현들은 이 일대기가 지닌 정서의 보편성을 성공적으로 전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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