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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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을 읽고, 문득 이념(이상)의 의미와 쓸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안토니오라는, 한때 아나키스트였다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변절했던 노인이 90세의 나이로 노인 요양원 5층에서 뛰어내리면서 시작되는(끝나는) 이 이야기에, 다음의 질문을 필연적으로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념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그것은 좋은 영향인가, 나쁜 영향인가? 이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책으로 들어가 봐야 한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자살을 전하는 작가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작가인 안토니오 알타리바는 20세기 스페인의 현대사를 살았던 아버지의 인생 역경을, 그 자신이 아버지와 융해하여 따라간다. 안토니오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농사일에 애착을 느끼지 못했다. 가난한 농부들은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담을 쌓았고, 폭력을 일삼았다. 결국 안토니오는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지만, 도시에선 가난이라는 시련을 더 혹독하게 겪을 뿐이었다. 운전면허도 따고 재봉틀 외판원으로 자리를 잡아갈 즈음, 스페인에 공화정이 시작된다. 안토니오는 그제서야 사회로 눈을 돌리고,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야만과 폭력이 어디서 비롯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당시 아나키즘의 출현은 시대적 흐름 위에 있었다. 안토니오가 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는 아나키즘적 삶을 꿈꾸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안토니오가 쉽게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첨예한 이념 대립으로 발발한 스페인 내전, 그리고 이어진 2차 세계대전. 안토니오는 전쟁에서 자신과 같은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면서 아나키스트로서의 자신의 이념을 확고히 한다. 그러나 납탄 동맹을 맺었던 동지들 중 일부는 전쟁에서 죽고, 일부는 전쟁이 끝난 뒤 변절하여 자본가의 삶을 택한다. 안토니오 역시 전쟁이 끝나도 변하지 않은 사회를 보며 환멸을 느낀다.살아남으려면 체제에 맹목적으로 순응해야만 했다. () 이런 변절은 고백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 숨겨 둔 개개인의 비극을 배신하는 것이다. 아니, 배신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자살을 의미한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선 과거를 묻어야 했고, 육체의 생존을 위해선 마음을 죽여야 했다.” 결국 안토니오는 아나키즘을 버리고 가정을 이룸으로써 위안을 얻기로 한다. 그러나 결혼생활마저 안토니오의 뜻대로 되지 않는데…….


안토니오의 불행은 사회적 불의와 야만에서 비롯되었다. 안토니오는 아나키즘이 그에 저항할 보루라고 믿었지만, 그 이상이 그를 결코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이쯤에서 다시, 서두에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념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 질문이 이 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묻는 게 필요하다. 이 이야기가 특정 이념을 선전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념 따위 쓸모없다고 주장하는 이념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위 질문은 이 책이 오용되는 걸 막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 나면, 오히려 섣불리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안토니오는 이념 때문에 더 불행해진 것일까? 아니 이념이 없었다면 안토니오는 더 이른 시점에서 무너지지 않았을까? 문제는 이념이 아니라 이념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 있지 않나? 이 시대에 이념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렇게 질문은 지속되게 된다. 전 세대에서 답하지 못한 이 질문은 현세대로 이어지고, 현세대에서도 답하지 못한 이 질문은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그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것이다. 답을 유예하는 동안 우리는 계속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이상을 추구할 수 있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아들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아버지의 시점으로 이끌어 가는 책이다. 마치 삶에 대한 질문들이 대를 이어 계속되듯이 말이다. 작가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만화라는 매체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책에는 만화라는 매체가 가진 시각적 은유법이 적절히 구사되고 있다. 팔당헤 당원들을 재봉해버리는 전투기, 안토니오의 눈을 쪼는 프랑코 정권의 독수리 문장, 늙은 안토니오의 가슴을 파는 두더지……. 비록 이 책이 유럽 현대사를 관통하는 동시에 한 개인의 무거운 일대기를 조망하고 있지만, 이런 만화적 표현들은 이 일대기가 지닌 정서의 보편성을 성공적으로 전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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