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8개월이 된 딸이 오늘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뭔가를 열심히 시도 중이다. 그 작은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데, 적어도 그 뭔가를 할 때만큼은 깜짝 놀랄 만한 집중력과 끈기를 발휘하곤 한다. 최근에는 두 팔로 상체를 일으키곤, 두 발로 서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다리가 채 여물기 전이라 그 가벼운 몸도 제대로 지탱하지는 못한다. 일어서려다 쓰러지기 일쑤다. 한 번은 내가 출근하고 없을 때, 딸이 아내의 무릎을 짚고 서려다 넘어지면서 어디 잘못 부딪혔는지 입안을 다친 일이 있었다. 어린 딸이 입에서 피를 흘리며 울자, 깜짝 놀란 아내는 그 길로 딸을 안고 병원으로 뛰어갔더란다. 다행히 의사 말로는 큰일은 아니라고 했다. 그날 퇴근하여 딸아이의 얼굴을 보니, 그때까지도 입안에 피를 조금 머금고 있었다. 그 낯으로 아빠가 반갑다고 웃어 보인다.

부모 된 특권으로써, 나는 딸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8개월은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많이 컸다곤 하나, 엄마와 아빠 품을 벗어날 정도는 아직 아닌 것이다. 그러나 딸은 분명히 크고 있고, 언젠가는 이 품을 벗어나게 될 터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임을 안다. 입안이 찢어지는 정도는 저리 가라 할 만큼 더 큰 상처를 입는 일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또 어떤 상처는 몸이 아닌 마음 위로 깊은 자국을 남기기 마련이다. 나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 자국들이 오히려 딸아이의 고투를 증명해 주리라 믿는다. 그걸 지켜보는 마음이 아주 편치는 않겠지만, 딸이 겪을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닌 것이다. 그날 딸은 웃었고, 그래서 나도 따라 웃었다.

 

동일한 딜레마를 청소년 성장 소설을 읽으면서도 느낀다. 청소년 성장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소설 속 주인공이 성장하는 걸 지켜보는 일이다. 소설 속 아이들은 자주 외부 세계로부터 시련을 부여받아 고통에 시달리곤 하는데, 그럴 때면 순수한 독자라는 지위를 망각하곤 지독한 연민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설 속 인물을 위해 딱히 뭔가를 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저 꾹 참고 이 서사를 묵묵히 따라갈 뿐이다. 다행인 것은, 이 이야기가 성장 소설이라는 이유로, 시련과 갈등은 어느 순간 해소될 것이며, 주인공은 결말에 이르러 성장을 완성하리라는 어떤 확신은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성장 소설이 청소년 세대의 성장을 아주 낙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걸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법은 없다. 어떤 고난에도 불구하고 성장은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성장 소설이 줄곧 던져온 메시지였다. 나는 이 성장 가능성을 현실로 이어가는 것이, 성장 소설을 위한 올바른 독법이라 믿는다.

 

 

 

 

 

 사람이 성장하는 데 있어 기기, 걷기, 말하기 같은 특정한 행동이 발달되는 결정적 시기가 있다고 합니다. 이 시기를 놓치면 다음 시기에 이런 발달과업이 보완되기 어렵다는 거지요. 이처럼 여러분이 성장하는 데 있어서도 특정 시기에 반드시 응답하고 넘어가야 하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어린 시절 나름의 질문, 청소년기에는 청소년기 나름의 질문 말이지요.

- 유영진, 문학동네, 관계의 온도의 발문 중에서

 

 

문학동네에서 청소년 테마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세 권의 소설집을 내놓았다. ‘관계’, ‘콤플렉스’, ‘미래(진로)’라는 세 개의 테마로, 21명의 작가가 한 편씩 쓴 단편 소설을 엮은 것이다. 대단한 기획력과 여러 사람의 품이 들어간 책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청소년 세대가 지닌 고민의 방향을 관계, 콤플렉스, 미래, 이 세 가지로 묶은 것이 아주 명쾌하고 또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응답한 21명의 작가가 내놓은 이야기들도 더없이 좋다. 청소년 소설을 빙자한 어떤 이야기들은 꼰대의 잔소리이기 쉬운데, 이 책에선 그러한 태도는 찾기 어렵다. 오히려 정답이 없는 이 고민을 앞에 두고 물음표와 말줄임표를 잔뜩 찍는 작품들이다.

  

  

 

 

 

 

나나가 없을 때 나는 누구하고 점심을 먹었을까, 쉬는 시간에는 멍청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거나 문제집만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걸까, 음악실이나 체육관으로 이동할 때 나는 혼자였을까, 나나 없이 학교로 가는 언덕길을 텅 비어 있었다. 눈앞에 아이들 없이 햇살만 가득한 교실이 보이는 것 같았다. 거기에는 나도 없었다.

- 김민령, 너를 기다리는 동안, 관계의 온도

 

는 나나가 아침 등굣길에서 만나 함께 다니는 사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나가 맹장 수술 때문에 결석하는 날이 길어지자, ‘모든 거리 풍경이 15도 정도 각도를 튼 것처럼느낀다. 나나의 부재가 로 하여금 세계 속 자기 존재를 재인식하게 한다.

혈연이나 가족 관계가 아닌 이상, 우리가 맺은 관계를 딱히 뭐라고 정의하긴 힘들다. ‘와 나나가 그랬듯. 다만 그 복잡한 관계 속에서는 우리는 다양한 감정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좋은 것은 늘 좋고, 나쁜 것은 늘 나쁜 것도 아니다. 좋았다가 나빠지기도 하고, 나빴다가 좋아지기도 하는 것이, 무릇 관계의 온도이다. 여기 7개의 단편이 관계의 다채로운 모습을 그렸다. 그 관계가 불러일으키는 온도변화에 깜짝 놀라게 된다. 아이들도 이렇게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구나, 하고 아주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다.

 

 

 

 

 

 

 아무도, 모른다. 내가 학교를 결석한 걸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엄마한테 왜 연락이 없지? 혹시 담임이 내가 결석한 걸 모르고 있나? 유나와 서연이는? 무슨 일인지 걱정도 안 되나?

저 아래서 울컥하고 뭔가가 올라왔다. 이게 아니다. 내가 기대했던 건, 이게 아니다.

- 김혜정, 학교에 안 갔어, 콤플렉스의 밀도

 

자타공인 모범생의 표본으로 평가받은 서은수는 어느 날 학교를 땡땡이치기로 마음먹는다. 비슷한 건 이름뿐인 같은 반 소은수 탓이다.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예쁜 소은수와 사사건건 비교 당하고 엮이던 차에, 어떤 사건을 계기로 열등감이 폭발하고 말았던 것. 그런데 왜 아무도 서은수가 학교를 땡땡이쳤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사건의 전말은 다음 날 밝혀진다. 전날 소은수도 감기로 학교를 빠졌는데, 선생님이 소은수네 엄마가 한 전화를 서은수네 엄마가 한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평소 소은수의 좋지 못한 행실이 낙인효과로 작용했던 것. 교무실에서 자신의 열등감 대상이었던 소은수가 짓는 허망한 표정을 보고, 서은수는 그만 아연해진다.

콤플렉스 관계가 뒤집히는 반전에 어리둥절했다. 통쾌하다기 보다 가슴이 꽉 막히는 반전이다. 누구에게나 콤플렉스가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 이야기가 아닌가.

이 책의 나머지 이야기에 대해 말하자면, 계속하여 콤플렉스의 부정적 측면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칼 융에 따르면, 콤플렉스는 또 다른 가능성 위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고재현의 곰이 춤춘다와 송미경의 젤잘르 헤어는 그런 의미에서 놓쳐서는 안 될 작품이다.

 

  

 

 

 

  

건물로 들어서자 급격히 낮아진 온도에 나는 카디건을 꺼내 입었다. 견디기 힘겨운 바깥의 더위와는 달리 학교 내부는 몹시 서늘했다. 어젯밤, 얼어붙은 J의 육체가 발견된 중앙 현관을 나는 무감하게 지나쳤다. 중앙 현관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던 냉기가 콧구멍을 통해 들어와 내 두개골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비정한 냉기는 그런 방식으로 학교 전체를 야금야금 장악하고 있었다.

- 최서경, 4%, 내일의 무게

 

지금 빙하기가 시작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아니, 현실의 학교는 이미 빙하기를 방불케 할는지 모를 일이다. 빙하기 교실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다가 종국에는 자기 안의 냉기를 이기지 못하고 얼어붙어 버리고 만다. 그 정경이 현실에서도 본 듯하여 섬뜩하다.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내일의 무게를 내려놓으라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내일의 무게를 내려놓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두지 않았다. 그러니 그 말도 해서는 안 된다. 21인의 작가는 그래서 말을 아주 아낀다. 소설 속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대신 열렬한 응원과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그것이 이 세 권의 책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하나의 태도이다.

 

성장을 지켜보는 올바른 태도가 무엇인지, 나 역시 잘 알지 못한다. 그저 그날 보여준 딸의 미소에서 어렴풋하게나마 느낀 건 있다. 그건 내 무릎과 어깨를 기꺼이 딸에게 내어주는 일이다. 딸이 계속 시도하고 실패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일이, 내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 믿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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