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 라디오』, 『그의 슬픔과 기쁨』
이야기의 공동체
각자의 인생을 바탕으로 쓴 한 편의 소설에 대해 상상해 본다. 전 세계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전부 소설가가 되어 자신의 인생에 관한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거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느냐에 따라 그 소설의 성격은 달라질 터이다. 어떤 소설은 희극이고, 또 어떤 소설은 비극이 될 것이다. 모험물일 수도 있고, 연애물일 수도 있다.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소설이 있는가 하면, 완전히 세속적인 소설도 있을 것이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어떤 이에 관한 소설은, 그 모든 성격을 다 가지고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잘 팔려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이 있는 것처럼, 어떤 이의 소설은 특별히 많은 주목을 받을 테고, 또 어떤 소설은 전혀 주목받지 못할 것이다. 소설 주인공이 유일한 독자인 불행한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 또한 소설이 된 인생의 숙명이다.
그때 나는 어떤 소설을 쓰고 있을까, 내 아내는 어떤 소설을 쓰고 있으며 내 아이는 어떤 소설을 쓰게 될까, 내가 잘 모르는 어떤 이는 또 어떤 소설을 쓰고 있을까. 그렇게 집필이 끝나고 나면, 다른 사람이 쓴 소설을 읽고 대신 내 소설을 건네는 것이다. 잘 부탁드린다, 꾸벅 인사하면서. 되도록이면 많은 소설을 읽고 싶다.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소설의 주인공을 전심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내 소설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서로를 잘 알기 위해서 소설책을 돌려보는, 그런 마술적 공동체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불가능한 공동체
각자의 인생을 바탕으로 한 소설 같은 것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갑자기 소설가가 될 수 없으니, 이건 그냥 공허한 상상일까? 몇몇 사람은 실제로 작가가 되어 자기 인생에 관한 몇 권의 책을 쓰기도 하지만, 대개 그런 책들은 자기 인생에서 특별히 빛났던 시기만을 담은 것이지, 인생 그 자체가 글감인 것은 아니다(그럼에도 그 책을 읽고 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소설이 아니라 영화나 노래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생이 한 권의 소설이든, 한 편의 영화든, 한 곡의 노래가 되는 일은 불가능할 터이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다른 무언가가 되기에 대체로 너무 평범하지 않은가.
아니, 평범한 게 문제일 수는 있어도, 평범하기 때문에 소설이 못 되는 건 아니다. 평범하므로 오히려 가능한 이야기들, 보편적이라 강렬한 이야기도 분명 있다. 이를테면 19세기 러시아 문학이 황금기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도, 당대 러시아의 현실과 민중의 삶을 사실주의의 방식으로 묘사해냈기 때문이다. 푸시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레르몬토프, 고골……. 세계는 이 이야기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이야기를 어떻게 소설로 만들 것이며, 타인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어쩌면 우리는 한 번도 쓰인 적도 없는 소설을 놓고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한 번 써보고 나면 멋진 이야기일지 누가 알겠는가. ‘사연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라는 말 속에 담긴 주장도 바로 그러하다. 평범함 속에 상상력을 뛰어넘는 사연이 담겨있기도 한 것이다. 스스로 ‘듣기’ 전문가라고, 듣기 위해서 살았다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말도 들어 봄 직하다.
박스팝은 보이스 오브 피플, 즉 민중의 목소리란 뜻이야. 피디가 되면 제일 먼저 훈련받는 게 바로 거리로 나가서 박스팝을 따 오는 거야. (……) 임진강에서 실향민 백 명을 만나서 고향과 가족에 대한 기억과 통일에 대한 의견을 녹음해 오는 것이었는데, 나중엔 너무 지쳐서 뭐라고 물어볼 힘도 없어졌어. (……) 나는 반복적인 질문에 대해서 좀 알게 되었을 수도 있어. 질문은 같아도 대답은 다양하더라는 말이 아니야. 질문은 같아도 예상을 벗어나는 말은 늘 있었어.
우리의 타인에 대한 상상력은 늘 우리를 배신해. 타인은 우리의 상상력보다 클 수 있어. 나는 예측할 수 없음에 열광하게 되었어. 반복적인 질문을 몇천 번이나 던져본 다음에 말이야.
- 23쪽, 『마술 라디오』, 정혜윤, 한겨레출판
이야기는 특정한 ‘인물’이 특정한 ‘상황’에 던져졌을 때 어떤 특정한 ‘선택’을 하는지 지켜보는 작업이라고 한다. 정혜윤 피디는 임진강의 실향민 백 명을 만나 동일한 질문을 던지는데, 말하자면 실향민들은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선택’을 한 사람들인 셈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 예상을 벗어나는 대답을 내놓는데, 이유는 물론 그들이 서로 다른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묻고 듣고 다니면서 제일 놀라운 것,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려 하나는 바로 그 점이야. (……) 난 이 이야기들을 다 방송하지는 못 했어. 그래서 남아도는 이야기가 있었어. 차고 넘치는 이야기들이 혀 끝에, 가슴속에 남았어. 나는 그 남아도는 이야기들에 애정이 있었어. 수년 전 버려진 릴테이프 조각들에게 그랬듯이. 사실 우리는 어떤 인물들의 연대기를 좋아해. 그리고 이력서들을 참고해. 이루어진 것들과 드러난 것들의 정산! 이걸로 인생을 생각하기도 해. 그러나 잠시만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거야. 우리의 소심함, 차마 어쩌지 못함. 좌절된 계획들, 부끄러운 실수들, 우리가 포기하거나 버린 모든 것,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어하는 것, 겁나서 피하는 것, 심지어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순간들이 인생을 이루고 있어. 연대기나 이력서, 성공담에 결코 포함되지 않는 가슴의 이야기,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저마다의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있어.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가슴의 이야기들을 들었던 거야.
- 49~50쪽, 같은 책
각자의 인생을 바탕으로 쓴 한 편의 소설 같은 건 사실 없지만, 아마 그 비슷한 것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가 보다. 정혜윤 피디는 사람들 마음속에서 그걸 발견했고,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는 듣기의 전문가답게, 사람들이 마음속에 담은 사연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마술적인 재능이 있었게 아닐까. 라디오 피디로서 그 이야기들을 그러모아 다듬었고, 그걸 바탕으로 몇 권의 책을 펴내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도 『마술 라디오』는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어떤 공동체를 꿈꾸는 책이 되었다.
마술 같은 이야기
“(……)내가 뱃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좀 있어서 뱃일을 배웠지. 그러다가 군대를 갔는데 누구 하나 면회 올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외로웠어. 그런데 어느 날 한 여고생에게 편지가 오기 시작한 거야. 국군 장병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편지 있잖아.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나에겐 고마운 사람이지. 2년 반 넘게 그 편지에 의지해서 살았던 것 같으니까. 사진만 한 번 주고받고 만나지는 못했어. 제대하고 쭉 여기 살았는데 이상하게 그 여고생이 생각날 때가 있어. 언제냐면…… 언제냐면 저녁 뉴스를 볼 때야. 뉴스 중에서도 일기예보를 들을 때야. 처음 내 귀를 잡아끈 것은 전북 전주에 폭설이 내린다는 뉴스였어. (……) 나는 한번쯤 편지를 보내보고 싶었어. 하지만 결혼해서 살 테고 내 편지가 누가 될까 걱정되었어. 나는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어. 그렇게 기다리다가 그 편지를 받은 지 30년 좀 안 되었을 때 이 구절을 편지에 옮겨 적어봤어. 다른 말은 암것도 안 적었어. 그냥 그 구절이랑 내 전화번호만 적었어. 이름도 안 적었어. 옛 주소로 보냈어. 거기 살고 있다면 받겠지 싶었어. (……) 이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남편도 이해를 해주지 않겠나 싶어서 보냈지만 보내놓고 나서도 편지 보낸 게 후회되었어. 좀 더 있다가 보낼걸 좀 빠른 것 같다고 생각했지. (……) 저기서 고기 잡느라 배 위에 있을 때 통화했어. 나는 내 이름을 대면서 물었지. 나를 기억하시겠습니까? 한참 말이 없대. 그 시간이 엄청 길대. 한참 있다가 전화기 너머로 대답이 들렸어. ‘알고말고요.’”
- 70~72쪽, 같은 책
정혜윤 피디는 다큐 <무지한 스승>을 준비하면서 만난 통영의 어부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일대에서 믿을 만한 사람의 상징이자 정확한 사람으로 통한다는 노인이었다. 위문편지로 시작된 만남이 3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기다린 끝에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는, 어디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늙은 어부가 어망 던지듯 툭 던져 놓는다. 그런데 그렇게 허황된 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고아로 태어난 어부는 평생을 고독하게 살았는데, 고독한 그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꼭 한 명 있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그렇다고 너무 늦지 않은 시점에 둘은 서로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고,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이 서로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 뚜렷한 이유나 조건 따위 없다고 믿지만, 이 경우 두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 경우를 상상할 수 없다. 서로의 고독을 알아보는 상대를 만났는데,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런 멋진 이야기를 당사자에게 듣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정혜윤 피디는 ‘무척 은밀하게 에로틱한’ 이 부부의 모습을 보며, 어부가 ‘자신의 자유를 사랑하듯, 삶을 사랑하듯, 삶을 위한 투쟁을 사랑하듯’ 사랑한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어부는 어떻게 그렇게 오래 고마움을 간직하고 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있었을까 궁금해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 자체가 사랑에 관한, 또 인생에 관한 하나의 질문이 된다.
이런 마술과도 같은 이야기가 또 있다. 이 역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긴 한데, 이번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실종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어려서 병약했어요. (……) 한번은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노란 위액을 토할 정도로 아팠어요. 병실 침대에 눕자마자 아버지가 얼른 귀에 라디오 이어폰을 꽂아주더라고요. (……) 통증을 잊게 딴생각하라고 얼른 라디오 이어폰을 귀에 꽂아주었던 아버지의 얼굴이랑. 참 피곤하고 여윈 얼굴이었죠. (……) 그런 말 많이 했죠. 최고의 불효는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거라고. 아버지가 덜컥 병에 걸려버린 거예요. 처음 병원에 갔을 때 앞으로 석 달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 입원한 아버지에게 최고급 티볼리 라디오를 선물했어요. 이번엔 내가 아버지 귀에 이어폰을 꽂아드렸어요. (……) 한번은 내가 밖에 나갔다 들어오는데 병실 문밖으로 아버지가 옆 환자에게 라디오를 자랑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이 라디오 스테레오야. 소리가 아주 빵빵해. 이 라디오 좋아.’ (……) 그게 내가 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였어요. ‘이 라디오가 좋아’가 유언이 된 거죠.”
(……) 그는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라디오를 끔찍이 아꼈어. 늘 머리맡에 두고 살았어. 당시 남자는 동거 중이었어.
“자존심과 의지와 생활력이 강하고 성격이 깔끔한 여자였는데 3년 정도 살다가 헤어지기로 했어요. (……) 여자 친구가 떠나는 날, 짐을 편히 싸라고 집을 잠깐 비웠어요. 몇 시간 뒤 집에 돌아왔더니 여자 친구가 진짜로 떠나고 없더라고요. (……) 누우면서 습관처럼 라디오 쪽으로 손을 뻗었어요. 그런데 늘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아버지의 라디오가 없어진 거예요. 식탁에 메모지가 한 장 있었어요. ‘오빠, 라디오는 내가 당분간 빌려 갈게요. (……) 목소리가 필요해요. 하지만 반드시 돌려드릴게요.’ 그 뒤로 우리 둘은 만난 적이 없으니 라디오도 돌려받지 못했죠. (……) 헤어진 지 2년이 지났을 때 그녀의 친구가 전화를 했어요. (……)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요. (……) 혹시 그녀 스스로? 나는 다시 택시를 타고 그녀가 지내던 방으로 갔어요. 혹시 무슨 유서라도 있나 찾아봤어요. (……) 저는 방안에 라디오가 없단 걸 발견했어요. (……) 그 방 안에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인 거죠. (……) 그녀는 어둠 속에서 뭔가 찾아 헤매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내게 라디오를 전해주지 않은 걸까요? 그녀는 당시에 가족을 빼놓고는 내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안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 그녀는 제가 눈을 부릅뜨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뭘 찾아내길 바란 것 아닌가 싶어요.”
- 161~169쪽, 같은 책
어릴 때 얻은 불치병으로 한쪽 눈을 실명한 사진가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어부의 이야기가 영화 같다면, 사진가의 이야기는 어딘가 문학적인 부분이 있다. 이 이야기 속 라디오는 마치 작가에 의해 잘 설계된 문학적 은유처럼 읽힌다. 라디오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한쪽 눈이 먼 사진가는 평생 그 수수께끼를 안고 살 것이다. 무척 슬프면서도, 한 편으로 그것이 그가 감당해야 할 숙명처럼 느껴진다. 눈도, 라디오도, 사랑하는 이도 잃었으므로, 그는 이제 결여된 존재다. 사진가인 그는 앞으로 세상을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볼 것이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그가 보는 세상이 어떤지 상상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려 노력할 것이다.
이런 경험을 우리는 주로 문학을 통해서 얻어 왔다. 그런 점에서 이 사진가의 인생은 거의 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래는 문학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거의 문학인 채로 그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었을 뿐이다. 정혜윤 피디를 만나 이야기 나눈 이후 비로소 문학이 되었다. 그런데 정혜윤 피디는 구태여 이 이야기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꽤 충실하게 타인의 말을 옮기면서도 의도적으로 이곳저곳에 여백을 남긴다. 독자가 각자의 생각과 이야기로 여백을 채우라는 듯이 말이다. 대체로 훌륭한 소설들이 그런 전략을 취하곤 한다.
『마술 라디오』에서 정혜윤 피디는 이처럼 아직 문학이 되지 못한, 그러나 곧 문학이 될 이야기를 주인공들을 대신하여 들려준다. 『마술 라디오』가 전체적으로 대화체로 쓰였다는 점도 중요한데, 정혜윤 피디에게 이 책은 자신과 독자 사이에 벌어지는 길고 긴 대화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를, 말을 다르게 쓸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힘을 얻는 것을 숱하게 봐왔어(그 반대도 물론 숱하게 봤지. 남을 위협하고 세를 과시하는 데만 말의 힘을 쓰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자신도 같은 칼날에 상처를 입지). 지금 내가 바로 그것을 해보려 해. 나는 언제부터인가 힘없는 사람들을 만나면 자꾸만 이야기를 들려줘. 나는 ‘의견’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나는 이야기로 노를 저어서 힘없는 사람들을 다른 편 기슭에 옮겨놓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 54쪽, 같은 책
저 힘없는 사람들이 도착한 기슭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 앞서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어떤 마술적 공동체가 있지 않을까?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각자의 소설책을 돌려 보는……. 물론 정혜윤 피디가 노 저은 배를 타고 도착한 공동체에서는 소설을 돌려 보는 대신 서로 대화를 나누겠지만 말이다. 나는 이 버전의 공동체도 마음에 든다.
평범하기 때문에 위대한 서사
『마술 라디오』에 담긴 이야기 대부분은 폭넓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 몇몇 이야기들은 아주 특수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이 공동체 안에서 모든 이야기들이 ‘보편적’일 필요는 없지만, 너무 특수한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일으키는 파문과는 무관하게 상대적으로 공감의 폭이 좁은 것이 사실이다. 공동체 의식을 공고하게 만드는 것은 역시 누구나 쉬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들이다. 보편적인 이야기란, 보편적인 인물이 보편적인 상황에서 어떤 보편적인 선택을 내리는 이야기로 정의내릴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보편적인 이야기란,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선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노라 이야기함으로써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정혜윤 피디의 또 다른 책인 『그의 슬픔과 기쁨』은 바로 그런 보편성의 층위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2013년 6월 7일 저녁 7시, 나는 모터쇼에 참석했다. 그 모터쇼의 이름은 H-200000이었다. ‘20000’은 자동차에 들어가는 부품 개수를 가리키고 ‘H’는 HEART 혹은 HOPE 혹은 사다리를 뜻한다고 들었다. 그 모터쇼에 나온 차는 달랑 한 대였다. 그 차를 만든 사람들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었다. 그 모터쇼의 작은 역사는 이렇다. 해고된 지 5년째에 접어들자 노동자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제일 하고 싶은 것은 뭐였지?’
‘왜 우리는 매일 투쟁만 하고 있는 거지?’
‘맞아. 우리 원래 자동차를 만들던 사람이었잖아.’
(……)
대략 8천만 원이 모였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노동자들은 중고 자동차 가게에서 2004년산 코란도 밴을 한 대 구입했다. (……) 그들 서른 명가량의 노동자들은 용인의 정비소에서 코란도 한 대를 24시간 해체했다. 그리고 해체한 것들을 다시 24시간에 걸쳐서 조립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사진과 영상으로 보았다. (……) 그 영상을 보는 동안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영상 속에서 노동자들의 얼굴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웃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그전에 몇 번이고 본 얼굴과는 달라 보였다. 그 순간 그들에겐 한 점 그늘도 없었다. 내가 본 것은 바로 그들이 잃어버린 얼굴이었다. 그들이 잃어버린 ‘평범함’이었다.
(……) 그날 저녁 나는 허름한 맥줏집에서 열린 모터쇼 뒤풀이에 참석했다. (……) 내 앞에 한 동자가 앉았다. 영상에서 본 얼굴이었다. (……) 그는 몽롱한 행복감 속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자꾸만 이렇게 말했다.
“또 하고 싶다.”
나는 그 말에 통증을 느꼈다. 그를 좀 더 알고 싶어졌다.
- 9쪽, 『그의 슬픔과 기쁨』, 정혜윤, 후마니타스
쌍용 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을 다룬 르포에세이 『그의 슬픔과 기쁨』은 『마술 라디오』와 거의 같은 시기에 출간되었다. 작가도 이 두 권의 책을 거의 동시에 집필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니 이 두 권이 내용이나 형식적인 면에서 대구를 이루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마술 라디오』는 다소 꿈결 같은 이야기이다. 사실에 기반을 두지만 때로 물리 법칙과 인과 법칙을 거스르는, 말하자면 마술적 사실주의에 가깝다. 반면 『그의 슬픔과 기쁨』은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목을 맨다. 노동자들의 인터뷰 녹취를 엮었으니 그런 것이기도 하거니와, 노동자 개개인이 처한 상황이라는 것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으면 결코 실감할 수 없는 절망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2월 25일 무급 휴직자 임무창은 집에서 잠이 들었다. 평범한 날이었을 수도 있었다. (……) 아내는 1년 전 봄 4월 25일 그에게 전화를 했었다. 그날 아내는 보고 싶으니 빨리 집으로 오라고 했었다. 아내는 쌍차 파업 이후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에 그때 그는 허겁지겁 집으로 갔었다. 아내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내는 무사했다. 그는 옷을 벗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 아내는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아이들은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는 그날로 몇 번이나 돌아가 봤을까? 수십 번일까 수백 번일까? 어떻게 해야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까? 옷을 갈아입지 말았어야 했을까? (…) 그가 시간을 되돌리고 되돌리면서 얼마나 많은 상상을 했을지 우리는 영원히 알 수가 없을 것이다.
2월 26일 그는 엎어진 자세로 자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빠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나 아빠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 숨지기 하루 전날 그는 친구를 만났었다. “아이들 등록금만 생각하면 가슴이 숯덩이가 된다.”고 말했다. ‘숯덩이 가슴’은 그냥 하소연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사인은 생활고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심근경색이었다.
- 138~139쪽, 같은 책
쌍용 자동차 노동자 해고 이후 노동자와 노동자 가족 23명이 사망했다. 생활고에 의한 자살과 스트레스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한 사망이 대부분이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살인 계속됐고, 남은 자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죽음에 애써 무관심하려고 했어요. 의지박약이라고 했어요. “왜 죽어? 열심히 살면 되지.” 그런데 스물두 번째 죽음은 달랐어요. 저는 그 소식 듣고 이 일을 그만하려고 했었어요. (……) 엄청 열심히 쉬지 않고 ‘희망 텐트’, ‘희망 뚜벅이’ 같은 투쟁을, 어렵지만 어떻게든 만들어 냈는데 또 죽은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77일간 싸운 사람인 거예요. 유일하게 우리에게 있던 확신은, 그 어려운 싸움을 한 사람은 자살하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그게 다 무너졌어요. 광주로 도망갔어요. 집사람한테도 연락 끊고 날랐어요. (……) “너만 힘든 것 아냐, 이 새끼야. 나도 죽을 것 같아.” 다들 걱정한 거죠. 내가 죽을까 봐. 집사람은 계속 “어디야? 어디야?” 하고, 창근이 형은 “내가 너에게 너무 큰 짐을 맡겼나 보다. 나도 포기할 거야.” 하고. 할 수 없이 올라가 평택역에서 버스 타고 공장 가서 버스 내리는 순간부터 내리 네 시간을 울었어요. 엉엉하며 울었더니 우리 형들이, 정우 형이 “그만 울어, 새끼야.” 그러는 거죠. 다들 저 없을 때 엄청 울어서, 저 울 때쯤엔 눈물도 말라 버린 거죠.”
- 151~152쪽, 고동민, 같은 책
그들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해고 통보를 받은 뒤 홀가분하게 공장을 떠날 수도 있었을 텐데, 다른 방법으로 생계를 꾸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힘든 투쟁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일까? 사실 『그의 기쁨과 슬픔』이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하는 책이다. 그래서 노동자 한 명 한 명을 만나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당신은 누구였지요?”, “왜 생계 활동을 하지 않지요?”, “무엇 때문에 5년간의 길거리 생활을 버티지요?”, “대체 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지요?”
스물여섯 명의 노동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구례에서, 완주에서, 임실에서, 고흥에서, 평택에서 각자 사연을 품고 쌍용 자동차에 입사한다. 2005년 상하이자동차가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더니 4년 뒤에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얼마 안 있어 사측이 2,646명의 정리 해고안을 발표한다. 설마 설마 하던 노동자들은 산 자(해고되지 않은 자)와 죽은 자(해고된 자)로 구분됐고, 곧 해고를 무효로 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된다.
일부 산 자도 징계 해고를 감수하고서 죽은 자들의 투쟁에 참여한다. 그러면서도 산 자든 죽은 자든 위 질문에는 똑 부러지게 대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쌍차 투쟁이 정연한 논리에 기반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저 이렇게밖에 말 할 수 없다.
“저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 ‘형, 동생’ 하면서 같이 다녔는데, 95퍼센트 정도가 같은 동네에 사는데, 게다가 진짜 형제들도 다니는데 죽은 자들만 싸우고 산 자들은 가만히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차가워도 분명한 현실이라는 것, 나도 거기 일조하는 사람 중 하나라는 것, 이런 것들을 우선 저부터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 35쪽, 박호민, 같은 책
“나는 나를 알아요. 나는 나만 살기 위해서 냉정해지질 못해요. 나는 나를 알아요. 나는 어울려야 사는 사람이에요. 파업에 참여 안 하고 그러면 꼭 배신자 같잖아요. (……) 말한 거 바꾸면 쪽팔리잖아요.”
- 127쪽, 김정운, 같은 책
“왜 우리가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요? 이 공장에서 차가 한 대 한 대 나가고 그러면서 우리가 한솥밥 먹었던 기억들의 소중함 때문이었습니다. 이게 우리를 버티게 했던 힘이었습니다.”
- 45쪽, 김정욱, 같은 책
“정리 해고 안 되었으면 내가 그렇게 공장 점거할 생각이나 해보았겠어요? 죽은 사람들도 정리 해고 되지 않았으면 죽었겟어요? 정리 해고 되지 않았다면 우린 지금하고 다르게 살았겠죠.”
- 91쪽, 정형구, 같은 책
“불온서적 있었지?” 그래서 “우리는 좌익 용공이 아니다. 우리는 이명박 정권에 맞서 싸운 게 아니다. 우린 그냥 아저씨들이다, 그냥 아저씨. 해고 안 되려고 그런 거다.” 했죠.
- 92쪽, 고동민, 같은 책
“이선균이 영화 속에서 ‘해야만 할 것 같아서’라고 말해요. 저한테도 해야만 할 것 같은 일들은 자꾸만 있었어요. (……) 해야만 할 것 같아서. 해야 될 것 같은 일을 다 하지는 못했겠지만, 그리고 주저하거나 발 빼려는 심정 속에서 갈등도 많았지만, 결국 행동으로 표현했던 것 같아요.”
- 97쪽, 이창근, 같은 책
의리 때문에, 억울해서, 화가 나서, 쪽팔려서, 추억 때문에, 그냥 해고되기 싫어서,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아서……. 투쟁의 이유치고는 너무 사사롭다. 그런데 사사롭기 때문에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었고, 힘든 투쟁의 길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너무 특수한 이유는 우리를 놀라게 할 수는 있어도, 공감을 불러일으키진 못 한다. 의리 때문에 버티고, 억울해서 버티고, 화나서 버티고…… 나도 그럴 수 있겠다는, 혹 나는 그럴 수 있겠냐는 반응이 비로소 생긴다.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창근 씨는 책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렇게 하는 이유가, 조명이 꺼지지 않아서예요. 그 빛이 밖에서 오는지 안에서 오는지 모르겠어요. 빛이 안 꺼져서 해요. 빛이 꺼지면 저도 어딘가 도망가겠지만 빛이 안 꺼져서 도망 못가요.”
- 281쪽, 이창근, 같은 책
이창근 씨가 봤다는 빛은 뭘까? 말 그대로 조명 빛을 말하는 걸 수도 있다. 그런데 ‘꺼지지 않는 빛’이라는 건 뭘 의미하는 걸까? 내가 알기로 그건 ‘인간’ 말고 다른 것일 수 없다.
다시, 이야기의 공동체로 가다
우리는 작가가 소설을 쓰듯이, 내 삶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내 뜻대로 정해서 쓸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 운명의 장난에 무방비로 노출된 비극적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내 서사를 내가 통제하지 못할 때, 힘없는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냥 운명의 장난이라는 서사의 흐름에 그냥 몸을 맡겨버리거나, 아니면 끝까지 흐름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이 제3의 방법이 있기 마련인데, 바로 힘없는 주인공들이 모여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마술의 라디오』와 『그의 슬픔과 기쁨』은 비유하자면 저마다의 공동체를 꿈꾸며 나아가는 한 척의 배다. 그렇다면 정혜윤 피디는 제일 선두에서 노를 젓는 사람(선장이 아니라)이라 할 수 있다. 배가 너무 노골적인 상징이라 생각된다면, 그냥 방향이라고 해도 좋겠다. 어쨌거나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다. 혼자일 때에 비해 이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이 특별히 많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을 때, 그 절박함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 속 누군가일 것이다.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하나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어떻게 역사에 각인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개인의 서사가 세계의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킬 수는 없다. 서사의 내용이 빈약해서 라기 보다, 파급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공동체가 비슷한 서사를 여럿 공유한다면, 파급력은 훨씬 강력하다. 이야기의 공동체가 크고 단단할수록 세계는 이 서사에 결코 반응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