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견 책의 목적은 분명해 보인다. 대개의 물건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책은 ‘매체’이기 때문에 사실 용도 자체는 다양하다 말할 수 있다.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거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또는 순수한 재미를 위해 그렇게 많은 책들이 세상에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단 하나의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바로 ‘읽히기 위해서’라는. 읽는다는 것이 책이 지닌 다른 모든 목적에 앞서는 본질적이고 불가결한 행위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읽힌다는 것은 책에 있어서 거의 운명과도 같은 일이 아닐까.
불행하게도 읽힌다는 목적에 도달하는 책의 수가, 독자 개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너무 적다. 예외 없이,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이 항상 더 많은 법이다. 그래서인지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읽은 책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내 책장과 타인의 책장, 그리고 도서관과 서점과 헌책방에 꽂힌 채 아직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저 많은 책들에 비하면, 내가 읽은 책의 목록이라는 것은 너무 하찮아 감춰버리고 싶은 것이다.
다소 소아적인 발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아직 읽지 않은 책에게 느끼는 부끄러움과 욕심은 앞으로 계속 책을 읽게 만드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그것대로 필요한 결여이다. 다행인 것은, 책은 그런 우리를 기꺼이 기다려준다는 점이다. 책이 특히 인내심이 각별한 매체임을 뒷받침할 근거는 아주 많다. 책은 원하기만 하면 흔히 구할 수 있고, 중간쯤 읽고 덮어 두었다가 언제고 다시 꺼내 읽을 수 있다. 또 책은 인쇄술의 발전에 따라 모양새를 바꿔 왔는데, 현대에 이르러 우리가 기원전 그리스에서 쓰인 플라톤의 『국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책의 그러한 끈질긴 생명력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책이 기꺼이 우리를 위해 기다려줄 거라는 믿음이 아주 근거 없는 낙관만은 아니다.
책의 또 다른 운명, 분서
그런데 책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금서’의 역사이다. 어떤 책들은 당대의 이해관계에 따라 읽거나 출간되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다. 금지될 뿐 아니라 불태워지기까지 했다. 이에 관해 중국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가장 유명한 역사적 사례이지 않을까. 진시황은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세우면서 법치주의를 통치의 근본 원리로 삼았다. 그리고 이를 비판할 수 있는 일체의 학문과 사상을 배격하기에 이른다. 수많은 책을 불태웠고, 이에 반발한 유학자들을 생매장했다. 금서가 만들어지는 맥락을 아주 잘 드러내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이러한 분서(焚書)는 그저 과거의 야만적이고 비이성적인 행위로 이해해야 할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나라에서도 조직적인 분서가 이루어졌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1970년대 ‘악서(惡書) 추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대량의 만화책들이 불태워졌고, 정부 주도로 수만 권의 만화책이 압수된 일이 있었다. 이 탄압으로 이후 한국의 만화 산업이 크게 퇴보했음을 두말할 것도 없다. 지배계층의 ‘만화책은 불건전하다’는 판단, 그러니 없애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분서 행위를 뒷받침했고,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했다. 분서 역시 독서만큼이나 독자의 자발적인 행위일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이것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우리의 또 다른 반응인 것은 아닐까.
『금서의 역사』를 쓴 베르너 풀트는 사회 구성원의 적지 않은 동조와 창작자 자신의 자기검열이 금서 행위에 크게 기여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이들의 생각은 간단명료하다. 어떤 책은 나쁘고, 그 책을 읽는 것은 나쁜 행위이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나쁜 행위는 근절해야 하고, 따라서 나쁜 책을 없애야 한다. 이런 논리는 아주 자연스러워서, 상황이 허락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벌어지게 된다. 레이 브래드버리가 쓴 『화씨 451』은 정확히 그런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를 그리는 소설이다. 시스템은 간단하다. 모두들 책이 나쁘다고 생각했고, 책은 불태워야만 하는 것이었다. 구태여 읽어볼 필요도 없다. 책이 숨겨져 있다면, 당연히 그 집도 함께 불태웠다. ‘방화수(frieman)’는 바로 그 일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주인공 몬태그도 방화수의 일원이다.
화씨 451, 책이 불타는 온도
클라리세 매클런이 말했다.
“저, 이런 것 물어 봐도 될까요? 방화수로 일하신 지는 얼마나 되었어요?”
“내가 스무살 때부터니까, 십 년이 되었군요.”
“그 동안 태웠던 책들 중에서 읽어보신 것은 없나요?”
몬태그는 웃었다.
“그건 법을 어기는 거지!”
“아, 물론 그렇죠.”
“보람있는 일이죠. 월요일에는 밀레이를, 수요일에는 휘트먼을, 금요일에는 포크너를 재가 될 때까지 불태우자. 그리고 그 재도 다시 태우자. 우리의 공식적인 슬로건이죠.”
- 『화씨 451』(레이 브래드버리 / 황금가지) 22쪽
『화씨 451』은 책이 금지된 미래 사회를 그린다. 디스토피아 소설이 그리는 미래 사회는 대체로 끔찍하기 마련인데, 이 세계는 좀 독특한 면이 있다. 일반적으로 소설 속 미래 사회의 끔찍함이란, 주로 주인공이나 인류가 겪는 육체적인 시련의 정도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영화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인간이 기계의 에너지원으로 전락한 모습은 미래 사회의 끔찍함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장치가 된다. 하지만 『화씨 451』에서는 그러한 육체적인 시련을 거의 느낄 수 없다. 이들은 대체로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고 있으며,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한다. 거대한 벽면 텔레비전으로부터 세속적인 프로그램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고, 복잡한 일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 책을 읽지 않으니 기억력이 감퇴하여 과거에 매달릴 일도 없이, 그저 현재 삶의 욕망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끔찍한 일인가? 충분히 끔찍하다. 이 미래 사회의 끔찍함은 육체적 시련이 아닌, 바로 정신적 빈곤에서 비롯된다. 경우에 따라 후자가 더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방화수인 몬태그는 자기 일에 만족하며 사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책을 불태운 날에는 '구릿빛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라, 나중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그 잔인한 미소가 얼굴 근육을 꽉 붙들고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옆집에 사는 이상한 소녀 클라리세를 만난 이후, 견고하던 그의 일상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클라리세의 끊임없는 호기심과 질문으로 인해 몬태그는 자신의 삶에서 모순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아요.”
“무슨! 사람들이 왜 얘기를 안 해?”
“아니에요. 아무도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요. 자동차며 옷들이며 수영장 얘기밖엔 안 해요. 그런 것들이 뭐는 얼마나 멋있냐는 둥 그런 얘기뿐이죠. 누구든 하는 얘기들은 다 똑같아요. 남들과 다른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어요.”
- 57쪽, 같은 책
몬태그는 자신이 벽면 텔레비전 사이에 끼워 넣어진 전기 장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도 할 줄 알고 사람처럼 움직일 줄도 안다. 그러나 이 벽을 깨어 부술 수는 없다. 단지 팬터마임처럼 안타깝게 그녀(아내)가 자신에게로 돌아와 줄 것을 간절히 바라는 정도밖에 할 수 없다. 이 두꺼운 벽을 건드릴 수가 없다.
- 81쪽, 같은 책
그러던 어느 날 클라리세가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다. 클라리세의 부재에 대한 걱정과 자기 안의 모순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느끼던 몬태그는, 늙은 여인의 책을 불태우던 현장에서 충동적으로 책 한 권을 품속에 감춘다. 그리고 그 늙은 여인이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책과 함께 자살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몬태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없음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혼란에 빠진 몬태그는 방화소로 출근하기를 거부하며, 아내에게 이런 말로 자신의 고통을 토로한다.
“꼭 어젯밤에 죽은 여자 때문만은 아니야. 간밤에 나는 지난 10년 동안 내가 불사르느라 뿌렸던 등유를 생각했어. 그리고 불태운 책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지. 불에 타 없어진 하나하나의 책들마다 제각기 한 사람씩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게 누구든지 한 권의 책을 채우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해 낸 거야. 책 한 쪽 한 쪽을 알맹이 있는 글로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는지 알 수 없지. 전에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해 보지 못했어.”
- 같은 책, 89쪽
이 자각은 조금 새삼스러워 보인다. 지난 10년 동안 아무런 죄책감 없이 책을 불태워 왔으면서 왜 새삼 불태운 책을, 그리고 그 책을 쓴 사람을 떠올려야 했을까. 몬태그는 처음에 이것을 책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뒤늦은 자각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그렇게 괴로워하는 이유가 꼭 책에 대한 관심이나 죄책감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주변 사람에 대한 자신의 이해 불가능한 상태 때문에 더 힘들어한다. 클라리세와 아내, 책과 함께 불탄 노인, 책을 쓰고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이 자신의 머릿속을 꽉 채웠지만, 그들이 누구고 어떤 심정인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상태, 즉 타인에게 거의 무지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이들을 견딜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자신의 집에 찾아온 이웃집 부인들을 향해 몬태그는 시를 낭독하며, 자신의 감정을 처음으로 폭발시킨다. 사람들의 무지와 무감각함, 텅 빈 자신의 삶이 너무도 끔찍해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 사랑이여, 우리를 진실되게 하라, 우리 서로를! 세상을.”
이 일로 그가 책을 가지고 있음이 발각되고, 몬태그의 변화를 견디지 못한 아내는 그를 밀고하고 만다. 이제 그는 책을 가진,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범죄자로 쫓기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책이다
“우리 전부가 똑같은 인간이 되어야 했거든. 헌법에도 나와 있듯 사람들은 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는 거지. 그리고 또 사람들은 전부 똑같은 인간이 되도록 길들여지지. 우린 모두 서로의 거울이야. 그렇게 되면 행복해지는 거지. 움츠러들거나 스스로에 대립되는 판결을 내리는 장애물이 없으니까. 그래, 바로 그렇기 때문이야! 책이란 옆집에 숨겨 놓은 장전된 권총이야. 태워 버려야 돼. 무기에서 탄환을 빼내야 한다고.”
- 같은 책, 99쪽
“당신이 찾아 헤매는 건 책이 아니야! 당신은 낡은 축음기 음반에서, 낡은 영화 필름에서, 그리고 오래된 친구들에게서 책에서 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것들을 얻을 수 있지. 자연 속에서, 그리고 당신 자신 속에서 찾아보시오. 책이란 단지 많은 것들을 담아 둘 수 있는 그릇의 한 종류일 따름이니까. 우리가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것들을 담아 두는 것이지. 책 자체에는 전혀 신비스럽거나 마술적인 매력이 없소. 그 매력은 오로지 책이 말하는 내용에 있는 거요. (…) 책들은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을, 숨구멍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지는 삶의 이야기들을 전해 준다.
- 같은 책, 136쪽
각각 방화서 서장 비티와 은퇴한 영문학 교수 파버가 몬태그에게 한 말이다. 비티와 파버는 이 책에 등장하는, 책에 관해 서로 대립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두 인물이지만, 책의 역할에 관해서는 적어도 동일한 관점을 가진 것 처럼 보인다. 책은 삶을 남다르고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다만 비티로 대변되는 지배계층은 이를 ‘위험’으로 간주한다. 불과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책에 관해, 자신과 타인에 관해 거의 무지했던 몬태그로서는 책이 정말 위험한 것인지 판단할 자기 안의 관점이 없다. 도시로부터 탈출하는 극단적 상황에 처했을 때 잠깐 잊었던 이 질문을, 몬태그는 다시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이 소설이 파버나 비티같은, 책에 대한 확고한 자기 철학과 관점을 가진 인물이 아닌 몬태그 같은 거의 무지한 인물을 중심에 놓은 것은 옳은 선택처럼 보인다. 우리 같은 평범한 독자가 그렇듯, 몬태그는 이제부터 배울 것이 아주 많다. 도시 밖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또 많은 책을 읽게 될 터이다. 읽을 책이 많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다.
그리고, 도시 끝에서 몬태그가 만난 사람들, 도시를 벗어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이 무리는 기꺼이 몬태그를 받아들인다. 이들은 책이 담은 지식을 보관하여 다음 세대로 전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책이 없는 시대에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그들은 그들이 한때 읽었던 책을 바탕으로, 그 자신들이 바로 책이 되기로 한다.
“당신이 바로 전도서가 되는 것이오. 이제 당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 되었는지 아시구료!”
“하지만 잊어버렸습니다.”
“아니오.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을 거요. 당신이 머릿속에 가로놓인 벽돌은 흔들어 떨어뜨릴 방법이 있소.”
“하지만 지금까지 기억해 내려고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 모릅니다!“
“그럴 필요 없소.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기억나게 될 거니까. 우린 다들 아주 정확한 기억력을 갖고 있소. (…) 몬태그, 플라톤의 『국가』를 읽고 싶지 않소?”
“물론 읽고 싶지요!”
“내가 바로 플라톤의 『국가』라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시몬스 박사가 바로 마르쿠스라오. (…) 사악한 정치 소설인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나단 스위프트를 소개합니다. (…) 몬태그, 여기 있는 우리 전부가 아리스토파네서, 마하트마 간디, 석가모니, 공자, 토마스 러브 피콕, 토마스 제퍼슨, 링컨입니다. 그리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기도 하고.”
- 같은 책, 231~232쪽
앞서 언급한 책에서 베르너 풀트는 “금서의 역사는 단순히 억압의 사슬, 파괴된 작품과 살해된 작가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권력에 대항해 언어가 거둔 승리의 연대기이기도 하다” 고 말했다. 책을 완전히 금하는 것으로 과연 그 연대를 끊을 수 있을까? 『화씨 451』은 그 결과를 똑똑히 보여주는 소설이다. 책이 완전히 금지된 사회에서, 결국 사람이 책이 된다는 것을.
위험한 책
『화씨 451』은 책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찬가일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책에 관한 찬미가 아주 감격적인 어조로 가득 차 있는데, 몬태그는 전도서의 한 구절을 적절히 인용함으로써, 이 찬가의 대미를 장식한다.
책에 대해 쏟아내는 그런 찬가에 동의 못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지만, 감동적인 동시에 조금 낯 뜨거워지는 측면이 분명 있다. 소설의 앞부분으로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화씨 451』은 비티와 파버라는 책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취하는 두 인물의 입을 통해 책의 양면성을 비교적 균형 있게 다룬다. 비티의 말처럼, 책에는 우리를 “잠깐 동안에 주정뱅이로 만들어 버리고, 몇 줄만 읽고는 당장 절벽 끝으로 달려 나가게” 만드는 위험한 측면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화씨 451』에서 책의 위험성에 대한 비티의 경고는 그냥 경고에 그치고 만다. 이 서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책이 되는 감격스러운 순간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이 금지된 또 다른 사회 다룬 소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는 『화씨 451』이 가지 않은 어떤 지점까지 나아간다.
중국에서 태어나 문화혁명을 겪고 프랑스로 건너가 작가가 된 다이 시지에는,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소설로 우리를 문화혁명기의 중국으로 안내한다. 1960년대 말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이자 혁명 기수인 마오쩌둥은 나라를 일대 변혁하는 운동을 벌였다. 모든 대학이 휴교했고 젊은 지식인들, 다시 말해 중등교육을 마친 학생들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재교육을 받기 위해 농촌으로 추방되었다. 주인공인 ‘나’와 친구 ‘뤄’도 재교육을 목적으로, 이곳 ‘하늘긴꼬리닭’ 산의 스무 개 마을 중 한 곳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모차르트는 언제나 마오 주석을 생각한다
우리는 실망과 괴로운 경험을 해야 했다. 교과목이 공업과 농업에 국한되었고 ‘기초 지식’에 속하는 수학과 물리, 화학 등은 폐지되었기 떄문이다. 교과서 표지에는 챙 달린 모자를 쓰고 실베스타 스텔론처럼 굵직한 팔로 커다란 망치를 휘두르고 있는 노동자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노동자 옆에는 농민으로 위장한 여자 공산당원이 빨간 머플러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우리가 유일하게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그런 교과서들과 마오쩌둥의 『붉은 어록』 밖에 없었다. 다른 책은 모두 금지되었다.
- 14~15쪽,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 (다이 시지에 / 현대문학)
중국의 문화혁명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특히 문화혁명의 폐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은 더더욱 적었기 때문에,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에서 보게 되는 당시 중국 사회는 다소 충격적이다. 재교육 첫날, 도시에서 온 소년들을 화로 앞에 세워 놓고 가방에서 물건을 하나씩 꺼내 불필요하다 생각되는 물건을 태워버리는 장면은 SF 소설인 『화씨 451』에 비견될 만하다. 이 때 ‘나’의 바이올린도 부르주아 장난감으로 치부되어 불 태워질 뻔 했지만, ‘뤄’의 재치로 살아남는다. 악기를 연주해 보라는 촌장의 말에 ‘나’는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연주하게 되고, 제목이 뭐냐는 촌장의 질문에 뤄는 <모차르트는 언제나 마오 주석을 생각한다>라고 재치 있기 대답한다.
엘리트 부모를 둔 소년들이 재교육을 마치고 무사히 복귀할 확률은 3퍼밀(3,000 분의 1)에 불과했으니, ‘나’와 뤄가 ‘하늘긴꼬리닭’에서 평생을 촌장의 비위나 맞추며 살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그나마 ‘나’와 뤄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마을 사람들에게 영화를 이야기로 들려주는 이야기꾼으로서, 한 달에 한 번 용징에 가서 영화를 볼 수 있었고, 또 이웃 마을 재봉사의 바느질하는 딸과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명처럼 찾아온 한 권의 책이 있었다.
발자크와 소년과 소녀
그 얇은 책의 제목은 『위르쉴 미루에』였다. (…) 나는 밥도 먹지 않고 밤이 이슥하도록 사랑과 기적으로 가득한 프랑스 이야기에 푹 빠져, 다른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서 보냈다.
아직 청춘의 혼돈상태에 빠져 있는 열아홉의 숫총각이 애국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운동에 관한 혁명적 장광설밖에 모른다고 생각해보라. 그런데 갑자기 그 작은 책은 침입자처럼 나에게 욕망과 열정과 충동과 사랑에 눈을 뜨라고 말하면서, 그때까지 고지식한 벙어리에 지나지 않던 내게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 81쪽, 같은 책
작가와 시인을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로 둔 또다른 친구 ‘안경잡이’한테는 비밀가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속에 금지된 책이 들어 있었다. ‘나’와 뤄는 ‘안경잡이’의 안경이 깨졌을 때, 그의 일을 도와주는 조건을 책 한 권을 빌릴 수 있었다. 그 책이 바로 발자크의 『위르쉴 미루에』 였다. 책에 완전히 매혹된 ‘나’는 책 일부를 가죽 점퍼에 옮겨 적었고, 뤄는 이 가죽 점퍼를 들고 바느질 소녀를 만나 읽어준다. 소년들이 그랬던 것처럼, 소녀도 즉각 발자크와 사랑에 빠졌다.
“내가 발자크의 원문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주고 나자 그애는 네 점퍼를 잡아채어 다시 한 번 읽었지. (…) 그애는 그 글을 모두 읽고 나더니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서 마치 성스러운 물건을 든 신자처럼 네 점퍼를 떠받치고 있었어. 발자크는 그애의 머리에 보이지 않는 손을 올려놓은 진짜 마법사야. 그애는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몽상에 잠김 채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지. 그러고는 네 점퍼를 자기가 입었어. 꽤 어울리더군. 그애는 자신의 살갗에 닿는 발자크의 말들이 행복과 지성을 갖다 줄 거라고 말했어.”
- 같은 책, 86~87쪽
소녀에게 발자크를 읽어준 것을 뤄는 ‘교육’이라고 표현했다. 시골 처녀를 자신과 어울리는 도시처녀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것이 뤄의 생각이었다. “이 책들로 나는 바느질 처녀를 딴 사람으로 만들어놓겠어. 그애는 더 이상 단순한 산골 처녀로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와 뤄와 바느질 소녀는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바뀌어 갔다.
나는 장난삼아 연애한다는 기분으로 그 책(『장 크리스토프』)을 대강 훑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책을 펼친 그 순간부터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 재교육까지 받은 나의 빈약한 머리로는 한 개인이 전세계와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장난삼아 시작한 연애가 위대한 사랑으로 바뀌었다. (…) 글자 그대로 수백 페이지의 거친 강물이 나를 집어삼켰다. 내게 있어서 그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책이었다. 그 책을 다 읽고 나니 침범할 수 없는 개인적인 삶도, 세상도 더 이상 이전의 것과 같지 않았다.
- 같은 책, 152~153쪽
읽을 것인가 불태울 것인가
『화씨 451』에서 몬태그가 그랬듯이, 책을 사랑하게 된 소년소녀들이 오랫동안 이 열망을 소중하게 간직했더라면 참 좋았겠지만,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소설의 마지막 장, ‘나’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슬픈 곡조를 따라, 뤄는 성냥에 불을 붙여 책을 불태우고 있다. 소년들은 한때 소중했던 소설의 등장인물과 표현들이 춤추다 재로 변하는 불길에 쳐다보며, 울었다 웃었다를 반복한다. 그 옆에 소녀는 없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가 던지는 질문이 힘을 갖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문학을 통해 삶이 바뀐다는 말은 넘쳐나는데, 정작 삶이 어떻게 바뀌었다는 말은 좀처럼 들을 수 없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현실에 문학이 너무 많이 넘쳐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그에 영향을 받은 우리 삶의 부분들도 점조직처럼 흩어져 큰 변화의 물길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리라. 또 책의 치명성은 섬세한 것이어서 아주 희소한 순간이 아니면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이리라. 소설 속 소년소녀가 느끼는 극심한 갈증(열정과 충동과 사랑) 정도가 아니라면, 책을 들이킨다고 한들 우리의 미약한 갈증이 풀리기나 할까? 절박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책도 그만큼 의미를 잃는다.
책의 목적에 대한 이야기로 이 글의 서두를 열었다. 『화씨 451』과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는 책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 영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책은 금지되고 불태워졌는데, 책을 향한 등장인물들의 반응도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바느질 소녀가 왜 도시로 떠났는지 알 수 있는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의 마무리 역시 대신하기로 한다. 아마도 다음의 이유로, 책은 읽히거나 불태워지는 듯하다.
뤄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창백한 얼굴로 불가에 앉은 그는 하소연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뤄는 책을 불사르는 광기에 사로잡혔다.
“가버렸구나.”
내가 말했다.
“응, 대도시로 가겠대. 그애가 발자크 얘기를 했어.”
뤄가 대꾸했다.
“뭐라고 했는데?”
“발자크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야.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이라는 걸.”
- 같은 책, 2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