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부를 시켜놓고
바닷가 허름한 두붓집
벚꽃이 피기 전에 모두부를 시켜놓고
나는 파도를 보네 어디로 갔을까
해변의 젖은 발자국들을 보네
막 일어서는 파도도 좋고
꽃이 필 사월도 좋지만 나는
다정한 모두부의 윤곽을 더 사랑하네
모두부의 비밀은 자르기 전에도
눈물겹도록 알 수가 있네 (P.12)
카카오
톡, 화면을 열자 십이월 오늘
'생일인 친구'에 그의 이름이 뜬다
지난여름에 죽은 사람인데
생일은 남아 찬바람에 식어가고 있다
함께 협궤열차를 타고 바닷가 역까지 갔던 사람
이제 그 역은 사라지고 더불어 기차도 사라지고
협궤는 남아 멀리 사라지는 길 끝을 보여준다
이 길은 기어이 철거가 될 것인데도
철로변에 누가 심었나 카카오 나무 한 그루
이 추운 곳에서는 살 수 없는 나무 그것이
이파리를 쑥쑥 내밀어 바람을 부르고
카카오 카카오 오 카카오 열매를 부풀린다
오늘 폐역사에 툭 떨어진 카카오 열매 하나
초콜릿이 되기에는 아직은 너무 쓴 열매 (P.34)
사과를 잘 먹는 새
사과를 잘 씻어서 과도로 자릅니다
반은 아내에게 주고 반은 내가 먹습니다
접시에 남는 것은 꼭지와 속입니다
사과를 잡고 키우던 꼭지는 마르고
속은 차올라야 잘 익은 사과입니다
아침 저녁 창가에 찾아오는 새는
잘게 썬 사과의 속을 잘 먹습니다
여섯 번 두리번 거리고 한 번을 쪼아먹는 새
흑연같은 눈을 바람에 닦습니다
난간을 꼭 쥐었던 발은 가늘게 떨고
날이 추워지면 아주 멀리 날아갈 새입니다
썰어준 사과는 먹고 지어준 이름은 들고
가슴의 어린 깃은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도록
짧은 울음을 흘리며 멀리를 바라봅니다
나는 생각할수록 너무 먼 하늘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이슬은 차가워지기 시작합니다 (p.63)
보이저
모로 누우면 남쪽 창으로 하현이 들어옵니다 밤늦게 뜨는
달입니다 낮에 뜬 달이나 저녁에 뜬 달은 모두 멀어지는 어
제의 일이구요
참 편안한 신발이었거나 다정한 문고리였거나 목에 잘 맞
았던 베개는 그믐에서 초승으로 건너오지 못하고 지금 내
게는 모로 누워 아픈 어깨와 창문을 막 벗어나려는 하현뿐
입니다
한밤의 창문은 빛나는 세계 내게는 아직 하현이 있고 희미
하게 흔들리는 커튼이 있습니다 창틀 너머 너무 멀리 간
것들로 나의 방은 끝없는 두 평의 어둠을 만듭니다 그 속을
당신은 아직 혼자 가고 있겠지요 이 아픈 생각의 끝보다
더 멀리 가는 당신 도착은 없이 가기만 하는 당신 가다 가다
한 번은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주세요 나는 여태 이곳이어서
하현에 몇자 적어 보냅니다 (P.80)
-심재휘 시집, <두부와 달걀과 보이저>에서
'백미! 쿠쿠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 정든 목소리처럼, 오랫동안 좋아한 詩人의 새 詩集을 밥솥처럼 읽는다.
'서두르는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 스위치는 그 빠른 전기 앞에 서서 내게 빛을/ 줄 때와 안 줄 때를 구분했다 화투짝만한 마음의 어디를 누/르면 되고 또 어디를 누르면 안 되는지 알지 못하고 많은 계/절이 갔다'처럼 나도 그렇게 많은 계절을 속절없이 보내고, 오늘 미세먼지 뿌연 하루를 보내고, 산토리 위스키에 얼음과 탄산수, 레몬을 짜내어 하이볼을 마시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