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 -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마이클 돕스의 냉전 3부작
마이클 돕스 지음, 허승철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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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_마이클 돕스]<고르바초프를 위한 변명>​
















[소련붕괴는 정해진 운명이었을까.]







20세기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이념이니, 냉전이니, 미소갈등과 같은 문제는 따라 붙는다. 이 문제들이 6.25한국전쟁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기에 그렇다. 그간 그래서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우리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유령처럼 붙어서 귀찮게 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역사적 경험의 부재로 이런 감정을 공유하는 세대에게도 현재는 존재하지도 않는 소련이란 존재는 여전히 막강하다. "한국인이 처한 민족적 특수성...."이란 도입부 말만으로도 짐작 가능한 북한의 존재! 그들이 택한 체제의 형식적 전통성이 소련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어서라고 볼 수도 있고, 날 때부터 초패권국가인 미국의 파워를 눈으로, 몸으로 체감하며 커온 사람들에게 한 때 미국과 견주던 소련이란 나라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궁금증이 서려있을 법도 당연하다.



그래서 1991을 펼치게 되었다. 소련의 붕괴가 오늘날의 북한체제에 던지는 메세지가 있을까? 20세기를 통째로 뒤흔들며 미국을 위협하던 초강대국가의 마지막은 어떠했을까? 관심조차 없던 이런 궁금증들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마이클 돕스의 1991은 독자가 가지는 이러한 궁금증에 매우 충실한 책이다. 소련이 붕괴되는 순간의 마지막 10년! 소비에트연방 곳곳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미세한 균열들을 놓치지 않는다. 연관없어 보이는 사건들은 마이클돕스에 의해 소련제국의 종말을 가리키는 커다란 이정표로 변모한다. 저자는 그 균열들을 프롤레타리아, 체제, 민족, 공산당이란 네이름의 반란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는 과정을 조명한다. 소련붕괴의 원인과 시점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만큼 어느 하나의 결정적 계기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정해진 끝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의 내부를 생생한 현장감으로 전할뿐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사건이 결정적이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사건의 양상과 결과는 크고 작은 다름으로 나타났지만 본질은 모두 동일했다. 소련체제 그 자체의 종말을 의미했다.

아프간침공이든, 체르노빌원전사고드니 kal007 민항기 폭파, 레닌조선소파업이든 모두가 한줄기로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사건들에 우둔함과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은 소련체제를 향한 조롱과도 같았다. 소련체제는 인간과 자연을 철저히 생산요소로만 간주하고 양적팽창을 위한 수단으로서 착취해왔다. 스탈린의 시대에는 이 계획경제가 언정도 먹혀들어갔다. 생산원료의 투입과 생산, 그를 통한 대외팽창을 이뤄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경제가 점점 복잡해질수록 체제의 비효율성은 더욱 드러났다. 시장경제는 자체적으로 개선을 하는 기제가 무수히 많았지만 계획경제는 그런것이 없었다.

이 비효율적인 체제를 떠받치는 것은 더 비효율적이고 무능한 공산당의 존재뿐이었다. 공산당 세력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쿠데타를 시도했을 따 군 수장이 자신 공산당들에 "절반은 술고래고 절반은 무능력했다"라며 스스로 쿠데타를 포기한 사실에서 사회주의 국가 수립이후 70년 동안 소련에는 비대하고 무능력한 공산당만 남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소련의 말로는 운명은 정해진 길을 따라간 것 처럼 보인다. 거기에 마지막 방점을 찍은 페레스트로이카의 아버지 고르바초프의 등장도 어쩌면 마지막 예정된 수순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르바초프는 개혁가인가. 추월당한 구시대 황제일뿐인가]​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유지시키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를 시작했지만, 결국 74년 소련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불명예?를 안았다. 소련의 서기장이라는 지위에서 고르바초프의 선택 하나하나는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제국의 운명을 뒤바꿔놓을 만큼 컸다. 그래서 저자는 그 순간을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상당히 모순적이고 상충적인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었는데, "천재성과 무능, 이상주의와 이기주의, 순진함과 교활함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다"는 저자의 표현이 딱 적절해보인다. 고르바초프의 이런 모순성은 정치적 모호함이란 형태로 가장 빈번히 표출되었다.

고르바초프의 모순성에 대해 저자 마이클돕스는 냉정한 시각을 잃지 않는듯하다. 그에 대해 "자신이 추진한 개혁에 추월당한 개혁자였으며, 자신이 착수한 혁명의 희생자가 되었다" "고르바초프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지 않았어도 일어날 일을 벌어지도록 '허용'한 일이었다." 고 평가한 부분에서도 이러한 시각이 느껴진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체제유지라는 틀 내에서의 불완전한 것이었으며, 개혁의 주체자라기보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았던 평화주의자 정도의 인식이 더 강한듯해보인다.

소련붕괴와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는 시대, 민족, 가치평가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

고르바초프를 향한 평가에 대해 《1991》,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필자의 느낌은 조금은 달랐다. 그를 위한 약간의 변명이 필요해 보인다고 느꼈다.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으로서 권력을 잡자마자

과거 크렘린 지도부가 폐쇄적으로 내리던 결정에 일반인의 참여할수 있도록하면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시작했다. 그의 정치적 모호함과 경제적 정책들은 분명히 실책이며 그를 여전히 '공산주의자로만' 보이게 했지만, 그는 결코 공산당을 위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던 걸로 생각된다. 그가 소련 최초로 인민대표회의라는 민주적 자유경쟁 체제를 도입하면서 외쳤던 "모든 결정은 소비에트로"라는 선언은 사실 70년전 볼셰비키혁명의 핵심이념이었다. 프롤레타리아 해방이라는 그 숭고한 기치는 오로지 소련 인민을 향한 가치였다. 1980년대 후반, 당시 소련체제하의 공산주의는 이미 변질될대로 바뀐 괴물이 된 상태였다. 고르바초프는 다름아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인민을 위하는 진정한 후계자서의 면모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그가 스탈린을 공개석상에 비판하고 레닌 연구에 목메달렸던 이유도 스탈린 이후의 공산주의는 진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던 걸로 보인다.

레이건대통령과 제네바 합의를 통해 핵무기 위험을 감소시키고, UN연설을 통해 158개국에 내세운 것은 공산주의 이념포기가 아니라 진정한 볼셰비키즘으로의 회귀를 의미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기존 공산주의 시스템에 위협이됨에도 민주적 절차를 도입하고 글라스노스트를 시행한 것은 그것이 인민을 위해선 필요한 일이었기에 도입한 것미다. 공산당이 비밀유지, 폐쇄화, 관료주의화하고 크렘린을 통해 위장아우라를 만들어내고 있을 때 그는 더이상 대외팽창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무력사용을 꾸준히 반대하고 그것이 인민의 평화를 위한 길이라 여겼다. 발트3국이 독립을 주장하고 나섰을 때 책사겪인 야코블레프를 리투아니아에 파견시켜 진상조사 한 후 그들의 독립주장이 페레스트로이카에 부합한다고 주장해 무력통제를 반대했다. 그리고 독재폭력를 일삼는 루마니아 차우셰스크 총통에 인민과 유럽을 고립시키고 있다고 이야기하거나, 극도로 보수적인 동독지도부에 설교하기도 하였으며, 장차 독일 통일은 거스를수 없는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리투아니아에서 무력이 사용되어 그가 우경화한 것은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을때도 결엔 탄압기관에 제동을 걸어 인민을 위한 결정을 내렸다.






고르바초프의 이런 개혁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냈어야 할 시기에도 모호함을 유지해 인기를 잃은 것은 그 스스로의 책임일 것이다. 천안문사태나 아르메니아 지진 등을 거치며 옐친이나 사하로프에게 시대정신의 선두주자라는 타이틀이 입혀질 때 고르바초프는 반대로 구시대의 공산주의자라는 이미지가 굳혀져 갔다. 소련제국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미국대통령 보다 늦게 알게되는 장면은 온 세기를 뒤흔든 제국의 서기장에게 이보다 더 큰 굴욕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고르바초프는 끝까지 체제를 옹호한 공산주의자임에 분명하다. 때로는 자신이 거머쥔 권좌에 집착하기도 했으며 체제안에서 개혁을 통해 인민의 행복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 오판했다. 하지만 그가 취한 페레스트로이카의 최중심엔 인민이 있고 그는 인민과의 갈등상황에서 번번히 무력 사용을 자제했다. 단순한 가정이지만 그에게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스스로 공산주의의 한계를 인정하고 내려놓는 순간이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실패한 지도자임을 받아들인다하더라도 그가 글라스노스트에 잡아먹혔다기보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취한 선택이면서, 단순히 시대변화로서 일어날 일을 '허용'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앞당겼다고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소련제국이 단숨에 먼지가 되는 벨라베슈스카야숲 회의에서 배제되는 굴욕의 장면 이후에 무력으로 대응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대의기구가 내린 결정을 존중할 겁니다. 국민 스스로 결정하게 합시다"라고 말했다. 그가 지도자로서 보인 모습은 수없이 많은 정치적 수사로 점철돼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앞에선 늘 인민을 위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했다.

소련을 해체시킨 고르바초프를 위해 그가 단순히 무시대착오적이고 수동적인 실패자가 아닌 스탈린이후로 사라졌던 진정한 볼셰비즘을 구현하려한 진정한 사회주의자 정도는 되었다고 변명은 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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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지방자치를 비추다
정영오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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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마음에서 지방자치의 길을 찾다.] _목민심서, 지방자치를 비추다_정영오


목민심서는 그 이름에서 알 수있듯 목민관의 마음가짐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다산을 대표하는 역작의 하나임에도 이상하게 쉬이 읽을 마음이 생기지는 않는 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을 수령이 왕명을 받들어 백성을 통치하는 행위가 지극히 봉건사회적 성격만을 가지리라 짐작했던 게 그 이유가 아닌가 싶다. 그것이 민주주의 시대에서의 통치 또는 법치와는 전혀다르거나, 상충되는 것이라 여긴 것 같다. 하지만 오해하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목민심서를 바탕으로 한 이 책[목민심서, 지방자치를 비추다]이 원서의 진면목에 독자가 한 층 가까이 가닿을 수 있는데 충실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다산을 실학자 또는 실학의 선두주자라고 일컫지만 그렇다고하여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가 아니라거나 정약용이 예학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목민심서에서도 수령의 임무 또는 역할에 대해 여러 번 강조, 반복되는데 가장 기본은 역시 수령 자신의 검소함과 청렴함이다. 다산은 유교 경전인 대학에 등장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제일 근본인 '수신'의 기치를 수령이 지녀야할 예치의 가장 근본으로서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목민심서와 오늘날의 통치 (지방자치)의 연관성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데, 다산의 이야기와 현재의 지방자치단체(장)에게 필요한 역할과 덕목으로 적용시켜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다. 제1부는 '부임'에서 다산은 수령의 부임행장(의복, 말안장)에서부터 검소해야 목민함에 힘쓸 수있다고 강조하며, 저자는 지방자치단체장의 공용차량, 공용재산(사택) 규정의 허술함을 이용하거나 허용범위를 넘어서 낭비되는 일을 지적하고 있다. 봉건국가와 민주국가의 차이가 천지차임에도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을 행함에 있어 수행자가 취해야 할 옳음이란 체체의 차이와는 무관한 일이다.
이 책을 읽어나갈수록 목민심서는 오늘날의 통치, 지방자치 현실에 적용할만한 덕목이 풍부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수령과 아전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각종 폐단들은 지방자치단체장이 이념이나 정치가 아니라 실무와 현실의 이치에 밝아야 함을 느끼게 하며, 다산이 지적한 문졸권력의 폐단은 지난 정권의 '문고리 삼인방'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특히, 구휼이나 진대, 권분과 관련된 부분은 현재 전세계를 고통속에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를 대처하는 국가, 지방자치단체 입장에서 참고할 부분도 있어 보인다.
목민심서에서 강조되는 수신이나 예치가 지방자치의 현실에 걸맞는 이유는 나라와 국민을 위해 힘쓰는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가 국가와 공공의 이익과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에게 수신이니 예학이니 강조하는 것은 고리타분하게 들릴진 몰라도, 오늘날의 목민관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겐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부분일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은 목민심서에서 나타난 다산의 실학적 마인드가 잘 드러나고 있는 점이다. 행정이나 통치는 불가피하게 규율과 규제를 동반한다. 다산은 왕권국가라는 봉건시대, 유학의 시대를 살아갔음에도 현실의 이치에 맞지 않는 규율이나 제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 개선의지를 드러낸다. 병역의무, 권분, 송금 등의 사례에서 드러난 다산의 합리성과 공평성의 개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지극히 타당하다. 그것은 형식적으로, 글로서만 존재하던 "조선의 왕과 신하는 오로지 백성을 근본으로 한다"는 민본 통치의 이념을 다산은 진실로 품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 책이 다루는 목민심서는 본격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지방자치뿐 아니라 다산이 품고 있던 진정한 '민'의 의미와 중요성이 무엇인지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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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 내 감정의 주인이 되는 자기결정권 연습
정정엽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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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 나의 정리


[타인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의 자유를 위해.]

 

여태 모르고 살았다. 내 마음이 내 것인지조차.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생의 진리처럼 몸으로 새기고, 지식으로 체화하면서 혹여 다른 사람에게 밋보이지 않을까 생각했고, 전전긍긍했다. 그 마음은 나와 함께 성장해 여전히 나를 불안하게 한다.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라는 제목이, 내겐 내가 없다고 느끼며 살아온 나날에 대한 한줄기 희망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이 책은 자신이, 자신의 마음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을 위로한다. 책에서 자기감(sense of self)이란 말로 설명되는 이 말은 자기를 감각하는 능력을 말한다.
감정을 억누르는데 습관이 된 사람들이나 내것이 없는 상태에서 타인의 선호로 가득 채운 삶을 사는 사람은 자기가 무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또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감'이 전혀 없다. 자존감, 자존심을 이야기하기 앞서 자기를 잘 알고 있고,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느냐는 이 물음은 부정할 틈도 없이 나를 무장해제시켰다.

자기감이 없는 사람의 특징은 늘 주변상황에 흔들린다.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감정을 드러내고 행동하지 못하기에 타인과 상황의 눈치만 살핀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상황에 따라 행동이 다른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는데, 그 결과 자신 또한 타인을 미워하거나 피하게 된다. 타인과 사회를 배려하거나 순응하기 위해 자신을 감춘 것이 자신을 억누르고 관계를 악화시킨다. 저자는 자기감이 약한 사람이 가지는 '투사'에 대해 이야기 한다. 투사는 다른 사람에게 죄의식, 열등감, 공격성과 같은 감정을 돌림으로써 자신의 속내를 부정하는 방어기제를 말한다. 조직에서의 입지를 우려해 법인카드 사용에 눈치를 보는 사람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사람의 법인카드 사용까지 못마땅해 한다. 사실 법인카드 사용이 회사 규정에 어긋난게 아니면 관심 가질 필요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내 감정을 억누른 행동은 자신처럼 살지 않는 타인을 미워하게 만든다. 그제서야 내가 미워한 사람의 미움은 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내 마음의 동요를 얼마나 많이 타인의 탓으로 돌렸단 말인가.

내마음을 흔드는 건 결국 내 자신의 마음 때문이다. 저자는 자기감과 자기결정권을 지니기 위해 소소한 의사결정 부터 스스로 해 볼 것을 말한다. 음식메뉴를 선택하기 위해 타인에게 의견을 여쭈면 '아무거나'라는 말로 선택의 상황을 회피하는 경우를 접한다. 생각해보면 아무거나라고 말한 사람이 모든 음식을 좋아할리는 만무하다.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드러내는 것도 작지만 큰 의사결정이자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있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라야 감정이 상하는 상황에서 용기있고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나 라는 것을 아는 방법은 자기감을 가짐으로써, 관계속에서의 자유를 얻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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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이영채.한홍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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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우익근대사 완전정복_이영채, 한홍구





오래보아도 미운 상대와의 비극은 계속 봐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지. 도대체 왜! 작년 7월경, 일본이 한국으로의 불산 등의 수출에 대해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할 거란 소식이 들려왔을 때,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본"이 모든 것의 최우선이라 할 정도로 신성시되는 21세기 물질사회에서, 되려 생산자가 물건을 안팔겠다고 하는 신기한? 모습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사실상 판매를 거부한 생뚱한 상황이었다. 경제학에서 시장의 수요와 공급은 주로 가격의 변수이다. 주어진 가격하에서 지불가능한 최대가격과 공급가능한 최소가격이 만나 거래가 형성되어야 하지만 이런 원칙과 믿음이 일순간에 무너졌다. 일본이 "너네한텐 안팔어"라고 으름장 놓는 모습이 너무나 당당해서, "우리가 무슨 진상 손님이라도 되는 건가?"싶은 마음이 들어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때가 "일본의 이러한 비이성적 행동의 근원은 무엇일까?"하는 의문이 일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한일우익근대사 완전정복]은 이러한 일본의 '경제보복' 이란 표면 뒤의 뒤엉킨 과거사와 이를 주도한 우익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일본 아니 정확히는 일본 우익이 이끌어온 현재 일본의 상황과 내부 논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 과정은 사실 우리의 민족적 분노를 끓어 오르게 하는 일들을 다시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일기본 협약, 위안부 강제징용, 야스쿠니 참배를 두고 일본이 보이는 시각은 우리와는 너무나 극명한 온도차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들을 서술함에 있어 이 책의 특징이랄 건 바로 '이성적 차분함'이다. 반일감정과 분노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겠다는 태도 같은게 엿보인다. 사실 일본과의 과거사를 다루는 글의 태도로는 상당히 낯선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 중간에 '일본인은 평화주의자다' '일본인 입장에선 역사 피로감도 그럴 법 하다'와 같은 내용을 접할 땐 알수 없는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전후 맥락과 전체적인 내용을 따져보면 이상할 게 없는 내용임에도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저자의 이러한 현실인식과 태도는 일본 우익이 행해왔던 과거부정과 현실왜곡을 폭로하고 더욱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덤덤히 역사의 진실과 마주해보면 일본 우익의 주장이 터무늬 없고 근거없음이 더욱 명확해 진다. 오만함과 이중성이란 본질은 서술방법이나 태도와는 전혀 무관한 법이다.








이 책에서 또 하나 비중있게 다뤄지는 부분은 한국의 우익이다. 평활르 위협하는 악의 축?인 일본의 우익과 병렬로 놓을 만큼 특별할 게 있을까 싶은 마음이었지만 사실 특별했다. 생각보다 더.

한국의 우익이 가치와 사상적으로 쌍둥이 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일본의 우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어서다. 저자의 표현으로 친일이 되는 경우가 크게 두 가지 경향성을 지니는데 하나는 신념이 이익이 되는 경우이고 나머지는 이익이 신념이 되는 경로다. 구한말의 친일인사로 볼 때 전자는 윤치호, 이광수 같은 사람이고, 후자는 송병준 같은 인물에 해당된다. 일본을 따른 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저자는 두 갈래의 친일을 분명히 구분한다. 예를들어 갑신정변을 주도한 인물들은 분명히 친일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좀 다르게 볼 것을 이야기 한다. 갑신정변 이전의 일본은 식민지배 야욕을 드러내기 이전이었고, 비록 그들의 행동은 친일이었으며, 그 방식은 결코 옹호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송병준과 같은 친일과는 다르게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저자가 친일의 층위를 구분하는 이유는 당시의 현실 여건을 고려하고 맥락과 의도를 정확히 보기 위해서이다. 박정희는 물리적인 친일행위랄 것이 없고 특히 1945년 이전의 시기는 더더욱 특별할 것은 없지만 '쇼와 유신' 같은 일본의 우익기치를 정통으로 공유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 오늘날의 한국의 우익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친일의 개념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다. 그렇게 지나간 일이되어 더이상 할 수도, 존재하지도 않는 개념이라 여긴다. 하지만 친일은 특정시기에 머무른 고정적인 것도, 절대악이라 할만한 무조건 적인 개념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일본의 우익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 한국의 우익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존재가 한일관계와 과거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앞으로는 어떠할까? 우리의 생각보다 더 깊게 생각해보야 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최인접국과의 평화공존이란 측면에서 현재 일본이 보내는 위험 신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아베 정부의 뚜렷한 전전의 군국주의 지향과 그를 지지하는 국민을 볼 때, 그 신호는 여기서 그치지 않을뿐더러 불행히도 그 강도마저 점점 켜져 갈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속해 있는동아시아의 평화체제가 지키기위해 일본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말하지만 쉬운 일은 아닌 것 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좌절할 필욘 없다.


최소한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일본의 우익이 자신들의 패배감, 무력감을 과거의 군국주의적 영광을 통해 회복하려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방식으로의 회귀는 그 어떤 정당성도 당위성도 갖추고 있지 않기에 국제적 이해나 명분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이 현실을 온국민이 인식하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 된다.

미워서 아주 싫은 상대를 계속 봐야 한다면, 그래야만 한다면 상대를 이해하려고 너무 애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상대의 의중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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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 인공지능을 만든 생각들의 역사와 철학 Editorial Science : 모두를 위한 과학 2
잭 코플랜드 지음, 박영대 옮김, 김재인 감수 / 에디토리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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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기[생각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곧 마음은 아니다. ]_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곧 마음은 아니다. ]​



모를 뻔 했다. 이 책이 1993년에 쓰여진 책이란 사실을. 감수의 말이나 책 중간 몇몇 저작 당시 시점에 대한 내용을 지나치듯 읽었다면 말이다.

그건 컴퓨터 및 인공지능 분야에 대해 문외한이어서지만, 그만큼 오늘날이 인공지능에 대해 쉽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대이기 때문일 터이다.

인공지능이란 용어나 그것이 보편화 된 미래에 대해 단편적인 이미지만 가진 나에게도 이 책은 꽤나 흥미로웠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30년 전 시점임에도 오늘날 우리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핵심을 찌르며 아주 묵직하게.



"컴퓨터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이러한 질문은 오래전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계산기로부터 시작 된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의 마음을 구현해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엔 오래되고도 근원적인 욕망이 담겨 있다. 인간의 마음을 알고 싶은 인간의 마음. 그것이 사랑이든, 지배든, 정치든 그 이유는 상관없는 그 마음.



이 책의 저자 잭코플랜드는 지금보다 인공지능 기술 논의가 활발지 않았던 90년대 초 시점에서 그 근본적인 물음을 끄집어 내고 있었다. 책은 인공지능의 기술적 측면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심리적, 철학적 면면에서 심도있게 접근 한다. 이러한 접근은 책이 무려 30년전 저작이라 생각하지 못한 이유와도 연결되는데, 인공지능 논의가 활발해진 오늘날의 쟁점과도 일치하기 때문이지 싶다.



저자는 인공지능의 두가지 큰 갈래. 하나는 인공지능의 인간화(마음탐구) 또 하나는 편의 제공 목적의 인공지능 기술 고도화를 언급하는데, 이러한 흐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016년 바둑 고수 이세돌 구단과 구글의 딥마인드인 알파고의 대국이 전세계의 이목을 한 데 모은 이유는 컴퓨터의 단순한 알고리즘으로는 파악할 수 조차 없다고 여긴 인간의 마음과 그것을 대변하듯 복잡한 수 싸움이 집약된 바둑영역에서 기계가 인간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그 이전의 인공지능과의 체스 대결이 다뤄지고 있다. 1992년 시점에서는 인공지능이 체스를 정복하지 못한 상태로 나온다. 하지만 몇년 후인 1997년 기계는 결국 체스 챔피언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된다. 이와 같은 사례를 통해 사람들은 과연 인공지능이 인간의 인지구조를 밝혀내고 실현시킬 수 있을지에 큰 관심을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인공지능분야의 또하나의 갈래인 기술활용 측면은 산업용 드론이나 재난용 로봇 기술등으로 실현되고 있으며 그 중요성과 필요성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세돌 구단과 알파고 대국으로 돌아가서 이 대결이 세기의 대결이 된 것은 사실 기계가 인간을 이겼다는 '결과'에만 있지 않다. 사람들이 진짜 열광한 이유는 이세돌 구단이 전체 게임에서는 졌지만 한 경기만큼은 이겼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지고도 작은 전투 승리에 열광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는 인간 마음 탐구에 있어 현재 인공지능의 수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바둑마저 기계가 사람을 이겼지만, 하지만 그것이 곧 사람 마음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환호하는 것이다. 바둑에서 기계앞에 인간의 무력함을 확인했지만 기계가 인간이 아님도 동시에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30년 가까이 전에 쓰여진 이 책이 지닌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샘, 일라이자 등과 같은 인공지능 컴퓨터가 수행하는 능력이 인간의 사고과정으로 나온 것과 동일하다면 기계는 '생각'할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그런 의미에서 알파고 대국은 인공지능의 딥마인드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기계가 인간 마음을 실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또 달리 보아야 한다라 말한다. 책에 언급된 인공지능 대화 실험에서 일라이자는 인간의 "생각할 수 있어요?"라는 질문에 거듭해서 버벅되는 모습을 보인다. 일라이자가 자연스럽지 못한 대답을 하는 것은 그 프로그램에 저장된 패턴이 일치하는 것을 대답으로만 내놓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과 그것에서 비롯된 대화는 일관되지도 항상 논리적이지도 않다. 인간의 '적응성', '독창성' 등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자유의지 앞에 인공지능은 한계가 분명하다. 이 책도 개념적으로 기계가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에 오류는 없지만, 인간의 인지과정은 현재 컴퓨터로는 구현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듯하다. 따라서 우리의 뇌가 컴퓨터 일 수는 있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는 다를 것이라 말한다. 인간의 뇌를 CPU에 비유한다고 해도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가 비분산적 속성인 것에 비해 인간의 뇌는 분산적이라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결함 발생시 우아하게 저하되는 인간의 뇌 앞에 단숨에 끊겨버리는 컴퓨터는 인간의 사고 기능을 구현했다기에는 한참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인공지능의 가능성만큼은 열어두고 있다. 책의 마지막에서 연결주의 네트워크 등으로 언급되는 병렬분산처리가 새로운 세기의 인지과학 분야의 큰 축이 될 거라 말하고 있다. 책이 나오고 30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저자의 예상이 인공지능 연구분야에 얼마나 들어 맞았는지 살펴보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의 근원적 욕구와 맞닿아 있고, 그것을 알기위한 인공지능 연구와 그로부터 파생 될 여러가지 인간심리적, 철학적 의미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인간의 '자유의지'라던지 '기계적 생각능력'도 지금보다 더욱 고도화된 수준에서는 인간의 주체성과 존재의 동일성 논란을 야기시킬 여지가 충분하다. 그 때에는 기계의 생각함이란 것이 형식상 오류 없음에서 내용상 자연스러움으로까지 더 나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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