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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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좌를 지키려는 욕심과 대국을 섬긴다는 명분이 만나는 곳에 백성의 자리는 없었다.>


"병자호란"하면 사람들은 아마도 "삼전도의 굴욕"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오랑캐의 침입을 피해 남한산성에서 저항하다 투항한 군주의 이야기를 우리는 "굴욕"으로 여기고 있다. 군주가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삼배구고두례는 당사자인 인조가 욕보인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당시 조선 더 나아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굴욕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병자호란의 "굴욕"에 역사적 사건을 대하는 특정한 관점이 담겨 있는 것이다. 오랑캐가 중국 중원으로의 패권을 넓혀가면서 우리나라를 침입한 사건. 야만에 가까운 미개한 족속에게 우리가 머리를 조아린 사건.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병자호란의 발발은 전적으로 후금(청)의 침입에 의한 것이며, 명나라를 아버지의 나라로 여기던 우리에게 북방 반유목 족속이 세운 "청"은 나라 같지도 않았을테니까. 강한 상대에게 침략 당한 약자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피해자로서 우리는 굴욕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병자호란을 바라보는 기본적 관점이다.

그런데 관점을 달리하면 이야기도 달라진다. <인조 1636-혼군의 전쟁, 병자호란>은 우리가 겪은 굴욕, 그리고 그 책임이 청나라 홍타이지 보다 인조(정권)에게 있다는 관점에서 기술한 책이다. 관점을 달리하는 것은 중요하다. 청나라의 침입으로만 설명하기엔 그 참상의 칼날이 너무나 깊었다. 2개월에 불과했던 병자호란의 전쟁기간은 우리 민족 내면을 할퀴는 비극이 되어 전쟁이 끝나고도 그 잔상이 길게 지속되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 역사를 과거의 것으로만 묵혀두어서는 안되는 이유다.



* 정말 대비할 수 없는 전쟁이었나?

책 <인조 1636>은 인조가 반정을 일으킨 배경에서부터 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소현세자의 청나라 볼모시기와 죽음까지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저자가 기술하는 내용과 삽입된 사료를 보고 있으면 "이 전쟁이 정말 피할 수 없는 것이었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인조와 서인 정권은 자신들의 권력유지와 안위에만 힘썼다. 반정으로 세운 정권인 만큼 그들에겐 명분이 대단히 중요했다. 그 중 광해군의 "배명금친"을 큰 명분으로 들었다. 임진왜란으로 태풍 앞의 촛불같았던 조선에게 원군을 파병한 명나라의 재조지은을, 즉 은혜를 저버렸다는 것이다.
조선의 상황으로 보면 중국의 패권국가인 명나라에 대한 사대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문제는 인조정권이 명나라를 섬기는 것을 자신들의 정권유지의 명분으로 앞세우며 마음으로 내면화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중국의 중원 패권국가가 바껴가는 상황에서도 그걸 모른 채하며 눈 감았다. 병자호란 이전 정묘호란을 겪었고 또 후금이 명을 상대로 세력을 넓혀가는 상황을 보면서도 어떠한 대비도 없었다. 그저 북방 반유목민족인 그들을 오랑캐라며 애써 무시했다. 눈 뜬 장님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하여 이념(숭명배금)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인조정권은 자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 다른 반정이 궐기될까 노심초사하며 두려워했다. 더군다나 집권 초기 "이괄의 난"을 겪고는 북방을 지키는 군사들을 훈련도 시키지 않았다. 인조정권은 이괄의 난 원인이 기찰의 미비에 있었다면서 공신 한 명당 약 100명 병사로 하여금 호위하도록 했다. 나라를 지킬 군사들을 훈련도 시키지 않은 채 자신들의 안위를 돌보는 것에만 치중했다.
그리하여 광해군 때 그나마 유지 되던 서북면을 지키는 군사체계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그러는 사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풍파는 우리 백성들이 다 떠앉았다. 그때마다 인조는 그저 "몽진" 할 뿐이었다. 공주로, 강화도로, 남한산성으로.

인조정권에게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는 사실은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정묘호란이 발발하고 적군이 의주를 함락하고 곧 안주에 이를 것이라는 치계가 조정에 당도하자 당황한 인조는 이렇게 말했다. "저들이 모문룡을 잡으러 온 것인가?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 조선을 침략하기 위하여 온 것인가?" 이 말은 인조정권이 말로만 숭명배금을 외쳤지. 후금에 대해 전혀 방비가 없음을 드러낸다. 1627년은 북방 반유목국가 후금이 명나라 정벌을 시작한지 10년 이상된 시점이다. 중국은 당나라 이후로는 거의 항상 중원을 차지한 나라가 패권을 차지했다. 그리고 몽골, 거란과 같은 유목국가는 빈약한 생산량을 극복하기 위해 농경지대인 중원을 빼앗아야만 하는 유인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김없이 한반도를 침략했다. 고려를 침략하여 3차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 그리고 수 십년간의 몽골과의 항쟁. 인조정권이 고려가 많은 북방국가의 침략에도 나라를 지켜낸 사례에서 배운 것이 세 차례의 "몽진" 뿐이라니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후금의 팔기군이 조선의 영토에 이미 들어왔음에도 저들이 왜 왔는지 모르는 인조정권이 얼마나 당시 주변국 정세에 어두웠는지 보여준다. 자신들의 안위에 눈이 멀어 군사들 조련도 시키지 않았음은 적군으로부터 안주성을 지키기 위해 투입된 평안병사 남이흥이 전세가 기울자, 장렬한 최후를 맞으면서 남긴 말에 절절히 드러난다. "장수가 되어 싸움터에서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할 게 없으나, 군사 조련을 한 번도 못 해보고 죽는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는다"

병자호란 때는 더하다. 남한산성에 피신하여 있는 왕을 지키려 오는 수많은 근왕군이 적과 싸우다 희생 될 때마저 인조정권의 현실인식은 처참하다. 청에서 왕자를 볼모로 잡을 왕자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인조정권은 가짜 왕자를 보내는 얕은 계략을 쓴다. 그러면서 "소 2마리, 돼지 3마리 , 술10통"을 청의 군영으로 보내 무마하려 한다. 청은 정묘호란 때 이미 겪어 조선의 가짜왕제 계략을 알고 있었으며, 선물로 가져 간것도 "굶주리는 너희 군신에게나 나누어주라"며 거절한다. 당시의 정세와 청의 침입 목적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과연 이런 얕은 수로 대응할 생각조차 불가했을 것이다. 더불어 이괄의난, 정묘호란의 곤욕을 거치고도 또 병자호란 직전 '절화교서 탈취사건' 등을 겪고도 말뿐인 항쟁(숭명배금) 이외에 어떠한 대책도 대비도 없었다. 이렇듯 전쟁을 발발하지 않았을 또는 전쟁을 잘 대비할 수 있었을 많은 기회 앞에서 인조정권은 그야말로 전체가 혼군(昏群)이라 하겠다.



* 병자호란, 또 다른 비극을 재생산하다.

역사가 증언하듯 인조는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의 굴욕을 겪었다. 조선의 국왕은 곧 국가를 의미하므로, 이는 곧 나라 전체의 굴욕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조의 굴욕은 비극축에도 끼기 힘든 정도라 생각한다. 병자호란으로 수 많은 살육과 비극이 양산되었고, 인조는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군사와 백성이 "어육"이 되어 처참히 죽어간 것은 물론이거니와, 청은 조선의 군민을, 그 수가 수십만에 달할 만큼 많은 사람을 피로인(포로)으로 잡아간다. 그들은 가족과 떨어져서, 때로는 가족 전체가 노예로 끌려 간다. 이렇게 끌려간 사람을 돈을 주고 데려오기도 했는데 이를 속환이라고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돈 몇낭이면 데려 올 수 있던 가족을 인조정권의 반정공신들이 자신의 가족을 데려오려 값으로 1000냥, 심지어 1500냥까지 지급하면서 속환가격이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올라버렸다. 일반 백성들은 더 이상 속환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속환되어 수 년만에 고국을 밟은 사람들 중에 여자에게는 "환향녀"라 딱지가 붙고 오랑캐에게 끌려가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혼을 당하게 된다. 인조정권이 책임을 다하지 않아서 나라가 백성을 지키지 않아서 생긴 참상 앞에 우리 백성들은 그 고통을 스스로 짊어져야 했다. 그리고 그 꼬리표는 유령이 되어 400년이 지난 후에도 "화냥년"이라 불리며 이 시대의 공기를 여전히 떠돌고 있다.

병자호란의 비극은 왕세자인 소현세자도 피해가지 못했다.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 부부는 청의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간다.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독일인 선교사 "아담샬"과 교류하게 된다. 그는 천문과 역법에 조예가 깊었고, 소현세자는 그런 그와 잦은 교류를 하며 자연스럽게 서양과학문명에 관심을 가진다. 소현세자는 내부반란으로 무너지는 명나라의 마지막을 직접 목도하게 되고, 그렇게 볼모의 이유가 사라지자 청은 소현세자의 귀국을 허락한다. 때는 1644년 11월이었다. 세자의 귀국 길에는 아담 샬로 부터 받은 망원경, 성경 및 과학서적들이 가득 있었다. 그런데 오랜 볼모 생활 중 크고 작은 질병을 앓았던 세자는 귀국 후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게 되고 결국 사망한다. 소현세자의 죽음을 두고 '독살'과 같은 이야기도 세상을 떠돈다. 인조가 세자의 귀국을 달가워 하지 않았고 귀국 후에도 냉대로 일관한다. 그리고 세자의 사망 후 부인인 강빈과 아들들도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으면서 소현세자 가족은 처참히 무너진다. 독살의 진위를 떠나 병자호란으로 인한 볼모생활이 아니었다면 인조와 세자 부자간의 비극이 이러한 결말을 맞지는 않았을 것 이다.
더불어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서양과학문명에 관심이 많았던 소현세자가 인조의 왕위를 이었다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해보게 된다. 조신후기, 병자호란 시기 처럼 주변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해 우리는 서양열강의 야욕 앞에 또 다시 피할 수 없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어쩌면 우리가 무겁게 치뤄야 했던 고통을 조금은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소현세자 앞에 드리운 비극으로 잃은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조선의 입장 보면 참 안타까운 일이다.



* 혼군(昏君)을 섬기는 대가

조선왕조에서 임금에게 요구하는 도덕적 이상은 "덕(德)"이다. 하늘을 본받고 조상과 백성을 섬기는 것으로 덕치를 실현한다고 보았다. 이 때 왕이 백성을 섬긴다는 것의 실체적 의미는 자신을 왕으로 받들며 충성하는 백성에 대한 신체적 안전을 보장하는 일이다. 왕조국가에서 모든 강토와 백성이 국왕의 영향력 아래에 있음을 볼 때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반정으로 옹립한 인조정권은 늘 또 다른 왕위 찬탈 가능성에 불안해 했다. 그들은 결국 나라와 백성의 안녕 보다도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가장 앞자리에 두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반정의 가장 강력한 명분이었던 "숭명배금"을 목놓아라 울부짖었다. 그렇게 외치기만하면 하늘이 알아서 덕치를 이뤄주리라 여겼던 걸까. 그곳어디에도 우리 백성의 자리는 없었다. 그렇게 인조가 떠넘긴 "불안"의 대가는 비극이 되어 우리 백성들이 치루고야 말았다.


<인조 1636> 이 책은 병자호란을 청의 침입으로 발발한 전쟁이라는 1차적 관점에서 규정하기보다 전쟁의 배경과 진행경과, 그리고 전쟁 이후의 기록을 면밀히 분석하여 밝히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인조정권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들을 드러낸다.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해석(*객관적 자료에 기반하여)해 보는 것은 역사에서 무엇이 의미있고 중요한지 스스로 고민하게 한다는 점에서 꼭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역사는 죽어있는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의 현실문제에 조응하는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역사는 얼마든지 현실에 적합한 방편이 될 수 있음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병자호란과 인조정권의 연대기를 다뤄 독자에게 한층 깊고 다각적인 정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

#인조1636리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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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가는 길 1 친정 가는 길 1
정용연 지음 / 비아북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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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가는 길 1 _정용연

"화전길은 버금이고 근친길이 으뜸이랴! "
봄꽃이 세상에 수놓은 싱그러움이 아무리 좋다한들 친정가는 길에 비할까. 조선의 시집간 여인들은 일년중 하루의 말미를 얻어 '반보기'를 한다. 친정과 중간 지점에서 엄마를 만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봐야 반나절 남짓한 이시간보다 여인들이 항상 꿈꾸는 것은 친정으로 가는 '근친'이다.
친정가는 길은 두 주인공 중 하나인 '송심'이 시집간지 6년만에 얻은 근친으로 시작한다. 겨우 닷새의 말미를 얻었다. 친정에 온 송심은 날아갈듯 편하지만 이내 마음이 불편해진다. 친정에서 고생하는 동서를 보니 시집에 있는 자신을 보는 것 같다. 그 거울같은 모습에 송심은 이내 팔을 걷어부친다.

어느날 송심은 시어머니가 건내준 진서(한자)를 보고도 읽지 못한다. 이는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내와 관련된 질문엔 막힘이 없다. 여자라는 이유로 배움에 기회조차 없었지만 생활에 있어서는 이보다 현명한 사람일 수 없다. 얼마 후 송심은 동서를 맞이하게 된다. 새로 시집에 올 동서는 진서를 읽고 쓸 줄 안다고 한다. 이상하게 경계심과 시기심을 느낀다. 하지만 이내 이 책의 두주인공은 함께 협력하고 같이 성장하는 관계가 된다. 송심의 동서 숙영은 당차고 행동력이 있다. 그러면서도 시집의 가부장적 위계질서 아래 놓인 형님 은송을 존중한다. 그렇게 둘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연대한다. 그 질서아래 여성은 차별받는 존재다. 시집을 간 순간부터 자신의 이름은 지워지고 아내이자, 며느리이자, 엄마로서 해야하는 의무만 부여받는다. 여성으로서의 존재가치는 삭제된다.

이 책은 만화로 구성돼있어 두 주인공이 놓인 이시대 여성의 삶이 생생히 전달된다. 어릴 적 할머니를 통해 어렴풋이 들었던 시대의 억압을 품은 용어, 이야기들이 이 만화를 통해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억압받은 여성들의 삶이 내가 짐작했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겠구나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이 책이 어느 정도 예상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 할 수 있다. 책의 초중반을 읽어나가며 느낀 분위기는 고요함이란 말이 적합할듯하다. 하지만 중반이후부턴 색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전환되고 박진감이 더해지는 건 저자가 두 주인공의 캐릭터를 소외와 차별받는 존재로만 가둬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숙영이 역병으로 남편을 잃고 나서부턴 이야기가 급변한다. 이시대, 남편을 먼저떠나보낸 여인들의 숙명은 수절과부였다. 숙영은 시집온지 네번째해 친정으로 근친을 가는데 그길로 돌아오지 않는다. 사내노비와 바람나 떠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숙영은 수절과부의 운명을 거부했다. 송심의 남편은 추노를 동반해 숙영을 찾아 떠나는데, 그길로 남편 경용도 소식이 두절된다. 10개월이 지나자 송심이 남편과 동서를 찾아 직접 길을 나선다. 그들을 찾아 서북 지역으로 가면서 이야기는 종잡을 수는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1부는 이즈음에서 마무리된다.

저자는 두 주인공을 여자가 아니라 운명의 개척자이자 역사의 중심에 놓였던 사람으로 대한다. 2부는 차별의 땅 서북지역에서의 이야기가 전개된다고 한다. 2부가 기대되는 건 이 만화가 홍경래의 난을 역사적 배경으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별의 땅, 소외된 사람들. 그 속의 은송심과 함숙영. 여인, 아녀자가 아니라 세글자 온전히 이름을 가진 주체로서 차별의 격랑속을 헤쳐갈 것이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엄연히 존재했던 그 이야기가 무엇보다 귀하고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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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유물과 유적으로 매 순간 다시 쓰는 다이나믹 한국 고대사 서가명강 시리즈 12
권오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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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_권오영

역사는 항상 놀라움을 동반한다. 절대적 사실이라 믿었던 역사가 반전의 얼굴을 한 채 새로운 진실로 대체되는 순간은 짜릿하다. 확신에 차있었던 믿음을 허물고 새로운 역사에 진실이란 확실성을 부여하는 것은 대개 그것이 기록이란 '형태'로 다가오기 때문이어서다. 고대사를 기준으로 본다면 천년이상의 세월의 벽을 뚫고 내려오는 기록은 그 어떤 것도 깨기 힘든 강력한 진실을 부여한다. 그 만큼 우리은 기록사에 집중한다. 그래서 고대사연구의 기본원칙은 객관적 자료에 기초한 합리적 추론이란 말도 이것으로써 성립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저자의 문제인식은 이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지금까지 객관적자료에만 편중된 고대사 연구방식은 되려 그 연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우선 이것은 대중적인 인식 관점에서 전혀 매력적이지 못하다. 고대사연구에서 중심이되는 시기와 주제는 6-7세기 그것도 정치사에 국한된다. 기록이란 객관적 자료로도 확인하기 힘든 생활사와 문화사는 어쩔수 없다는 현실여건과 핑계? 사이에서 그렇게 소외되어왔다. 언제부터인지 자연스레 역사학자들도 무관심한 영역이 되었다고 본다.
또한 우리가 귀중한 토대로 삼는 삼국시대 기록자료 중하나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사실 그 자체로 후행적이다. 삼국시대가 아닌 약 700여년 후인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서이다. 그리고 문헌자료라 해서 절대적이지도 않다. 우리가 접하는 상당의 문헌자료는 왜곡되어 있기도 하다.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또는 기타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입맛대로 해석하고 편집된 자료또한 문헌자료가 큰 비중을 차지 한다.
저자는 기존의 연구방식과 관점을 고수하는 것은 미래적 역사연구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고 본다. 이미 최신의 역사연구흐름 반영하여 성과를 내고 있는 집단은 기성의 관점을 고수한 역사학자가 아니라 진취적이고 열린 태도를 견지한 젊은 고고학자라 고백한다. 이 지점에서 기성 역사학자이기도 한 저자 스스로에 대한 성찰적 태도도 엿보인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쓰여진 기록아니라 실제하는 흔적이다. 책에서 저자가 가장 많이 언급하는 인골이다. 무관심한 역사학자에겐 황량히 남은 뼛조각일뿐이겠지만, 진취적인 고고학자에게는 역사라는 수사에 있어 과학적 단서가 되어준다. 인골이 직접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별, 연령, 영양상태, 질병, 습관 등의 정보는 그 자체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그것에 지역, 상황, 인골의 수, 매장된 모습 등의 정보와 결합 될 경우 역사적 자료가 부족한 인류의 생활사와 문화사에 우리가 예상한 수준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대표적으로 순장 문화와 관련하여 과학적 인골 분석을 통해 순장 당한 사람이 노예가 아니라 영양상태가 풍부하고 균형잡힌 사람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골이 역사를 반전시키고 진실을 드러내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고고학적 단서인 인골, 고분, 환호, 무덤, 유물 등은 흘러버린 세월이 감춘, 그렇지만 분명한 역사적 진실을 가득 머금고 있다. 그 진실에 다가가기위해서는 학문을 초월한 융복합적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역사학자들의 태도와 관점 전환이 필수적이다.
백제의 수도인 하남위례성이 어디인가하는 논쟁은 천년이나 지속되었다. 풍납토성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백제 위례성 수도가 풍납토성으로 밝혀진 반전과 진실은 발로 뛴 젋은 고고학자의 공이 가장 컸다. 그리고 한국의 고대사회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아시아 세력과 교류관계였다는 점, 그리고 고조선의 대외관계가 '한'만이 아니라 한과 대적하여 흉노와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 등은 앞으로의 역사연구방향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일민족의 옷을 벗고 다문화시대로! 동쪽의 고요한 은자의나라, 순수한 단일민족, 우리의 교섭상대는 중국일본 뿐이었다는 프레임을 고집하지 않은 것에서 우리 역사는 진실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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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 20세기를 뒤흔든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6개월 마이클 돕스의 냉전 3부작
마이클 돕스 지음, 홍희범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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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발자취_예고된 갈등> 1945_마이클 돕스










냉전의 발자취: 예고된 갈등





마이클돕스의 3부작은 냉전의 발자취를 찾는 여정이다. 그중에서도 1945는 냉전의 첫발자국과도 같다. 보통 모든 첫발자국은 뚜렷히 남는다. 그 어떤 연결들도 시작점은 분명히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다른 발자취의 연결고리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연결의 시작점이자 단절점.

하지만 냉전에는 그 첫발자국이 없다. 보다 정확히는 첫발자국이라 주장?하는 발자취들만 여럿있을뿐이다. 1945를 꺼내든 것은 1962와 1991을 통해 냉전의 절정과 해소를 맛보았음에도 그 시작인 발발에 대해선 충분한 만족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45가 마이클돕스를 통해 그려낼 냉전의 시작이 궁금했다.





다소 싱거운 결말인지 모르지만 결론적으로 냉전의 시작이라 꼬집어 부를만한 단일한 사건은 없었다. 다만, 1945년은 2차세계대전 종식과 미,소간의 대립이 표면화된 시기로 1945에서는 냉전의 초기형성이라 부를만한 일들을 면밀히 조명하고 있었다. 그 중심엔 얄타회담에서 포츠담회담으로까지 이어지는 6개월이 있다. 1945가 들려주는 역사는 단일한 사건이라기보단 이야기에 가깝고, 이야기라기 보단, 역사의 시대성을 관통하는 생생한 인터뷰라 보고 싶다.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사건일수록 복합적인 요인이 많이 작용한다. 그런 사건에 단일하고 고정된 인식만이 존재하는 것이 어쩌면 더욱 이상한 일일지 모른다. 냉전이란 이슈에는 이념적, 정치적, 국가주의적, 제국주의적 요소가 다 버무려져있다. 마이클돕스가 역사의 진실에 다가가는 방법은 객관적 자료를 다층위적으로 확보하여 맥락과 배경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가 활용하는 것은 관련 인터뷰나 회고록, 기밀문서 등이 주를 이루는데, 만일 그것이 어떤 '발언'이라면 이 자료들이 단편적인 발언과 역사인식에 맥락이라는 생명을 불어 넣게 된다. 예를들어 얄타나 포츠담회담에서 영국총리인 처칠이 대제국의 원수인 스탈린을 탐탁치 않아 하는 면모를 여러번 보이는데 이는 단순히 스탈린이란 인물에 대한 개인적 평가가 아니라 그속에는 미,소 양국에 비해 미미한 영향력을 지닌 영국의 수상이란 위치, 제국주의적 세력전쟁에 있어 유럽대륙 동쪽의 강력한 상대 소련에 대한 두려움, 상반된 이념이 만들어낸 상대에 대한 몰이해 등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결과물에 가깝다. 처칠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심경, 부하에게 이야기한 내용, 회고록 등을 통해 그의 말에 역사적, 정치적 맥락이 입혀지고 우리는 이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보다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얻는다.







1945년의 이 6개월은 향후 45년이상 계속되는 냉전의 시초에 해당한다. 마이클돕스의 1945를 통해 이 중대한 6개월을 보다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ㅅ시만, 애초에 독자로 기대한 냉전의 촉발점을 발견하긴 어려웠다. 오히려 냉전의 개념에 대한 혼란? 또는 그 근본속성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이 커져나갔다.

얄타회담에 참여한 강대국 3국가의 세 거두 루스벨트, 스탈린, 처칠은 6개월 뒤 포츠담회담에선 스탈린만 회담 끝까지 남게 된다. 두 번의 회담은 2차서계대전을 종식시키고 세계의 평화적 통일? 을 위한 연합국의 구체적 협력행위였지만 결과적으론 불명확한 결론과 각자에게 유리한 방식의 해석만을 낳았다 . 분명 6개월사이에 세계정세는 변했고 연합국에게 승리는 확연히 가까워졌다. 초강대국 소련은 독일에 이어 일본과의 전쟁에도 참전을 하여 미국을 도울 계획이었고, 미국은 전례없는 원자 폭탄 실험에 성공하여 전쟁 종식과 연합국의 승리에 한발짝 더 다가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연합국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두나라 아니 세 초강대국의 냉전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결코 막을수 없는 일같이 느껴진다. 2차대전이 종식되기도 전에 새로운 전쟁을 대비한다는 느낌이랄까. 그들 모두에게서 '오늘의 아군도 내일의 적이다.'와 같은 마음가짐이 느껴졌다.

냉전을 너무 제국주의적 팽창 개념에 갖다 붙인거 같아 '이념'을 기준으로도 생각해보았다. 애초에 냉전을 이념전쟁으로 보는 게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라해도, 1945년과 향후의 냉전을 설명하기에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사실 미국과 소련양국이 추구하는 이념은 모두 초국가적인 이념이다. 어찌보면 두 체제 모두 근본개념상으로는 구성원을 위한 제도이다. 그러나 양국은 스스로 고수하는 이념에 반대되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았다. 늘 옳은 행동하는 것 처럼 포장했지만, 사실 그것은 '기만'인 경우가 많았다. 인민을 위한 일이라면서 고혈을 쥐어짜고 그들을 희생시켰다. 세계평화와 최소한의 도덕률이란 이름뒤엔 언제든 국익이란 이름으로 살육을 정당화 할 또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1945년 7월부터 17일간 이어진 포츠담회담에서 얄타회담의 루즈벨트와 처칠이 끝까지 함께했다면 미,소간의 냉전이 본격화 되는 걸 막을 수 있었을까?

루즈벨트의 자리를 이은 트루먼이 세계평화를 외치면서도 연합국이 아닌 미국만의 승전을 가져다 줄 신무기 원자폭탄 성공 소식에 보이던 기쁜 감정과 그 전쟁관성 앞에 무기력했던 건 그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라서 인 것은 아닐 것이다. 누가 됐든 당시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것이 제국주의의 얼굴을 가졌으면서도 이념이란 가면을 쓰고 힘자랑을 하는 두 패권국가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싶다. 냉전의 시작은 어찌보면 포츠담이나 얄타회보다도 이전, 양국이 속으로 적대시하면서도 서로의 필요에 의해 연합군이란 이름으로 할 때 부터 예견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두 개의 태양이란 있을 수 없는 땅따먹기 싸움의 속성이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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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이론의 모든 것 - 프랑크푸르트학파부터 지구화론까지
앤서니 엘리엇 지음, 김봉석.박치현 옮김 / 앨피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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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기) 현대사회이론의 모든 것_앤서니 엘리엇





<알고 쓰는 말, 모르고 쓰는 언어>



한동안 잊고 지냈다. 우리 모두가 사회속에 놓인 존재라는 사실을. 마음 먹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모두 내 자유라고만 느꼈다.

어른이 된 뒤로는 더욱 그랬다. 특히 말과 언어는 내 생각과 내 존재의 주체성을 직접적으로 표현해 주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라 여겼다.

"현대사회이론의 모든 것"에서 언어학의 구조주의 부분은 아주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동안 내가 사용하는 말이 나의 주체적 선택이라고만 여긴 순진한 착각에 커다란 한방을 얻어 맞은 느낌이 들었다.

언어학의 대명사 격인 소쉬르는 "언어와 대상세계의 관계는 관습적이라 주장" 한다. 이것은 언어가 그 대상과의 본질적 관계를 드러내는데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하여 구조화된다는 의미다. 언어는 독자적 체계라기 보다는 자의적이고 관습적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그렇다면 언어에 의해 구조화 되는 사회속의 개인들은 언어를 가지고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사물을 알게되고 사회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렇게보면 언어의 의미는 언어발화자의 마음속에 있는 의도적인 생각의 결과가 아닌게 된다.

소쉬르의 이러한 주장은 너무 강하게 느껴져 사실 거부감이 들었다.

언어의 기능을 '차이의 표시'에만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 언어를 한정적으로만 보고, 또 그 언어를 사용하는 개인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하여 이에 대한 반론이 뚜렷히 떠오르지도 않았다. 나는 내 생각과 감정을 언어 선택을 통해 주체적으로 표현한다고 생각했면서도, 언어와 그 대상과의 본질적 관계와 의미에 대해 고민해보지도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더불어 언어속에서 전이되는 사회의 관습화된 상징적질서가 그 자체로 은폐되어 있음을 고찰한 소쉬르의 언어학은 당연해 보이고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기존질서에 대한 문제제기와 반론을 만드는 계기가 되어준 측면에 의의가 있다고 느껴졌다.











<언어라는 거대한 구조 앞의 페미니즘>



소쉬르의 언어학은 구조주의적 사회의 단면을 비추고 그것을 사유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특히나 페미니즘이 제기하는 젠더억압과 남녀차별문제는 언어가 만들고 유지시키는 상징적 질서라는 구조의 문제성을 수면위로 이끌어 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정치적 페미니즘은 여러사회이론가들에 의해 그 당위성과 필요성이 주장되어왔다. 페미니스트 운동가들은 젠더억압의 원인에 대해 프로이트, 라캉의 이론이나 기타 정신분석학적 관점을 반영하여 설명하고 있다. 핵심원인에 대한 분석은 각자 다를 수 있지만 , 언어가 사회적 기호로서 자의적이고 관습적인 질서로서 억압을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데는 비교적 공통적인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남녀차별속에 존재하는 젠더억압에 대해 남성성과 여성성의 젠더 역할을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러운 성향으로 경험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사회와 문화에 의해서 심층에서 결정된 것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언어라는 기호적인 것을 엄마의 몸에다한 기억과 내밀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개념화했다. 이는 통상적으로 여성적인 것과 관련된다. 그녀는 모성이 상징적인 것의 기호화를 대표한다고 보았다.

줄리엣 미쳴은 프로이트, 라캉이론을 적용하여 엄마의 몸에 상상적인 일체감을 느끼던 아이는 사회적이고 성적인 차이의 상징적 질서속 으로 이행하는데 여기에 요구되는 것은 제3자인 아버지와 그 도구인 '언어'라고 이야기 한다. 양성 모두가 사용하는 언어가 특정 젠더가 특정 젠더를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현실을 이야기 한다 .

초도로우는 고전적민 프로이트이론의 가부장적 가정을 거부하면서 정신분석학의 대상관계이론, 그리고 핵심 젠더 정체성이론에 주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모성인데, 모성의 재생산에서 초도로우는 여성만의 엄마 역할이 젠더억압으로 이끈다고 주장한다

주디스 버틀러의 중심테마는 언어 또는 담론으로 특히 기호는 언제나 차이의 문제라는 포스트구조주의의 통찰이다. 그녀는 젠더들이 행하는 사회적 수행은 언제나 지배적인 여성성과 남성성의 문화적 재현을 복제하고 모방한다는 것이다

젠더 정체성의 구성된 성격과 이를 수행하는 개인을 주체로 만드는 사회정치적 힘을 은폐한다. 이는 그 자체로 젠더란 것이 구조적 결정임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페미니스트 이론가, 운동가들이 언어라는 기호에 집중하는 이유는 언어가 기존의 상징적 질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고 있고, 그 질서는 젠더라는 이름의 억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언어가 불평등의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언어속에서 전이되는 사회의 질서가 지극히 안정적이고 당연해 보이는 것은 우리가 언어의 기능과 그 심연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지 않아서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때론 페미니즘이 항상 과하고 가족해체를 부추긴다고 잘못생각한 시기도 있었다. 젠더억압에 맞서는 일은 단순히 개인의 차원의 일이 아니다. 거대한 구조에 맞서는 일이다. 이미 질서화된 구조적 결정 앞에, 그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 모두의 힘으로서만 그것을 해결 할 수 있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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