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이영채.한홍구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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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우익근대사 완전정복_이영채, 한홍구





오래보아도 미운 상대와의 비극은 계속 봐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지. 도대체 왜! 작년 7월경, 일본이 한국으로의 불산 등의 수출에 대해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할 거란 소식이 들려왔을 때,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본"이 모든 것의 최우선이라 할 정도로 신성시되는 21세기 물질사회에서, 되려 생산자가 물건을 안팔겠다고 하는 신기한? 모습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사실상 판매를 거부한 생뚱한 상황이었다. 경제학에서 시장의 수요와 공급은 주로 가격의 변수이다. 주어진 가격하에서 지불가능한 최대가격과 공급가능한 최소가격이 만나 거래가 형성되어야 하지만 이런 원칙과 믿음이 일순간에 무너졌다. 일본이 "너네한텐 안팔어"라고 으름장 놓는 모습이 너무나 당당해서, "우리가 무슨 진상 손님이라도 되는 건가?"싶은 마음이 들어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때가 "일본의 이러한 비이성적 행동의 근원은 무엇일까?"하는 의문이 일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한일우익근대사 완전정복]은 이러한 일본의 '경제보복' 이란 표면 뒤의 뒤엉킨 과거사와 이를 주도한 우익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일본 아니 정확히는 일본 우익이 이끌어온 현재 일본의 상황과 내부 논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 과정은 사실 우리의 민족적 분노를 끓어 오르게 하는 일들을 다시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일기본 협약, 위안부 강제징용, 야스쿠니 참배를 두고 일본이 보이는 시각은 우리와는 너무나 극명한 온도차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들을 서술함에 있어 이 책의 특징이랄 건 바로 '이성적 차분함'이다. 반일감정과 분노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겠다는 태도 같은게 엿보인다. 사실 일본과의 과거사를 다루는 글의 태도로는 상당히 낯선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 중간에 '일본인은 평화주의자다' '일본인 입장에선 역사 피로감도 그럴 법 하다'와 같은 내용을 접할 땐 알수 없는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전후 맥락과 전체적인 내용을 따져보면 이상할 게 없는 내용임에도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저자의 이러한 현실인식과 태도는 일본 우익이 행해왔던 과거부정과 현실왜곡을 폭로하고 더욱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덤덤히 역사의 진실과 마주해보면 일본 우익의 주장이 터무늬 없고 근거없음이 더욱 명확해 진다. 오만함과 이중성이란 본질은 서술방법이나 태도와는 전혀 무관한 법이다.








이 책에서 또 하나 비중있게 다뤄지는 부분은 한국의 우익이다. 평활르 위협하는 악의 축?인 일본의 우익과 병렬로 놓을 만큼 특별할 게 있을까 싶은 마음이었지만 사실 특별했다. 생각보다 더.

한국의 우익이 가치와 사상적으로 쌍둥이 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일본의 우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어서다. 저자의 표현으로 친일이 되는 경우가 크게 두 가지 경향성을 지니는데 하나는 신념이 이익이 되는 경우이고 나머지는 이익이 신념이 되는 경로다. 구한말의 친일인사로 볼 때 전자는 윤치호, 이광수 같은 사람이고, 후자는 송병준 같은 인물에 해당된다. 일본을 따른 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저자는 두 갈래의 친일을 분명히 구분한다. 예를들어 갑신정변을 주도한 인물들은 분명히 친일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좀 다르게 볼 것을 이야기 한다. 갑신정변 이전의 일본은 식민지배 야욕을 드러내기 이전이었고, 비록 그들의 행동은 친일이었으며, 그 방식은 결코 옹호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송병준과 같은 친일과는 다르게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저자가 친일의 층위를 구분하는 이유는 당시의 현실 여건을 고려하고 맥락과 의도를 정확히 보기 위해서이다. 박정희는 물리적인 친일행위랄 것이 없고 특히 1945년 이전의 시기는 더더욱 특별할 것은 없지만 '쇼와 유신' 같은 일본의 우익기치를 정통으로 공유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 오늘날의 한국의 우익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친일의 개념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다. 그렇게 지나간 일이되어 더이상 할 수도, 존재하지도 않는 개념이라 여긴다. 하지만 친일은 특정시기에 머무른 고정적인 것도, 절대악이라 할만한 무조건 적인 개념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일본의 우익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 한국의 우익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존재가 한일관계와 과거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앞으로는 어떠할까? 우리의 생각보다 더 깊게 생각해보야 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최인접국과의 평화공존이란 측면에서 현재 일본이 보내는 위험 신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아베 정부의 뚜렷한 전전의 군국주의 지향과 그를 지지하는 국민을 볼 때, 그 신호는 여기서 그치지 않을뿐더러 불행히도 그 강도마저 점점 켜져 갈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속해 있는동아시아의 평화체제가 지키기위해 일본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말하지만 쉬운 일은 아닌 것 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좌절할 필욘 없다.


최소한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일본의 우익이 자신들의 패배감, 무력감을 과거의 군국주의적 영광을 통해 회복하려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방식으로의 회귀는 그 어떤 정당성도 당위성도 갖추고 있지 않기에 국제적 이해나 명분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이 현실을 온국민이 인식하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 된다.

미워서 아주 싫은 상대를 계속 봐야 한다면, 그래야만 한다면 상대를 이해하려고 너무 애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상대의 의중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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