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미덕의 공동체 - 일상을 구축하고 삶을 재건하는 우리들의 평범한 힘에 대하여
마이클 이그나티에프 지음, 박중서 옮김 / 원더박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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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후기)<우리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평범한 미덕 그리고 미래>평범한 미덕의 공동체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묻다>

우리가 '공동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는 흔치 않다. 공동체는 우리 두 눈에 보이는 것도, 애타게 찾아 헤맨 어떤 성취의 결과물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 우리 스스로는 오늘날을 살아내고 있다는 것 자체로 매순간 공동체의 일원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만나는 가족, 친구, 조직, 사회 등의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은 모두 공동체라는 틀속에서 형성되고 기반하고 있다.
이 책은 이렇듯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공동체로서의 정체성과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도록 묻는다.
"여러분의 공동체(나라)는 누구의/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사실 공동체는 당연한 것도 영원히 고정된 것도 아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이 필요한 시점이다.



<세계화는 민족간 평등과 경제적 결속의 확산 과정 ,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료는 전쟁뿐 아니라 그간 힘의 질서가 세계를 지배해 온 시대의 종언이기도 했다. 한동안 열강은 자본주의와 국민국가를 경제적, 정치적 모태로하여 땅따먹기하듯 경쟁적으로 민족이 민족을 침략하고, 삶의 터전과 물질절 토대를 빼앗는 행동을 일사았다. 이는 마치 '공동체(나라)의 주인은 힘있는 자의 것'이라 부르짖는 시대와 같았다. 그렇게 제국주의는 폭주하는 기관차였다. 하지만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시대의 폭주도 2차 세계대전과 함께 끝을 맞이하게 되고, 이후 자연스럽게 탈제국주의 및 탈식민지화가 진행되며 오늘날까지 민족간 '평등'이라는 규범을 전세계에 확산시켜왔다. 현대 사회는 힘 없는 약한 민족에게도 평등의 개념은 적용되고 있으며 그것은 전세계가 제국주의적 침략 논리를 더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보편적 세계윤리가 경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윤리의 규범화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와 경제적 결속의 세계화가 이룩해 온 성과라고 볼 수도 있다. 저자는 현대 사회를 규정하며 상징과도 같은 자유민주주의와 초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누리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물질적 풍요의 핵심이라 말하고 있다.



<21세기 공동체, 함께 살기와 나란히 살기 사이>

현대 민주주의는 특정한 세력이 힘을 장악하고 폭력을 가하는 독재로부터 대중을 해방시켜나가고 있다. 이러한 제도와 규범은 민족간의 침략과 갈등을 획기적으로 소거시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갈등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21세기 현대 사회는 내전과 같은 보다 지역적이고 민족내적인 갈등관계가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다.

이 책이 이야기하는 전세계 7개국의 도시 이야기는 그런 공동체들의 갈등과 화합에 대해 밀도있게 접근한다. 그중에서 잭슨하이츠, 로스앤젤레스, 리우데자네이루 등의 도시들이 드러내는 공동체의 정체성은 현대의 사회는 '다양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도시에는 국가, 인종, 문화를 초월한 다양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종교적, 민족적, 문화적 배경은 각양각색이다. 저자는 이들 도시들이 초다양성 사회를 잘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이러한 각양각색의 배경을 넘어서서 공동체가 사람들을 융화시키고 화합한 결과는 결코 아니라고 강조한다. 사실 그들은 함께 살기가 아닌 나란히 살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장소, 공간, 지역에서 같은 사회와 제도, 문화적 환경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들은 말그대로 공존하고 있을뿐이다. 이해와 협력이 아니라 각자의 이유로 그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서로의 목적아래에 각자가 살아갈 수 있게 서로를 허용하고 있는 게 보다 현실적인 모습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문화적, 종교적, 민족적 배경차는 위험으로 촉발될 잠재적 갈등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갈등이 표면화 되지 않는 것은 그 사회가 경찰업무, 행정, 정치 등을 법과 제도를 통해 공동체내 사람들이 '나란히 살기' '공존'할 수 있도록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형성된 가치관과 배경은 그에 따른 행동과 경험의 차이를 낳는다. 그리고 그 차이는 그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 경험을 한 사람을 본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발생시킨다. 저자는 인간의 이러한 모습이 이성을 통해 융화하고 협력하고 이해하는 모습보다 본질적이라고 보는 것 같다. 만약,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오늘날의 다양성 사회에서 다양한 모습과 생각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중요함 딱 한가지는 잘 조직된 법과 제도 그것이 전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도덕규범의 층위, 평범한 미덕 vs 보편적 인권>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평범한 미덕의 공동체'는 민주주의 사회의 법과 제도가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해치지 않는 상황이라면 공동체내에 자연스레 생성되어 존재하는 협력의 가치를 말한다. 신뢰, 친절, 관용, 정직, 절제 등의 미덕은 지역, 사회, 민족에게 운명공동체의 상황을 보다 낫게 만드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특히나 그러한 가치는 잔혹, 부패, 권력욕, 증오와 같은 평폄한 악덕이 심각히 자리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필수적이었다.
이렇듯 평범한 미덕은 나, 나의 가족, 친구 그리고 이웃 사이를 결속시키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미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21세기 세계각지에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갈등, 예를 들면 내전, 난민과 같은 보편적 인권 문제가 존재하며 놀랍게도 이러한 문제는 평범한 미덕과 상충하는 측면이 있다.
'민주주의의 진화는 인권과 함께 가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 기능은 분권과 상호견제이다. 민주주의는 권력을 독점하려는 소수의 독재자로부터 보호를 얻는 대신, 다수세력의 지배이자 그것의 옹호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 책에 언급되는 보스니아, 미얀마의 사례가 이러한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는 오랜 민족적, 종교적 분쟁이 혐오를 낳고 무력 충돌을 빚어왔다. 지금도 보스니아는 공존하지만 결코 함께 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미얀마는 난민 문제로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 미얀마의 민족구성은 135개에 달하며, 그중 탄압을 받고 있는 로힝야족(소수 무슬림계)은 국가라는 테두리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도 보호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배제와 억압에는 민족의 차이, 정치적 쟁점 외에 미얀마에서 90%를 차지하는 다수 종교인 불교의 소수종교인 이슬람교에 대한 탄압이 자리하고 있다. 미얀마에서의 로힝야족의 생존여건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난민 발생 또한 심각하다. 한 때 민주화의 상징과도 같았던 아웅산 수지가 로힝야족에 대한 버마민족의 탄압 앞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내 다수의 대중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이해와 소수가 아닌 다수를 선택한 결과물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 책이 제기하는 최초의 문제의식과 마주한다. 미얀마(공동체)의 주인은 누구인가? 보편적 인권(로힝야 난민)보다 평범한 미덕(민주주의하 다수 세력의 공동체)을 앞세우는 미얀마 국민들을 어떻게 바라 봐야 할까?
저자의 시각은 미덕이 지역적이고 민족적인 것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보는듯하다.
인권은 우리에게 위험에 처한 낯선이를 바라볼때 도덕적으로 변함없이 보편적이 되라고 명령하지만 평범한 미덕은 항상 자기 집에서 가까운 시민쪽으로 유도하도록 사람들을 본능적으로 이끈다고 말한다.
한 국가가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우선 공유한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건립유지 되고 있기에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자연적 우선권이 부여되었다고 믿는다.
우리는 각자의 피부, 각자의 역사, 각자의 인종, 성별 너머로 나아갈 수 없으며 이 모든 차이는 자부심과 수치, 지위와 권력의 원천이 된다고 말이다.
따라서 저자는 지역적 미덕에서 보편적인권으로의 도덕적 변화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그 변화는 현실적으로 매우 느리게 진행될 것이라 전망한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 것은 법과 제도가 잘 갖춰 사람들이 서로 신뢰할 수 있도록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다. 당장 함께 살기까진 아니라도 공존과 나란히 살기가 유지되도록 말이다. 두려움의 시대에서는 평범한 미덕 그리고 더 나아가 인권은 설자리가 없다. 이 가치들은 안전 없이는 결코 기능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사생활에서의 평범한 미덕은 신뢰할만한 공공제도에 의존하고 있고, 그 신뢰가 형성된 상태에서만이 도덕적 변화의 시도들이 활성화되고 자리 잡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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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는 삶
정소현 지음 / 창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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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기)품위있는 삶(품위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품위 있는 삶은 무엇인가?>​





품위 있는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사실 하루 하루를 살아내기도 버겁다고 느끼는 사람이 널린 시대에 내 삶에 품위까지 생각할 여력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소현 작가 소설집의 첫 타자인 [품위 있는 삶, 100세 보험]은 누구에게나 품위가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의사인 주인공 윤승은 열심히 일한 덕분에 노년의 빈곤에서 해방 될 수 있었다. 이십년 전부터 불입한 보험 덕분에 매일 같이 보조인 방문하여 요리, 청소 등의 가사일과 개인적인 용무와 건강까지 도맡아 케어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 빈곤과 고독사가 뗄레야 뗄 수 없는 인과관계인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 자립수단을 확보한 윤승은 한국의 일반적인 노인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녀는 우리에게 품위가 필요하며 그 품위는 물질수단의 유무에 따라 갈리는 현실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매일매일이 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니 늙어가는 현실이 서글프긴 하지만 그덕에 지금 누리는 소소한 일상과 여유가 더욱 소중하다고 여긴다. 그녀가 생각하는 품위있는 삶의 조건은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온전한 신체와 정신을 갖춘 상태를 의미한다. 그녀는 치매에 걸렸던 아버지를 보며 내가 스스로를 자각 할 수없는 삶은 실존적인 삶이 아니라고 여긴듯하다. 치매로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삶과 죽음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보험의 옵션으로 치매에 걸릴 경우 안락사를 시켜달라는 조항을 넣도록 이끌었다.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윤승을 통해 단순히 노인에게 풍부한 부와 건강한 신체가 필요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피해만 주는 삶, 내가 나를 모르는 삶 따위에는 연연하지 않겠다던 그녀는 자신에게 치매을 받아들이라는 현실앞에서 구차한 본색을 내비친다. 살고 싶은 욕망을 떨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탓해야 할까?



그녀가 모르는 건 자신이 치매라는 것 뿐이 아니다. 윤승이 윤승일 수 있게 하는 또하나의 정체성은 타인과의 관계로서의 그녀이다. 소원해져 자신을 보러오지 않지만 내심 아들을 기다리는 엄마이자, 회사일을 제쳐두고 자신을 돌보는 손자의 할머니로서의 윤승은 그녀 스스로를 규정짓고 살아가게 하는 원천과도 같다. 치매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그녀에게 더 충격적인 것은 아들과 손주라 믿었던 인물들이 보험사 직원들이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녀가 가입한 보험 상품은 도우미들이 친자식, 친가족 처럼 고객을 케어해 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있었다. 치매는 그녀로 하여금 그들을 내 자식과 손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독자들은 윤승을 바라보며 노년의 삶이 어떻게 다가올까?

무덤덤할 줄 알았던 죽음앞에서 살고자 발버둥치는 모습이 구차해 보일지 모르겠다. 윤승과 마찬가지로 내가 나를 자각하지도 못하는 모습이 생각하면 끔찍하게 여겨지거나 그것도 아니면 나도 나를 잃어가는데 나를 기억하고 위로해줄 가족하나 없다는 사실이 어쩌면 더 절망적일지 모르겠다. 나도 늙으면 저렇게 될까 싶어 걱정이 앞설 것이다. 그런의미에서이 작품의 결말은 비극적이라 생각한다. 분명 해피엔딩도 덤덤한 엔딩도 아니다. 주인공 윤승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충격적 두 가지 사실에 마주한 채 끝이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 소설은 비극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막닥드려야 할 지극히 현실적인 지점을 이야기 한다. 품위 있는 삶이 경제적 안락, 건강한 신체 , 가족의 존재나 가족간의 유대감 등 어느 하나만으로 충족되지 한음을 윤승을 통해 보이고 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사유해 보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생각해봐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과 같은 내일이 영원히 계속 될거라 여기며 살아간다. 윤승역시 그렇게 살아왔다. 현재에 치여 영원할 것같이 살았고 그것에 떠밀리는지도 모르게 노년을 맞이했다. 열심히는 살았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와 구분, 그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녀는 죽음을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그에 맞춰 삶을 살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치매와 안락사는 삶에 대한 본능적인 미련을 가지게 만들 수 밖에 없다. 죽음을 앞둔 모습이 비극적일 수 있지만 우리가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 모습이라면 비극이라고 볼 수도 없다. 우리가 어차피 대면해야 할 일상이자 현실이다.

이 소설은 마치 우리 모두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리고 죽음을 통해 내 삶의 의미를 찾아 보라고 말하는 소설처럼 느껴졌다. 품위는 노년이 되는 순간 갖춰지는 그 어떤 것이 결코 아니라고 말이다.










<품위있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정소현 소설의 표제작 격인 [품위 있는 삶, 110세 보험]을 읽으며 노년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특히나 아무리 대비해도 노년의 '품위'는 쉽지 않음을 느끼기도 했다. 그 뒤 품위 있는 삶이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어지 않아 여러 형태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건 바로 이 소설 속에 담긴 서로 다른 6편의 소설이 비추는 삶을 통해서였다.

이 소설집의 두번째 작품인 [어제의 일들]은 자살시도후 장애를 얻게 된 상현의 삶을 다룬다. 첫 번째 작품에서 윤승의 삶이 품위와 멀어졌다는 확신을 갖게 된 건 그녀가 의지했던 아들이나 손주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마당에 그녀를 기억해줄 사람조차 없는 현실이 안쓰러워 보였다. 고독과 외로움은 본명이 사람을 힘들게 하고 품위 있는 삶에 장애 요인으로 보인다 . 하지만 [어제의 일들] 속 상현을 보고 있으면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고독과 외로움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가족도 없는 것과 다름없고 장애마저 가진 그녀에게 세상은 벽이라 인식하는 것은 그녀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인식일 뿐이다. 그녀는 사고 이후 그림책 작가로서 정체성을 형성하고, 가족은 없지만 엄마라 부를수 있고 자신을 걱정해주는 존재가 있고, 과거에 집착하시도 고통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불행속에서도 희망적 미래를 고대하며 노력한다. 지금 살아있는게 다행이라고,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고!

어차피 해피인생이 가득한 인생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가능한 일일뿐이다. 인생은 비극에 더가깝고 자주 찾아오는 법이다. 상현이 취하는 삶의 태도야 말로 품위 있는 삶이 어떠한지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소설집의 세번째 소설인 [지옥의 형태]는 두번째 상현의 소설에서 등장했던 율희가 다시 등장하는 특이한 소설이었다. [어제의 일들]에서 율희는 상현을 질투하며 시기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는 남편과 자신도 있고 장애가 있지도 않고 경제적인 어려움에 허덕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수십년 만에 장애를 얻은 상현을 만난 율희는 자신보다 나을 거 하나 없어봬는 상현에게 또다시 시기와 질투, 분노를 내보인다. 상현에 비해 모든 걸 갖춘 율희는 사실 하나디 갖추지 않은 것과 같다. 그녀를 채우고 있는 건 오로지 불안과 고도기 분노 같은 것들이다. 그것들이 그녀의 몸과 정신 삶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너무나도 불행해 보이는 상현이 사실 자신과 달리 불행하지 않고 건강한 모습을 보이자 터져 나온 모습이었다. 품위 있는 삶은 비춰지는 조건들이 풍족한 삶이 아니라 내 삶을 이루고 있는 나의 조건, 상황인식 속에서의 삶의 의미를 따져보고 그속어서 피어나는 단단한 나의 정체성이 중요함을 이 두 소설은 대비 시키고 있다.

[그 밑, 바로 옆]과 [꾸꾸루 삼촌]은 다소 현실적이지 않은 설정과 상황속에서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그 밑, 바로 옆]은 주인공 '견'은 갑작스런 할머니의 사망속에서 자신의 진짜 가족을 찾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할머니가 나의 진짜 가족으로부터 나를 납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결국 진짜 가족과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은 시체, 썩어가는 할머니 곁으로 돌아오게 된다. 결론이 명확히 언급되어 있진 않지만 돌아가신,할머니와의 대화라는 설정과 그 곁에 머문다는 상황이 죽음과 연결지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꾸꾸루 삼촌]에서는 삶에 미련이 많아 떠나지 못하는 한많은 한 삼촌과 조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문제는 조카인 철완은 자신이 죽은 사실을 인지 하고 못하고 있다. 성공하기 위해 가족과 연락도 끓고 가수라는 목표를 위해 노력한다. 그 조카를 방문한 삼촌과의 재회를 다루고 있는데 사실 죽은 이들끼리의 재회라 볼 수 있다.

이 두 소설은 삶과 죽음에 있어 자신을 둘러싼 사람과 유대 또는 관계가 매우 중요함을 독특한 설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 밑, 바로 옆]에서 견은 진짜 가족을 외면하고 죽은 할머니를 찾아갈 정도로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고 규정짓는 건 할머니와의 기억임을 말하고 있다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꾸꾸루 삼촌]에선 어떤 한 불운, 불행이 인생을 망친 그래서 삶에 미련이 많은 영혼들의 이야기인데 이런 삶을 통해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고, 성공을 바라는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하지만 결국 죽은 삼촌을 통해 떠날 때임을 깨닫고 나아가는 철완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두 도설을 보고 있으면 품위있는 삶이 그리 원대한 목표나 거대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내 삶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 여건 들속에서 불운이나 불행없이 소소하게 영위할 수 있는 여건들이 중요얌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지루하다 느끼는 일상이 어떤이에겐 어떤 것보다 소중한 품위가 됨을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 소설집의 각기 다른 단편은 서로 다른 인물과 삶그리고 죽음을 이야기 하지만, 공통적으로 그리고 은유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죽음이 가까이 있고 그리고 죽음을 통한 삶의 의미 즉, 고독의 사유가 필요하고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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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 1차 세계대전에서 금융 위기와 셰일 혁명까지, 석유가 결정한 국제정치.세계경제의 33장면
최지웅 지음 / 부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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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기)(석유는 세계질서를 움직이는 원천)_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





[익숙하고도 낯선 석유]​


이 책은 석유의 세계사를 다루고 있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로부터 석유산업의 태동, 그리고 영국 처칠에 의해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와 만나며, 더나아가 미국에 의해 세계의 연료가 돼가는 일련의 과정들은 독자에게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것은 우리는 석유가 가진 에너지원으로서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지만, 그속의 작동하는 '정치적 힘'과 '경제적 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많진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는 석유의 역사에 있어 결정적인 33가지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개별 사건 하나하나가 석유사에 있어 크나큰 영향을 미친 파급력 큰 사건들이었지만, 각 장면들이 석유사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도 석유의 역사와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것은 석유라는 이야기의 자체적 힘이기도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유기적 구성을 위해 애쓴 노력의 산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독자는 단 한권의 책을 읽는 것이지만 석유의 역사와 그것이 세계질서에 미친 '힘과 부'에 대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교양서로서의 충분한 깊이와 독자의 이해를 돕는 구성적 완결성이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석유는 세계질서를 결정하는 힘과 부의 원천]​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석유의 중요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자원 빈국으로서의 정체성을 귀가 닳도록 들으며 큰 대한민국 국민들은 너무나도 익숙한 사실이다. 그러한 걱정애는 세계 5위의 석유 수입국가라는 현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유국에서 석유공급을 제한할 경우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비산유국으로서의 에너지 주권에 대한 잠재적 불안감이 매우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통제 불가능한 위험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석유가 에너지라는 자원으로서의 중요성 너머의 보다 근원적인 '속성'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교육 등으로 숱하게 접해 온 20세기의 역사, 세계사, 정치사, 경제사는 사실 '석유'라는 단하나의 키워드에서 비롯됐다고 할 만큼 깊은 관계에 있었고, 그 관계와 결합력은 지금도 여전하다는 것을 철저히 해부하고 있다





석유는 사람이 가진 기본 속성, 힘과 부를 차지하고자하는 본성을 증폭시키도록 역할 해왔다. 석유의 세계사는 석유를 가진 세력이 예외 없이 현대 세계질서를 뒤흔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세븐시스터즈라고 불리우는 영미계 메이저 석유회사는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1960년대 까지 석유산업을 지배해 왔다. 여기서 말하는 지배는 경제적 측면의 '부'만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2차대전 후 승전국인 미국과 영국의 패권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힘이 바탕이 되었기에 기름한방울 나지 않는 영국이 산유국보다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산업구조가 석유로 개편되고 산업화의 영향으로 석유생산보다 소비가 늘자 석유에 기댄 권력이 영미계 메이저회사에서 중동 산유국 중심의 opec으로 넘어가게 된다. opec은 정치적 패권은 약하였지만 석유의 무기화를 통해 전세계에 존재감을 과시하였다. 이후 두 차례의 오일쇼크는 그 영향력을 전세계가 휘청거릴 만큼 강력하고 오래도록 증명했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에게 별달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 때의 혼란과 갈등은 그 자체로 이미 과거의 일이다.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은 석유공급이 중단된 상황을 겪지도, 냉정의 구도가 무수한 사람을 죽이고 억압했던 시대를 살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얼핏 평화가 도래한듯이 고요해보이는 시대를 살지만, 석유를 둘러싼 이권 대립과 그것에 기반한 힘의 질서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오늘날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우선주의와 신보호무역 기조는 힘의 질서와 균형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셰일가스 등의 기술 발전으로 미국 내 에너지 수급이 매우 안정적인 측면에 기인한다. 더이상 과거 만큼 중동 산유국 에너지에 눈을 돌리지 않아도 되는 상황인 것이다. 자본으로써 민족주의를 침탈해온 미국이 반세계화로 돌아선게 아니라 이또한 자국을 위한 패권인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늘 부침이 있기 마련이다. 안정적 상태는 절대로 영원하지 않다. 그것이 석유의 생산측면이든, 공급측면의 문제든,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불확실성은 언제나 시작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에너지로서의 석유뿐 아니라 석유에 깃든 힘 자체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라고 생각한다
















[문명의 충돌보다 강한 이권침탈 증오]​



지구상의 민족과 민족, 또는 국가와 국가간에 벌어지는 골 깊은 갈등들은 대개 종교나 문화와 같은 문명의 충돌에 의한 면이 크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저자는 미국과 중동의 갈등사례를 통해 그러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21c 세계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을 떠올리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탈레반과 오사마빈라덴에 의해 자행된 9.11테러를 꼽을 것이다. 미국을 상대로 한 이슬람 무장단체의 테러는 이슬람권 전역을 기반으로 오래도록 응축되어온 반서구화 정서의 폭발로 볼 수 있다. 그 응축의 중심에는 산유국과 미국의 수익 반분문제를 비롯한 석유갈등문제 그로 인한 중동국가의 사회혼란과 부패, 그리고 빈곤에 대한 반작용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오사마 빈라덴이 친미국가로 유명한 사우디 출신이라는 점과 이슬람 무장단체가 무자헤딘, 탈레반, 알카에다, is 등으로 변화 확산되며 범이슬람적, 범중동적 성격을 가지며, 무장테러 단체들이 서로 공조 협력 관계에 있는 점을 볼 때 아랍국가들 사이에는 서구에 대해 석유를 빼앗긴 공동체적 증오가 자리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학창시절 9.11테러 현장 생중계를 보며 느꼈던 참상의 광경은 아직까지 강렬히 남아있다. 그때 미국이 무자비한 테러를 일삼고, 무고한 시민을 죽이는 무장테러단체를 '악의 축'이라 규정했다. 그 뉴스를 보며 나는 미국시민은 아니지만 세계시민으로서 평화를 사랑하고 수호하는 미국의 의지에 응원의 마음을 보냈다. 지금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패권과 자본력으로 타국의 이권에 개입하고, 자신들에 친화적인 정권을 세우고, 그 이권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 그곳에서 거리낌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는 '악'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말이다. 그런 나라가 자신들의 침략주의적인 행동을 뒤로 하고 그에 반하는 정서를 가진 국가를 악의축으로 규정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극악으로 치닫는 갈등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원인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우리, 대한민국] ​



사실 석유를 둘러싼 갈등과 국제질서의 변동은 어쩌면 우리와 큰 관련이 없다고 느낄 수 있다. 사실 그렇다. 누가 패권을 잡든, 누가 석유이권을 가지든 우리는 그 대상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현실은 그럼에도 우리는 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기적이고 미래적 차원의 계획. 이것이 저자가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바다. 그것은 바로 산유국과 접점을 넓혀가는 것이다. 1970년대 테헤란시와 서울시의 자매도시 협약이 좋은 사럐가 되어준다. 현재 서울에는 선릉, 역삼 등에 걸쳐지는 테헤란로가 존재하고, 반대로 이란의 테헤란에는 서울로가 존재한다. 경제적 무역 외에 도시, 문화 차워의 상호교류는 더 없이 좋은 접점이 되어 줄 것이다. 더불어 자원개발탐사와 같은 석유관련 산업에서 기술력을 보유하는 것 또한 장기적 차원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다. 우리는 석유없는 석유강국을 꿈꿀 수 있다. 산유국처럼 석유는 없지만 석유를 찾고, 뽑아내고,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전후방 연관 산업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인위적 관계보다 서로의 존재가 서로에게 도움이되는 상호호혜적 바탕위에 서 있는 관계가 우리에게 필요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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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 - 판타스틱 픽션 WHITE 1-1 판타스틱 픽션 화이트 White 1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송정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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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와 케빈 .. 느껴지는 마음들... >


[모성이란 특별한 것인가?]

이 소설은 내용이나 주제를 모르고 읽기 시작하더라도 그 특유의 묵직하고 비극적인 느낌은 몇장을 넘기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중심 사건의 내용과 결론이 처음부터 공개되며 시작하기에 이 소설을 읽는 독자도 비극의 원인이 무엇일까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도입과 초중반까지는 자유로운 삶을 중요시하는 에바가 원치않았던 아이를 가지며 겪게 되는 혼란스런 감정을 주로 다루고 있다.

임신이후 그녀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은 이상케 우호적이지 않았다. 몸과몸으로 연결 된 태아로부터 전해져오는 (아빠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그 무언가가 그녀에겐 없었다. 그녀는 모성이란 게 느껴지지 않는 것에 불안을 느끼며 자신을 탓하기도 한다. 아이가 태어나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이가 세상에 존재 한다는 자체만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만큼 특별한 모성이랄 게 없었다. 현실은 젖을 물지 않는 아이, 관심을 기울여도 도통 뭐하나 쉽지 않은 상황의 연속이었다.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글을 통해 그 때의 기억을 회상하는 엄마 에바는 사회에 격한 울분을 토로했다. 모성이라는 특별함은 엄마에게 주어진다는 사회의 인식이 양육의 의무, 아이의 상태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엄마에게만 지우는 현실에 대한 것이었다. 아이가 잘 먹지 않거나, 발달이 조금 느리거나, 아프거나, 알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모든 원인이자 결과는 엄마와 결부시킨다. 엄마도 아빠와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처음으로 부모가 되었으며 모르는 것 투성인 시행착오를 온몸으로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 우리는 한 번 이라도 생각해 본 적있는가? 모성이 정말 특별한 것인가? 모성을 아빠를 부모라는 역할에서 한정적이고 보조적인 책임을 부여하고 당연시하는 논리로 적용하고 있지 않은지 말이다,.



[서로가 서로를 선택하지 못하는 부모와 자식지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그 특별함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선택 할 수 없다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그런 측면에서 엄마 에바가 케빈에 대해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녀가 가엾이 느껴지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이 소설이 전적으로 엄마의 시각과 입장에서 전개되는 치우쳐진 관점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모성을 엄마만이 가지는 특별함이라는 거대한 사회의 인식 구조에서 에바는 모성을 느끼고 싶어도 느껴지지 않는 것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린다. "내가 이상한가".. 그런 마음 때문인지 그러는 더욱 더 노력한다. 아이의 행동으로부터 그 어떤 유대감이나 동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록 더욱더 말이다. 모성이란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느끼는 여성이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모성을 극복 할 수있는 것인가? 모성이 특별하다면 애초부터 노력여부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진짜 불행은 모성이 아니라 케빈이란 아이 자체가 정말 특별?하게 태어난 것일 거다. 케빈은 날 때 부터 괴이할 이상한 행동들을 보이기 시작하고 성장하면서 괴이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행동과 심리 상태가 심화되어 간다. 그러한 모습을 온전히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에바 뿐이다.

케빈이 평범한? 아이였다면 엄마와 아이의 상호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피아나고 강화되는 애착관계가 형성되었을 것이고, 그건 에바의 엄마로서의 노력과는 무관한 것이다. 모성도 아이와의 상호작용아래 강화되는 것인데, 그것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아주 어릴적 부터 거부해 온 케빈은 감정없는 벽과도 같았을 것이다. 이 소설이 케빈의 심리 상태를 학문적으로 다루고 있진 않지만 성장과정에서 케빈이 연관되었던 사건이나 이 소설의 핵심과도 같은 비극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회구성원에 대해 감정을 느끼지 못하거나, 그 마저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연출하고 기획하는 모습을 볼 때 소시오패스 같은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소설은 그런 비정상적 심리 상태를 가지게 된 연원에 대해 케빈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 점에서 케빈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엄마에 대해 어떠한 마음을 가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결과의 책임을 에바의 모성을 탓하기엔 케빈은 너무나 특별한 아이였다.


[불행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불운이 겹쳐져야일어난다. 그 '겹침'이 쉽진 않아도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비극을 알리고 시작하는 소설이 더 높은 층위의 비극이 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하는 독자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이 소설 또한 명석하고 충격적이기 까지 하다. 이 소설이 다루는 주제는 우리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면면을 살피면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극단적인 케빈과 극단적인 에바라고... 일반적인 엄마와 일반적인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에바와 케빈이라는 케릭터가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라고해서 세상에 이런 관계, 이런 현상이 없다고 발생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가 무겁고 침통함 마저 느껴지는 이 소설에 인상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은 우리 모두는 그 근원적인 불안을 안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가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다. 사회의 인식은 서로가 만나게 되는 순간부터 특별한 끌림이 그들을 서고 연결하고 사랑으로 채워진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관심가져야 할 것은 이러한 인식을 경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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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욤비 -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기
욤비 토나.박진숙 지음 / 이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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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더이상 보호하지 않는 사람들]​



국가가 더이상 보호하지 않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무엇일까? 바로 난민이다. 굳이 난민의 개념을 언급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 난민은 가난한 사람, 경제적인 도움이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민들이 난민이 된 상황과 배경을 이렇게만 인식하는 건 지극히 단편적이고 부분적면이 강조된 시각이다. 나 역시 이러한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내 이름은 욤비'라는 책을 만나기 전까지 줄곧 그랬다.



내 이름은 욤비의 저자 욤비 토나는 콩고민주공화국 출신의 난민이다. 그의 삶과 그 궤적을 보고 있으면 난민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얼마나 편협하고 잘못돼 있는지 느껴진다. 욤비씨는 콩코민주공화국의 보호는 커녕 억압을 받고 그것을 피해 쫓기듯 콩고를 떠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용감한 사람이다. 오직 콩고의 민주화와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그러한 신념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조국은 고된 핍박과 탄압을 일삼았다. 그는 살기 위해 그렇게 조국을 떠나올 수 밖에 없었다.






[용감한 한 시민이 치르기엔 너무나 가혹한 대가]​



욤비 토나는 조국을 위해 용기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두 번에 걸친 콩고 정보부 내의 비밀감옥에 투옥되는 것이었다. 모진 고문과 배후 자백을 강요받는 상황속에서도 그는 조국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있었다. 대통령에게 충언이 담긴 비밀밀서를 전하려했다며 끌려간 1차 투옥에서 풀려난 후 그는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와 반란군 사이에 수면아래의 모종 거래의 전말을 야당에게 알렸다는 이유로 2차 투옥 되었다. 또 다시 투옥 될 위험을 인지하고서도 그는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비밀 거래의 전말을 대통령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혹여 대통령이 알고서도 진행하려는 것이라면 야당쪽에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행동은 모든 대비나 계책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투옥과 고문의 두려움, 가족이 느낄 위험과 공포, 소리소문없이 제거 될 수도 있는 상황속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일어난 행동이다. 그것은 조국의 미래와 발전을 위한 순수한 의분 같은 것이었다. 내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을 한다는 마음. 그는 콩고 키토나 왕국의 왕자이면서, 콩고 정보국 내의 요원으로서 충분히 부유하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왕자로서의 정체성 그득권으로서의 안주 그런 건 없었다.



2차 투옥 후 욤비의 신변에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그의 친구들과 정보국 동료들의 도움으로 비밀리에 탈출을 감행했다. 그에게 남은 선택은 조국 콩고를 쫓기듯 떠나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욤비씨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떠날 때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 여행의 끝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2002년 7월 콩고를 떠나 중국을 거쳐 그해 한국에 들어왔다. 콩고대사관으로부터 쫒기는 신세이기에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 자체도 무척 어려웠지만 그 이후 사료공장과 직물 공장 등을 전전하며 난민이자 외국인노동자로서의 차별과 시선을 모두 겪어야 했다. 그가 난민으로 인정되기 까지는 무려 6년이란 시간이 소요됐고 가족들도 고스란히 그 인고의 시간을 견더내야만 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내전과 독재로 얼룩진 나라에서 욤비씨 같이 누구하나 옳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콩고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안전하지 않은 나라이다. 이를 증명이라도하듯 그는 여전히 그의 나라로 돌아갈 수 없다. 조국을 생각하는 마음하나로 한 개인이 행한 용감한 행동의 결과와 대가가 너무 끔찍할 정도로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콩고로 돌아가는 순간 살아남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난민이다. 국가가 보호하지 않는. 그러나 그는 결코 가난하거나 부끄러운 삶을 산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도 하기힘든 용감한 일을 한 사람이다.










[그의 간절한 꿈, 콩고로 돌아가는 것]​



욤비 토나는 2019년 현재까지 그는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키토나 왕국의 왕자로 출생. 킨샤사 대학 경제학과 졸업, 콩고 민주공화국 정보국 근무. 2차에 걸친 감옥 투옥. 콩고 탈출. 2002년 한국입국, 난민 허가 신청중인 외국인 노동자신분으로 체류. 2008년 난민인정, 그리고 가족들의 입국 허가. 2013년 대학교수.

욤비 토나의 파란만장한 삶을 보고 있으면 결코 평범한 한 개인의 삶 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다. 2019년 현재 그는 광주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인 상태이며 한국으로 들어온 부인과 세자녀 그리고 한국에서 얻은 두자녀까지 더해 7명의 가족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삶을 살아 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조국으로 돌아가는 미래를 그린다. 한국에서 겪었던 알듯 모를듯한 차별(이러한 문제에 대해 한국인들이 느낄 문제성과 별개로)과 문화적 이질성이 주된 이유는 아니다. 그는 바로 콩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왕자로서의 그리고 기득권으로서의 정체성은 벗어던진지 오래지만 조국 콩고인이란 정체성은 그를 더욱 더 조국을 꿈꾸게 만든다.



난민이라는, 외국인 노동자라는, 흑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으로 욤비 토나씨를 생각해 보자. 그는 가난한 사람인가? 한국에 눌러앉아 우리의 지원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인가? 그는 우리가 무시해도 되는 사람인가?

난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좁고 단순한 의미의 개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난민이 우리와 거리가 먼 개념이 아니며, 우리도 난민이 될 가능성에서 배제 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불과 70여년 전까지 20세기 전반부 내내 난민 발생국이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해외를 전전하던 독립투사들, 일제의 탄압앞에 정상적인 삶을 영외할 수 없었던 사람들, 정치적 사회적 이유로 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해 망명했던 망명가들, 우리민족의 비극이자 참극인 6.25전쟁으로 생겨난 피난민들. 이들 모두가 난민이다. 이들을 모두 가난한 사람 혹은 구호, 모금등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치부 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6.25의 진짜참극은 우리가 그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행방 된 게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위험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도 어느 한순간 난민이 될 수 있다. 인생은 누구도 믿기 힘든 장난같지만 그런 장난 같은 일들이 곧잘 일어나기도 한다.



이 책을 통해 난민을 도와 달라고 호소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의 인식에 오해와 편견은 없는지 우리가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아닌지 묻고 있는 것이다. 욤비씨의 삶은 그 자신에게는 지독한 고난과 역경이 많은 삶이지만 그의 삶이 그의 경험들이 우리에게는 소중한 성찰과 통찰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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