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회화실록
이종수 지음 / 생각정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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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 조선의 회화>

조선회화실록은 역사가 기록된 사실이라는 정의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역사가 아무리 (과거) 사실의 기록이라해도 그 기록이 모든 진실을 뚜렷히 드러내주지는 못한다. 흔히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우려석인 말에서 드러나듯이 역사가 실체적 진실성을 언제나 머금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불확실한 것 투성이인 추정에 불과한 것이 역사에 더 적합한 속성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은 역사의 큰 버팀목이 되어 준다. 실록은 누가봐도 똑같이 소리내어 읽을 명확한 문자로 기록된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배우고, 수많은 역사컨텐츠들도 거리낌없이 실록을 근거로 인용한다.
하지만 문자로 실록이라고 해서 온전한 사실을 보장해주시 못한다. 문자는 그 자체로 명확한 의사를 드러내는 수단이지만 그 문자를 사용했던 사람들은 거기에 시대적, 상황적 맥락을 담아 기록했다. 하지만 오늘날에 역사를 해석하는 사람은 그 시대의 상황과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들어 최근에 개봉된 한글창제와 관련된 영화는 한글창제 과정에서 신미대사라는 스님의 참여를 꽤 큰 비중으로 다뤘다. 하지만 이내 이 영화는 큰 논란에 휩싸였다. 한글창제는 세종의 친제를 주장하는 학자, 반대로 집현전 학자들의 창제 등으로 갈리어 의견이 매우 분분한 상황이다.
실록은 분명히 왕께서 친히 창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까닭은 왕이라는 절대적 존재는 모든 행위의 수행자이자 책임자(실제 행위자 여부는 상관없이)라는 권위적 맥락을 담아 이해하는 것도 하나의 해석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조선회화실록>은 맥락이라는 이러한 역사의 틈을 채워주기에 충분한 책이다. 회화는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을 더 깊이 이해하거나, 또는 문자로 기록되지 않아 우리가 무관심했던 사항들에 관심을 불어넣기에 충분한 역할을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윤두서의 자화상이라는 회화는 역사 이해에 깊이와 숨결을 불어넣어주는 것 같다. 학창시절 국사책에서 처음 본 윤두서의 자화상은 그 강렬한 인상 덕분에 조선의 회화를 떠올릴 때 가장 으뜸이 되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 강렬함의 이유는 알지 못한 채였다. 하지만 그림에 담긴 윤두서의 자화상은 그 이유를 담고 있다. 붕당정치라는 거센 환국의 풍랑속에 배제된 남인의 후손이었던 윤두서는 양반이면서 사대부는 아닌, 양반이면서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자화상에서 머리만 달린 기이한 회화를 그리고, 강렬한 이목구비와 길다란 수염을 디테일하게 표현함으로서 그 어떤 초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자신만의 특성을 드러내었는데, 그러한 조건은 그가 스스로를 규정할 수 없는 정체성의 존재로 인식한 것과 남인으로서 학문적으로는 다양하고 실질적인 것에 관심을 두었던 배경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조선회화실록은 역사에 대한 맥락, 깊이 뿐 아니라 몰랐던 사실에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역할에도 충실하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선조의 독서당계회도와 고종의 어진이다. 독서당계회도는 사대부의 독서를 위한 독서당으로서 조광조, 이황, 주세붕 같은 사람들이 독서휴가를 지낸 곳이다. 이 시대의 독서 회화가 얘기하듯이 당시의 국왕인 선조 또한 책을 멀리하지 않았다. 시문과 시화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향락이나 사치를 부리지도 않았다. 교양인으로서 괜찮은 수준의 왕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선조는 국란의 상황에서 백성을 버리고 도망한 군주로 기억한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새롭게 드는 생각은 만약 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어땠을까? 라는 상상이다. 선조의 실정은 분명하나, 백성을 버린 임금에 가졌던 인간적인 분노에 대해 약간의 연민 같은 감정이 들기도 했다.

마지막 후반부에 등장하는 고종의 어진은 격동과 수난의 근대사를 지낸 얼굴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다. 고종의 황색 용포은 군주로서의 위엄을 한껏치켜 세우고 있으며, 무릎 옆의 호패에 쓰인 임자생 갑자 등극은 황제로서의 위용과 정통성을 드러낸다.하지만 이러한 착장과 대비될 만큼 고종의 용안은 평안하다. 격동의 세월을 살아간 군주치고는 지나치게 온화해 보일 정도다. 이 회화를 보고 난 후 한일병합 직전 을사오적의 매국노가 고종에게 국권을 일본에 이양할 것을 협박한 장면이 떠올랐다. 조선을 지켜낼 의무를 지닌 국왕으로서의 고종은 대응은 너무 무기력했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고종행장에 기록된 고종의 성품은 어진의 용안에서 엿보이는 데로 수많은 변란에도 언제나 온화하여 분노한 기색이 없었다고 묘사되고 있다.
조선의 국운이 다 소모될 만큼 민족의 고통이었던 구한말. 우리의 군주가 고종이 아니었다면 결과는 달려졌을까란 생각이 오래도록 맴돌았다.


이밖에도 산수화를 나타낸 몽유도원도(관념산수화), 북새선은도(실경산수화)와 금강전도(진경산수화)의 비교가 인상적이었고, 노론과 소론의 영수였던 송시열과 윤증의 초상에 숨겨진 정치적, 정당적 숙명성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밖에도 이 책에 등장하는 28점의 회화는 우리의 역사가 지닌 빈 틈에 다가갈 수 있도록, 그림으로서 생생히 전하고 있다. 이러한 역할과 중요성을 생각할 때 회화가 조선의 예술작품일뿐 아니라 역사의 현장과 그 시대의 맥락을 담은 귀중한 정보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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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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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마음만으론 턱없다.]
길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당신은 차별하는 사람인가요?'라고 묻는다고 하자. 과연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마 대답은 압도적으로 '그렇지 않다'일 것 이다. 사실 이 질문의 전제에는 차별에 대해 내가 인식하고 있는가?가란 말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차별주의자가 아니라 생각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차별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차별은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더 흔하게 이뤄지는 법이다. 차별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차별받은 사람만 무수히 많은 현실이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선량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도 부지불식간에 무수한 차별을 행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책이다.

[복잡하고 다양한 층위의 차별들]
우리가 일반적으로 차별이라 말하는 상황은 동등한 조건에서 타인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거나, 또다른 타인에 의도적으로 특권을 부여하는 경우를 말한다. 여기에는 직접적, 의식적인 차별동기가 존재하며 그 행위자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일상에서 광범위하고 무수히 벌어지는 차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런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이 책은 이야기하며, 예를 들자면 다수를 차지하는 지배집단의 구성원이되는 것 만으로 누리는 특권과 그로인해 배제와 차별에 노출되는 집단 문제, 전통적인 성역할과 차별로 인해 저임금에 처한 여성들과 그러한 차별의 구조적 본질을 개인에 지우는 문제, 사회적 존재로서 다양한 범주의 집단에 속하며 차별당하면서 동시에 차별하는 존재가 되는 이중의 지위에 서는 문제, 농담과 싫음의 표현이란 이름으로 포장하며 은밀히 표출하는 모독과 혐오의 문제, 경제적 수익추구가 최고의 가치이자 이념이란 자본주의적 물적추구 아래 횡행하는 특정 소수집단에 대한 배제 문제 등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배제와 차별의 사례들은 이렇듯 설명만으로도 길며 복잡한데 그것은 이러한 문제 자체가 구조적이면서도 그것을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속에서 작동되기 때문인 것이다.


[다수자의 민주주의와 보편성을 넘어서서]
만약 내가 속한 어떤 사회적 범주의 집단에서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 집단이 다수자로 이뤄진 지배적 집단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 된다. 우리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제도와 법 그리고 민주주의 같은 체제는 모두 다수자의 원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질서는 모두 다수자나 힘있는 세력을 뒷받침한다. 예를들면 다수결의 원칙 같은 것이다. 따라서 다수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특권이 없는, 배제 되는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에 대해 무감각하다.
민주주의란 이름아래 다수의 원리로만 모든 의사결정과 제도의 혜택이 돌아간다면 소수집단은 영원한 배제와 차별에 노출되게 된다. 그래서 민주주의체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다수자란 이유로 모든 것을 주므를수 있음을 의미하는 게 결코 아니라며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적용되고 체감되는 민주주의는 너무나 다수자 중심이다.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성이란 말은 대체로 긍정적 의미로 여겨진다. 인류 또는 인간의 보편성이란 이름아래 다양한 영역의 사회체계와 제도, 과학 등에서 발전, 진보해왔으며 그 자체로 공동체와 집단의 생존력을 보존하는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다루는 차별 문제에 있어 '보편성'이란 말은 그 자체로 차별을 은폐하거나 그 구조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혹자는 차별받는 사람들을 위해 행하는 제도적, 정책적 지원이 또 다른 문제(사실은 그럼으로서 다수자,특권자가 느끼는 불편 또는 역차별이란 감정)를 낳기에 차별문제를 대함에 있어 보편성의 관점에서 차라리 '구분'을 없애는 게 맞지 않냐고 말한다. 예를들면 "흑인의 인권은 소중하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로 말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건 형식적 평등에 불과하다. 보편성은 차별이 보이지 않게 만들어 은폐시키기도 한다. 보편성이란 이름아래 그속의 흑인이 경험하는 차별의 경험은 숨겨진다. 또 보편성의 관점은 기존의 지배질서(법, 제도, 정책)를 그대로 유지하는 기제가 있어 '구조적' 차별을 받는 소수집단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보편적으로 모든 차별을 금지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차별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보이기 위해 차별금지 사유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구조적 차별의 해소를 위해 차이가 드러나는 실질적 평등 정책이 적극적으로 필요하다.

가만보면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그런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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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다, 개정판 현대 예술의 거장
피에르 아술린 지음, 정재곤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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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순간, 찰나를 담는다˝는 말이 참 멋지면서도 기대감을 자아냅니다.
왜냐면 찰나는 그저 그 ‘순간‘ 일뿐일지 몰라도, 그 ‘찰나‘들이 모이고 모여 그것이 파리라는 사회를 드러내고, 역사성과 예술성을 지닌 파리 그 자체를 이룰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무척이나 설레이는 맘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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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 거짓과 혐오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
미치코 가쿠타니 지음, 김영선 옮김 / 돌베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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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등장은 우연일까?>
이 책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 '트럼프'가 등장한다. 그것은 21세기에도 여전한 초패권국가인 미국의 대통령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현대사회가 앉고 있는 탈진실적 징후와 상징을 미국사회에서 찾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만큼 중요하게 '트럼프'라는 사람의 개인적 특성 자체가 저자가 이야기 하려는 맥락(실재과 허구, 진짜와 가짜 사이의 경계와 구분이 흐려진)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트럼프가 말하는 거짓말, 사실에 거짓을 더해 변형한 주장, 근거없는 혐오와 두려움의 조장에 대해 정말 가열차게 비판을 가한다.(한 인물에 대해 이런 수준의 비판을 접하는 책은 오랜만이다.)

그렇다면 트럼프의 등장은 과연 우연일까? 단순히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별종으로 취급하면 끝날 일 일까?
저자는 트럼프를 넘어 미국사회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나치와 레닌의 역사를 오가며 본질적 차원에서 오늘날 현재 "진실"이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조명하고 있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자가 독재자뿐이던가!>
트럼프의 자아도취적 언행과 배제와 혐오를 조장하는 발언을 단순히 농담이거나 개인적 차원으로 한정해서 볼 수 만은 없다. 그의 말은 발언과 동시에 미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발언이 오늘날의 국가주의 ,정치적 부족주의, 탈구 현상, 사회변화에 대한 두려움, 국외자에 대한 혐오같은 현상의 '불'에 '기름'을 통째로 들이붓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저자는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그리고 그 과정자체와 러시아의 미 대선 개입 의혹) 사실로 말미암아로 미국 사회가 실재과 허구, 진짜와 가짜를 구분이 희미해지는 진실과 객관적 실재의 죽음시대가 도래했음을 경고하는 듯하다.

트럼프는 거짓만큼이나 사실에 가짜를 끼어얹은 발언을 직접적으로 많이 하고, 또 그런 왜곡, 과장의 발언이 퍼져나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 과정에서 사실과 진실에 대한 언어의 변형이 일어난다. 트럼프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대중의 혐오와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것이고, 또 그것이 곧 자신의 목표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그 목표는 모두를 위한 합리성이나 선이아니라 권력과 부의 창출일뿐이다.

저자는 트럼프정부의 이런 양태를 역사를 거슬러 소비에트연방의 레닌이나, 나치스, 마오쩌둥의 중국에서 나타났던 것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그 시대 그 곳에서도 불행한 '언어의 변형'을 경험했다. 이들 사회는 독재자가 얼마나 신속하고 교활하게 언어를 무기화해서 비판적 사고를 억압하고 편견에 뿌리를 둔 증오에 불을 붙여 민주주의를 장악했는지를 보여준다.
트럼프의 모습은 마치 이들의 '대중 선동'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실 전체주의 제국주의의 독재자와 민주주의 초현대사회의 대통령의 연관성에 대한 이야기가 다소 생경하고 어색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가 '빅토르 세베스첸'은 레닌을 보고 '독재국가뿐 아니라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선동가'라고 이야기 했다.
트럼프가 대중을 사로잡는 방식, 트럼프 행정부 그리고 공화당을 비롯한 우파가 그것을 용인하고 되려 강화시켜 나가는 모습은 시대와 체제를 불문하여 언어의 변형이 권력집단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해준다. 트럼프의 당선과정과 러시아의 미 대선 개입 그리고 당선이후의 여러 모습은 그것을 매번 증명시켜왔다.

<가짜의 생존전략:포스트모더니즘과 기술혁신>
언어의 변형을 통한 진실의 회피, 이성과 객관의 죽음이 이토록 빈번히 이뤄지는 것은 그것을 이끄는 세력(트럼프와 우파)이 포스트모더니즘과 기술을 악용하고 활용하기에 가능해진다.
196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은 낡은 인문주의 전통의 전복을 제안하는 반권위주의를 의미했다.
이런 움직임은 좀더 평등주의적 담론을 촉진했고 이전에는 권리를 박탈당했던 목소리들이 소리를 낼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공격적인 이론이나 틀렸다고 밝혀진 이론을 주장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특정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도 이 주장을 이용했다. 아니 악용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진실이 불완전하며 보는 관점과 상관관계에 있다고 말하는데 어떤 사건을 이해하거나 기술하는 타당한 방식이 단 하나가 아니라는 인식이다. 진실보다는 관점, 절대보다는 상대주의를 의미한다. 특정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진실을 왜곡하고 흐트리는 세력은 이러한 상대성과 관점주의 속에 자신의 야욕을 숨겨 전파함으로서 대중이,의심없이 받아들이고 한번 전파된 인식은 확증편향이 되어 확대재생산된다.
이 책에서 비중있게 다뤄지는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러시아의 소셜미디어 여론 조작은 그러한 형태로 이뤄졌고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영향력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일부의 또는 단편적인 사실속에 숨겨진 거짓과 가짜는 사실인양 미국본토를 급습했고 트럼프가 야기하는 두려움의 무기화를 한 껏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상대주의를 악용한 탈진실이 허무주의와 혐오의 형태로 대중에게 전파되는 것의 유통경로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이다. 웹과 SNS는 그 구조적 특성으로 인해 탈권위와 집단지성 같은 공동체와 민주주의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허나 트럼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웹이 가짜가 진짜인양 둔갑되고, 혐오가 고삐뿔린 망나니 마냥 날뛰는 것에 촉매제가 되고 마는 불편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나아가고 있는가!>
상대주의와 관점주의는 실로 약자를 인식하고 고착화된 권위에 저항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것은 모더니즘의 한계를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이름으로 변화발전시켜 온 것이다.
허나 그것이 악용되고 있는 트럼프의 시대는 그 어떤 가치도 스스로 굳건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것이 너무 자명하고 당위적인 것이라 그외의 상황을 상상하지 못한다. 민주주의가 무너지리라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물론 저자도 직접적인 민주주의의 붕괴를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 그리고 트럼프의 시대가 보여주는 여러 양상들은 민주주의가 언제나 굳건하지 않음을, 그리고 항상 변하고(변할수) 있음을 말해준다.
미국의 건국세대는 공동의 목표, 공동의 이해, 공동의 선을 찾으려는 노력과 그러한 인식, 사실에 기초하여 민주주의라는 보편적이고도 소중한 체제를 탄생시켰다. 상호견제와 균형의 민주주의 이념은 갈등과 대립속에서도 하나로 나아가게 하고, 하나이진 못해도 배제와 혐오가 미쳐날뛰지 않는 최소한의 공존을 위한 인정과 다문화를 만들어내었다.
허나 지금의 트럼프 그리고 앞으로의 트럼프는 그 가치를 잘 유지발전 시키고 있다고 보여지는가! 그것은 단순히 정권 차원의 성과문제가 아니라 그 사회속에 살아가는 사람과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와도 직결되기에 중요하다.
저자가 트럼프에 대해 이렇게까지 날선 비판을 가하는 것은 민주주의는 언제나 굳건하다고 믿는, 그리고 진실과 가짜의 구분에 무지한, 사실과 허구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보이는 반대급부의 문제인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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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의 일
김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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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실한 인간과 비극적 일]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살어?"
아마 이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일을 자아실현과 삶의 의미로 삼으라말하지만 그것이 점점 이룰수 없는 이상이 되어가는 요즘같은 독한? 현실에서는 사실 이말이 더 공감가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통신회사에서 설비기술자로 현장에서 수십년을 근무해온 '그'는 분명히 '일'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다. 성실함을 바탕으로 자신의 과업을 수행하고 그에 맞게 기술력을 체화해온 사람. 더군다나 그 과정속에서 함께 일한다는 것의 의미와 동료와의 신뢰를 굳건히 쌓아온 사람이다. 그의 인생에서 일은 그의 삶 자체를 의미하는, 삶의 표식이자 증거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소설은 그가 저성과자로 분류되어 3번째 재교육을 앞두고 있는 상황으로 시작된다. 그 보다 젊은 부장은 예의바름을 잔뜩 머금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퇴직금을 넉넉히 챙겨주겠다는 속보이는? 말로 권고사직할 것을 종용한다.

결국 그는 재교육 프로그램을 받고, 지방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수십년을 현장에서 일해온 그에게 영업 업무가 떨어진다.
회사는 불황을 이유로 팀내의 노동자들 사이를 갈라놓고 서로를 원망하게 만들었듯이, 지방에 영업이라는 생소한 직무와 할당과 경쟁이라는 구조에 직원들을 몰아넣고 또다시 그들간의 불화를 야기하고 끊임없이 무능력한 사람임을 자각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발령지와 직무가 수없이 바껴도 그는 결코 그만두지 않는다. 사실 그가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대출금을 갚기에 빠듯한 상황에 처해있지만, 이것이 이러한 수모속에서도 그가 버티는 것에 대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의 아내 해선은 수소문해 알아낸다른 일자리로 이직할 것을 권유하지만 그에게는 이런 말들이 와닿지 않는다. 그는 바로 살기위해서만 일해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원을 내보내기 위해 갖은 상황에 몰아넣는 회사앞에서도 그는 꿋꿋히 버텨내고 있다. 소설의 종반부는 그러한 버팀이 그와 그의 삶 자체를 변화시키는 상황을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그는 지방의 철탑 건설 현장에 배치를 받고 이 과업만 끝나면 다시 복직될 것을 약속받는다. 현장은 지역주민과 회사와 경찰이 한데 뒤엉켜 철탑 건설을 두고 지역주민의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그동안 회사에서의 일을, 삶과 분리되지 않는, 삶 그 자체이자 실체로 인식해온 그에게 철탑건설은 새로운 과업이자 그 끝엔 본사 복직이 기다리는 완성해야 할 목표가 된다.
그의 개인적인 목표와 회사와 지역주민의 갈등이라는 사회적 양상이 결합되면서 그와 그의 삶을 무참히 변화시킨다. 그는 철탑건설 사업 78조 1조 9번에 편성되는데, 철탑 건설을 반대하는 지역주민에게 '우리도 위에서 시켜서 하는 일'이라며,어떻게해서든 과업을 진행해나간다. 사실 그는 위에서 시켜서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던 그였다.

점차 시간은 흘러가고 그는 지역주민에게 철탑이 어떠한 영향을 주게되는지 그들의 고충이 무엇인지에 대해 무감각해져간다. 그러한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도 포기해버린다. 그에겐 회사가 시킨 일, 그가 끝마쳐야 할 과업만 존재할 뿐이다.

결국 회사로부터 줄곧 피해를 받아온 그는 회사가 자신에게 들이댔던 무자비한 논리를 스스로 누군가에게 읇어대는 가해를 가하는 사람으로 바껴있었다. 그는 78구역 1조에 남아있는 "최후의 유일한 9번"이 되면서 건설을 마치게 된다.

하지만 건설완료에도 그의 복직은 원활히 이뤄지지 못한다. 그에게 부여된 '9번'이라는 번호는 철탑 건설 목표를 부여받은 것이 사람이 아닌 기계나 도구로 느껴지도록 만드는 지점이 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회사 논리에 이용된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소설은 '괴물이 된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변화를 두고 그가 '악'하다고만 결론 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실 지극히 평범한 사람,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일이란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동료애를 갖춘 모범적인 사람에 가까웠다.
그의 변화는 '일'이라는 것이 "살기 위한 일이든 일을 위한 삶이든" 간에 나의 '일'이 이 세상 모든 관계와 사회에 지극히 긴밀하고도 중요한 연관성을 가지며, 내가 한 그 일들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올지 생각하고 또 관심을 가져야 함을 말하는 것만 같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누구라도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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