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제3판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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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성찰로 가득한 내면, 그러한 삶의 의미]









[고인이 되신 저자께: 그 엄혹한 세월을 견디게 한 건 무엇이었나요?]​



나로선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생각만으로도 세월의 인고가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아 상상조차 어렵다. 불과 이십대 후반의 나이에 그것도 20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는 심정이라!. 20년이란 세월도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기간일 뿐 그는 형기내내 사형수와 무기수로서 끝나지 않을 지도 모를 나날들을 보낸 것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저자 신영복이 옥중에서 가족과 주고 받은 편지를 한 데 엮은 것이다. 사실 감옥은 물리적인 공간의 제약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형벌이지만, 사실 한 사람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활동, 생각, 동기 등 그 모든 것을 일순간에 정지 시키기에 총체적이자 크나 큰 엄벌이며 인생의 종료선고와도 같은 것이다.(잘못의 대가라는 당위성은 논외로 하고 자체의 본질적 성격상)



이 책을 읽고 난 직후의 느낌은 저자가 옥중에서 한 '사색'과 그를 통해 깨달은 '통찰'들에 대한 감명도 컸지만 그 이전에 보다 근원적으로 "20년이란 세월을 옥중에서 보내며 그 엄혹한 시간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라는 물음 같은 것이었다. 저자의 옥중편지들을 보면 그는 수감의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내적인 감정의 동요나 두려움 같은 건 없었던 걸로 보일 정도다. 물론 가족의 염려를 우려해 걱정할 만한 자신의 속내는 철저히 감춘 걸 수도 있지만, 그 기간이 무려 20년인 점과 그의 편지는 일반적으로 가족과 주고 받는 범위를 넘어서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자신의 속내를 자유롭게 드러내고 있는 것인 면을 볼 때 그에게 수감 생활은 단순히 '고통'이라 정의 내리기 힘든 복합적인 어떤 것으로 가득했으리라 판단된다. 고인이 되신 저자께 더이상 물을 수는 없지만 그 어떤 것은 분명 기나긴 투옥 내내 끊임없이 스스로를 뒤돌아 보던 '자기성찰'과 '부끄러움'의 자세로 부터 비롯되어 그를 더 단단하게 버티도록 하였으리라 짐작해본다. 그리고 저자의 그런 자세는 현재에 그의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묵직하고도 묵묵한 울림을 전하고 있다.














[한 포기 키 작은 풀로 서서]​



이 책 군데 군데에서 찾을 수 있는 '한 포기 키 작은 풀로 서서'라는 문구는 저자의 인생관을 고스란히 그리고 종합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고백과도 같은 절절한 자기반성의 태도를 내비친다. 그것도 끊임없이.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허락없이도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 '생각'일테지만 이미 사회적 엄벌을 받고 있는 사람이 사회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자아성찰의 계기로 삼는 모습과 이토록 엄격한 자기검열적 태도를 보고 있으면 어떤 경외감 같은 감정이 밀려 온다.



저자의 자아성찰. 그 과정은 자신이 가졌던 선입견이나 편견에 대한 반성이자, 공동체를 구성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자기만 잘났다며 우쭐대는 사람들의 오만함에 대한 간접적인 폭로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인간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키작은 풀은 특별할 것는 한 포기 일뿐이지만, 그 한 포기들이 주체적으로 서있기에 풀이라는 그들의 존재를 강력히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듯 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체적이며 고귀한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 저자 자신도 사회적으로는 이미 낙인 찍히고 실패하여 한정된 공간에 자유조차 누리지 못하는 무력한 삶이지만 그런 절망속에서도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편견과 단편적인 느낌 그리고 인식만으로 재단하지 않고 주체! 그 자체로 바라보며 그런 사람들이 모여 이뤄내는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믿음과 애정어린 시선을 끝까지 유지한다.














[배움에 관하여(관념보다 인식, 인식보다 실천을)]​



20년 간의 옥중서간에 녹아있는 저자의 사색과 통찰은 그것이 아무리 특수한 환경에 놓여있는 상황이었다 할지라도 그 깊이와 세밀함은 누군가 흉내내듯 따라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저자는 옥중에서의 자신의 처지를 '한 발 걸음이라는 외로운 보행'에 비유했다. 사람이 성장하기 위한 두 다리는 인식과 실천인데, 사람이 활동을 통해 실천하고 그 실천의 결과로 인식을 얻는 이러한 순환반복을 성장의 원천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자신은 인식의 실천을 이행하는 활동을 할 수 없기에 인식은 정지하고 사고는 멈출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저자는 독서를 언급한다.


"독서는 실천이 아니며 독서는 다리가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역시 한 발 걸음이었습니다. 더구나 독서가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까닭은 그것이 한 발 걸음이라 더디다는 데에 있다기 보다 인식-인식-인식의 과정을 되풀이 하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현실의 튼튼 한 땅을 잃고 공중으로 공중으로 지극히 관념화해간다는 사실입니다"(한 발 걸음 중에서...)



오히려 저자는 책의 위험성을 경계한다.



" 저는 책에서 대단한 것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 그것은 지식은 특유의 지적 사유욕을 만족시켜 크고 복잡한 머리를 만들어 사물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의 머릿속을 뒤져 비슷한 지식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만 그것으로 외계의 사물에 대치해버리는 습관을 길러놓거나, 기껏 촌놈 겁주는 권위의 전시물로나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그런 것 인줄을 모르는 경우마저 없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지식이라 불러온 것이 사실입니다. ...지식은 책속이나 서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경험과 실천속에 그것과의 통일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피서의 계절 중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인식과 실천의 통일,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해 필요한 직접적인 '행동의 중요성'은 생전의 그를 알지 못하는 나 같은 독자들에게도 큰 깨달음을 안겨 준다. 그간 배움의 뜻을 인식의 축적에만 두었던 게 아닌가 싶었고, 성찰없이 인식만 쌓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러한 삶이 내가 진정 바라는 삶인가! 라는 물음이 나를 뒤돌아 보게 한다.














[어머니, 어머님: 20년의 세월, 옥중서간을 모아보니]​



독자들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을 한 권의 책으로 접하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독자를 위한 것도 한 번에 씌여진 것도 아니다. 20년의 세월 속에 파묻힌 한 인생의 인고의 나날들이 겹겹이 모인 결과물이다. 사실 각 편지 하나하나인 그 나날들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글이다. 그러나 편지들을 한 권의 이어진 책으로 접하는 독자들은 각 편지의 연결됨을 통해 독특한 감상 같은 걸 느낄 수 있는데, 그 감상들을 통해 저자가 편지에 직접적으로 나타내지 않은 감정들을 부수적으로 느낄 수 있다.



몇가지를 들자면,



1) 이 옥중서간은 시간의 흐름순으로 엽서가 배열되어 있다. 편지를 읽다보면 본의 아니게 추운 겨울/따듯한 겨울, 시원한 여름/더운 여름이라는 표현들이 빈번히 반복 되는 걸 알 수 있는데, 계절의 변화 무쌍함은 곧 자연의 섭리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순간 "올 여름은 덥다"고 호들갑 떨던 작년의 내가 떠오르며 부끄러워 졌다.



2)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 편지의 주된 내용도 변화해가는데, 어릴적 추억 - 인간의 관념, 사고, 행동에 대한 통찰 - 의병, 동학, 공동체 - 주위 환경(자연), 교도소 사람들(소소한 일상), 가족 등으로 주제가 넓혀져 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결국 저자의 통찰, 성찰의 방향은 스스로에서 개인으로 개인으로부터 사회에 대한 것으로 확장 됨이 짙어 진다. 이러한 구조는 이 책이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라 하나의 완결을 가진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작품으로 느끼도록한다. 이러한 것의 이유는 온전히 저자의 깊은 사색과 통찰의 결과물 임에 틀림 없고, 또 그러한 태도가 옥중 내내 내면에 간직되었기에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유기성'일 것이다.



3) 20년간의 편지 속 가장 등장하는 단어는 <더위와 추위 >그리고 <가내 평안하시리라 기원합니다.>일 것이다. 이 편지들이 일반적인 것이었다면 이러한 표현들을 의례적인 것으로 봐도 무방하겠으나, 이 옥중서간은 의례를 의례로서만 볼 수가 없다. 그 속에는 안녕을 바라는 진실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있다. <더위와 추위>는 옥중의 저자를 자나 깨나 걱정하는 노모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 반복되어 나타난 표현으로 보이고,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는 표현은 저자가 곁에서 부양하지 못하는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과 걱정이 애달프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편지 내용의 대상으로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사람은 바로 '어머님' 일 것이다. 저자가 감옥에서 흘러보낸 '나이'들에 비하면 아직 초입부 단계인 나에게 요즘 가장 큰 변화는 '부모님의 나이 듦'을 내가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저자의 상황과는 비교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자유로이 왕래하고 있음에도 그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나날이 약해지실 것을 생각하면 왠지 모를 서글픔이 커져만 간다. 부모님을 아직도 편하게 해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 같은 것일까.



평범한 삶속에 있는 나또한 이러한데, 옥중의 저자가 부모님에 대해 느끼는 죄송함은 얼마나 큰 슬픔으로 다가왔을까!. 사형수라는 크나 큰 충격을 안겨드렸고, 20여년간 지속 된 옥살이, 어머님이 할머님이 되시도록 얼굴조차 편히 보여드리지 못하는 무력한 처지 . 어쩌면 옥중의 저자에게 가장 큰 아픔은 이러한 죄책감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옥중서간에 수없이 반복된 '어머님'이라는 그 이름은 일상이라는 이름앞에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 소중함을 그것이 결여된 상황에서의 아픔과 소중함을 간접적이지만 그 어떤 이야기보다 크게 느끼도록 해준다.













[성찰하는 삶]​



성찰하는 삶은 마음가짐이자 태도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자신만 알기에 쉽게 그리고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그러하기에 자기성찰은 더욱 어렵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이지만, 복잡다단한 내 마음과 행동 그리고 욕심 앞에 자기 객관화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다.



반면 우리는 상대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에는 훨씬 적극적이다. 단편적인 면모나 이미지만으로 그 사람을 정의하려 한다. 그것이 폭력이라는 건 자신이 그 피해의 대상이 되어서야 느낄까 말까한 상황이다. 이 책의 저자는 감옥에서의 시간을 자기성찰의 계기로 삼았다. 그의 인생에서는 불행한 시간이었겠지만 그의 인고의 시간이 이 책을 읽는 우리에게는 감사하게도 성찰하는 삶의 의미와 중요성을 가슴깊이 느끼도록 돕고 있다.


















#감옥으로부터의사색#신영복#성찰#자기성찰#자아성찰#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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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0자 - 김인국 칼럼집 철수와 영희를 위한 사회 읽기 시리즈 1
김인국 지음 / 철수와영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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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어둠을 넘어서_2230자_김인국 저


[말씨를 무릅쓰고 하는 말]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사명이자 업인 김인국 신부에게 성경은 말씀의 보고이자 신도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끄는 목적과 수단 그 자체이다. 그런데 그가 성경대신 자신의 펜을 들었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말씀'에 대해 말했다. 말씀은 말을 받아서 쓰는 것이기에 무릇 성인이라 불리는 사람은 자기 말이 없는 사람과도 같다. 라고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는 신부에게 2230자라는 칼럼은 어떤 의미일까 라는 궁금증이 피어났다.
말에는 씨가 있어 한 번 퍼져 나가면 반드시 싹을 틔우는 법인데, 무엇이 김인국 신부로 하여금 그 위험을 무릅쓰도록 만들었을까 싶었다.



[시대의 어둠을 넘어]

김인국 신부의 말과 글은 자기 반성의 발로이다. 어찌보면 스스로가 속한 종교계 전체를 향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말과 글고 연명하는 자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 나라는 지옥 조선이 되고 말았다 이제 어디에다가 '봐라,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구나'를 외쳐야 할지 모르겠다 설교자의 직무란 본시 사회의 안일과 교만을 일깨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은 망했다고 믿는 젊은이들이 절반에 육박하고 있으니 그럴 일도 별로 없겠다 "
그래서였을까. 저자는 시대의 어둠과 사람들의 아픔을 크게 느끼는 듯 같기도 하다. 칼럼을 게제한 시기는 2015년 9월 부터 2018년 2월까지로 '파란만장 대한민국'이라 할 만큼 어둠도 실망도 희망도 크게 우리를 휘감던 기간이다. 저자는 아픔에 공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대의 어둠을 드러내고 아픔을 기억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2019년 현재의 시점에서 그 아픔의 시기는 과거다. 아직도 아픔을 간직한 사람이 있음에도 그 일들과 무관한 사람들에게는 과거일 뿐이다.
2230자 칼럼에서 거듭 언급되는 단어들... 세월호 참사, 국정교과서, 최순실 등 국정농단, 구의역참사, 강남역 살인 등등... 사실 모두 한 때 온 나라를 떠들석하게 했던 사건들이며 나 역시 어느 하나 처음 듣는 게 없을 정도다. 그럼에보 이 단어들을 듣는 순간 왠지모를 까막득함과 살짝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 같은 사람에겐 한 낱 사건 그것도 지나간 사건이 된지 오래였다. 왠지모를 부끄러움이 이는 듯했다.
우리는 그 일들을 잊은 듯 살지만 그래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지만, 저자의 글들은 한 번쯤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해결했기에 잊은 것이냐고! 아니면 잊음을 단순히 시간이 흐르면 다가오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편히 생각한 건 아닌지 하고 말이다.



[기억과 행동만이...]

저자는 선인들의 말이나 역사적 사건 등을 꽤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을 통해 '기억'하고 '행동'하는 사회만이 역사의 실수?를, 시대의 어둠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이고 있다. 사람들을 아프게 한 일들이 그저 우연이거나 실수의 결과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는 것으로 충분할테니 말이다. 하지만 겹겹이 쌓여온 역사는 말한다. 시대와 세월의 어둠엔 언제나 그 원인이 있다고!. 그리고 그건 다름 아닌 사람이라고!.
마을이든 사회든 국가든 그 조직을 구분짓는 층위가 있고 그 시스템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 사람들의 삶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래서 어둠을 물리치는 주체는 우리 스스로의 기억과 행동이라고 더욱 강조하는지도 모른다.

그런의미에서 촛불은 가히 혁명이라 할 만큼 크고 단단한 의미가 있다. 저자 역시 촛불의 의미를 진즉부터 생각한 듯하다.

"무력한 초 한자루가 불의에 맞서는 비무장 시민들의 유일한 압박수단이라서 그렇다. 촛불은 안으로는 재욕망을 태워 없애고 밖으로는 어둠을 비춘다 "

한낱 싹이 단단한 나무가 되듯 작디작아보이는 촛불의 시간이 불러 올 변화. 인고의 시간을 버틴 나무는나무가 되면 더이상 약하지 않다. 꺽으려면 힘쓸 작정에다 가시에 찔릴 각오까지 해야 한다. 한 때 나물이던 그것은 아무리 가늘어도 회초리가 되고 육모 방망이가 된다.



[그래도 사람이 희망, 사람과 사람 사이]

2016년 3월 온 사람들이 목격한 세기의 대결 한 편엔 사람이 아닌 알파고가 있었다. 그 결과는 그 대결 자체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사람이 만든 기계 앞에 사람이 이렇게 무력할 수 있음을 처음이자 직접적으로 실감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사람의 힘을. 기계 따위는 흉내 낼 수도 없는 사람의 숭고함을. 저자는 명동성당에 모인 선배들을 보며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져주다 짊어져주다 마지막에는 스스로 죽으러 가는 사명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숭고함이 사람들의 조직된 힘이 잘 발휘 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어떻게 잘 유지하느냐에 있다고 강조한다.
이미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것들이 누군가에겐 끝나지 않는 현재가 아닌지, 너무 깊은 아픔은 아닌지 또 그것이 시대의 어둠 때문이진 않은지...
모두가 모두이 눈이 되고 서로가 서로를 보듬을 때 시대의 어둠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종교적 신념이 드러난나는 머리말 부분을 되새기며.....

"2230자 글은 시대의 신음 같은 것이어서 고운 말씨, 고운 말씀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언제나 이 땅을 사랑하시고 이 땅의 형편 때문에 자주 끙끙 앓으시는 하느님의 애끓는 심정이 어느 한구석 한 글자에라도 묻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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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생명의 탄생 - 합성생물학은 어떻게 인공생명을 만들었는가
크레이그 벤터 지음, 김명주 옮김, 이대한 감수 / 바다출판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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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기)인공생명의 탄생_크레이그 벤터​












[일생의 진화:위대함의 70년]



1943년 2월 더블린,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당시에 발표했던 얇은 책자가 생물학에 있어 일대 획을 긋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될거라 예상한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물리학자의 지극히 물리학적인 시각이 생물학계 전반에 미친 영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20세기 중반까지 생물학자들에게 생물특성의 전이나 유전의 매개는 단백질이 실행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슈뢰딩거의 인식이 새로운 관점의 강력한 동기가 되었을까? 그로부터 우리는 DNA의 역할과 이중나선이라는 구조를 찾아 유전암호를 이해하게 되었고, 나아가 합성염색체와 합성세포를 만듦으로써 DNA가 생명의 소프트웨어임을 증명하는 데 까지 왔다.

오늘날 생명과학은 그 때를 분기점으로 하여 믿을 수 없는 창조와 변화를 이뤄 낸 것이다. 가히 과학의 위대함이란 수식으로는 부족할만큼 혁명적인 성과다.



생명공학자이자 이 책의 저자인 크레이그 벤터는 선구연구 결과물과 컴퓨팅 기술의 발달이란 토대를 바탕으로 DNA 유전 정보를 디지털화하고 합성하고 연구하여 새로운 합성세포를 창조해 내었다. 그의 이러한 연구성과는 다음 연구 목표를 위한 강한 동력과 자신감으로 발휘되어 시너지를 내주었을 뿐만아니라. 이 책의 후반부에서 주로 언급되는 생명합성 기술의 창조성과 역할에 대한 강한 긍정으로 나타나는 원천이 되어 준다.





[1943-2012 합성생물학의 위대한 발자취]​



1944년 DNA종합체가 실제로 세포에 새로운 성질을 부여하는 형질전환 인자임을 알아냈지만, 그것이 과학계에서 중심적인 생각으로 받아들여지는데에만 10년이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후 인간의 유전체 서열 해독을 가능하게 한 DNA시퀀싱 기술이 1970년대에 가능해지면서 유전정보의 디지털화가 본격화되었고 저자의 합성생명체에 대한 꿈의 첫발을 내딪게 된다.



벤터와 그의 연구팀은 H.인플루엔자균을 이용해 유전체의 염기쌍 모두를 정확히 분석하고, 2만5천개의 절편 조립에 완벽히 성공하였다. 그 이후 M.게니탈리움 유전체 그리고 고세균 유전체를 분석함으로써 최초로 생명의 세가지가 가지고 있는 유전체들 모두에 대한 조망을 제공하는 성과를 거둔다.

그리고 파이 X 174의 유전체를 복제하여 그것을 원형으로 만들고 효소로 복제한 DNA를 대장균에 감염시켜 그 바이러스의 사본을 생산하는 것에도 성공한다.

그 다음 계획은 세균의 전체 합성유전체를 창조하고 최초의 합성세포를 생산하는 일이었다.

그는 최초의 합성 염색체를 게니탈리움 jcvi-1.0이라고 명명했고, 그것이 정상적인 염색체처럼 작동할수 있는지 보기 위해 최초의 합성유전체를 세포에 이식을 시도한다.

그리고 결국 M. 카프리콜룸 세포들에 새로운 염색체가 이식된 것을 확인하였다.

그들이 얻은 것은 한종의 유전체를 다른 종인 숙주 세포에 고의로 이식한 결과로 생긴 최초의 세포였다. 이것은 사실상 한종을 다른 종을 바꾼것이었다.



그 이후 저자가 다음 목표로 고대한 것은 좀더 원대한 꿈 같은 것이었다.

새로운 정보를 생명에 넣고 컴퓨터에서 디지털 부호를 창조하고 화학 합성을 이용해 그 부호를 dna 염색체로 바꾸고 그것을 숙주 세포에 이식해 새로운 버전의 세포를 창조하는 것으로 반대 방향으로의 합성생명을 의미했다. 그렇게 창조됨 세포는 이전의 생물들과 달리 자연적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 이전에 없던 새로운 창조물인 것이다.





[합성생물학의 청사진: 생명을 출력하다]​



저자는 유전자 정보 서열 해독이라는 초기 연구를 수행하기 전부터 합성생명의 사회적 의미와 영향력을 고민해왔다고 이야기한다. 설계된 생명을 만드는 합성생명 기술이 테러리스트 등의 단체가 악용할 만한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지만 하지만 그런 연구가 제시하는 기회들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합성생물학의 미래는 장밋빛이다. 합성생물학은 미래에 식량안보, 지속가능한 에너지, 건강처럼 지구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직면한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깨끗한 에너지를 생산하고, 오염퇴치를 도울 새로운 산물들을 가져다 줄것이고, 불모지에서 농작물을 기를수 있도록 도와줄것이고, 합리적인 가격의 농산물뿐 아니라 백신을 포함한 약물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며 합성생물 연구의 당위성을 피력한다.



인공생명과 관련하여 합성생물학의 또 하나의 청사진은 먼 장소에 생명을 빛의 속도로 전송하고 창조하는 일 같은 것들이다.

그의 연구팀은 DNA 부호의 디지털 버전을 전자기파의 형태로 전송하는 그리고 그런 다음에 먼 장소에서 특별한 수신기를 이용해 생명을 창조하는 방법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이게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라고 확신하는데 우선 가까운 미래에는 개인들이 차세대 3d프린터를 이용해 문손잡이부터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시점에 이를 것이고, 지금 시점에서는 단백질 분자, 바이러스 파지, 단일 미생물 세포들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만 이 분야는 눈 깜짝할 새에 더 복잡한 생명 시스템으로 빠르게 이동할 것이라 예상한다.



그의 확고한 믿음은 우리가 불과 70년 사이에 이뤄내 온 믿을 수 없는 결과물들에 기반해 있다. 불과 20세기 중반까지도 우리는 DNA조차 제대로 몰랐다.

DNA 정보의 디지털화와 분석 그리고 합성세포 창조를 자유롭게 해내는 토대를 마련한 현재 상태에서 미래에 생물학이 진화해 갈 미래는 과거의 그것보다 아니 과거의 변화수준으로는 상상조차 불가한 것일지 모른다.



다세포 유기체가 되는 살아있는 세포로 전환하거나 출력된다는 이 공상소설 같은 말도 저자 크레이그 밴터가 이룩해 온 성과와 자신감을 엿보면 꽤 그럴듯해 보이기까지 한다. 인류와 미래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최우선을 두는 과학이라면, 그것이 꿈같은 일 일지라도 그 위대함이 꼭 실현되기를 독자로서도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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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 세기의 핵담판 쿠바 미사일 위기의 13일 마이클 돕스의 냉전 3부작
마이클 돕스 지음, 박수민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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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양상과 전쟁의 본질을 담다_1962_마이클 돕스



[1962, 누가? 왜? 결과 보다 전쟁의 양상과 본질을 담다. ]​



전쟁의 개념을 국가와 국가간의 갈등상황이 빚어낸 무력충돌로 본다고 할 때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수행하는 주체, 즉 국가가 있기 마련이다. 전쟁을 시작하고 통제하고 끝맺음 하는 주체. 최후의 결과가 어느쪽 주체의 손을 들어 줄지 알수는 없어도 전쟁이 국가와 국가, 주체 간 주도권 싸움임에는 확실히 보인다.



1962는 너무나도 확고해 보이던 이 전쟁의 주체가 희미해지는 순간들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전쟁이 지속될 수록 대립하는 각 국가 자신들도 통제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지는 모습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우리는 쿠바 핵미사일 위기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책을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이유중 하나는 전쟁의 교훈은 결과가 아니라 전쟁속에서 드러나는 전쟁의 양상과 그 본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쟁을 다룬 세부적인 기록이나 책을 통해 당시의 전쟁 상황과 배경, 경과 그 결과를 얻곤 한다. 1962는 타 전쟁 서적에 비해 전쟁상황과 경과 자체에 보다 집중한다. 13일 간 이어진 미국, 소련, 쿠바의 갈등상황에는 "꼭 말귀를 못알아먹는 개자식들이 있다니깐"이라고 말한 케네디의 표현으로 대변되는 '전쟁의 속성'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전쟁을 결정짓는 건 "개자식들"]​



1962는 쿠바 핵 미사일위기의 당사자인 미국, 소련, 쿠바의 일촉즉발의 13일의 순간을 세부적으로 담고 있다. 세기의 사건이라 불리는 만큼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정보는 방대하다. 위기 당시의 각국 정치지도자의 회고록, 수많은 관련자 인터뷰, 비밀해제 된 보안 문서, 당시 작성된 기록 등 그것도 각 국가별로 수집, 분석하여 그 때의 상황을 재구성하고 있다.





당시 위기의 심각성과 생생함은 두 초대강국 지도자들의 회고록과 인터뷰 자료를 통해 탄탄히 뒷받침 되고 있다. 갈등상황에서의 두 지도자의 태도나 심경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쿠바 핵무기 위기의 결과뿐 아니라 전쟁의 본질을 규정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개자식"으로 표현되는 케네디의 말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전달해주는 정보이다.



케네디는 이 말을 쿠바핵미사일 위기가 촌각을 다투고 있던, 알수없는 혼란속에 모두가 빠져 허우적 되던, 검은 토요일(10/27)에 공기시료 채취를 위해 알래스카로 보냈던 미군 U2 정찰기가 소련 영공을 무단 침공한 사실을 보고 받고 케네디 대통령이 내밷은 말이다.



케네디는 태평양 전쟁을 잠수정을 지휘하면서 몸소 겪은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과 파멸적 결론과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갈등의 수준과 양상이 심화고조되는 상황속에서도 평화적 해법을 늘 함께 고민하던 대통령이었다. 그런 그에게 검은 토요일은 대통령인 자신도 어찌하지못하는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도미노 처럼 번지고 있던 통제 불가의 위기 순간이었다.



전쟁의 시작은 두 국가, 좀 더 엄밀히는 두 지도자의 결정으로 시작되었지만, 전쟁상황이 지속되기 시작하면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이나 전쟁기계들은 자체적인 논리와 관성을 갖게 된다. 즉 위기 자체가 관성을 가지게 되어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번지는 것이다.



검은 토요일 이런 우려는 케네디 대통령 만의 몫은 아니었다. 소련의 수장 흐루쇼프 서기장은 쿠바에 배치된 소련군 방공부대 sam이 쿠바 상공을 저공 정찰하던 미군 U2 정찰기를 격추시켰다는 보고를 전해 받는다. 그는 전투태세 격상을 쿠바에 명령했었지만 핵미사일의 발사나 전쟁승인은 본인의 통제 아래에 두려고 했었다. 흐루쇼프 역시 케네디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혹한 결과를 이해하고 있던 사람으로서 핵 무기로 무장한 두 초강대국 간의 무력전 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런 흐루쇼프는 쿠바 지도자 카스트로의 요청만으로 소련군 지휘관이 미군 정찰기를 격추시켰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고 두려워했다.



쿠바 핵미사일위기의 진짜 위기는 케네디와 흐루쇼프간의 사상과 의지의 충돌이 아니라 두 지도자의 통제를 벗어나며 생기는 예기치 못한 "개자식"들을 얼마나 잘 통제할수 있느냐에 달려있었다






[전쟁의 결과: 여러분 지도자의 품성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쿠바 핵미사일 위기가 핵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결과로 쿠바미사일 위기는 갈등관리 및 전쟁 관리의 위대한 승리라는 자신감을 미국에게 안겨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쿠바 미사일위기가 전쟁 당사자들이 통제 가능한 상황 속에 있었다는 별 것 아니었다는 오해?를 주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1962를 통해 갈등해소 직후의 양상을 꼼꼼히 따져 보아야 한다. 10월28일 일요일, 쿠바와 터키 미사일 기지 맞교환이라는 양국의 물밑 합의가 이뤄지자 마자, 그에 따라 흐루쇼프의 케네디에 대한 메시지가 전세계에 방송되면서 갈등은 극적으로 해소되었다.





흐루쇼프와 케네디는 안도하였다. 하지만 그순간 미 백악관과 펜타곤의 분위기는 정말 딴판이었다. 갈등 해소 라디오 방송 순간에도 펜타곤을 10월 30일로 예정 된 쿠바 침공 계획을 다듬고 있었다. 그늘은 흐루쇼프의 갈등 해소 발포를 믿지 않았다. 미국을 향한 기만이자 허위행위라 생각했다. 전쟁 준비는 수뇌부의 머리속에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미국전역에는 미사일과 전투기가 대기 중이었다. 쿠바의 카스트로는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미국과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목숨을 잃더라도 미국과 싸우기 위해 미사일을 옮기며 전투태세를 완벽히 준비하고 있었다. 소련쪽에서도 흐루숖는 평화적 해법도 같이 고민하였지만 현장의 지휘관들은 전쟁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갈등 상황이 지속되어 전쟁 자체가 가지는 관성이 약간이라도 더 강해졌다라면 그 결과는 전혀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평화로운 결과를 맞은 것은 순전히 두 지도자의 품성 덕분이다.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패권 경쟁을 마다 않는 초강대국의 수장이면서도 핵전쟁 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인간애를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는 각국 수뇌부들의 생각과도 다른 것이었다. 흐루쇼프가 아닌 다른 서기장이었다면 쿠바 카스트로의 확전 요청에 응해 전쟁의 파국으로 접어들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고, 케네디와 함께 해법을 고민했던 엑스콤 자문위원들도 12명중 절반이 쿠바 침공을 계속 지지했다는 사실에서 그들중 누구하나라도 미국의,대통령이 었다면 이 역사적 사실의 결과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란 걸 알 수 있다. 저자는 우리가 핵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그 때 백악관에 케네디가 있었고, 크렘린에 흐루쇼프가 있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오늘날 그런 위기가 다시 발생한다면?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는 이유]​



오늘날 쿠바 위기가 만약 재현된다면 어떻게 될까? 케네디 대통령과 흐루쇼프 서기장이 다시 살아돌아온대도 잔쟁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쿠바핵미사일 위기는 냉전이자 정보전이었지만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잘못된 정보들이 사실인양 많이 보고되고 그것이 군사적 행동 결정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이러한 잘못된 정보들로 예기치 않은 혹은 잘못된 행동과 오해를 낳았지만 그와 동시에 위기 자체를 억제시킨 면도 있다. 미국과 소련의 평화적 합의가 이뤄질 수 있었던 이유 중엔 미국과 소련의 상대에 대한 잘못된 판단과 그로인한 두려움이라는 원천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9년을 사는 오늘날은 어떤가? 무기의 파괴력은 비교도 못할 수준으로 향상되었고 상대의 침범이나 공격을 인식하고 대응하는 정보 체계는 말할 수 없이 세세하고 예민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수분아닌 수초내에 정밀 타격이 가능하다. 전쟁의 파괴력이 향상된 반면 한번 전쟁이 시작되면 발휘되는 전쟁기제와 관성은 여전하다. 전쟁은 시작되기만 하면 시간이 갈수록 멈추기 어려워지는 그 속성은 변함없다.



간디와 부처가 지도자로 있더라도 갈등상황에서 전쟁을 막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모두가 전쟁가능성에 유심히 지켜보고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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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과 함께하는 유럽사 산책
김경화 외 지음 / 글항아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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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문장은 이미 누구나에게 친숙하다(feat, 스타벅스)>​



책 프롤로그에 나오는 저자의 "문장이라 하면 어떤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르냐?"는 질문에 나라면 단연코 sentence를 떠올렸을 것이다.(이 책을 집어들지 않았다면). 아니 문장이 문장(sentence)이지 다른 문장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허나 신세대?들에게 문장의 이미지를 물으면 문장(sentence)이 아니라 다른 문장(emblem) 을 떠올린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이 자체로 내가 구세대?임을 명확히 자각하게 해준 질문이면서, 동시에 내가 모른다고 여긴 나와는 접합지점이 하나도 없을 문장(엠블럼으로서의)이 실은 나와 나같은 사람 모두에게 생활 깊숙이 연관되어 있구나 하는 새로운 인식을 안겨다 주었다.

바로 우리 주위에서 친숙하게 접하는 기업로고나 스포츠구단 마크, 국가의 국기는 모두 그 기원이 문장으로부터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커피를 밖에서 사먹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타벅스 로고를 알 것이다. 어디 신화에 나올 법한 여자(바다의 신 사이렌을 형상화)와 강렬한 녹색의 원형 마크. 1971년 미국 시애틀의 조그만 항구에서 시작한 스타벅스가 전세계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는 지금, 스타벅스의 기업로고는 스타벅스를 다른 커피 프랜차이즈와 분별하게 하는 표식으로 역할한다. 하지만 스타벅스 로고에는 단순한 표식으로서의 역할 외에 창업주의 창업계기, 신념과 가치와 연관된 총체적인 정체성이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중세 전쟁에서 적과 아군을 식별하기 위해, 그리고 가문과 제국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해 활용 되었던 문장의 역사를 살펴 본 다면 스타벅스와 같은 오늘날의 기업로고가 문장에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알면 알수록 다양하고 흥미로운 문장의 변천사>​



이렇듯 문장은 중세시대 전투에서 피아 식별을 위한 목적에 기원하고 있다. 문장을 영어로 하면 coat of arms이다. 문장은 중세 기사가 갑옷 위에 걸치던 코트에 수로 놓은 문양을 뜻했다. 문장을 관리하는 문장관이 전시에는 메신저 역할을 , 평화시에는 마상 창 시합에서 무기 관리와 심판의 역할을 하게 된 것도 다 문장이 전투에 기원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문장이 전쟁에 활용된 직접적인 계기는 바로 십자군 원정이다.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에게 빼앗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유럽 각지의 전사들이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 수차례에 걸쳐 일으킨 싸움이다. 유럽각지의 전사들이 모이다 보니 소통과 단합의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이 전쟁의 현장에서 선택된 게 공통의 문양 문장이었다. 십자군 원정을 치르면서 특정 문양을 넣은 웃옷과 방패 문장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전장의 식별 수단은 점차 봉건 엘리트들이 자신의 통치 범위를 표시하고 봉건적 친분관계를 드러내는 사회적 수단으로 변모해갔다.

문장은 사유재산 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세의 계약에서 빠지지 않았던게 인장인데 12세기 이후 유럽 전역에서 차츰 인장 대신 문장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표식에서 결혼과 분가까지 표시하게 되면서 문장은 더욱 복잡해졌다. 영국 귀족이자 정치 명문가인 텔름-누겐트-브릿지스-찬도스-그레빌 가문의 문장은 719개의 세부문장의 복합으로 되어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가문의 역사를 알수 있다. 식별 기능은 포기한 채 가문의 긍지를 한껏 내세우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렇듯 문장이 여타 상징과 구별되는 특징은 계승된다는 점이었다.








넓은 의미에서 문장은 개인과 가족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나타내는 서구 유럽의 시각 상징이었다.



독수리는 로마뿐 아니라 로마가 지배하는 모든 나라에서 로마 제국 자체로 인식되었고, 프랑스에선 3백합이 첨가 된 헨리 4세의 문장은 이후 다른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치며 확산되어 간다. 영국에서는 프랑스의 백합이 엘리자베스 1세 때까지 왕실을 대표하였다.



전쟁터에서 기사의 역할을 쇠퇴 한 뒤에도 마상 창 시합에서 중세 기사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이에 따라 문장이 역할도 보다 다양하고 분명해진다. 토너먼트에 앞서 문장, 깃발, 투구가 전시되는 장면을 보면 여기서 문장관을 비롯한 관객과 귀부인들이 누가 시합에 참가하는지 가늠 할 수 있다. 화려한 깃발과 무장, 무구는 축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하늘과 땅의 권위와 결합하다>​



교회는 처음에 세속의 언어로 가득찬 문장을 혐오했다. 하느님의 나라 보다 속세의 성공을 기리는 문장이 좋아 보일리 없었다. 하지만 13세기 고딕양식의 발전으로 교회 창문은 더 높아졌고 스테인드글라스가 창문을 수놓으면서 빛의 성소로 변한 교회 안으로 문장이 들어왔다. 교황과 성인의 업적뿐만 아니라 성스러움의 신비를 가르치는 데 문장이 큰 도움이 되었다.




평범한 프랑스의 상징이던 백합은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나면서 종교적 의미를 덧입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왕실에 정착했다. 동물 문장이 선호되는 서양에서 백합처럼 식물 문장이 사랑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백합이 삼위일체의 숭고한 의미를 부각시켜주는 디자인적 요소를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속의 성공에 하늘의 영광까지 덧입혀지면서 문장은 인장의 법적 효력을 대신하게 되었고 결혼과 장례와 같은 의식은 물론 상품에까지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용도로 까지 확장되어 간다.



문장은 나라의 국기에도 영향을 주는데,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상황에서 이 같은 문장의 역할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세계 영토를 놓고 싸우면서 서로 물러서지 않았다. 이에 교황은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1529년 사라고사 조약을 통해 대서양 한가운데를 경선으로 나눠 새로 발견된 땅의 서족은 스페인이 동쪽은 포르투갈이 갖는 걸로 보았다. 16세기의 문장은 가문과 왕실의 권위를 의미하는 데서 발전해 국가와 국가의 권력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우리가 국가의 상징으로 떠올리는 국기의 역할을 16세기 문장이 이미하고 있었다.







<문장 속에 깃든 살아 숨쉬는 유럽의 역사와 문화>



이태리 밀라노의 상징 중 하나로 비시오네(큰 뱀)가 있다. 비시오네는 밀라노의 거리 건축물이나 인터밀란의 어웨이 유니폼으로 사용 될 만큼 밀라노의 상징과도 같다. 비시오네는 큰 청색 뱀으로 비스콘티 가문이 십자군 원정 때 이 상징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큰 뱀에 대한 인식은 일반적으로 혐오스런 동물에 가깝고 더구나 서양에서 잘쓰지 않는 뱀이 어떻게 문장에 들어가고 상징이 되었을까?





역사학자 줄리아 카츠위츠는 비스콘티 가문의 문장 속 뱀은 언뜻보기에 사람을 잡아먹는 형상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낳는 모습이라 말한다. 뱀은 보통 머리부터 먹는데 문장에서의 다리부터 먹는 모습은 먹는게 아니라 낳고 있는 걸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뱀이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생산적이라는 인식은 다른 문화권에서도 발견된다.

성경에서 뱀은 사악한 이미지로 나오지만 고대 신화나 종교에서 보면 뱀은 대대로 허물을 벗고 재생하고 부활하는 이미지였다. 문장에 깃든 역사와 문화는 오늘날의 인식의 뿌리와 원천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뱀에게 덧씌우진 기존의 인식 말고 새로운 시선으로 봐라봐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오는날에도 우리에게 문장이 필요한 이유>​



문장의 흔적이 오늘날에도 직접적으로 남아있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국기이다. 문장의 도형모양 중에서 수직삼분할, 수평삼분할, 십자가, 캔턴이 국기에 많이 응용되었다.




문장의 도형 뿐만아니라 상징적인 색들도 응용되었는데, 힘을 과시했던 구소련의 국기를 보면 문장으이 바탕으로 가장 많이 쓰였던 노랑과 문장 형상의 색으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됐던 빨강을 이용해 단결된 연방의 힘을 강조하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의 가봉의 문장을 보면 삼분할된 유럽식 문장을 쓰고 있지만 서포터로 등장하는 동물은 그 나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블랙팬더다. 유럽의 정신을 따르고는 있지만 자국의 주체성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알 수 있다.



문장의 문법과 언어를 오늘날에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장은 중세 1000년이 비축한 역사이며, 착용자의 정체성 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까지도 담고 있다.

현대에도 중세 문장의 영향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강해지고 있다. 이것은 유럽에 국한 된 것은 아닌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동양에 살고 있는 우리가 문장을 공부하고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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