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연필 모으는 남자
앙리 퀴에코 지음, 남수인 옮김 / 샘터사 / 2005년 5월
절판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뉜다. 버리는 부류와 간직하는 부류이다. 그것은 가풍에서 비롯된다. 우리 부모님은 간직하는 쪽이었다. 부모님은 무엇이건 곳간에 보관하였다. 곳간에서 토끼도 길렀는데, 놈들은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놈들은 자동차 타이어조차 쪼아댔다. 때는 전시였다. 그런 땐 간직하는 부류가 유리했다. 내가 아는 어느 할머니는 무엇 하나 버리는 법이 없었고, 무용지물의 보물들을 신발 상자에 넣어놓았다. 일생동안, 특히 쓸모없는 끈 조각들을 모아서, 상자 뚜껑에 '쓸모없는 끈 조각들'이라고 써 두었다.-13쪽

나는 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로 인색해서는 아니고, 다만 나 자신을 분산시키기를, 분열시키기를 좋아하지 않아서이다. 자기를 분산시키는 것은 앞으로 올 즐거움을 망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왜 자기가 끈질기게 시도하는지, 왜 바보처럼 그렇게 고생을 사서하는지 자문하는 예술가에게 작업은 몹시 힘든 것이다. 때로 그런 회의에 덧붙여 자기가 쓸데없이 일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면 그는 의욕을 잃고 만다.-157쪽

매일 하루에 하나, 그리고 매순간 변하는 하늘. 밝아졌다 어두어졌다하는 하늘. 저녁 하늘 역시 한없이 많다. 노랗구나 하면 어느새 오렌지 빛이고 빨개진 하늘, 꼭 빨갛다곤 할 수 없는 붉은색조의 하늘이 지는 태양을 어떻게 에메랄드빛 녹색으로, 아니 그보다는 베로네즈색으로 만드는지 알 수 없는 하늘, 강렬하고 투명한 하늘, 우리가 비행기로, 시선으로 횡단하는 하늘, 현기증이 되는 하늘, 검청색 자켓 무늬에 금장식을 늘어뜨린, 폭우를 쏟아내는 하늘. 진노한 하나님의 하늘들. 지붕의 기와들이 이를 갈고, 하늘은 흥분하여 날뛰며 자기 몸에 전기로 얼룩무늬를 그린다. 시원한 여름밤의 하늘. 사람들이 한없이 뛰어드는 별들의 밤들, 꽃불이 가득 흩뿌려진 우윳빛 하늘.-181쪽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광물이건 식물이건, 이 모든 물체들은 우리 인간들보다 훨씬 오래 생존하며 생존하는 동안, 어쩌면 서로 관찰하고 도전하고 미워하고 경멸하는지도 모른다. 몽당연필들은 무해하여 함께 장난하고 놀 수 있다. 그러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면 연필과의 관계는 시련이 된다.-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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