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절판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가 책을 구경한 것은 가져간 원숭이와 잉꼬를 판 날이었다.
그는 여선생이 보여 주는 책들을 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동에 휩싸였다. 대략 50여 권을 헤아리는 책들이 선반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그는 그날부터 그 즈음 구입한 돋보기 안경을 쓰고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살펴 나가기 시작했는데, 나름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결정하기까지는 그때부터 다섯 달 정도가 흐른 뒤였다. 그사이 그는 여러 책을 보며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묻고 되물었다.-85쪽

그는 기하학 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 과연 그 책이 머리를 싸매고 들여다볼 만한 책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는 그 책 속에서 아주 긴 문장 하나를 기억했는데, 그것은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은 직각의 맞은편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따금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혼자 중얼거리게 되는 말이자 나중에 엘 이딜리오 주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말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기이한 욕설이나 주문처럼 들렸던 것이다.-85쪽

역사에 관한 책은 마치 거짓말을 꾸며 놓은 것 같았다. 팔꿈치까지 올라가는 긴 장갑과 곡예사처럼 착 달라붙은 바지 차림에 잘 말려 올린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는 그런 연약한 인물들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그런 자들은 파리 한 마리도 죽일 수 없는 존재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역사 이야기도 그가 좋아하는 책에서 제외되었다.-86쪽

그가 엘 도라도에 머무는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책은 에드몬드 데 아미치스의 소설, 특히 [사랑의 학교]였다. 그는 그 책을 거의 손에서 떼지 않은 채 눈이 아프도록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눈물을 쥐어짜며 그 책을 들여다보던 그의 마음 한구석에 주인공이 겪는 불행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 많은 불행이 한 사람에게만 들이닥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롬바르디아의 소년에게 그토록 참기 힘든 고통을 안겨 주는 내용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비겁하다는 느낌이 들자 그 책을 덮어 버리고 말았다.-86쪽

그러던 어느날 그는 플로렌스 바클레이의 [로사리오]를 펼쳤다. 그 책은 어쩌면 그가 진작부터 찾아 헤매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책에 담긴 것은 사랑, 온통 사랑이었다. 그 책은 등장 인물들의 아픔과 인내를 얼마나 아름다운 방법으로 묘사해 놓았는지 줄줄 흘러 내리는 눈물에 돋보기가 흥건히 젖을 정도였다-87쪽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여선생-그와 독서 취향이 똑같지 않았다-의 허락을 받아 그 책을 가지고 엘 이딜리오로 돌아왔는데, 그 책은 그가 오두막의 창문 앞에서 수없이 읽고 또 읽은 텍스트가 되었다.그리고 그 책은 나중에 치과 의사가 가져다 준, 세월보다 더 끈질긴 사랑과 불행을 담고 있는, 다른 책들과 함께 지금처럼 마음이 착잡해진 노인이 다시 찾아 줄때를 기다리며 다리가 긴 탁자 위를 차지하게 되었다.-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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