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슈만이 나의 최애 작곡가가 되었다. 클래식 음악을 폭넓게 듣지 않고 피아노 곡만 편애해서 '가장 좋아한다'라는 말을 붙이긴 성급하긴 하지만 최소한 지금까지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리스트, 슈베르트, 쇼팽,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라벨, 프로코피예프 등의 다른 작곡가들의 곡 중에서도 들을 때면 감탄하고 황홀경에 취하며 눈물을 흘리는 곡들이 있지만 감탄하고 존경하며 감동하는 차원과 별개로 슈만의 피아노 곡에 유독 마음이 안절부절하며 흔들린다. 슈만의 음악을 들을 때면 가슴이 간질거리고 아주 깊은 곳에서 잔잔하게 슬픔이나 기쁨이 한 방울씩 고이고............ 미칠 것 같다!
작년까지만 해도 슈만은 아무리 들어도, 어디를 좋아해야 하는지 종잡을 수 없고, 내내 웅얼거리기만 하는 거 같고, 모호했다. 기승전결의 꽉 짜인 서사로 된 소나타를 좋아하고, 극적이며 파국적으로 치달아가는 음악에서 재미와 감동을 느껴온 터라 어디로 가는지(가령 쇼팽 소나타 3번이나 리스트 소나타, 아니면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3번 같이), 뭘 말하려는지 모르겠는 슈만은 너무나 어려웠다. 하지만 슈만을 정말 이해하고 싶었다. 그건 순전히 조성진이 슈만의 유모레스크와 숲의 정경을 연주했기 때문이었고 오로지 '덕심' 하나로 유모레스크를 백 번은 넘게 들었다. 하지만 실연을 여러 번 보아도 감동이 쉽게 밀려오지 않았다. 몇 번 울컥하는 순간들이 있긴 했지만, 곡을 이해하진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밤. 백건우의 슈만 앨범을 플레이했는데 마음이 확 얼어붙으며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백건우의 슈만 앨범엔 아베크 변주곡과 어린이 정경, 숲의 정경같이 슈만 곡 중에선 '푸르다'라고 할 수 있는 곡들과, 새벽의 노래나, 밤의 소곡, 유령 변주곡처럼 '황폐화된' 곡이 담겨 있다. 백건우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곡에서조차 뭔가를 다 놓아버린 듯했고, 숲의 정경에선 어둡고 축축한 안개 낀 숲을 보여줬고, 유령 변주곡에서는 말 그대로 유령처럼 연주했다. 이게 슈만인가.... 그리고 공연을 갔다. 마침 내 자리가 피아노 뚜껑이 정면으로 열리는 합창석 자리였는데 피아노의 생소리가 귓구멍으로 그대로 꽂혀들어왔다. 그때 기록에 '소리가 심장에 와서 박혔다'라고 썼는데 과장이 아니었다. 70대의 피아니스트가 들려주는 인생을 다 알아버린 현자 같은 연주 덕에 슈만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마음이 무방비로 열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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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슈만 연주를 찾아 듣기 시작했다. 20대 피아니스트인 문지영의 앨범을 접했을 땐, 빛으로 가득 찬 슈만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슈만 판타지 3악장에선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가는 기쁨의 망울을 느낄 수 있었다. 절망과 우울, 슬픔, 낙담에 침체되어 있어 있지만 그 안에서 한 올 한 올 뭔가를 찾아낸다. 어둠 속의 희망 같은 거. 하지만 대놓고 빛나지 않아서 조심히 잘 닦아가며 보아야 보인다.
문지영은 결코 과시적이지 않은 사려 깊은 연주를 들려준다고 생각하는데, 슈만 역시도 어느 선을 넘지 않으면서 터지기 직전에서 차오름을 꾹꾹 눌러댄다. 눈에 눈물이 한 방울 가득 고여 있지만 말은 또박또박하는 그런 모습이 늘 연상이 된달까. 슈만 판타지는 내가 얼마 알지 않는 피아노곡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곡이 되었고 그래서 꽤 많이 찾아들어봤는데,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이 아니면(리히터처럼) 문지영의 판타지 3악장 연주가 지금까지도 나는 가장 좋다. 한 음 한 음 약간씩 뜸 들이면서 멈칫하는 여지가 있고, 차오르는 감정을 담담하고 담백하게 드러내면서 절정까지 차곡차곡 도달하는 거. 언제 들어도 내 눈물 버튼이다.
슈만의 곡에 빠져들면서 미셸 슈나이더의 <내면의 풍경>을 한 달 동안 음악을 들으면서 읽어나갔고, 콩브레 마을에서 슈만 세미나를 하면서 슈만의 어법을 알게 되었다. 갑자기 시작하고 갑자기 끝나버리고. 플로레스탄이라는 정열적이고 공격적인 자아와 오이제비우스라는 온유한 자아가 교차하고, 당김음과 급작스러운 불협화음이 많이 쓰이고. 아는 만큼 들리고 들리는 만큼 좋아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지 모르겠는데, 많이 듣기로는 쇼팽이나 베토벤의 피아노 곡도 꽤 들었지만 슈만의 음악에 내 정서가 유독 반응하는 뭔가가 있는 거 같다.
"이 음악은 종종 힘겹고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음악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것을 건드린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광기, 우리 자신의 죽음을. 슈만을 연주할 때 우리는 쇼팽이나 브람스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거의 기쁨을 느낄 수 없다. 마치 그런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될까 봐. 그로부터 나올 수 없을까 봐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왜 하필이면 이런 음악일까? 이런 음악은 상처 입은 살갗, 일상의 균열, 완만한 고통의 점령, 돌연 민낯을 드러낸 삶이나 다름없다." <미셸 슈나이더- 슈만. 내면의 풍경>
슈만의 피아노 곡들은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는다. 대신 콕콕 쑤시며 들어온다. 전엔 짧은 곡들의 모음이 서사 없이 툭툭 끊기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는데, 지금은 찰나를 딱 잡아채어 그 순간을 늘려서 보여주는 것에 설득 당한다. 난데없이 시작해서 돌연 끊겨버리는 음악이 당혹스럽다기보다는 그럴만하지, 싶게 들린다. 슈만의 서정적인 곡에서 들려주는 선율에 가슴이 찡하기도 하지만 플로레스탄 자아가 나올 때 널뛰어내대는 급박함과 불안정함에 자주 꽂히는데, 장난기 어린 듯하면서도 유치한 리듬이 튀어나와 언제 끝날지 모르게 반복될 때 아.. 너무나 좋다. 이에 대해 미셸 슈나이더는 "진부한 화성적 급변, 리듬 상의 왜곡과 유치한 멜로디가 이따금 작품의 가장 밀도 높은 내부로 끼어든다"라고 표현했다.
이런 부분을 들으면서 슈만이 머리채를 풀었다고 말하곤 한다. 슈만의 광기는 외향적으로 폭발시키는 광기가 아니라 저 깊숙한데 나사 하나가 풀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하고 간당간당한 내향형 광기라고 보아진다. 겉으론 평정을 유지하지만 속은 들끓고 난잡한 상태. 그것이 슈나이더의 표현대로 알고 싶지 않은 것을 건드린다. 슈만의 음악은 과시적이지 않고 서사를 매끄럽게 다듬지 않는다. 꾸밈없이 균열과 분열을 드러낸다. 정점으로 도달할 거 같다가 그 앞에서 멈춰버리고 좀 적당히 맛만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방향을 잃을 채 직진만 하거나 갑자기 틀어버린다. 카타르시스와 몰입을 끊어버리고 듣는 이의 기대를 무심하게 배반해버린다.
나는 이게 꼭 우리 삶 같다고 느낀다. 자신을 영웅처럼 그리거나 미화시킨 곡들에선 없는 것! 너무나 솔직하다. 손열음이나 문지영이 슈만을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로 뽑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슈만의 곡에 꽂히게 되면 자신과 동일시가 잘 될 수밖에 없다. 우린 영웅이 아니니까. 슈만은 지극히 내면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내면은 슈베르트의 자기 연민이나 쇼팽의 노스탤지어와는 다른 '생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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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3악장 다음으로 좋아하는 곡. 빈 사육제에 있는 4번째 곡, 인터메조. 난데없음, 어딘가로 달려감, 위태로움, 울 것 같지만 터트리지 않는 울음. 슈만의 모든 것이 압축적으로 들어있다고 느껴지는 곡. 영상에서 이 곡을 연주하는 뤼까 드바르그는 내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데, 다 깨우친듯한 성숙한 연주는 아닐지 몰라도 까칠하면서 예민하고 섬세하게 연주해서 좋아한다.
조성진으로 돌아와 들어보면, 유모레스크는 무관중이었던 이때 연주가 정말 좋다. 그 사이에 내가 슈만과 더 친해져서인지 조성진의 연주도 무르익어서인지, 무관중인 쓸쓸함이 비극적 느낌을 고조시킨 것인지는 모르겠다. 슈나이더는 이 곡을 "여러 기분이 내적으로 한꺼번에 뒤섞여 있는 상태의 고통과 웃음"이라고 표현했다. 비극적이면서도 명랑하고, 두려움을 요란한 웃음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아, 미칠 거 같아!
슈만을 좋아하는만큼 슈만 연주는 오로지 이 연주자! 하는 건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연주마다 각기 다른 개성으로 보여지는 슈만의 모습을 더 좋아한다.
인생을 초월한 백건우의 슈만.
장난끼와 쓰라림이 공존하는 조성진의 슈만.
문지영의 사려깊은 슈만.
미켈란젤리의 쿨한 슈만.
리히터의 음침하고 어두운 슈만.
라두루푸의 순수한 슈만.
그리고 슈만다움이 뭔지를 그대로 들려주는 데무스의 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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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했던 음악감상회에서 슈만의 음악이 횡설수설하게 느껴진다, 핵심만 말하는게 좋다는 '이성파'와 슈만의 몽상가적이고 감정적인 음악,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이야기가 좋다는 '감성파'로 나뉘어 열띠게 이야기를 나눴다. 음악을 좋아하는 취향이 개인의 성정이나 직업에서 오는 특성을 반영한다고 할 때......한 분이 내 글은 무지 논리적인데...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슈만을 가장 좋아하는 게 신기하다고 하셨다.
나는 슈만을 들으며 너무 나 같다, 이건 내 이야기 같다며 느껴왔는데, 글이나 일할 때 보이는 면과 음악을 듣거나 혼자 있을 때 튀어나오는 내 자아가 반대라는 걸 알고는 있었으나 이걸 슈만에 대입해 보는 건 생각해 보지는 못했다. 나는 글로는 언뜻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론 매우 충동적이고 감정적이다. 아침에 곡 하나 잘못 들어다가 그날 해야 할 일을 못하고 넋 놓고 있는 일도 빈번하다. 일하는 자아, 글쓰는 자아, 육아하는 자아, 음악 듣는 자아 등, 누군들 안 그러겠냐만 내 안에도 내가 너무 많다. 각 때마다 적당한 자아를 끄집어 낸다. 두개의 캐릭터로 자신을 분리해 곡을 쓰고, 여러 인물을 창조해 평론을 쓰곤 했던 슈만에게 심하게 공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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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취향만큼 그 사람을 잘 드러내는 것이 있을까? 저마다 좋아하는 작곡가의 음악을 즐기는 방식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특정 작곡가를 택했다는 사실은 그의 내면 세계와 욕망, 꿈 모두를 아우르는 총체로서 한 명을 택했다는 의미다. (...)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몸을 슈만 음악의 리듬, 화성과 동일시 했다.
"슈만을 어떻게 듣냐고요? 나는 슈만을 연인이라고 생각하면서 듣습니다. ...나는 내가 언제나 슈만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마땅히 받아야할 사랑을 못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해봤을 겁니다. 나는 우리가 슈만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민감하게 느낍니다. (롤랑바르트) " <프랑수아 누델만 - 건반위의 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