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의 가장자리 - 부서진 유년의 파편에서 출현한 신경과학자 이야기
데이비드 수실로 지음, 이충호 옮김 / 북하우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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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환경에서 출발한 사람들의 삶은 왜 그토록 다른 곳에 도착하는 걸까. 약물에 중독된 부모와 가난, 불안정한 양육 환경과 보육원 생활을 거친 데이비드 수실로는 자신과 비슷한 출발점에 있었던 사람들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무엇이 그들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끈 것일까. 수실로는 수많은 조건과 우연, 선택과 관계를 따라가며 이 오래된 질문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다.

책을 읽으며 나는 그 차이를 만들어낸 요인 가운데 하나가 수실로가 좀처럼 ‘묻기를 그만두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데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부모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자신은 왜 이곳에 있는지, 컴퓨터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간은 어떤 과정을 거쳐 판단하고 결정하는지 끊임없이 궁금해한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물러나기보다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 그 내부를 들여다보려 한다.

그 태도는 과학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대할 때에도 이어진다.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놓였는지 생각하고,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찾는다. 그의 삶에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도움을 건넨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역시 필요한 도움을 구하고 요청할 줄 알았다. 수실로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회복력이란 고통을 홀로 견뎌내는 강인함이라기보다,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질문하며 다음 가능성을 찾아가는 능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좋아했던 성경의 문장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구하면 얻을 것이다’처럼 말이다.

아주 작은 차이에서 시작된 선택들은 오랜 시간 쌓이며 처음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거리까지 서로의 삶을 벌려놓기도 한다. 우연히 만난 컴퓨터와 그의 가능성을 발견해준 사람들, 새로운 환경으로 나아갈 기회와 스스로 내린 선택들이 서로 얽히며 수실로의 삶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말하는 카오스와 창발은 과학적 개념을 넘어 인간의 생애를 바라보는 흥미로운 관점이 된다. 삶은 예측할 수 없기에 위태롭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직 펼쳐지지 않은 가능성을 품는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삶을 따라가는 감정적 경험과 인간의 뇌를 이해하는 지적 경험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점에서 드물고도 매력적이다. 한 편의 성장소설처럼 읽히는 동시에 과학서로서도 충분한 지적 흥미를 준다. 개인의 기억과 과학적 질문이 끊임없이 만나 서로를 비추며, 한 인간이 만들어지는 창발의 과정을 눈앞에 펼쳐 보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게 한다. 지금의 나는 어떤 우연과 선택을 거쳐 여기까지 왔을까. 필연이라고 믿었던 것들 사이에도 수많은 우연이 있었고,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일들 가운데에는 오랫동안 쌓아온 선택의 결과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과거의 어느 한순간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도, 주어진 모든 조건을 선택할 수도 없다. 그러나 아직 품지 않은 질문과 내리지 않은 선택이 남아 있는 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 역시 남아 있다.

한 소년의 고통스러운 유년에서 출발해 뇌와 의식, 인공지능과 인간 존재를 지나 마침내 독자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책. 『카오스의 가장자리』는 감성과 지성을 함께 움직이며 예측할 수 없기에 아직 열려 있는 삶에 희망을 품게 한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 지나온 모든 것의 결과라면, 앞으로의 나는 또 어떤 질문과 선택 속에서 새롭게 나타나게 될까. 탁월하고도 용기 있는 지적 성장서다.

#카오스의가장자리 #데이비드수실로 #에세이추천 #도서추천 #서평

*도서증정 @bookhouse_official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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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극장으로 읽다
이대환 지음 / 시공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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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오페라를 음악이 아닌 ‘공간’을 통해 바라보게 되었다. 그 공간을 따라가다 보니 뜻밖에도 유럽의 역사와 문화, 인간의 욕망과 예술을 향한 애정까지 하나의 다채로운 흐름 안에서 만날 수 있었다.

연극에서 출발해 음악과 연기, 무대와 건축이 결합된 종합예술로 발전한 오페라는 수백 년 동안 유럽 사회의 변화와 함께해왔다. 오페라 극장은 단순히 음악을 감상하는 장소가 아니라 한 시대의 권력과 욕망, 기술과 미학이 교차하고 수많은 사람의 예술을 향한 열망이 켜켜이 쌓여온 공간이다. 정치와 종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전쟁과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했다. 한 시대의 취향과 가치관까지 극장이라는 공간 안에 축적되어온 것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렇게 사라진 극장을 다시 세우기 위해 귀족뿐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까지 나섰다는 사실이다. 먹고사는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예술을 위해 많은 사람이 시간과 돈을 내어놓았다는 것은 그들에게 오페라가 단순한 유흥이나 사치 이상의 의미였음을 보여준다. 한 도시가 자신이 사랑해온 예술과 공간을 지켜내려 했다는 사실에서 예술이 공동체의 기억이자 정체성이 될 수도 있음을 느꼈다.

책에 등장하는 유럽의 10대 오페라 하우스를 따라가다 보면 건축 역시 하나의 언어처럼 느껴진다. 극장의 장식과 조각에는 신화와 종교, 당대의 문화적 상징이 숨어 있고, 객석의 배치에는 그 시대의 계급과 사회적 관계가 드러난다. 벽과 천장, 좌석과 내장재, 공간의 형태까지도 성악가의 목소리와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어떻게 반사하고 흡수해 객석에 전달할 것인지 세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과 귀에 들리는 아름다움이 하나의 건축 안에서 동시에 설계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오페라 극장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종합예술처럼 느껴진다.

오페라 극장의 역사만으로도 왕과 귀족, 시민과 후원자, 작곡가와 예술가들이 만나고 충돌하며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오페라만으로도 수백 년에 걸친 인간의 욕망과 권력, 사랑과 허영, 예술을 향한 열망과 시대의 변화까지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이제는 화면 하나만 있으면 세계 어디에서 열리는 공연도 볼 수 있고, 기술은 실제와 가상의 경계를 점점 더 정교하게 허문다. 인공지능은 음악과 이미지, 목소리까지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오페라와 연극처럼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예술에는 쉽게 대체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얼마 전 친구의 연극을 보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배우가 바로 눈앞에서 숨 쉬고 움직이고, 같은 공간의 관객들이 동시에 웃고 긴장하며 침묵하는 순간에는 화면으로 옮겨지지 않는 생생함이 있다. 오페라 역시 성악가의 몸에서 나온 목소리가 극장의 벽과 천장을 울리고,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배우의 움직임, 무대와 조명, 그날의 관객이 한 공간에서 만난다. 아무리 같은 작품을 같은 사람들이 공연한다 해도 완전히 똑같은 공연은 다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날 그 장소에 있었던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경험이 존재한다.

어쩌면 이것이 오페라 극장이라는 공간이 수백 년 동안 사라지지 않은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오페라는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예술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그곳에 존재함으로써 경험하는 예술이고, 극장은 그 경험을 담아내는 그릇인 동시에 인간이 오랫동안 예술을 사랑해온 흔적이 축적된 장소다.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이 아름다움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들인 시간과 욕망, 기술과 기억이 공존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오래된 극장과 도시의 공간들을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 같다. 가능하다면 언젠가 아름다운 극장의 객석에 앉아 오페라 한 편을 보고 싶어졌다.

모든 것을 화면으로 보고 기술로 재현할 수 있을 것 같은 시대일수록 그곳에 직접 존재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경험은 더욱 귀해진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극장을 짓고, 잃고, 다시 세우며 지켜온 것은 어쩌면 바로 그런 순간들이 아니었을까. 『오페라, 극장으로 읽다』는 오페라와 건축을 넘어, 인간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예술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지켜왔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탁월한 교양서다.

#오페라극장으로읽다 #오페라 #클래식 #도서추천 #교양서

*도서증정 @sigongsa_books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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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미술관 - 〈모나리자〉부터 〈절규〉까지 도난당한 걸작 50점에 얽힌 미스터리 사건 파일
수지 호지 지음, 안진이 옮김 / 현대지성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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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만 들어도 쉽게 알아차릴 만큼 유명하고 가치 높은 그림들이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며 보존된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일임을 새삼 깨닫는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미술관에서 마주하는 예술이 생각보다 훨씬 불안정한 운명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많은 작품이 도난당하고 사라진다. 돈을 위해 훔치고,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약탈하며, 때로는 정치적 목적이나 뒤틀린 소유욕이 예술을 제자리에서 떼어놓는다. 놀랍게도 그렇게 사라진 작품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은 적잖이 충격적이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비밀 창고에 잠들어 있을 수도 있고,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없는 장물이 되어 떠돌고 있을 수도 있으며, 어떤 작품은 이미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토록 많은 작품이 사라졌고,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은 설명하기 어려운 상실감을 불러일으킨다.

예술 작품의 도난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단지 값비싼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에는 한 인간의 시간과 감각이 남아 있고,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것을 바라봐온 사람들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 작품이 수백 년 동안 살아남았다는 것은 수많은 전쟁과 재난, 사회의 변화와 인간의 죽음을 지나서도 누군가가 그것을 보존하고 다음 세대에 건네왔을 만큼의 가치를 지녔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난은 그렇게 이어져온 긴 역사적 연결을 한순간에 끊어버린다.

애석하게도 작품이 사라지고 나서야 오히려 그 존재가 더욱 선명해지기도 한다. 빈 벽과 빈 액자는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늘 볼 수 있을 때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이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순간 간절해지는 것은 예술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어쩌면 인간은 존재보다 부재를 통해 어떤 것의 가치를 더 또렷하게 깨닫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도난이라는 사건 자체가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품을 둘러싼 기이한 운명은 때때로 우리가 작품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어떻게 사라졌는지, 어디를 떠돌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돌아왔는지를 알게 되면 그림은 더 이상 미술사 책 속의 납작한 이미지로만 남지 않는다. 하나의 작품에도 인간의 욕망과 탐욕, 전쟁과 권력, 우연과 집착이 뒤엉킨 긴 생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그동안 미술관에 걸린 작품을 바라보며 느꼈던 감동이 더 귀한 순간으로 여겨졌다. 지금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 누군가가 오랜 시간 지켜왔고, 그렇게 수많은 시간을 통과한 끝에 지금 이 순간 내가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다음번 미술관에서는 그림 앞에 조금 더 특별한 마음으로 머물 것 같다. 언제든 다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심히 지나치기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실물을 마주할 수 있다는 우연과 행운을 생각하며, 더 큰 감동과 감사함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사라진 수많은 작품의 이야기는 결국 남아 있는 작품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값진 이야기이기도 했다.

#도둑맞은미술관 #현대지성 #미술 #교양서 #도서추천

*도서증정 @hdjs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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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기원
토니 모리슨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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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토록 연약하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경계를 만든다. 그리고 그 경계 밖에 누군가를 세워놓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차이에서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발견하면서도, 정작 타인의 다름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끼고 그들을 배제한다.

모리슨은 미국 사회의 인종 문제와 노예제의 역사를 따라가며 인간이 어떻게 타인을 만들어왔는지를 들여다본다. 인간은 특정한 인종이나 집단을 혐오하는 마음을 타고나지 않는다. 아이는 주변의 어른들이 누구를 경계하고 낮춰 말하는지, 무엇을 아름답거나 추하다고 여기는지를 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세계를 분류하는 방법을 익힌다. 편견은 일상의 표정과 말투, 농담과 시선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견고하게 전승된다.

이러한 타인화의 구조는 민족주의와 여성혐오, 젠더 갈등과 극우주의 등 우리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경계에서도 발견된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하나의 범주로 묶고 그 차이를 과장하며 경계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자신이 속한 세계를 선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순간 복잡했던 세계는 단순해지고, 한 인간의 고유성은 하나의 범주로 환원된다.

책을 읽다 문득 오늘날 우리가 만들어내고 소비하는 이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생성형 AI로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지금은 어떤 형상도 가장 자유롭고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시대여야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AI가 만들어내는 여성과 남성의 얼굴에서는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매끈한 피부와 대칭적인 이목구비, 젊음과 일정한 신체 비율. 수없이 다른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이 오히려 비슷한 이미지를 반복한다. AI가 재현하는 정형화된 아름다움은 인간 사회가 오랫동안 축적해온 욕망을 압축해 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인간이 다시 AI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학습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미적 관념을 AI가 학습하고,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를 보며 다시 아름다움의 기준을 학습한다. 인간이 기계를 가르쳤는데 어느 순간 기계가 인간에게 인간의 모습을 가르치는 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름다움과 정상의 범주는 더욱 축소된다.

나는 다시 모리슨이 말하는 타인의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 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정상의 경계가 필요하다. 어떤 얼굴과 몸이 아름답고 정상적인 것인지 끊임없이 제시된다면 그 기준에서 멀어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밀려난다.

AI 시대의 가장 큰 역설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상상하는 인간의 모습과 정형화된 정답의 범주는 점점 축소될 수 있다는 것. 기술이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아도 인간의 욕망과 편견이 그대로라면, 그것은 동일한 기준을 무한히 복제하는 기능으로 전락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차이가 사라진 세계가 아니라 차이를 견딜 수 있는 감수성일 것이다. 서로 다른 얼굴과 몸, 삶과 생각을 마주하고도 그 안에서 한 인간의 고유성을 발견하는 능력. 타인을 나와 같은 존재로 만들지 않고도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능력 말이다.

편견이 학습된 관념이라면 배운 것은 다시 의심할 수 있고, 익숙해진 경계는 다시 흐리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타인을 만들어내는 법을 배워왔다면, 어쩌면 타인 없이도 나 자신일 수 있는 법 역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기원 #토니모리슨 #책추천 #서평 #북스타그램

*이 서평은 구매한 도서를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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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은 주어지지 않는다 - 커리어, 자기 정의의 여정
윤기열 지음 / 도서출판 독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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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은 자신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말처럼 사용된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회사에 다니는지, 어떤 직함을 가지고 있는지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의 직업적 정체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존재다. 우리 안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살아보지 못한 수많은 모습과 가능성이 함께 존재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커리어의 중심에는 자신에게 다양한 기회의 가능성을 열어두라는 조언이 있다. 수명이 길어지고 한 사람이 살아가며 경험하게 될 역할 또한 훨씬 다양해진 시대에, 하나의 역할에 자신을 고정하기보다 호기심과 주변의 변화에 눈을 열어두는 것. 기회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역할은 뒤따라오는 것이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저자의 18년 커리어를 따라가다 보면 그 말이 단순한 조언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회초년생으로 시작해 기업의 임원이 되기까지, 그리고 오랜 커리어를 뒤로하고 유학길에 오르기까지. 그야말로 사회생활을 진하게 해본 선배가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경험을 아낌없이 풀어놓은 듯하다. 성공과 낙담, 리더가 되어 겪는 고민, 조직 안에서의 관계, 커리어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터득한 현실적인 노하우가 곳곳에 담겨 있다. 특히 PR이나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구체적인 상황과 대처 방식은 물론, 일의 영역과 자신의 역할을 확장해가는 과정에서도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자가 좀처럼 적당한 선에 머물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더 나은 방향은 없는지, 다른 방법은 없는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정말 최선인지 끊임없이 묻는다. 그 질문은 업무를 향하기도 하고 자신을 향하기도 한다. 어쩌면 수많은 기회와 가능성이 그녀 앞에서 문을 열어준 것은 특별한 행운 때문이라기보다, 계속 질문하고 그 답을 직접 행동으로 확인하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무엇보다 나는 성과나 결과보다 ‘경험 자체’에 큰 가치를 두는 그녀의 태도가 좋았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때처럼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지금의 자리에서 충분히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해보고, 배우고, 부딪쳐보려는 태도는 현재의 역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동시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을 때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이 책에서 말하는 ‘역할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단순히 더 적극적으로 커리어를 개척하라는 의미로만 읽히지 않는다. 지금 내가 무엇이라고 불리는지보다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쉽게 단정하지 말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한때의 직함이나 성취가 나의 전부라고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지금까지 해온 경험 역시 하나의 길에 나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음 가능성으로 건너가기 위한 자원이 될 수 있다.

책의 마지막에는 QR코드를 통해 자신만의 ‘역할 노트’를 작성해볼 수 있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시선을 나의 현재와 미래로 돌려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지금 나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지금까지의 경험은 내게 무엇을 남겼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은지 하나씩 생각해보게 된다.

취업부터 이직, 승진과 조직생활, 그리고 어느 정도 커리어를 쌓은 뒤 찾아오는 ‘그다음은 무엇인가’라는 고민까지. 우리는 일하며 살아가는 동안 여러 번 자신의 자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은 그때마다 정답을 유보하고 자신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져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질문 끝에서 발견한 가능성을 향해 일단 움직여보라고 등을 밀어준다.

지금의 나를 너무 익숙한 역할 안에 가두고 있지는 않은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가능성에서 제외해버린 것은 없는지. 어쩌면 우리의 다음 역할은 어딘가에 완성된 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질문하고 움직이는 과정에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역할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아직 만나지 못한 나의 모습을 더 다채롭게 그려나가도 되지 않을까.

#역할은주어지지않는다 #처세술 #성공학 #도서추천 #북스타그램

*도서증정 @dokkpress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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