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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것들 - 바르샤바 게토의 아카이브로 떠난 여행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지음, 여문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2월
평점 :
우리는 흔히 역사를 거대한 흐름으로 이해하려 한다. 수많은 사건과 숫자, 지도와 연표 속에서 그것은 하나의 방향성을 가진 이야기처럼 정리된다. 그러나 이 책이 붙잡고 있는 것은 역사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주목받지 못했던 파편들, 흩어지고 부서진 채 남겨진 조각들이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수집된 종잇장들, 편지, 일기, 배급표, 사탕 포장지들은 처음부터 ‘역사’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라질 가능성이 더 컸던, 너무 사소해서 누구도 보존하려 하지 않았을 흔적들이다. 그러나 에마누엘 린겔블룸과 오이네그 샤베스의 활동가들은 바로 그 보잘것없는 것들 속에서 사라져가는 삶의 마지막 증거를 보았다.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잔존’을 선택했다. 살아남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무엇이라도 자신들의 현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을 남기려 했던 선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저항이었다.
이 책은 사소한 기록들 자체로 강렬하다. 역사적 정보를 넘어, 그 안에는 처절하고 절박한 생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린겔블룸은 타인의 고통을 관찰하는 관찰자임과 동시에 고통을 함께하는 참여자이다. 그래서 이 아카이브에는 언제나 탄식이 스며 있다. 감정의 표현을 넘어, 자신이 보고 있는 세계를 외면하지 않고 진실을 남기겠다는 의지와 결의가 기록들과 파편들 속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디디-위베르만은 이러한 기록을 통해 ‘상상력’의 역할을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상상력은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윤리적 능력이다. 우리는 그 시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고통을 온전히 재현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상하려고 시도한다. 결핍된 채로, 불완전한 채로, 끝없이 되돌아보는, 바로 그 상상 속에서 역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해는 완전한 재현이 아니라 도달할 수 없음에 대한 자각 위에서만 가능해진다. 우리는 상상해야만 하고, 역사 속에 묻힌 누군가의 고통과 진실을 응시해야만 한다. 그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또 다른 역할일 것이다.
너무도 연약해 쉽게 찢기고 불태워질 수 있는 종잇장들이 오히려 인간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는 사유는 인상적이다. 그것은 승자와 패자의 구분을 넘어 지속되며, 권력과 폭력을 초월해 증언한다. 심지어 이미지조차 그것을 만든 자의 의도와 다른 진실을 드러낸다. 결국 기록은 언제든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잠재적인 증언이 된다.
이 아카이브가 남긴 것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흩어진 자리에서 다시 무언가를 모으려는 욕망이 발생한다는 사실 자체다. 부스러기를 모아 하나의 의미를 만들려는 시도, 그것은 미래를 향한 행위다. 파괴의 결과를 진실의 집합으로 전환하는 일, 역사를 바로잡고 생과 죽음을 넘어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하는 일. 이 책은 바로 그 과정을 따라가며, 기록이 어떻게 정치적 실천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지금도 세계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처절한 생을 이어가며 죽음과 맞닿은 채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을 누군가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삶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이름 뒤에 묻혀 우리의 의식에서 쉽게 사라진다. 그러나 전쟁의 잔상들, 파편들, 그 시간을 증명하는 흩어진 무수한 것들은 여전히 어딘가에 남아 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남기고 있을까. 역사는 완성된 이야기로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누군가의 손에 의해 다시 읽히고, 다시 쓰이며, 다시 구성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거대한 서사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흩어진 것들을 외면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불가능해 보이는 시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응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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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증정 @moonji_books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