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기원
토니 모리슨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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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토록 연약하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경계를 만든다. 그리고 그 경계 밖에 누군가를 세워놓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차이에서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발견하면서도, 정작 타인의 다름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끼고 그들을 배제한다.

모리슨은 미국 사회의 인종 문제와 노예제의 역사를 따라가며 인간이 어떻게 타인을 만들어왔는지를 들여다본다. 인간은 특정한 인종이나 집단을 혐오하는 마음을 타고나지 않는다. 아이는 주변의 어른들이 누구를 경계하고 낮춰 말하는지, 무엇을 아름답거나 추하다고 여기는지를 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세계를 분류하는 방법을 익힌다. 편견은 일상의 표정과 말투, 농담과 시선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견고하게 전승된다.

이러한 타인화의 구조는 민족주의와 여성혐오, 젠더 갈등과 극우주의 등 우리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경계에서도 발견된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하나의 범주로 묶고 그 차이를 과장하며 경계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자신이 속한 세계를 선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순간 복잡했던 세계는 단순해지고, 한 인간의 고유성은 하나의 범주로 환원된다.

책을 읽다 문득 오늘날 우리가 만들어내고 소비하는 이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생성형 AI로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지금은 어떤 형상도 가장 자유롭고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시대여야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AI가 만들어내는 여성과 남성의 얼굴에서는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매끈한 피부와 대칭적인 이목구비, 젊음과 일정한 신체 비율. 수없이 다른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이 오히려 비슷한 이미지를 반복한다. AI가 재현하는 정형화된 아름다움은 인간 사회가 오랫동안 축적해온 욕망을 압축해 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인간이 다시 AI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학습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미적 관념을 AI가 학습하고,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를 보며 다시 아름다움의 기준을 학습한다. 인간이 기계를 가르쳤는데 어느 순간 기계가 인간에게 인간의 모습을 가르치는 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름다움과 정상의 범주는 더욱 축소된다.

나는 다시 모리슨이 말하는 타인의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 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정상의 경계가 필요하다. 어떤 얼굴과 몸이 아름답고 정상적인 것인지 끊임없이 제시된다면 그 기준에서 멀어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밀려난다.

AI 시대의 가장 큰 역설 가운데 하나는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상상하는 인간의 모습과 정형화된 정답의 범주는 점점 축소될 수 있다는 것. 기술이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아도 인간의 욕망과 편견이 그대로라면, 그것은 동일한 기준을 무한히 복제하는 기능으로 전락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차이가 사라진 세계가 아니라 차이를 견딜 수 있는 감수성일 것이다. 서로 다른 얼굴과 몸, 삶과 생각을 마주하고도 그 안에서 한 인간의 고유성을 발견하는 능력. 타인을 나와 같은 존재로 만들지 않고도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능력 말이다.

편견이 학습된 관념이라면 배운 것은 다시 의심할 수 있고, 익숙해진 경계는 다시 흐리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타인을 만들어내는 법을 배워왔다면, 어쩌면 타인 없이도 나 자신일 수 있는 법 역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기원 #토니모리슨 #책추천 #서평 #북스타그램

*이 서평은 구매한 도서를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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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은 주어지지 않는다 - 커리어, 자기 정의의 여정
윤기열 지음 / 도서출판 독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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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은 자신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말처럼 사용된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회사에 다니는지, 어떤 직함을 가지고 있는지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의 직업적 정체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존재다. 우리 안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살아보지 못한 수많은 모습과 가능성이 함께 존재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커리어의 중심에는 자신에게 다양한 기회의 가능성을 열어두라는 조언이 있다. 수명이 길어지고 한 사람이 살아가며 경험하게 될 역할 또한 훨씬 다양해진 시대에, 하나의 역할에 자신을 고정하기보다 호기심과 주변의 변화에 눈을 열어두는 것. 기회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역할은 뒤따라오는 것이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저자의 18년 커리어를 따라가다 보면 그 말이 단순한 조언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회초년생으로 시작해 기업의 임원이 되기까지, 그리고 오랜 커리어를 뒤로하고 유학길에 오르기까지. 그야말로 사회생활을 진하게 해본 선배가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경험을 아낌없이 풀어놓은 듯하다. 성공과 낙담, 리더가 되어 겪는 고민, 조직 안에서의 관계, 커리어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터득한 현실적인 노하우가 곳곳에 담겨 있다. 특히 PR이나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구체적인 상황과 대처 방식은 물론, 일의 영역과 자신의 역할을 확장해가는 과정에서도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자가 좀처럼 적당한 선에 머물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더 나은 방향은 없는지, 다른 방법은 없는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정말 최선인지 끊임없이 묻는다. 그 질문은 업무를 향하기도 하고 자신을 향하기도 한다. 어쩌면 수많은 기회와 가능성이 그녀 앞에서 문을 열어준 것은 특별한 행운 때문이라기보다, 계속 질문하고 그 답을 직접 행동으로 확인하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무엇보다 나는 성과나 결과보다 ‘경험 자체’에 큰 가치를 두는 그녀의 태도가 좋았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때처럼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지금의 자리에서 충분히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해보고, 배우고, 부딪쳐보려는 태도는 현재의 역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동시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을 때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이 책에서 말하는 ‘역할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단순히 더 적극적으로 커리어를 개척하라는 의미로만 읽히지 않는다. 지금 내가 무엇이라고 불리는지보다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쉽게 단정하지 말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한때의 직함이나 성취가 나의 전부라고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지금까지 해온 경험 역시 하나의 길에 나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음 가능성으로 건너가기 위한 자원이 될 수 있다.

책의 마지막에는 QR코드를 통해 자신만의 ‘역할 노트’를 작성해볼 수 있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시선을 나의 현재와 미래로 돌려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지금 나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지금까지의 경험은 내게 무엇을 남겼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은지 하나씩 생각해보게 된다.

취업부터 이직, 승진과 조직생활, 그리고 어느 정도 커리어를 쌓은 뒤 찾아오는 ‘그다음은 무엇인가’라는 고민까지. 우리는 일하며 살아가는 동안 여러 번 자신의 자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은 그때마다 정답을 유보하고 자신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져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질문 끝에서 발견한 가능성을 향해 일단 움직여보라고 등을 밀어준다.

지금의 나를 너무 익숙한 역할 안에 가두고 있지는 않은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가능성에서 제외해버린 것은 없는지. 어쩌면 우리의 다음 역할은 어딘가에 완성된 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질문하고 움직이는 과정에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역할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아직 만나지 못한 나의 모습을 더 다채롭게 그려나가도 되지 않을까.

#역할은주어지지않는다 #처세술 #성공학 #도서추천 #북스타그램

*도서증정 @dokkpress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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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6 - 사과
박솔뫼 외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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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수상작품집이라서일까. 무엇보다 작가마다 가진 고유한 글쓰기 방식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문장의 길이와 호흡, 장면을 전환하는 방식, 인물을 바라보는 거리, 이야기를 어디까지 말하고 어디에서 멈출 것인지까지 모두 새로웠다. 처음에는 이질적일 만큼 어색하게 읽히던 문장에 점점 흥미를 느끼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결국 그 방식에 설득당하는 경험이 신선했다.

특히 대상 수상작인 박솔뫼의 「사과」가 인상 깊었다. 문장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듯 긴 호흡으로 이어지고, 충분히 큰 사건이라 할 만한 일조차 전조나 강조 없이 문장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놓인다. 장면과 사건 역시 예고 없이 툭 전환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흐트러진다는 느낌이 없다. 오히려 그 무심한 듯 이어지는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의 기억과 생각이 실제로 움직이는 방식에 가까운 리듬처럼 느껴진다. 무엇을 중요하다고 미리 표시해 주지 않기에 독자가 스스로 문장 속에 놓인 것들의 무게를 발견하게 되는 점도 좋았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한 여성 화자의 이야기 안에 생각보다 묵직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점이다.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방식, 개인의 삶을 둘러싼 사회의 모습까지. 작가는 그것을 쉬이 결론 내리지 않는다. 평범한 삶의 장면들 사이에 그저 조용히 놓아두었고, 그래서 읽고 난 뒤 더 많은 생각이 남았다. 짧은 소설 안에 인간과 관계와 사회를 바라보는 깊은 시선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른 우수작들에서도 각각의 고유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동안 읽어온 완결되고 매끄러운, 어쩐지 잘 정제된 글들과는 조금 다른 날것의 감각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거칠거나 미완성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쉽게 다듬어 하나의 모양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보존되는 개성과 생생함에 가까웠다. 어떤 작품은 문장으로, 어떤 작품은 인물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또 어떤 작품은 예상하지 못한 상상의 이야기로 자신의 세계를 드러냈다.

여섯 편 모두 그 안에는 작가마다 분명하고 견고한 세계가 있었다. 실험적인 문장과 리듬을 따라가다가 어느새 이야기의 다음을 궁금해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소설이 끝난 뒤에는 이야기 자체가 지닌 힘에 대해 오래 곱씹게 되었다. 인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삶의 순간에는 무엇이 숨어 있는가. 좋은 소설은 반드시 답을 주지 않아도 이렇게 많은 질문을 남길 수 있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특히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책은 꽤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 같다. 잘 쓰기 위해 이미 존재하는 좋은 문장의 모양을 닮아가는 것만이 글쓰기의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가 분명하다면 문장의 호흡도, 이야기의 구조도, 삶을 포착하는 방식도 얼마든지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정형화된 틀 안에서 얼마나 매끄럽게 쓰느냐보다 무엇을 바라보고, 그것을 얼마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느냐인지도 모르겠다.

여섯 명의 작가가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어느 누구의 문장도 다른 누구의 문장과 같지 않은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그 차이를 한 권 안에서 연이어 만나는 일은 무척 신선했다.

익숙한 문장 밖으로 독자를 이끌며 이렇게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 조금 낯설어도 그 낯섦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하나의 견고한 세계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써 내려간 이야기 역시 결국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사유에 닿을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좋은 글의 모양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수상작들을 읽고 나니 오히려 좋은 글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효석문학상수상작품집2026 #이효석문학상
#단편소설 #서평 #북스타그램

*도서증정 @vook_da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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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지식산문 O 10
존 비게닛 지음, 김명남 옮김 / 복복서가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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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사라진 자리, 고요하고 평온한 순간,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무는 시간. 침묵은 그저 말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침묵은 너무도 다채로운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의미까지 동시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돈을 지불해서라도 얻고 싶은 평온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상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소음 때문에 누릴 수 없는 사치가 되기도 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상대를 침묵시킴으로써 자신의 힘을 행사하고, 반대로 약자는 침묵함으로써 자신을 지킬 수도 있다. 말하지 않는다는 동일한 행위가 어느 순간에는 억압의 결과가 되고, 다른 순간에는 저항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침묵의 의미는 침묵 그 자체보다 누가, 언제, 무엇을 위해 침묵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침묵이라고 믿었던 순간에도 완전한 침묵은 좀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극도로 조용한 공간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몸이 내는 소리가 선명해지고, 소리 내지 않고 책을 읽을 때조차 우리의 뇌는 문장을 일종의 소리로 받아들인다. 겉으로는 아무 소리도 없는 독서의 순간에 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가장 깊숙이 듣고 있는 셈이다. 침묵하려 할수록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소리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역설은 무척 인상적이다.

예술에서 침묵이 작동하는 방식 역시 흥미롭다. 음악에서 음과 음 사이의 멈춤이 다음 소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고, 그림 앞에서 언어가 물러난 자리에는 감각과 감정이 들어선다. 말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이 있다. 침묵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말과 소리가 차지하던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올 공간을 만드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이 책의 가장 큰 재미는 이렇게 하나의 주제를 붙잡고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생각을 끊임없이 뻗어나가게 한다는 데 있다. 음악과 문학, 경제와 계급, 권력과 폭력, 과학과 신체, 독서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이야기는 ‘침묵’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축을 중심으로 새로운 관점을 다채롭게 펼쳐 보인다.

한 가지 주제를 이토록 다양한 층위로 뒤집고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개념 하나가 얼마나 많은 질문을 품고 있는지 발견하게 하는 것. 그것이 『침묵』이 주는 가장 큰 지적 즐거움이었다.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침묵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침묵은 소리가 사라진 자리가 아니라, 미처 듣지 못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비밀스러운 순간인지도 모른다.

#침묵 #지식산문 #복복서가 #인문에세이 #책추천

*도서증정 @bokbokseoga_publishing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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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리치가 세상을 구한다는 헛소리, 그런데 우리는 왜 그들을 숭배하는가
달리아 나미앙 지음, 조민영 옮김 / 원더박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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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설국열차’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 중 하나는 열차의 바닥을 열어젖히는 순간이다. 화려하고 안락한 객실 아래,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비좁고 뜨거운 공간에서 한 아이가 기계의 부품처럼 혹사당하고 있다. 열차는 쉼 없이 작동하고 있었고 승객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 세계를 움직이는 데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바닥이 열리기 전까지 보이지 않았다.

이 책은 우리가 안락하게 앉아 있는 세계의 바닥을 열어젖힌다.

우리는 식민주의와 노예제를 잔혹했던 과거로 기억하며 오늘날의 세계는 훨씬 문명화되었다고 믿는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어느 시대보다 편리하고 풍요로워졌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지구 반대편에서 만들어진 물건조차 클릭 몇 번이면 집 앞까지 도착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그 시대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가.

물론 오늘날을 과거의 노예제나 식민지배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유한 국가와 기업의 풍요를 위해 다른 누군가의 노동과 토지, 자원과 환경이 희생되는 구조가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착취는 국경과 복잡한 공급망 너머로 이동해 우리의 눈에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를 쇠사슬로 묶지 않아도 극단적인 빈곤은 값싼 노동력을 만들어내고, 군대를 보내 영토를 점령하지 않아도 자본은 토지와 자원을 차지할 수 있다.

그 구조의 정점에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단순히 누군가가 부자라는 사실이 아니다. 막대한 부는 정치와 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세계가 나아갈 방향까지 결정하는 권력이 된다.

더 기묘한 것은 그 경제구조의 가장 큰 수혜자들이 이제는 그 구조가 만들어낸 문제를 해결할 구원자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기후위기도, 빈곤도, 식량문제도 그들의 투자와 혁신과 자선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그들에게 문제의 원인을 묻기보다 해결책을 기대한다.

21세기 자본주의 아래 인간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안락함을 누린다. 기술의 성취와 소비의 풍요는 더 나은 세계가 계속해서 도래하고 있다는 희망을 심는다.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하고 합리적으로 소비하며 살아간다고 철썩같이 믿는다.

그러나 바로 그 안락함 때문에 세계의 다른 면을 외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값싼 옷은 누가 만들었는지,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광물은 어디에서 채굴되는지, 우리가 버린 폐기물은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좀처럼 알지 못한다. 어쩌면 알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도록 세계가 설계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열차의 승객에게 기관실의 사정까지 알 필요가 없는 것처럼.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며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소유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는지, 어떻게 다른 나라의 자원을 빼앗으면서 그것을 문명화라고 믿었는지 의아해한다. 하지만 미래의 사람들 역시 우리에게 묻지 않을까.

어떻게 한 사람이 평생 써도 다 쓰지 못할 부를 축적하는 동안 다른 곳에서는 사람들이 먹을 것과 깨끗한 물을 구하지 못하는 세계를 정상이라고 생각했을까. 어떻게 지구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생산하고 소비하면서 그것을 발전이라고 불렀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 구조에서 가장 많은 부와 권력을 얻은 사람들에게 다시 그 문제의 해결을 기대했을까.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 질문하지 않게 된 것들을 다시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 자선과 기후위기, 식량과 에너지, 노동과 소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실제 사례와 함께 낱낱이 보여준다.

그 연결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가 타고 있는 열차의 바닥이 열린다.

그 아래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의 풍요가 다른 누군가의 빈곤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 우리가 누리는 세계의 비용이 언제나 공평하게 분배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워진다.

설국열차 속 승객들은 바닥이 열리기 전까지 아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한 번 바닥이 열리고 그 아이를 보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보지 못했던 것과 보고도 외면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바닥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그 안을 들여다본 뒤에도 여전히 이 열차가 아무 문제 없이 잘 달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슈퍼리치가세상을구한다는헛소리그런데우리는왜그들을숭배하는가
#사회비평 #책추천 #책스타그램

*도서증정 @wonderbox_pub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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