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
허나영 지음 / 비에이블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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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모든 지붕 위에 내린다”는 말이 있다. 고통은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나의 상처는 유난히 크게 느껴져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늘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문득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상실과 불안, 가난과 질병, 관계의 파열 같은 시간을 지나게 되면 쳇바퀴처럼 무심히 흘러가던 일상도 멈춰 선다. 그제야 우리는 묻게 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나는 어떤 감정 속에 있는지, 그리고 삶이란 무엇인지.

“내면에 암울한 비밀을 지니지 않은 인간은 이야기할 것이 없다.” 작가 모리아크의 말이다. 흔히 예술은 고통에서 탄생한다고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화가들 역시 그렇다. 빈센트 반 고흐의 격렬한 붓질, 에드바르 뭉크의 불안에 잠식된 화면,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그려낸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그리고 친구의 죽음 이후 깊은 우울의 색으로 세계를 물들였던 파블로 피카소까지. 그들은 내면이 흔들리고 세계에 균열이 생길 때 오히려 더욱 치열하게 화폭에 몰두했다. 어째서 고통은 예술과 그토록 자주 연결되는 것일까.

감정이 더 이상 흘려보낼 수 없는 무게가 될 때, 그것은 출구를 요구한다. 어떤 이에게 그 출구는 파괴가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창작이 된다. 색과 선, 빛과 어둠은 혼란한 내면을 표현하는 형태가 되고, 무너진 세계를 다시 세워보려는 시도가 된다. 어쩌면 창작이란 삶을 견디고 이해하려는 가장 치열한 몸짓인지도 모른다. 화가들은 그 고통을 그림 속에 응축해 담아냈다. 그래서 우리는 작품 속에서 감정을 느끼고 공감하며 위안을 얻는다. 동시에 그림을 바라보는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

『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는 흔들리던 시기마다 그림 앞에 섰던 저자의 경험에서 출발한 책이다. 이는 예술과 삶이 맞닿는 지점을 따라가며, 뒤늦게 자신을 돌보기 시작한 한 사람의 고백이기도 하다. 독자는 그 고백을 따라 저자가 건너온 계절과 감정의 풍경을 함께 바라보며, 어느새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된다. 그림을 바라보는 시간은 저자에게 자기 회복의 방식이었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연습이었고, 각박한 삶 속에서 스스로에게 허락한 멈춤이었다.

이 책을 만난 우리는 이제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잠시 그림 속으로 숨을 수 있다. 그림을 바라본다는 것은 한 사람의 생을 함께 건너는 일이자, 흔들리는 자신을 마주하기 위한 작은 용기다. 책은 우리를 자연스레 그림 앞으로 이끌고,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갖도록 등을 밀어준다. 캔버스 위의 색과 선을 따라가다 보면 타인의 고통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느껴지고, 내 상처 또한 이전과는 다른 빛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 빛 아래에서 우리는 마음을 다독이며 다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바람부는날이면그림속으로숨는다 #미술관 #예술에세이 #책추천 #서평

*도서증정 @samnparkers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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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세계의 농담 - 삶의 모퉁이를 돌 때 내게 다가와주는 고전들
이다혜 지음 / 오리지널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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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읽으며 두 가지 이유로 상당히 분주했다. 하나는 이미 읽었던 책에 대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느라 바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읽지 못한 책에 대한 저자의 생생하고도 절절한(!) 추천이 내 마음을 끌어당겨 검색창을 열고 장바구니를 채우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나는 과거의 독자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독자가 되었다. 고전은 이미 지나온 시간 속에 있으면서, 아직 만나지 못한 나의 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그렇게 분주하게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저자의 진솔하고 유려한 문장과 책에 대한 깊은 애정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작품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어느 날 이 책이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들려주는 방식은 고전을 낡은 것이 아닌 지금 숨 쉬는 이야기로 되살린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독서의 경지, 그러면서도 쉽게 닿기 어려운 통찰이 이 책에는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읽기의 세계는 단번에 열리지 않는다. 시간을 들이고, 반복하고, 때로는 이해하지 못한 채 덮어두었다가 다시 펼치는 과정을 거치며 비로소 문학이 품은 오래된 숨결에 닿는다. 때때로 그 숨결은 혼란스럽다. 다정하지만 잔혹하고, 유쾌하지만 구슬프며, 단순해 보이지만 끝내 복잡하다. 그렇기에 더욱 읽어낼 가치가 있다.

우리는 고전을 통해 살아보지 못한 시대와 삶을 건너가면서 결국은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고전은 과거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이다혜 작가는 그 거울을 독자 앞에 조심스레 세워두고, 거기에 비친 우리의 얼굴을 함께 응시하는 시간을 선사한다.

『오래된 세계의 농담』은 고전을 내 삶 가까이에 두는 법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마음이 흔들릴 때 중심을 잡고 나아가게 하는 오래된 이야기들, 성장통을 통과하는 동안 잠시 기대 앉을 수 있었던 문장들, 세상을 더 선명하게 바라보게 하는 인물들을 한 권 안에 모아둔다. 특히 한 권의 고전을 음악이나 영화, 산책, 그림과 같은 일상의 장면과 연결해주는 구성은 고전을 독서의 영역에서 삶의 연장선으로 확장시키며 읽기에 활력을 더한다.

“책은 그 자리에 있지만 독자는 성장한다.”는 저자의 말은 그동안 읽어 내려간 고전들을 다시 펼쳐 들게 한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다른 내가 읽게 된다는 사실, 이 책은 그 변화의 앞으로 우리를 이끈다.

삶에서 돌아보기도, 내다보고도 싶은 날, 다시 펼칠 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조금 든든해진다. 고전은 우리를 시험하는 책이 아니라, 우리가 건너온 시간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이 책은 농담처럼 친숙하고 오래 남는 다정함으로 일러준다.

#오래된세계의농담 #독서에세이 #에세이추천 #북스타그램 #서평

*도서증정 @originals_book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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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명성아파트
무경 지음 / 래빗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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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경성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일제강점기라는 무거운 역사적 시공간을 좀처럼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세련된 모더니즘적 감각으로 전개된다. 독신자아파트라는 근대적 주거 공간, 영화 촬영이라는 대중문화적 장면,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은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게 지금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결국 시대가 달라도 반복되는 인간사의 본질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소설 도입부에 제시되는 명성아파트의 도면은 대칭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2층부터 4층까지 똑같이 반복되는 평면, 동일한 가구, 같은 위치에 놓인 거울까지. 이러한 대칭성과 규격화는 단순한 공간적 설정을 넘어 하나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겉으로는 질서정연하고 근대적인 공간이지만, 그 내부에는 각자의 욕망과 비밀이 숨 쉬고 있다. 똑같은 벽 안에서 서로 다른 진실을 감춘 인물들은 마치 거울처럼 인간의 선과 악이라는 양면성을 반영한다.

소설의 중심에는 열두 살 식모 ‘입분’이 있다. 처음 등장할 때 그녀는 어리숙하고 처연한 소녀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위를 바라보는 관찰력과 사려 깊음은 예사롭지 않다. 사건이 전개될수록 그 세심함은 총명함으로, 총명함은 상황을 읽고 움직이는 전략적 감각으로 확장된다. 인상적인 점은 이 작은 소녀가 힘도, 권력도, 제도적 보호도 없는 가장자리의 인물이라는 설정이 오히려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데 있다. 바로 그 위치 덕분에 입분은 누구보다 많은 것을 보고 듣는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오히려 쉽게 의심받거나 경계되지만, 입분은 위계의 말단에서 인물들의 틈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든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약한 위치에 선 존재가 가장 날카로운 추리의 주체가 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제약은 곧 무기가 되고, 주변성은 통찰로 전환된다. 독자는 입분의 시선을 따라가며 명성아파트의 주민들을 낱낱이 다시 바라보게 된다.

살인 사건은 단순한 범죄를 넘어, 시대적 욕망과 맞물리며 인간 개개인의 내면을 파고든다. “사람은 완전히 하얗지도 까맣지도 않다”는 작품 속 문장처럼, 이 소설은 인간을 회색의 존재로 그린다. 범인은 특별히 규정된 악인이 아니라, 욕망과 두려움 속에서 잘못된 선택을 거듭하는 평범한 인간들의 합으로 제시된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단선적인 애국주의나 반일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대에 살았을 법한 사람들의 생존 방식과 이해타산, 크고 작은 욕망과 체념을 입체적으로 펼쳐 보인다. 그래서 독자는 1939년을 읽으면서 동시에 현재를 읽게 된다. 시대는 다르지만 인간의 계산과 두려움, 욕망과 변명은 여전히 낯설지 않다.

『1939년 명성아파트』는 공간을 이용한 절묘한 트릭과 긴장감 넘치는 전개로 정통 미스터리의 매력을 충실히 구현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인간의 양면성과 근대 도시의 불안이라는 질문을 남긴다. 명성아파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축소판이자, 속을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은밀한 단면처럼 느껴진다.

그 회색 세계 한복판에서, 가장 작고 연약해 보였던 소녀가 누구보다 또렷한 시선으로 진실을 향해 걸어간다. 독자는 그 발걸음을 따라가며, 사건의 진실뿐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잡한 음영까지 들여다보게 된다.

#1939년명성아파트 #추리소설 #소설추천 #북스타그램 #서평

*도서증정 @rabbithole_book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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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프루스트 - 삶의 슬픔과 희열, 위로와 예술을 알려준 우리들의 프루스트를 찾아서
김주원 외 지음 / 현암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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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엄격하고도 경건한 주름 아래 그토록 풍만하고 관능적인 제과점의 작은 조가비 모양’의 마들렌이 떠오르는 표지부터 이미 프루스트적이다.

『나의 프루스트』는 프루스트 필생의 역작이자 20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열 명의 필자가 각자의 시선으로 풀어낸 기록이다.

이 개별적이고도 고유한 이야기들은 단순한 감상문을 넘어선다. 그것은 프루스트의 길고도 아름다운 문장, 은유로 직조된 사유, 그리고 일상의 사소함을 놓치지 않는 성실한 자기의식에 대한 찬미이자 응답이다. 동시에 우리가 그동안 프루스트를 읽으며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아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펼치지 못한 독자에게는 이 책이 다정한 예고편이 되어줄 것이다. 거대한 고전을 정복해야 할 산이 아니라, 언젠가 자신의 속도로 걸어 들어가도 좋은 숲으로 느끼게 한다.

열 명의 필자가 들려주는 프루스트는 개성적이고 다채롭다. 어떤 이는 상실의 시간을 통과하며 위로를 얻었고, 어떤 이는 글쓰기의 욕망과 용기를 배웠다. 또 다른 이는 음악과 피아노를 통해 문장을 다시 들었고, 번역을 통해 애도와 기억을 건너갔다. 그들의 읽기 방식은 진솔하고 개별적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프루스트를 삶의 내부로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소설에서 흘러나온 사유가 각자의 삶 속에서 다시 새롭게 솟아올라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다.

열 명의 필자가 들려주는 읽기의 경험은 프루스트 그 자신의 고백만큼이나 진솔하고 생생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 내가 느꼈던 생각과 맞닿는 대목에서는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미처 알지 못했던 맥락과 이야기들을 만날 때에는 또 하나의 문이 열리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것은 작품을 다시 읽는 경험과도 닮아 있었다.

특히 최양현 필자의 「언젠가는 해야 할 일에 대하여」는 소설을 연극적 구성으로 풀어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장면들을 무대 위에 올려놓듯 압축해 보여주려는 시도는 방대한 서사를 한순간에 응축해 현재로 끌어당긴다. 마치 긴 드라마를 몰아보듯 속도감 있게 전개되면서도 원작의 정서를 놓치지 않는다. 텍스트가 또 다른 매체로 건너가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해석이자 창작임을 보여준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일곱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로 다른 줄거리와 의미를 품으면서도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듯, 『나의 프루스트』 역시 열 편의 글이 각기 독립적인 빛을 내면서도 ‘프루스트’라는 중심 아래 조화롭게 연결된다.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모여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그 안에서 나는 프루스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을 동시에 발견한다.

이 책을 덮으며, 나 역시 나만의 프루스트를 쓰고 싶어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느껴온 수많은 감정과 사유, 그 문장들 속에서 발견했던 나 자신의 파편들을 다시 기록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은 완독의 성취로 남기보다 각자의 삶 속에서 다시 쓰일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읽기의 한 장면이자 증명일 것이다.

『나의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 만나는 시간, 다시 읽기로 돌아가는 시간, 그리고 스스로의 프루스트를 기록하는 또 하나의 시간 앞으로 우리를 이끈다. 결국 우리는 프루스트가 남긴 말처럼 프루스트를 읽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시간을 다시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프루스트가 마침내 자신의 ‘되찾은 시간’을 써 내려갔듯, 그의 독자들 또한 각자의 시간을 되찾는 경험에 이른다. 『나의 프루스트』는 바로 그 순간들, 각자가 자기 자신의 시간을 읽어내는 장면들을 모아둔 소중하고 빛나는 기록이다.

#나의프루스트 #마르셀프루스트 #인문에세이 #도서추천 #서평

*도서증정 @hyeonamsa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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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만들기 - 성형외과의의 탄생
린지 피츠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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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만들기』를 읽으며 나는 논픽션이 오히려 가장 극적인 서사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이 책은 허구보다 더 생생하고, 상상보다 더 참혹하며, 그래서 더욱 깊이 마음을 파고든다. 픽션은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이 책은 “실제로 그랬다”는 사실을 들려주기에 그 무게가 다르게 다가온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비극을 배경으로, 얼굴을 잃은 병사들과 그 얼굴을 되찾아주기 위해 일생을 바친 해럴드 길리스의 이야기는 잘 짜인 소설처럼 흘러가지만, 한 장면 한 장면이 실제 기록이라는 점에서 더 큰 울림을 남긴다.

전쟁은 얼굴을 파괴했다. 포탄과 파편은 사람의 형체를 무너뜨렸고, 얼굴을 잃은 병사들은 사회 속에서 ‘자기 세계의 이방인’이 되었다. 팔다리를 잃은 이들이 영웅으로 불릴 때, 얼굴을 잃은 이들은 시선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 사회가 얼굴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드러낸다. 이 책은 성형 수술의 역사를 다루지만, 실은 ‘존엄의 복원’을 이야기한다. 먹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의 회복을 넘어, 다시 사회 속으로 돌아갈 수 있는 얼굴을 만들어주는 일. 그것은 허영이 아니라 생존이었고, 선택이 아니라 절박함이었다.

전쟁의 비극 속에서 펼쳐지는 이 감동의 서사는 단순하지 않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여러 겹의 아이러니를 느꼈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파괴가 없었다면 현대 성형외과는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참혹한 상처는 외과 기술을 밀어붙였고, 외과 의사와 치과 의사, 화가와 조각가, 사진사가 협업하는 새로운 의료 체계를 탄생시켰다. 인간은 서로를 파괴하는 동시에,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 파괴를 복원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과연, 지구 위에 피를 묻히지 않고 세워진 문명이 있을까. 우리가 오늘날 당연하게 사용하는 많은 기술이 전쟁과 극한의 생존 경쟁 속에서 발전했다는 사실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 책은 성형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하는 동시에, 인간의 얼굴과 존엄을 깊이 있게 성찰하게 한다. 얼굴은 누군가에게 보여질 수밖에 없는 정체성의 형상이며, 인간 심리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의 성형이 더 나은 미적 기준을 향한 선택이라면, 제1차 세계대전 속 길리스의 수술은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되찾는 일이었다. 하나는 경쟁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의 문제다. 그 차이를 인식하는 순간, ‘성형’이라는 단어가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동시에 우리는 깨닫게 된다. 얼굴은 단지 피부와 뼈의 구조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자아 인식이 응축된 입체적인 표면이라는 사실을.

참혹한 전쟁 속에서 성형술의 발전을 다루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어둡기만 하지는 않다. 그 속에는 언제나 희망과 연대, 의지와 사랑이 피어난다. 길리스는 병동에서 거울을 치우며 환자의 마음을 보호했고, 얼굴 재건의 의지를 북돋우며 재치 있는 농담을 건넬 줄 아는 따뜻한 인성의 소유자였다. 병사들이 길리스와 웃음 섞인 대화를 나누고 의지가 되어주는 장면은 뭉클하고 감동적이다.

파괴의 한복판에서도 인간은 복원을 시도하고, 절망 속에서도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감동일 것이다.

『얼굴 만들기』는 의학사의 한 전환점을 기록한 책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이야기다.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지만, 또 서로를 살리기 위해 필사적이다. 전쟁은 파괴의 역사이지만, 그 속에서도 누군가는 얼굴을, 곧 한 사람의 삶을 다시 세우려 했다. 논픽션이 이토록 서사적이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증명한다. 우리가 오늘 누리는 기술은 과연 어떤 고통 위에 세워졌는가. 그 물음은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얼굴만들기 #열린책들 #린지피츠해리스 #베스트셀러 #서평

*도서증정 @openbooks21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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