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명성아파트
무경 지음 / 래빗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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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경성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일제강점기라는 무거운 역사적 시공간을 좀처럼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세련된 모더니즘적 감각으로 전개된다. 독신자아파트라는 근대적 주거 공간, 영화 촬영이라는 대중문화적 장면,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은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게 지금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결국 시대가 달라도 반복되는 인간사의 본질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소설 도입부에 제시되는 명성아파트의 도면은 대칭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2층부터 4층까지 똑같이 반복되는 평면, 동일한 가구, 같은 위치에 놓인 거울까지. 이러한 대칭성과 규격화는 단순한 공간적 설정을 넘어 하나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겉으로는 질서정연하고 근대적인 공간이지만, 그 내부에는 각자의 욕망과 비밀이 숨 쉬고 있다. 똑같은 벽 안에서 서로 다른 진실을 감춘 인물들은 마치 거울처럼 인간의 선과 악이라는 양면성을 반영한다.

소설의 중심에는 열두 살 식모 ‘입분’이 있다. 처음 등장할 때 그녀는 어리숙하고 처연한 소녀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위를 바라보는 관찰력과 사려 깊음은 예사롭지 않다. 사건이 전개될수록 그 세심함은 총명함으로, 총명함은 상황을 읽고 움직이는 전략적 감각으로 확장된다. 인상적인 점은 이 작은 소녀가 힘도, 권력도, 제도적 보호도 없는 가장자리의 인물이라는 설정이 오히려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데 있다. 바로 그 위치 덕분에 입분은 누구보다 많은 것을 보고 듣는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오히려 쉽게 의심받거나 경계되지만, 입분은 위계의 말단에서 인물들의 틈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든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약한 위치에 선 존재가 가장 날카로운 추리의 주체가 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제약은 곧 무기가 되고, 주변성은 통찰로 전환된다. 독자는 입분의 시선을 따라가며 명성아파트의 주민들을 낱낱이 다시 바라보게 된다.

살인 사건은 단순한 범죄를 넘어, 시대적 욕망과 맞물리며 인간 개개인의 내면을 파고든다. “사람은 완전히 하얗지도 까맣지도 않다”는 작품 속 문장처럼, 이 소설은 인간을 회색의 존재로 그린다. 범인은 특별히 규정된 악인이 아니라, 욕망과 두려움 속에서 잘못된 선택을 거듭하는 평범한 인간들의 합으로 제시된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단선적인 애국주의나 반일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대에 살았을 법한 사람들의 생존 방식과 이해타산, 크고 작은 욕망과 체념을 입체적으로 펼쳐 보인다. 그래서 독자는 1939년을 읽으면서 동시에 현재를 읽게 된다. 시대는 다르지만 인간의 계산과 두려움, 욕망과 변명은 여전히 낯설지 않다.

『1939년 명성아파트』는 공간을 이용한 절묘한 트릭과 긴장감 넘치는 전개로 정통 미스터리의 매력을 충실히 구현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인간의 양면성과 근대 도시의 불안이라는 질문을 남긴다. 명성아파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축소판이자, 속을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은밀한 단면처럼 느껴진다.

그 회색 세계 한복판에서, 가장 작고 연약해 보였던 소녀가 누구보다 또렷한 시선으로 진실을 향해 걸어간다. 독자는 그 발걸음을 따라가며, 사건의 진실뿐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잡한 음영까지 들여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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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증정 @rabbithole_book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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