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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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위의 작업실』, 참, 재미있게 읽었다. 저자 김 갑수씨의 평생에 걸친 작업실에 대한 욕망과 그것을 지구 위에 소유하고자 했던 처절한 내면의 몸부림이 지금도 내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 하나 염두에 둘 것은, 여기서 김 갑수씨가 말하는 작업실은 실제로 목공일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따위의 흔한 작업실이 아니라는 것. 그냥 세상의 온갖 시끄러움과 부조리를 피해 지하로 들어가 숨어서 커피를 볶고 음악을 듣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라는 것. 이런 의미에서라면 나도 이미 나의 작업실을 지구 위에 가지고 있다. 작은 아파트의 문 칸 방엔 서재를, 안방엔 A/V 룸을. 서재에선 정신의 허기를 채우고, 안방에선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이 두 작업실은 내 삶에서 나날의 욕망을 잠재우고 도덕적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곳이다. 이곳에 숨어 있으면 삶의 유한함에 대한 상념도 아득한 저 너머로 잠시 잣아 들고, 살아 있는 이 순간만이 시분초로 쪼개져서 내 뇌 속과 혈관 구석구석으로 호흡의 기쁨을 전달해 준다. 살아가는 동안 타인으로 인해 상처받고, 성취하지 못한 목표와 사랑의 상실 때문에 좌절당한 내 마음 속 응어리가 독서와 음악, 영화로 인해 치유되는 지구 위 내 작업실. 이 지극히 사적인 시공간에서 오늘도 나는 정신의 비익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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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서점 그라피티 ― 교토 · 오사카 · 고베 편』이라는 고서점 안내서를 읽다가 책 좋아하는 사람은 국가를 초월해서 모두 똑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구절을 발견했다. 저자에 따르면 <서적애호 정도>를 점검하는 항목인 셈인데,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각 항목 아래에는 나의 경우를 함께 서술해 보겠다.

① 독서 카드, 신간 안내, 전표(매상표) 등은 버리지 않는다.

→ 나는 어떤 책을 발행한 출판사가 책 속에 자사의 다른 책들을 소개하는 신간 안내쪽지나 또는 출판사들이 신간을 공동으로 안내하고자 발행한 서평지 등을 따로 모아 둔다. 이것은 후일 비슷한 성격의 책들을 찾거나 소위 양서를 선택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또, 한국에서 발행되는 책에는 전표가 빠져 있지만 일본에서 발행되는 책에는 반드시 들어 있으므로, 나는 일본어 책을 살 때는 이것도 버리지 않고 잘 접어서 책갈피로 사용한다. 이 전표는 출판사가 서점으로 하여금 보충 주문을 쉽게 하고자 할 요량으로 책 속에 끼워두는 것인데, 출판사명과 저자명, 제목 및 가격이 인쇄되어 있어 무척 편리하다.

② 신간, 고서를 막론하고, 산 책의 제목, 가격, 구입처 등을 기록하고 있다.

→ 나는 따로 노트에 적어 두지는 않는다. 다만 책을 사 갖고 집에 도착하는 즉시 책 뒤쪽 안표지에 구입 날짜와 구입 서점명, 자필 서명 등을 반드시 표기해 둔다. 이것은 언제든 책한 권 한 권에 대한 첫 인상과 그 책을 살 때의 느낌, 책이 있던 서점의 분위기 또는 중고서점의 경우는 서점의 전체적인 모습은 물론 주인의 인상이나 성격 등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떠올리는 데 좋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났을 때의 시간 간격과의 비교로도 좋다.

③ 사고 싶은 책의 목록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

→ 나는 항상은 아니어도 책 제목을 적어둔 쪽지를 여러 장 만들어 두고 서점에 갈 때마다 가능한 챙겨서 나간다. 요즘은 서점 안에 소비자 스스로 찾아 볼 수 있도록 PC를 구비해두고 있는 곳이 많으므로, 머릿속에 기억해 두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④ 정기적으로 목록을 보내 주는 고서점이 3곳 이상 있다.

→ 한국은 중고서점에서 자체적으로 목록을 만들어서 소비자에게 보내줄 만큼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나는 가능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가까운 중고서점에 직접 나가 책을 구입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 대학 강의가 있어 바쁠 때는 주말에라도 나가려고 노력한다. 내게는 신촌에 단골로 가는 중고 서점이 3군데 있다(글벗서점, 공씨책방, 숨어있는 책).

⑤ 고서전(古書展), 즉매회(卽賣會)에는 첫날 아침 일찍 급히 달려 간다.

→ 이것도 일본에서는 활성화된 행사이지만 한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예전 청계천에 중고서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을 때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내 기억으로는 1980년대 중후반까지 종로 1가에 있던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에서 이와 비슷한 행사를 열었던 적은 몇 번 있다. 그 당시 나도 꽤 싼 값에 펭귄판 문고나 신조문고(新潮文庫) 따위를 산 적이 있다. 지금 혹시 어디선가 고서전을 연다면 아침 일찍 달려 갈 용의는 충분히 있다.

⑥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인데도, 이전보다 싸다거나 상태가 좋다는 등의 이유로, 다시 산 적 이 있다.

→ 그렇다, 나도 여러 번 있다. 특히 내가 먼저 읽어 좋은 인상을 받았고 누구에게라도 추천해주고 싶은 책을 중고서점에서 보았을 때는 어서 그 책이 좋은 독자에게 팔려 나가기를 마음속으로 바란다. 다음 번 같은 중고서점에 들렸을 때도 여전히 있을 경우 그 책이 방치되어 있는 것이 마음 아파 내가 사고 말았던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그렇게 중복 구매한 책들로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나 칼 하인츠 프리저의 『전격전의 전설』, 에르빈 롬멜의 『롬멜 전사록』,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지(知)의 정원』, 폴 콜리어 외 『제2차 세계대전』,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 정 민의 『오직 독서뿐』,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의 재발견』, 『한시 미학 산책』등에 이르기까지 30여 종이 넘는다. 이렇게 두 권씩 갖게 된 책들 중 한 권은 보존용으로, 다른 한 권은 철저하게 읽는 용도로 따로 구분한다. 좀 증상이 심한 것은 아닌가 하고 고민한 적은 여러 번 있었어도 절대 그만 둘 수 없는 나만의 책 애호법이기도 하다(누가 나에게 돌을 던지면 기꺼이 맞아 주겠다).

⑦ 서적 대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회식 · 주거비를 제외하면 가장 크다.

→ 나는 대학생시절부터 밥 먹을 돈도 아껴 책을 샀으므로 언제나 책을 사는 것이 먹는 것보다 우선이었다. 내 전공과 관련하여 읽었던 영국의 작가 중에 지금도 가장 애호하는 사람이 바로 조지 기싱(George Gissing)인데, 이 사람도 딱 한 끼 식사비용만을 가지고 먹거리를 사러 가다가 그만 서점에서 꼭 사고 싶었던 책을 보고는 잠시 갈등하다가 육체의 배고픔 보다 정신의 허기를 채우고자 책을 사 갖고 집에 돌아와 배를 골면서 책을 읽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가난했지만 책만은 끔찍이도 사랑했던 책벌레였다. 나도 그와 비슷하다 할 수 있을까?

⑧ 찾고 있던 책을 손에 넣는 꿈을 꾼 적이 있다.

→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꽤 어두운 지하에 마련된 서점에서 내가 사고 싶었던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습을 꿈에서 본 적은 있다. 한 권의 특정한 책을 구하는 꿈을 꾸지는 않아도 될 만큼 책이 귀하게 취급되는 시대가 아니라서 일까, 아니면 돈만 있으면 구하지 못할 책이 없어서 일까, 점점 책이라는 사물에 부여하는 개념들이 천박해지고 가벼워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⑨ 3천 권 이상의 책을 가지고 있다.

→ 언젠가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의 목록을 정리한 적이 있었는데, 대략 5000권까지 정리하고는 그만 두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단행본만을 정리한 것이고 문학전집이나 문고본, 그리고 잡지류는 모두 제외한 것이므로 모두 합친다면 8000권에서 10000권 사이는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내가 사는 작은 아파트는 책꽂이를 제외하면 가구라 할 만한 것이 없고, 현관부터 쌓여 있는 책꽂이와 책을 피해 요리조리 뱀처럼 난 길을 지나야 한다. 잠은 그냥 거실 책꽂이가 놓여 있지 않은 가운데 공간에서 잔다. 자다가 책꽂이와 책 무게 때문에 방구들이 꺼져 깔려 죽지는 않을까 늘 두려워하면서. 그래서 다치바나 다카시도 3만5천권에 달하는 책을 보관할 고양이 빌딩을 튼튼하게 짓지 않았던가? 오늘도 잠자기가 두렵다.  ⑩ 사후(死後)의 장서 행방을 생각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 2012년에 읽었던 쓰루가야 신이치의『책을 읽고 양을 잃다』에서 가장 마음이 짠했던 부분은 '藏書印'이라는 소제목에서 개진되는 내용인데, 많은 책을 소장했던 사람이 죽은 후에 장서를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을지를 자손에게 유언으로 남긴 낙관의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는 '子孫永保'로 사후에도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 두 번째는 '身後俟代我珍藏人伴信友記' 라는 글귀처럼 합당한 인물에게 양도한다는 것, 세 번째는 장서가 뿔뿔이 흩어지리라는 것을 긍정하고 체념하는 것(p.132~4).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일단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고, 그 뒤에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지만, 그 때까지는 열심히 읽고 사색하며 세상을 떠나기 직전엔 아마 저자가 말하듯 다독보다는 정독에 매진하여 한 두 권의 책만을 가까이 두고 거듭 읽으며 죽음을 준비하지 않을까? 오늘도 잠이 오지 않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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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왜공정 - 일본 신新 왜구의 한반도 재침 음모
전경일 지음 / 다빈치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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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일의 『남왜공정(南倭工程)』을 착잡하고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읽었다. 저자가 7년에 걸쳐 철저한 연구 끝에 내놓은 결론이 가히 놀랍다. "일본은 틀림없이 2045년에 한반도를 재침략한다!"라는 주장. 이 주장은 근거 없는 도발이 아니라 한국사와 일본사를 철저히 연구하고 거시적 관점에서 객관적인 역사적 증거와 패턴을 통해 도출해 낸 충격적일 정도로 정확한 예측이다. 이 책을 꼼꼼히 읽어보면 알겠지만, 한반도와 일본의 지정학적 악연에 의해 형성된 고대부터 현대까지 일본의 한반도를 향한 잔혹 행위가 바로 '왜구'라는 일본 특유의 살육 해적집단에 의한 불행임을 밝히고 있다. 고대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을 거쳐 대한제국의 강제병합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일방적이고 잔혹했던 한반도 침략사가 고대의 왜구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차분한 어조로 전달하는 저자의 문체가 오히려 일본의 행태를 더욱 섬뜩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실제 현대의 일본 자위대는 미국이나 중국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을 만큼의 거대 군사조직으로 세력을 키웠고, 아시아 최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의 왜구가 중세의 조선을 7년간이나 유린했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또 근대 말과 현대 들어 제국주의 세력으로 거대해진 왜구가 36년 동안 얼마나 한반도를 피폐하게 만들었는가? 이렇게 생각해보면 현대 일본의 자위대는 일본의 왜구적 습성이 가장 첨예하게 확대된 실질적인 위협인 셈이다. 한국은 북한과 일본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다. 실제 상황이 이런데도 한국인들은 일본과 일본인들에 대해 아직도 심정적 우월의식에만 사로잡혀 사태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분명 일본은 한반도에서 많은 문물을 받아들여 국가를 형성했고 문명화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정신적 우월과 심정적 만족감에 눈이 멀어 일본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현실적으로 일본과 한국의 경제적 차이와 기술적 격차만으로도 한국은 일본과 대등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게다가 일본과 일본인은 결코 한국인이 자랑해마지 않는 예의로 다스릴만한 국가도 국민도 아니다. 국제정치에서 예의범절과 상호존중은 내가 상대만큼의 힘을 갖추고 있을 때만 효력이 있을 뿐, 약소국은 늘 강대국의 이익에 따라 얼마든지 침략과 식민지화가 반복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언제쯤 일본과 일본인의 본질을 바로 보고 제대로 대비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자생적 친일파가 생겨나고 있고, 젊은 세대의 일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나, 일본제국주의를 겪은 기성세대의 일제 시대에 대한 향수 등이 분명히 커다란 부담임은 틀림없다. 따라서 개개 한국인들이 일본과 일본인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일본과 일본인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왜구적 속성을 먼저 알아야 한다. 왜구는 오랜 시간동안 한반도와 동남아 일대에서 무차별적 살육과 약탈, 방화를 해온 해적집단의 원형이자, 현대 일본과 일본인 속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일본 중심 극우익적 사고의 바탕이며, 한반도가 존재하는 한 언제고 재침략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실질적 거대 세력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 2002년에 유사법제를 통과시킴으로써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가 한반도에 상륙할 근거는 마련해 놓은 셈이고, 독도에 대한 막무가내식의 영유권 주장도 결국 독도와 울릉도를 통해 한반도 내륙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책략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나는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아들이 전쟁 없는 평화로운 땅에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토의 보존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 아닐까? 나는 국방 관련 사안에서 만큼은 비리와 뇌물이 없으면 정말 좋겠다. 나라를 보존하는데 꼭 필요한 국방 분야에서 마저 늘 터져 나오는 비리를 접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못해 언제 정신을 차리려나 싶은 분노가 앞선다. 다시 국토를 빼앗기고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살고 싶은가? 마찬가지로 나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느낀 지도 오래 되었다. 그들이 언젠가는 영토를 회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결국 이스라엘 또한 일본 우익과 마찬가지 아닌가? 나치에 의한 민족 절멸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그 참혹했던 경험을 팔레스타인 민중들에게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결코 미국의 논리대로 유태인과 이스라엘을 두둔하고 싶지는 않다. 또, 만일 한일 간에 군사적 충돌이 벌어진다면 미국이 어디를 편들 것 같은가? 아무튼 많은 한국인들이 이 책을 읽고 세계의 작동방식과 국제정치의 냉혹함에 눈 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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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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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를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처음 읽었던 때인 2001년 9월엔 감탄과 부러움으로 저자인 다치바나 다카시라는 일본인의 지성에 질투마저 느꼈었다. 두 번째로 읽었던 2012년엔 다치바나 다카시가 방광암에 걸린 자신의 치료 과정과 최신 암 연구 동향을 담은 <암,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라는 책을 읽는 과정에서 새삼 저자의 지적 호기심의 근원을 탐구하고 싶어 다시 손에 잡았던 것인데, 이 때는 나도 어느 정도 관심 분야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리가 되어 있었던 터라 무조건적인 경탄보다는 냉철한 시각으로 읽을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올해 3월 대학 강의 가는 왕복 버스 안에서 다시 한 번 읽었던 것인데, 뭐랄까, 아직도 지적인 면에서 다치바나 다카시의 그 폭넓은 호기심과 깊이를 따라갈 수는 없지만, 대학생들과 호흡하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책과 독서에 대해 나 나름대로의 경험과 폭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수준에는 이르렀다는 생각에 대해 책벌레의 의견을 내 것과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단숨에 읽었다. 결론은 많은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내 삶의 깊이와 경험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아무리 첨단 디지털 시대라 해도 진정한 지식과 지혜는 책 속에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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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레종 데트르 - 쿨한 남자 김갑수의 종횡무진 독서 오디세이
김갑수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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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김갑수는 김갑수 답게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글을 쓸 때도 김갑수 답게 쓰는 사람인지라, <나의 레종 데트르>라는 책도 비록 독서후의 느낌을 모은 것이지만 그대로 인간 김갑수가 실명으로 드러나는 마당이기도 하다. 김갑수의 독서 범위는 문학에서 예술, 사회비평에서 자서전(또는 전기)에 이르기까지 워낙 다양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은 책의 핵심을 집어내는 읽기 자체의 능력도 뛰어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타고난 성정이랄까 아니면 취향의 문제랄까, 지연과학에 관한 책은 한 권도 없고 그 분야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있다는 것. 아무튼 이 책은 제목도 특이한데, 프랑스어로 '존재의 이유'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에 실린 서평 아닌 서평들은 김갑수의 읽기를 통해 김갑수 식으로 해석되어 누가 읽어도 김갑수가 썼음을 단번에 알 수 있을 만큼 예전 그의 책들에서 받았던 인상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존재의 이유'라는 책 제목처럼, 김갑수의 신경망에 들어 온 모든 책들은 그 자체로 읽어볼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도덕이나 윤리 따위의 규범들은 되도록 무시되고 책의 내용이 무엇이든 쉽게 감동받고 쉽게 분노하며 쉽게 희노애락오욕칠정을 드러내는 상황이 반복된다. 나는 이 책을 그 자체로 58년 개띠 김갑수가 인간과 사회에 던지는 그만의 독특한 사유체계의 중간 점검으로 읽었다. 아마 앞으로도 김갑수는 결코 사회적 보편 진리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고, 도덕이나 윤리에 기울지 않을 것이며,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하면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누리다가 아쉬워하면서 눈을 감을 것이다. 그런 그가 부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아직도 정신적으로 자유롭지 않을 것일까? 김갑수의 책은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이든 읽은 후에 내 육체의 구속과 내 정신의 보수성을 퍼뜩 깨닫게 해는 무엇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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