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서점 그라피티 ― 교토 · 오사카 · 고베 편』이라는 고서점 안내서를 읽다가 책 좋아하는 사람은 국가를 초월해서 모두 똑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구절을 발견했다. 저자에 따르면 <서적애호 정도>를 점검하는 항목인 셈인데,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각 항목 아래에는 나의 경우를 함께 서술해 보겠다.

① 독서 카드, 신간 안내, 전표(매상표) 등은 버리지 않는다.

→ 나는 어떤 책을 발행한 출판사가 책 속에 자사의 다른 책들을 소개하는 신간 안내쪽지나 또는 출판사들이 신간을 공동으로 안내하고자 발행한 서평지 등을 따로 모아 둔다. 이것은 후일 비슷한 성격의 책들을 찾거나 소위 양서를 선택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또, 한국에서 발행되는 책에는 전표가 빠져 있지만 일본에서 발행되는 책에는 반드시 들어 있으므로, 나는 일본어 책을 살 때는 이것도 버리지 않고 잘 접어서 책갈피로 사용한다. 이 전표는 출판사가 서점으로 하여금 보충 주문을 쉽게 하고자 할 요량으로 책 속에 끼워두는 것인데, 출판사명과 저자명, 제목 및 가격이 인쇄되어 있어 무척 편리하다.

② 신간, 고서를 막론하고, 산 책의 제목, 가격, 구입처 등을 기록하고 있다.

→ 나는 따로 노트에 적어 두지는 않는다. 다만 책을 사 갖고 집에 도착하는 즉시 책 뒤쪽 안표지에 구입 날짜와 구입 서점명, 자필 서명 등을 반드시 표기해 둔다. 이것은 언제든 책한 권 한 권에 대한 첫 인상과 그 책을 살 때의 느낌, 책이 있던 서점의 분위기 또는 중고서점의 경우는 서점의 전체적인 모습은 물론 주인의 인상이나 성격 등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떠올리는 데 좋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났을 때의 시간 간격과의 비교로도 좋다.

③ 사고 싶은 책의 목록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

→ 나는 항상은 아니어도 책 제목을 적어둔 쪽지를 여러 장 만들어 두고 서점에 갈 때마다 가능한 챙겨서 나간다. 요즘은 서점 안에 소비자 스스로 찾아 볼 수 있도록 PC를 구비해두고 있는 곳이 많으므로, 머릿속에 기억해 두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④ 정기적으로 목록을 보내 주는 고서점이 3곳 이상 있다.

→ 한국은 중고서점에서 자체적으로 목록을 만들어서 소비자에게 보내줄 만큼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나는 가능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가까운 중고서점에 직접 나가 책을 구입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 대학 강의가 있어 바쁠 때는 주말에라도 나가려고 노력한다. 내게는 신촌에 단골로 가는 중고 서점이 3군데 있다(글벗서점, 공씨책방, 숨어있는 책).

⑤ 고서전(古書展), 즉매회(卽賣會)에는 첫날 아침 일찍 급히 달려 간다.

→ 이것도 일본에서는 활성화된 행사이지만 한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예전 청계천에 중고서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을 때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내 기억으로는 1980년대 중후반까지 종로 1가에 있던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에서 이와 비슷한 행사를 열었던 적은 몇 번 있다. 그 당시 나도 꽤 싼 값에 펭귄판 문고나 신조문고(新潮文庫) 따위를 산 적이 있다. 지금 혹시 어디선가 고서전을 연다면 아침 일찍 달려 갈 용의는 충분히 있다.

⑥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인데도, 이전보다 싸다거나 상태가 좋다는 등의 이유로, 다시 산 적 이 있다.

→ 그렇다, 나도 여러 번 있다. 특히 내가 먼저 읽어 좋은 인상을 받았고 누구에게라도 추천해주고 싶은 책을 중고서점에서 보았을 때는 어서 그 책이 좋은 독자에게 팔려 나가기를 마음속으로 바란다. 다음 번 같은 중고서점에 들렸을 때도 여전히 있을 경우 그 책이 방치되어 있는 것이 마음 아파 내가 사고 말았던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그렇게 중복 구매한 책들로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나 칼 하인츠 프리저의 『전격전의 전설』, 에르빈 롬멜의 『롬멜 전사록』,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지(知)의 정원』, 폴 콜리어 외 『제2차 세계대전』,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 정 민의 『오직 독서뿐』,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의 재발견』, 『한시 미학 산책』등에 이르기까지 30여 종이 넘는다. 이렇게 두 권씩 갖게 된 책들 중 한 권은 보존용으로, 다른 한 권은 철저하게 읽는 용도로 따로 구분한다. 좀 증상이 심한 것은 아닌가 하고 고민한 적은 여러 번 있었어도 절대 그만 둘 수 없는 나만의 책 애호법이기도 하다(누가 나에게 돌을 던지면 기꺼이 맞아 주겠다).

⑦ 서적 대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회식 · 주거비를 제외하면 가장 크다.

→ 나는 대학생시절부터 밥 먹을 돈도 아껴 책을 샀으므로 언제나 책을 사는 것이 먹는 것보다 우선이었다. 내 전공과 관련하여 읽었던 영국의 작가 중에 지금도 가장 애호하는 사람이 바로 조지 기싱(George Gissing)인데, 이 사람도 딱 한 끼 식사비용만을 가지고 먹거리를 사러 가다가 그만 서점에서 꼭 사고 싶었던 책을 보고는 잠시 갈등하다가 육체의 배고픔 보다 정신의 허기를 채우고자 책을 사 갖고 집에 돌아와 배를 골면서 책을 읽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가난했지만 책만은 끔찍이도 사랑했던 책벌레였다. 나도 그와 비슷하다 할 수 있을까?

⑧ 찾고 있던 책을 손에 넣는 꿈을 꾼 적이 있다.

→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꽤 어두운 지하에 마련된 서점에서 내가 사고 싶었던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습을 꿈에서 본 적은 있다. 한 권의 특정한 책을 구하는 꿈을 꾸지는 않아도 될 만큼 책이 귀하게 취급되는 시대가 아니라서 일까, 아니면 돈만 있으면 구하지 못할 책이 없어서 일까, 점점 책이라는 사물에 부여하는 개념들이 천박해지고 가벼워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⑨ 3천 권 이상의 책을 가지고 있다.

→ 언젠가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의 목록을 정리한 적이 있었는데, 대략 5000권까지 정리하고는 그만 두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단행본만을 정리한 것이고 문학전집이나 문고본, 그리고 잡지류는 모두 제외한 것이므로 모두 합친다면 8000권에서 10000권 사이는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내가 사는 작은 아파트는 책꽂이를 제외하면 가구라 할 만한 것이 없고, 현관부터 쌓여 있는 책꽂이와 책을 피해 요리조리 뱀처럼 난 길을 지나야 한다. 잠은 그냥 거실 책꽂이가 놓여 있지 않은 가운데 공간에서 잔다. 자다가 책꽂이와 책 무게 때문에 방구들이 꺼져 깔려 죽지는 않을까 늘 두려워하면서. 그래서 다치바나 다카시도 3만5천권에 달하는 책을 보관할 고양이 빌딩을 튼튼하게 짓지 않았던가? 오늘도 잠자기가 두렵다.  ⑩ 사후(死後)의 장서 행방을 생각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 2012년에 읽었던 쓰루가야 신이치의『책을 읽고 양을 잃다』에서 가장 마음이 짠했던 부분은 '藏書印'이라는 소제목에서 개진되는 내용인데, 많은 책을 소장했던 사람이 죽은 후에 장서를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을지를 자손에게 유언으로 남긴 낙관의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는 '子孫永保'로 사후에도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 두 번째는 '身後俟代我珍藏人伴信友記' 라는 글귀처럼 합당한 인물에게 양도한다는 것, 세 번째는 장서가 뿔뿔이 흩어지리라는 것을 긍정하고 체념하는 것(p.132~4).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일단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고, 그 뒤에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지만, 그 때까지는 열심히 읽고 사색하며 세상을 떠나기 직전엔 아마 저자가 말하듯 다독보다는 정독에 매진하여 한 두 권의 책만을 가까이 두고 거듭 읽으며 죽음을 준비하지 않을까? 오늘도 잠이 오지 않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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