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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서점 그라피티 ― 교토 · 오사카 · 고베 편』이라는 고서점 안내서를 읽다가 책 좋아하는 사람은 국가를 초월해서 모두 똑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구절을 발견했다. 저자에 따르면 <서적애호 정도>를 점검하는 항목인 셈인데,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각 항목 아래에는 나의 경우를 함께 서술해 보겠다.

① 독서 카드, 신간 안내, 전표(매상표) 등은 버리지 않는다.

→ 나는 어떤 책을 발행한 출판사가 책 속에 자사의 다른 책들을 소개하는 신간 안내쪽지나 또는 출판사들이 신간을 공동으로 안내하고자 발행한 서평지 등을 따로 모아 둔다. 이것은 후일 비슷한 성격의 책들을 찾거나 소위 양서를 선택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또, 한국에서 발행되는 책에는 전표가 빠져 있지만 일본에서 발행되는 책에는 반드시 들어 있으므로, 나는 일본어 책을 살 때는 이것도 버리지 않고 잘 접어서 책갈피로 사용한다. 이 전표는 출판사가 서점으로 하여금 보충 주문을 쉽게 하고자 할 요량으로 책 속에 끼워두는 것인데, 출판사명과 저자명, 제목 및 가격이 인쇄되어 있어 무척 편리하다.

② 신간, 고서를 막론하고, 산 책의 제목, 가격, 구입처 등을 기록하고 있다.

→ 나는 따로 노트에 적어 두지는 않는다. 다만 책을 사 갖고 집에 도착하는 즉시 책 뒤쪽 안표지에 구입 날짜와 구입 서점명, 자필 서명 등을 반드시 표기해 둔다. 이것은 언제든 책한 권 한 권에 대한 첫 인상과 그 책을 살 때의 느낌, 책이 있던 서점의 분위기 또는 중고서점의 경우는 서점의 전체적인 모습은 물론 주인의 인상이나 성격 등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떠올리는 데 좋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났을 때의 시간 간격과의 비교로도 좋다.

③ 사고 싶은 책의 목록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

→ 나는 항상은 아니어도 책 제목을 적어둔 쪽지를 여러 장 만들어 두고 서점에 갈 때마다 가능한 챙겨서 나간다. 요즘은 서점 안에 소비자 스스로 찾아 볼 수 있도록 PC를 구비해두고 있는 곳이 많으므로, 머릿속에 기억해 두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④ 정기적으로 목록을 보내 주는 고서점이 3곳 이상 있다.

→ 한국은 중고서점에서 자체적으로 목록을 만들어서 소비자에게 보내줄 만큼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나는 가능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가까운 중고서점에 직접 나가 책을 구입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 대학 강의가 있어 바쁠 때는 주말에라도 나가려고 노력한다. 내게는 신촌에 단골로 가는 중고 서점이 3군데 있다(글벗서점, 공씨책방, 숨어있는 책).

⑤ 고서전(古書展), 즉매회(卽賣會)에는 첫날 아침 일찍 급히 달려 간다.

→ 이것도 일본에서는 활성화된 행사이지만 한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예전 청계천에 중고서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을 때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내 기억으로는 1980년대 중후반까지 종로 1가에 있던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에서 이와 비슷한 행사를 열었던 적은 몇 번 있다. 그 당시 나도 꽤 싼 값에 펭귄판 문고나 신조문고(新潮文庫) 따위를 산 적이 있다. 지금 혹시 어디선가 고서전을 연다면 아침 일찍 달려 갈 용의는 충분히 있다.

⑥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인데도, 이전보다 싸다거나 상태가 좋다는 등의 이유로, 다시 산 적 이 있다.

→ 그렇다, 나도 여러 번 있다. 특히 내가 먼저 읽어 좋은 인상을 받았고 누구에게라도 추천해주고 싶은 책을 중고서점에서 보았을 때는 어서 그 책이 좋은 독자에게 팔려 나가기를 마음속으로 바란다. 다음 번 같은 중고서점에 들렸을 때도 여전히 있을 경우 그 책이 방치되어 있는 것이 마음 아파 내가 사고 말았던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그렇게 중복 구매한 책들로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나 칼 하인츠 프리저의 『전격전의 전설』, 에르빈 롬멜의 『롬멜 전사록』,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지(知)의 정원』, 폴 콜리어 외 『제2차 세계대전』,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 정 민의 『오직 독서뿐』,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의 재발견』, 『한시 미학 산책』등에 이르기까지 30여 종이 넘는다. 이렇게 두 권씩 갖게 된 책들 중 한 권은 보존용으로, 다른 한 권은 철저하게 읽는 용도로 따로 구분한다. 좀 증상이 심한 것은 아닌가 하고 고민한 적은 여러 번 있었어도 절대 그만 둘 수 없는 나만의 책 애호법이기도 하다(누가 나에게 돌을 던지면 기꺼이 맞아 주겠다).

⑦ 서적 대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회식 · 주거비를 제외하면 가장 크다.

→ 나는 대학생시절부터 밥 먹을 돈도 아껴 책을 샀으므로 언제나 책을 사는 것이 먹는 것보다 우선이었다. 내 전공과 관련하여 읽었던 영국의 작가 중에 지금도 가장 애호하는 사람이 바로 조지 기싱(George Gissing)인데, 이 사람도 딱 한 끼 식사비용만을 가지고 먹거리를 사러 가다가 그만 서점에서 꼭 사고 싶었던 책을 보고는 잠시 갈등하다가 육체의 배고픔 보다 정신의 허기를 채우고자 책을 사 갖고 집에 돌아와 배를 골면서 책을 읽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가난했지만 책만은 끔찍이도 사랑했던 책벌레였다. 나도 그와 비슷하다 할 수 있을까?

⑧ 찾고 있던 책을 손에 넣는 꿈을 꾼 적이 있다.

→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꽤 어두운 지하에 마련된 서점에서 내가 사고 싶었던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습을 꿈에서 본 적은 있다. 한 권의 특정한 책을 구하는 꿈을 꾸지는 않아도 될 만큼 책이 귀하게 취급되는 시대가 아니라서 일까, 아니면 돈만 있으면 구하지 못할 책이 없어서 일까, 점점 책이라는 사물에 부여하는 개념들이 천박해지고 가벼워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⑨ 3천 권 이상의 책을 가지고 있다.

→ 언젠가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의 목록을 정리한 적이 있었는데, 대략 5000권까지 정리하고는 그만 두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단행본만을 정리한 것이고 문학전집이나 문고본, 그리고 잡지류는 모두 제외한 것이므로 모두 합친다면 8000권에서 10000권 사이는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내가 사는 작은 아파트는 책꽂이를 제외하면 가구라 할 만한 것이 없고, 현관부터 쌓여 있는 책꽂이와 책을 피해 요리조리 뱀처럼 난 길을 지나야 한다. 잠은 그냥 거실 책꽂이가 놓여 있지 않은 가운데 공간에서 잔다. 자다가 책꽂이와 책 무게 때문에 방구들이 꺼져 깔려 죽지는 않을까 늘 두려워하면서. 그래서 다치바나 다카시도 3만5천권에 달하는 책을 보관할 고양이 빌딩을 튼튼하게 짓지 않았던가? 오늘도 잠자기가 두렵다.  ⑩ 사후(死後)의 장서 행방을 생각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 2012년에 읽었던 쓰루가야 신이치의『책을 읽고 양을 잃다』에서 가장 마음이 짠했던 부분은 '藏書印'이라는 소제목에서 개진되는 내용인데, 많은 책을 소장했던 사람이 죽은 후에 장서를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을지를 자손에게 유언으로 남긴 낙관의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는 '子孫永保'로 사후에도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 두 번째는 '身後俟代我珍藏人伴信友記' 라는 글귀처럼 합당한 인물에게 양도한다는 것, 세 번째는 장서가 뿔뿔이 흩어지리라는 것을 긍정하고 체념하는 것(p.132~4).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일단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고, 그 뒤에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지만, 그 때까지는 열심히 읽고 사색하며 세상을 떠나기 직전엔 아마 저자가 말하듯 다독보다는 정독에 매진하여 한 두 권의 책만을 가까이 두고 거듭 읽으며 죽음을 준비하지 않을까? 오늘도 잠이 오지 않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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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왜 읽는가? 아니, 왜 읽어야 하는가? 茶山선생, 星湖선생을 포함하는 수없이 많은 우리의 선인들이나 서구의 많은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책읽기에 대한 수다한 단상들과 독서기에서 논의되어 온 탁월한 독서법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이야기 했으므로, 이번에는 나의 개인 경험을 통해 책읽기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보기로 하겠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첫째, 도덕적인 인간이 되고자 함이다. 책읽기는 당장의 물질적 풍요 같은 보상으로 이어지는 행위가 아니다. 또한 책읽기 자체는 운동이나 기타 활동처럼 신체의 변화를 가져다주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인간의 다양한 활동 가운데서도 특히 책읽기는 가시적인 결과가 당장 나타나지 않아서 현대처럼 어떤 활동 뒤의 보상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시대에는 별로 득이 될 것이 없는, 어쩌면 공허한 행위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현실이 이런데도 책을 읽어야 할 당위성이 있다면, 나의 경우처럼, 책읽기는 언제든 버려도 되는 덕목으로 전락한 도덕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실존적 몸부림이라는 것에서 찾고 싶다. 옛 조선의 선비들이 도덕과 원칙을 준수하고 올바른 삶을 살고자 했던 나날의 지침이 바로 책읽기였음을 상기해보면, 세상이 인간성의 타락으로 인한 도덕성의 해이(解弛)나 폭력 또는 이념이 득세하는 시공간으로 치달릴수록 책읽기는 나의 정신을 단련시켜 오로지 도덕적으로 살고자하는 결의를 더욱 굳게 해주는 적극적인 행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뉴스를 보기가 절망적일 만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도덕적 타락상이 극에 달한 지금, 옛 선비들의 맑고 청빈했던 정신세계를 그들이 읽었던 경전 또는 그들이 남긴 책들을 통해 추체험 하는 행동은 비록 금전적인 부유함을 약속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무한 욕망을 누르고 진정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지침은 될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내가 책을 고르고 읽는 기준은 무엇보다도 나의 도덕성을 굳건히 지키고 시류(時流)의 잘못된 흐름에서 멀리 벗어나 청명한 정신의 탑을 쌓는데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에 국한된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둘째, 인간이 분류해 놓은 학문 분야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위해서다. 이것은 대단히 실용적인 목적의 책읽기 이지만,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얻는 방법으로 책읽기보다 용이한 행동이 또 있는가? 내 전공은 영어영문학인데, 문학만으로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 부분적인 이해만이 가능할 뿐 더 깊은 인식에는 도달하기가 불가능하므로 다양한 분야의 책읽기는 필수적이다. 따라서 내 책읽기의 범위는 먼저 문학을 포함하는 인문과학 전반과 사회과학, 생물학을 포함하는 자연과학의 일부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분야에 걸쳐 있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될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다만 하나의 전공에만 몰두하고 그 밖의 분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동향도 모르는 채 지내기에는 인간 뇌의 대부분이 활용되지 못함이 안타깝다. 죽기 직전까지 인간의 뇌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며 그렇게 인식의 폭을 넓혀가는 것인데, 알고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두려움도 그만큼 줄어들지 않겠는가? 고대나 중세처럼 책의 소유나 읽기가 왕족을 포함하는 소수 특권계층의 전유물이었고 따라서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무기로 소수가 권력과 대중 지배력마저 독점했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책읽기가 특권도 아니고 그저 대중적인 선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책이 안 팔리고 읽히지도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식과 정보가 대중화되었어도 내게 알고자 하는 의지가 없고 호기심마저 없다면 나는 여전히 정보와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의 지배를 받기가 쉽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책읽기를 소홀히 하여 잘못되고 왜곡된 지식과 정보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 누구라도 거짓과 비도덕, 또는 폭력과 욕망의 희생자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해볼 때 책읽기는 나의 지적 성장과 더불어 나와 세계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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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인 학자인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 1786~1841)가 자신의 형님인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독서 습관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한 권의 책을 다 읽을 만큼 길게 한가한 때를 기다린 뒤에야 책을 편다면 평생 가도 책을 읽은 만한 날은 없다. 비록 아주 바쁜 중에도 한 글자를 읽은 만한 틈만 있으면 문득 한 글자라도 읽는 것이 옳다.”(정민, 『오직 독서뿐』김영사, p. 380) 또, 조선 영조 때 유중림(柳重臨)이 당시 이미 읽히고 있던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를 증보한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공부하는 사람이 너무 많이만 보려 들면 익숙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알려고 하면 정밀하지 못하여 빨리 하려는 것이 도리어 더디게 되는데 그게 바로 공부하는 사람의 큰 병통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 분량을 적게 하여 익히 읽고 정하게 생각하면 오랜 후에는 자연히 바른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유중림, 『산림경제』솔, p. 104)라는 말이 있는데, 홍석주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매일 꾸준하게 조금씩 이라도 해나가는 독서와 공부. 독서와 공부는 그 시간을 따로 마련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서와 공부도 마치 숨을 쉬듯이 의식하지 않고 언제든 내가 있는 그 자리와 그 시간에 임하여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바빠서, 시간이 나지 않아 책읽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하거나, 또는 이미 돈 벌며 잘 살고 있는 데 공부는 무슨 공부냐 하면서 더 이상의 지적인 호기심을 해소하려고 들지 않는다. 물론 그 이외에도 인터넷이나 스마트 폰, 케이블 방송 등, 우리의 하루 24시간을 온통 자극적인 오락과 게임, 상업적인 이미지들로 가득 채우는 방해 요소도 독서와 공부의 큰 장애물이긴 하지만, 부인하지 못할 사실을 말하자면 책을 읽고 공부할 마음 자체가 없는 것뿐이다. 책에도 여러 분야가 있고, 공부도 마찬가지지만, 옛날에는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바로 공부였다. 특히 조선의 선비들에게 독서는 그 자체로 절대적이고 순수한 공부의 한 형태였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읽기를 통해 조선의 선비들은 정신과 육체를 가다듬고 욕망을 절제하며 일상생활에서 언행일치를 실천하고자 했다. 독서와 공부를 무슨 거창한 것으로 여기고 경원시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독서와 공부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저 언제 어디서든 읽고 공부하는 습관만이 나의 뇌 속을 바꾸고 뇌가 바뀌면 육체도 더욱 활성화되며 그렇게 궁극적으로 나와 내 주변 세계가 총체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떤 책을 읽고 어떻게 공부해야 할 것인가. 지금이야 워낙 많은 종류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인터넷이나 전자책 등, 책의 형태와 의미도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어떤 포맷을 택해 무엇을 읽던 그 한 줄 한 줄이 그동안의 안일했던 정신을 후려쳐 깊은 반성과 함께 행동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신변잡기식 수필이나 가벼운 베스트셀러 소설, 또는 주식투자를 권유하는 자기계발서가 과연 나태하고 고여서 썩어 가는 정신을 뒤흔들어 궁극적인 깨달음을 줄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만약 당신이 베스트셀러만을 읽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정신은 가볍고 자극적이며 말초적인 수준에서 단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다. 전혀 지성적이지 못하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수도 없으며 그저 남들이 시키는 것만 하고 싶다면 베스트셀러를 읽어라. 하지만 독서가 곧 공부라면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 근래 들어 소위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여러 분과(分科) 학문들의 통섭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한 권의 정평 있는 고전(古典) 독서야 말로 폭넓은 지식과 깊은 지혜의 원천에 바로 들어 갈 수 있는 척도임을 잊지 말길. 물론 처음부터 쉽게 고전을 읽을 수는 없다. 그러나 홍석주나 유중림의 말처럼 매일 꾸준히 정해놓은 분량만큼은 어김없이 읽고 공부하는 습관을 실천한다면 어느새 고전 속의 깊고도 넓은 지식과 지혜가 당신을 단단히 감싸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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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서점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 중 하나가 책과의 만남에도 필연성이 있다는 인식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제 낙성대 소재 중고서점에 들렀다가 '발견'한 <혁명의 시간>이라는 책 때문이다. 이 책은 알라딘 인터넷 서점에 품절로 떠서 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어제, 그것도 집에 가는 길에 잠시 들려볼까 하고 전철에서 내려 중고서점에 갔던 것인데, 그 곳에 떡 하니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전율이랄까, 어떤 책과의 만남에는 반드시 필연적인 무엇인가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 책에 대해 늘 생각했고 중고서점에 갈 때마다 찾기도 했지만, 만약 어제 그 시간에 그 중고서점에 들리지 않았다면 이 책이 지금 내 손에 들려있을 수 있을까? 물론 시내 대형서점에 가면 한 권쯤 있을지도 모른다. 대학도서관에서 대출할 수도 있을테고. 하지만 돈과 시간이 있다고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마 이전 책 주인이 급전이 필요해 중고서점에 이 책을 팔았을 수도 있고, 중고서점 주인장이 평소 사회과학에 관심이 있어 특수한 경로를 통해 확보했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책은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는 것이다. 행운인지 천부적인 안목인지 모르겠으나 그동안 이런 식으로 중고서점에서 遭遇한 책들이 꽤 된다. 예를 들어 <전격전의 전설>이나 <콜디스트 윈터>, <조약으로 보는 한국 근대사> 등이 그것이다. 내가 어떤 책을 중고서점에서 발견하는 방법은 이렇다. 우선 시내 대형서점에서 눈으로 제목을 익히고 내게 필요한 책이라고 판단이 되면 그 책에 대한 생각을 늘 하면서 생활한다. 그 자리에서 당장 정가를 주고 그 책을 살 수도 있지만, 우선은 유보하고 기다려 보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언젠가 느낌이 올 때가 있다. 확신은 못하지만 기다리던 책이 중고서점에 들어 왔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말이다. 위에 든 <전격전의 전설>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 책은 어느 휴일 집에서 묵은 <플래툰>지를 뒤적이다 서평란에서 보고는 기억해둔 것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고서점에서 발견하고는 쾌재를 불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 때 유행했던 <시크릿>이란 책에 나오는 '끌어당김의 법칙'이랄까, 아무튼 한 권의 책과 만나는 일에도 분명 운명같은 그 무엇이 존재한다고 해도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다음번 중고서점에서는 어떤 책과 만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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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집중적으로 읽었던 세계화 관련 생각 몇 가지. 사실 세계화에 대한 해결책은 이미 나와 있다. 소위 서구 선진 강대국들이 욕심을 줄이는 것이다. 그들이 고기를 덜 먹으면 소, 돼지가 먹는 곡물만으로도 충분히 최빈국의 굶주림이 해결될 수 있고, 그들이 자동차를 덜 타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줄어 교토 의정서를 준수할 수 있으며, 그들이 최신 전자 제품에 대한 욕망을 줄이면 대기업이 아프리카의 내전을 틈타 그 곳의 지하자원을 헐값에 사들여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는 없을 테니까. 세계화의 본질은 선진 강대국들이 그동안 누려온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습관을 포기하지 못하고 개발도상국의 희생을 발판 삼아서라도 영원히 자신들만의 안락함을 누리겠다는 이기적 발상에 불과한 것이다. 과연 그들이 고기를 덜 먹고, 자동차를 덜 타며, 최신 전자제품 소유를 포기하겠는가? 과연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는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자신들의 안락함을 포기하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인종적 오만함과 기술적 우위, 정치적 안정 따위의 자기 기만적인 사고방식으로 지금까지 군림해 온 그들이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고 진정으로 지구의 안전과 후진국의 발전을 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오산이다. 그들은 절대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명분을 내세워서 라도 타국을 침략하여 기름을 확보할 것이고, 최빈국에서 내전을 유발하여 무기를 팔 것이며, 값싸게 지하자원을 확보하여 그것으로 전자제품을 만들어 비싼 값에 팔아먹을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이 지향하는 바도 선진 자본주의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가? 한국도 이미 제국주의 국가가 아닌가? 한국보다 못살고 발전이 더딘 지역을 무시하고 오만하게 굴고 있지는 않은가? 한국은 얼마나 가난한 나라를 돕고 있는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세계화는 무엇인가? 미국 흉내 내기? 아니면 미국 추종하기? 선진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최빈국의 자원 및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 한국에서 생산되는 자동차가 세계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늘이고 있는데 언제까지 쾌적한 라이프 스타일만을 강조하며 진실을 가릴 것인가? 얼마 전 끝난 핵안보 정상회의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등의 핵강국들이 그 많은 핵무기를 폐기할 생각이 없는데 무슨 핵 테러를 걱정하는가? 과연 맨주먹뿐인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핵무기를 소유하여 그것을 운영할 막대한 자본을 소유하고 있거나, 플루토늄을 확보하여 그것을 핵무기로 만들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미국과 러시아가 소유한 핵무기 자체가 지구의 평화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 아니냐? 왜 본질은 건드리지 않고 진실을 호도하는가? 한국의 언론은 그저 미국으로 대표되는 선진 강대국들의 대변인일 뿐이다. 자주적으로 사고할 수도 없고 종속적인 상황에서는 그저 강대국들의 논리를 앵무새처럼 따라 하면 되는 것이다, 세계화는 좋은 것이라고. 그러나 지금과 같은 형식으로 세계화가 계속되면 부유한 국가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국가는 더욱 가난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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