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시에 매혹되다 - 한시에 담긴 옛 지식인들의 사유와 풍류
김풍기 지음 / 푸르메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쓰는 정신은 무엇을 잉태하는가? 인간사 짧은 생애 동안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많고, 아귀다툼과 그로 인한 무수한 죽음들, 가난과 이별로 점철되어 삶의 진정한 환희를 느껴보지도 못한 채 떠나야 할 이 지상에서, 왜 시를 쓰는 것인가? 오히려 그래서 시를 쓰는 것이 내 육체의 생존에 절대 조건일지도. 살면서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 알 수 없고, 인간성에서 일말의 희망도 볼 수 없을 때, 소수 지식인들은 붓을 들고 시를 써내려갔다. 어쩌면 극히 소극적인 행위로 보이지만, 시를 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시대와의 불화를 극복하며 평등과 사랑이 넘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일지도. 그렇게 더러는 현실의 고단함도 삶의 일부로 편입되고, 자연과 계절의 부단한 순환 속에서 인간의 극히 짧고 작은 시공간은 지적이고도 정서적인 사유의 원질로써 기능하는 것은 아닐지. 나를 포함한 세상 만물은 죽음을 내포하고 태어나 죽음을 향해 살다가 종국엔 소멸할 운명. 왜 서로 증오하는가? 왜 더욱 사랑하지 않는가?

           강원대 교수인 김풍기 선생의 『옛 시에 매혹되다』를 읽는 동안 많은 상념들이 내 머리 속에서 떠올랐다 사라졌다. 이 책은 저자가 30년에 걸쳐 읽고 사유해온 중국과 고려, 조선의 한시들에 관한 사색적인 기록이다. 모두 17개의 소주제로 나뉘어져 있는데, 풍류(風流), 부채, 차(茶), 절의(節義), 여행, 이별, 책, 봄, 꽃, 질병, 변방, 장마, 산책, 정원, 대나무, 은거(隱居), 밤 비 등, 한 편 한 편의 글들이 저자의 개인적 경험과 옛 한시가 어울려 조용하지만 근본적인 사유를 자극한다. 옛사람들의 정갈하고 낮은 삶의 자세에서 나오는 향기가 다툼과 욕망, 상대에 몰이해 등으로 늘 갈등과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현 한국 사회에 깊은 성찰과 반성을 촉구한다고 할까. 모든 글들이 잔잔한 울림을 주지만 특히 은거에 관한 글이 가장 인상 깊었다. 진정한 은거란 무엇일까? 단순히 속세를 떠나 산 속이나 전원에 들어앉는 공간적 이동이 은거일까? 그거야 돈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아무리 몸이 속세를 멀리 벗어나 있어도 마음이 그곳을 향하고 귀가 그 쪽을 향해 열려 있다면 그것을 은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풍기 선생은 말한다, “진정한 은거는 거처하는 곳이 어디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마음이 중요한 법이다.”라고. 조태억(趙泰億)이라는 가난한 선비가 쓴 한시 한 구절. “원래 저잣거리에 은거하는 것, 반드시 홍진과 멀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오.(從來城市隱 不必遠紅塵)” 이어지는 김풍기 선생의 말, “은거란 자유로운 마음을 구가하는 순간 언제 어디서나 실현되는 것.” 이제 나는 공간적인 은거는 다시 꿈꾸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막연히 꿈꾸던 낙향, 아니, 내 고향은 서울이니까 낙향이라기보다 그저 전원 속에서 살고 싶은 바람이겠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제약이 있고 게다가 오랜 생활의 터전을 훌훌 털고 떠나기도 마땅치 않으니, 지금 살고 있는 조그만 아파트의 더 작은 나의 서재인 청향재(淸香齋)에서 은거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물론 그동안 나는 내 서재에서 정신의 자유와 비익을 수시로 경험해왔으니, 서재 속으로 은거한다는 말은 더욱 적극적으로 다종다양한 책들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나를 얽어매고 있는 많은 사회적 관계들과 정신적 부담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키겠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그랬듯 권력 다툼에 가까이 가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인간성의 한계를 더욱 철저히 깨달아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인간을 신뢰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살겠다는 뜻이다. 서재만큼 이러한 바람을 실천하기 좋은 공간이 지상에 또 있을까? 번잡하고 욕망으로 들끓는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다툼에서 벗어나 서재 속으로 은거할 수 있는 나는 자발적 유배의 길을 택한 것이지만, 비록 저잣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제약은 있어도 정신만큼은 몽테뉴의 그것에 못지 않은 자유와 사유의 깊이는 확보한 것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쿠시마에 남겨진 동물들 - 죽음의 땅 일본원전사고 20킬로미터 이내의 기록
오오타 야스스케 지음, 하상련 옮김 / 책공장더불어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의 프리랜서 카메라맨인 오오타 야스스케의『후쿠시마에 남겨진 동물들』을 1시간 만에 다 읽었다. 아니 읽었다기보다는 사진 한 장 한 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 만큼 이 책에 실려 있는 사진들은 진실을 담고서 글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해준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에 밀어닥친 쓰나미와 뒤 이은 대지진, 그리고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폭발은 인간과 더불어 살아온 동물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원전으로부터 20킬로미터 이내의 출입제한 구역에 남겨진 수많은 애완용 개나 고양이, 식용으로 기르던 소와 돼지, 닭들이 떼죽음을 당했고 피난을 가버린 주인 가족을 기다리다 굶어 죽거나 더러는 야생화 하여 다른 약한 동물들을 해치는 개의 무리도 생겨났다. 이 책에 실린 사진 중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사람이 떠나간 목장에서 먹지 못해 서서히 굶어 죽어가던 소와 돼지들의 처절한 모습이었다. 고기를 지나치게 탐식해온 인간에게 강제로 사육 당해 그 자체만으로도 괴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 왔을 소와 돼지들의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는, 어쩌면 인간과 자연이 모의한 극한의 잔혹함이리라. 그래도 조금의 희망은 남아 있었다. 꽤 많은 수의 개와 고양이들이 구조됐고 더러는 가족에게 돌아가기도 했으며 다른 가족에게 입양되기도 했다. 어떤 개나 고양이들은 사람을 보자마자 도망가 다시는 볼 수 없었고, 곤타라는 이름의 개는 소와 닭들을 고양이나 다른 개들로부터 보호하느라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으며, 사람만 보면 어리광을 피우며 놀아 달라던 흰둥이도 있었다. 이 동물들에게는 쓰나미도 원자력발전소 폭발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일 것이기에 그저 다시 예전처럼 주인 가족과 함께 하길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정작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 즉, 쓰나미는 불가항력이었다 해도 지진과 해일이 자주 발생하는 일본에 과연 원자력발전소가 꼭 필요한 에너지원인가 하는 점 말이다. 원전 폭발 이후 전력대란은커녕 일본은 여전히 잘 굴러가고 있지 않은가? 결국 원자력발전소의 존재 이유는 차후 핵무기 확보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도 원전 마피아라는 용어와 함께 그 부정과 부패가 도를 넘은지 오래지만, 원자력발전이란 개념 자체가 어마어마한 위력의 핵병기로 전용될 수 있는 도덕적 딜레마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은가? 반드시 원자력이어야 했을까? 1986년 4월 26일 소련의 체르노빌에서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한 이후 지금까지 그곳은 금단의 땅이고 아무도 돌아 갈 수 없는 유령마을이 되고 말았다, 후쿠시마의 15만 원전 난민도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아니, 돌아갈 수는 있는 것인가? 한국은 어떤가? “부산과 울산 사이에 핵발전소가 6개나 있는 나라, 거기에 2개를 더 짓고 있는 나라,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는 수도권과 핵단지가 불과 30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나라, 핵발전소 밀집도가 세계 1위인 나라, 오래되어 삐거덕거리는 핵발전소를 앞으로 더 쓸 예정인 나라, 1000킬로미터 밖 핵발전소의 사고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배짱을 가진 나라.”(강은주, 체르노빌 후쿠시마 한국, 아카이브, 2012) 이것이 원자력발전소와 관련 있는 현재 한국의 모습이다. 아주 심각한 상태이지만 누구 하나 진지하게 사유하지도 않고 걱정은 더군다나 하지 않는다. 원자력발전소 건설과정에서 주민과 주민, 주민과 정부 사이의 갈등만 부각될 뿐, 불량부품이나 정비의 미비로 인한 폭발의 위험성은 늘 아슬아슬하게 무마되고 만다. 만약(정말 만약이길 바란다. 왜냐하면 뉴스 등에서 보도되는 한국의 원자력발전 관련 보도는 대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정부의 에너지원 확보 노력에 따른 필요성 내지 당위성만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후쿠시마 정도의 폭발 사고가 실제로 발생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세월호 침몰사고에서도 충분히 보았듯이 과연 제대로 수습할 매뉴얼은 마련되어 있을까? 그동안 뉴스 보도를 통해 단편적이나마 알게 되었듯, 얼마나 많은 부정과 부패가 원자력발전과 관련하여 얽혀 있을지, 부패의 사슬이 워낙 길고 단단하여 자신의 목숨으로 책임질 사람은 있을지, 아니, 일본보다 작은 땅덩어리 어디에 방사능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이 남아 있을 것인지, 상상만 해도 가공할 재앙이라는 것 외에는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에너지가 모자라면 국민을 더 계몽해서라도 아끼도록 하면 될 것 아닌가? 또는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대체 에너지 개발에 더 전념하면 될 것 아닌가? 예를 들어 나는 에어컨도 없고 자동차도 없다. 게다가 나는 평소에 에너지를 아끼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조금씩 아끼면 될 일 아닌가? 이렇게 노력해 나가면 구태여 원자력발전이 필요할까? 그런데 편리함과 안락함에 젖은 대다수 한국인들이 과연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을까? 올 여름도 집집마다 비록 냉방병에 걸릴지언정 매일 에어컨을 시원하게 가동할 것이고, 문 닫고 있으면 장사가 안된다고 변명하면서 에어컨을 강하게 켜둔 채로 영업장의 문을 활짝 열어 두겠지. 이러니 누가 원자력발전의 위험성에 대해 생각하겠는가? 에어컨을 돌려주는 그 전기를 원자력이 제공해준다고 막연하게 느끼면서 청정에너지원이라는 원자력에 슬그머니 동조하겠지. 참, 어렵고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후쿠시마에 버려진 동물들의 가련하고도 기막힌 운명에 마음이 울적했는데, 그럼에도 아낄 줄 모르고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한없는 욕심에 분노가 치미는 혼란스러운 마음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인간은 앞으로도 자신들의 행태를 바꾸지 않을 공산이 크다. 과학기술이 가져다 준 편리와 안락에 대한 탐닉, 자연을 파헤치고 분석해서 조금 알게 된 지식의 독점, 소와 돼지, 닭 등의 가축에 대한 비인간적인 밀집 사육, 가난한 나라를 희생시켜서라도 자신들의 에너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강대국의 오만, 핵무기를 합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원자력발전의 당위성 등. 후쿠시마를 떠돌고 있는 한 고양이의 눈이 나를 울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
아이라 바이오크 지음, 곽명단 옮김 / 물푸레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Yanni의 「You Only Live Once」의 피아노 선율이 거실을 채우고 있는 지금, 습관처럼 나의 죽음에 대해 명상을 해본다. 내 임종 시 나는 형제자매나 아들, 손자에게 어떤 말을 하고 눈을 감게 될까? 행복하게 잘 살라고 말할까, 아니면 아쉬움 없이 살라고 말할까? 나를 포함하여 누구도 예외 없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오게 마련이고 죽음 직전에 이르러 마음속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 과연 어떤 말이 나중에 떠날 사람에게 작은 깨달음이라도 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무슨 말을 했을까? 오직 한 번 살고 한 번 죽는 것이니, 세상에 태어날 때의 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죽음의 순간은 존재로써의 자신의 소멸을 체험함과 동시에 지상을 떠나야 한다. 어찌 하고 싶은 말이 없겠는가? 미국의 호스피스 전문의인 아이라 바이오크 교수는 자신이 30년 동안 수천 명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써 내려간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에서 이것을 단 네 마디로 압축한다. “용서하고 용서해 주세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잘 가요.” 무슨 거창한 말을 기대했다면 실망하기 십상이겠지만, 사실 이 네 마디는 가족이어서, 친구여서, 연인이어서 더욱 하기 힘든 말이 아닌가? 당신은 지금까지 타인을 몇 번이나 진심으로 용서했는가? 아니면 타인이 당신의 잘못을 진정 용서해준 적이 있는가? 당신은 하루에 당신의 가족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또는 사랑한다고 말하는가? 아마 거의 말하지 않거나 생각조차 못하고 그냥 흘려보내는 적이 더 많을 것이다. 너무 가까운 사람이라 또는 그냥 어쩌다보니 가족이니까 그래서 형식적으로 변해가도 그저 그런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정작 이 네 마디 말이 그 서먹한 사이를 회복시켜주고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인간에게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간이란 존재는 얼마나 모순이 많고 자기중심적인가? 또한 얼마나 쉽게 타인을 증오하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는가? 현대사회처럼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을 쏟는 극단의 이기적인 분위기 속에서, 타인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고마운 존재로 받아 들여 기꺼이 자신을 내어 줄 수 있기란 아무리 죽음이 가깝다 해도 쉽게 실천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죽음조차도 후회나 아쉬움 또는 미안함 따위의 감정이 결코 소용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용서하고 용서해 주세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잘 가요.” 이 네 마디가 살아 있는 동안 이토록 절실하고 그 어떤 꾸밈의 말보다 더 큰 치유와 내면의 성숙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핵심임에랴. 어쩌면 인간은 상처주고 상처받는 것에 익숙한 동물일지도. 그래서 용서와는 더욱 멀어지고 마는 어리석은 동물일지도. 타인의 죽음은커녕 자신의 죽음조차도 그 직전까지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기에, 용서와 사랑, 고마움 등의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조건들마저도 이토록 쉽게 무시되는 것은 아닌지. 대구 지하철과 세월호의 희생자들이 남긴 마지막 말도 결국 “고마워요.”와 “사랑해요.” 였다. 너무 늦기 전에 가족과 친구에게 말하라, “용서하고 용서해 주세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라고. 그리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말하라, “잘 가요.” 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빈에서는 인생이 아름다워진다 - 문화여행자 박종호의 오스트리아 빈 예술견문록
박종호 지음 / 김영사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1~3권과 『유럽 음악축제 순례기』를 읽고 나서 다섯 번째로 읽은 박종호 선생의 『빈에서는 인생이 아름다워진다』. 이 책은 여행기지만 역사적 유적지나 음식점 등의 단순 나열식 소개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빈(Wien)의 예술만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일종의 사적 예술향유의 기록이다. 저자가 여러 번의 빈 방문을 통해 세밀하게 그려나간 빈의 예술가들과 예술품들, 도시 전체가 오직 예술에 특화된 빈의 매력들을 저자 특유의 입담으로 이야기해주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죽기 전 한 번쯤은 빈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도 저자의 흔적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예술가들을 만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온전하게 예술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졌다. 물론 지금의 빈은 1900년대 말의 벨 에포크(Belle Epoch)와는 다르겠지만, 당시에 각 예술 분야에서 활약했던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들과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좋았던 과거가 오늘날 어떻게 재활용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내가 언젠가 빈에 가게 된다면 나도 박종호 선생처럼 가장 먼저 빈의 중앙묘지에 가서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등, 내가 존경하는 음악가들에게 헌화를 하고 그들의 삶과 예술에 대해 현지에서 사색해보고 싶다. 음악가들이 살아서 활보하며 때로는 고뇌에 시달리거나 때로는 환희에 눈물을 흘렸을 그 빈에서, 그들의 체취를 찾아 나의 삶을 반추해보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이지만, 세기말의 빈은 음악 뿐 아니라 미술, 디자인, 건축, 문학, 연극, 오페라 등 거의 모든 예술 장르가 골고루 커다란 성취를 이룩한 희대의 공간이었다. 마치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처럼 한꺼번에 예술의 천재들이 쏟아져 나와 서로 다투며 수준 높은 예술작품들을 경쟁적으로 생산한 것인데, 그 질적이고 양적인 수준이 가히 놀랄 만하다. 그래서 일까, 발길이 닿는 곳 마다 예술품이 차고 넘치는 빈은 그것 때문에 오히려 인간 성취의 극치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덧없음을 온몸으로 증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술을 사랑하고 아끼는 인간이 왜 동시에 살육과 파괴를 일삼고 있는 것인가. 예술을 통해 순화된 인간의 어두운 심성은 왜 주기적으로 고개를 쳐들고 지금까지의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을 뒤틀려 하는가. 예술이 긍정적 인간성의 발현이라면 그것의 파괴는 부정적 인간성의 발현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책에서 저자가 논하고 있는 예술 지상주의와 그것의 향유, 또는 적극적 소비라는 측면도 하나의 시각일 뿐 이라는 점을 간과하지는 말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 - 김갑수의 음악과 사랑 이야기
김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김갑수라는 사내가 있다. 그는 오늘 이 시간에도 자신의 지하 작업실에서 음악을 듣고 있을 것이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심한 학대를 당했고, 그 때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 때부터 그에게 음악은 삶의 모든 조건을 저당 잡혀서라도 처절하게 추구해야 하는 절대 조건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음악을 듣지 않고 보낸 날이 단 하루도 없을 정도로 오직 음악 듣기에 자신을 바쳐 왔다. 그는 정식으로 등단한 시인임에도 방송출연과 글쓰기로 생계를 꾸리고 산다. 밥벌이를 제외한 하루의 모든 시간은 오직 음악 듣기로 채워진다. 지금 세상에 이렇게 사는 사내도 있다.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는 김갑수라는 사내가 왜 이토록 음악 듣기에 집착하는지 그 이유가 낱낱이 공개되어 있다. 이전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에서는 클래식, 록, 재즈, 월드뮤직 등, 다양한 장르를 전방위로 말하던 그가 이 책에서는 오직 클래식만 이야기 한다. 클래식을 제외한 다른 장르는 그의 허허로운 삶을 채워주질 못했나 보다. 아무튼 이 책에서 나는 김갑수의 한 쪽 눈이 의안(義眼)이고, 그 눈을 치료해준 여의사와 결혼했다는 극히 내밀한 사연까지 알게 되었다. 그 아내가 음악에는 절대 무지하다는 것도. 아무튼 아직 생존해 있는 한 사내의 삶이 이렇게까지 나의 관심을 끈 적은 일찍이 없었다. 처절할 정도의 자기 방어술로 무장한 한 사내가 음악에 빠져 그 음악을 통해 자신을 어루만지고 위무해온 사연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김갑수의 내면 지향적 행태에서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의 행복 추구와 예술의 사회적 기능 활용의 극치를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