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형은 제시카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15
존 보인 지음, 정회성 옮김 / 비룡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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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은 어렸을 때부터 형 제이슨을 존경하고 좋아했다. 제이슨은 난독증이 있어서 책을 잘 읽지 못하는 샘을 위해 인내를 가지고 도와줬고, 학교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남학생이었으며 축구도 너무 잘 해서 아스널 FC 유소년 팀에서 입단을 하라고 할 정도였다.

장관인 엄마와 엄마의 보좌관인 아빠는 늘 바빠서 형제의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샘의 곁에는 늘 제이슨 형이 있었고, 그래서 부모님보다 형이 훨씬 더 좋았다.

 

그런데 제이슨 형이 18살, 샘이 14살이 되었을 때 여름휴가라 웬일로 집에 가족 모두가 있던 날 형은 자신이 샘의 형이 아니라 누나인 것 같다는 고백을 했다. 안 그래도 샘은 이전부터 형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터라 당황했고, 너무 바빠서 자식들과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던 엄마와 아빠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취급을 했다. 제이슨의 나이에는 한 번쯤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제이슨이 자신이 여자라는 뜻을 굽히지 않으며 머리를 길러 포니테일로 묶고 다니자, 엄마와 아빠는 병원에 데려가 고쳐달라고까지 한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으로 충격을 안겨준 존 보인 작가의 최근작인 이 소설은 제목에서부터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10대가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제이슨 형을 곁에서 지켜보는 동생 샘의 시선으로 소설이 진행됐다.

 

제이슨은 동생 샘에게는 물론이고 학교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자세한 묘사가 있지는 않았지만 잘생긴 외모를 가졌던 것 같고, 축구까지 잘했기 때문에 당연히 학교 최고의 스타였다. 정말 예쁜 여자친구와 사귀기도 했다. 그런 형에 비해 샘은 축구는 영 젬병이고 책도 잘 읽지 못하는 난독증이라 같은 학교 선생님들이 더러 실망을 표할 때도 있었지만, 형을 질투하기는커녕 너무나 좋아했다.

이런 멋진 사람이 자신의 형이라 자랑스러웠던 샘에게 제이슨의 고백은 핵폭탄 급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거부하고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정체성에 대해 이해하기엔 샘이 조금은 미성숙했던 탓도 있었다. 부모님은 처음엔 그럴 수 있다는 듯, 그저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멋진 아들 제이슨으로 돌아올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제이슨의 생각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그게 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치려고만 들었다.

 

소설은 동생 샘의 시선으로 진행됐지만 제이슨에게 마음이 더 기울었다. 늘 곁에 있던 동생에게마저 외면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제이슨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샘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 같은 성별의 형제라서 유대감을 느꼈던 부분이 많았을 텐데, 갑자기 형이 아니라 누나로 취급해 주길 바란다면 질색팔색하게 될 것 같긴 했다. 내가 샘의 입장이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샘은 제 나이보다 왠지 조금은 어린 것 같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필요했다.

샘의 반응은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었지만 부모의 반응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이슨이 남자의 몸으로 태어난 여자라는 고백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 입지를 더 우려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관인 엄마는 차기 총리감으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최근 들어서 현직 총리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엄마는 준비를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잡음이 있어서는 안 됐다. 그래서 엄마와 아빠는 아들의 성 정체성에 대한 폭탄 같은 고백을 외면하다 나중엔 전기 충격 따위로 고쳐보려고 들었다. 부모가 등장할 때마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인정할 수 없으면 차라리 내버려 두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자꾸만 제이슨을 자극하고 힘들게 만들었다.

 

가족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해 제이슨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줬다. 제이슨에 관한 사실이 학교에 소문난 이후, 샘이 싫어하는 같은 반 데이비드는 이때다 싶어서 샘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제이슨은 트랜스젠더인데 데이비드는 그게 그거인 줄 알고 샘의 형이 동성애자라고 놀렸고, 샘은 뭐가 됐든 참을 수 없어서 치고받고 싸우기도 했다. 심리 상담사는 처음으로 제이슨을 지지해 줬고, 다소 의외였던 건 제이슨의 축구 코치의 반응이었다. 제이슨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으니 축구는 계속하라며 설득하는 편견 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엄마와 사이가 안 좋은 동생 로즈 이모는 제이슨이 가족에게서 기대했던 반응을 보였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가지각색이라 다양한 반응을 보였지만, 중요한 건 자신의 생각이 어떻든 상대방을 무조건 비방하고 잘못됐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을 사람을 꺾어 부러뜨리지는 말아야 한다. 이해가 안 되고 싫으면 그저 아무 말 없이 지나가면 될 일이다.

 

소설이 전체적으로 제이슨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렀지만, 결국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형 제이슨이 아닌 누나 제시카로 받아들이는 결말을 보여줬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유쾌해서 당연히 해피엔딩을 예상하긴 했는데, 결정적인 장면에서 샘이 한 말은 괜스레 뭉클해졌다. 참 다행인 결말이었고 마지막엔 진짜 남매 같은 반응을 보여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주제가 다소 무겁긴 했지만 어린 샘의 시선으로 가볍게 풀어가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제이슨, 우린 너를 도우려는 것뿐이야. 네가 여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 게 그렇게 잘못된 거니?"
"전 여자가 되려는 게 아니에요. 전 원래 여자예요." - P148

"너 방금 내가 낫기를 바란다고 했니?"
"응. 그 말이 어때서?"
"그러니까 넌 내가 아프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렇지? 내가 어떤 병에 걸렸다고 말이야." - P112

"제가 생각하는 ‘나 자신‘이 되는 방법, 그리고 저에게 맞는 방식대로 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 제이슨으로 지내는 지금의 삶은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거짓으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에요. 전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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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플린 베리 지음, 황금진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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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사는 노라는 금요일을 맞이해 시골에 사는 언니 레이첼의 집으로 향한다. 기차를 타고 역에 도착한 노라는 마중을 나오지 않은 언니가 바쁜 것 같아 집까지 걸어간다. 언니의 차가 진입로에 주차되어 있는 걸 보고 집 안으로 들어간 노라는 계단 꼭대기 난간 기둥에 언니의 개가 밧줄에 목이 매달려 있는 걸 본다. 그 밑으로는 피가 고여 있었다.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계단을 올라간 그녀는 복도 가득한 핏자국 너머로 쓰러져 있는 언니를 발견한다. 셔츠가 검붉은 색이 되도록 젖어있던 언니는 숨을 쉬지 않았다. 노라는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신고한 덕분에 구급차와 순찰차가 도착했다.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노라는 언니가 사는 동네에 한동안 머물러야 했다. 살인사건 현장이라 언니의 집에 머물 수는 없었기에 동네에 하나뿐인 여관에 묵으며 장례 준비를 해야 했고, 사건을 맡은 모레티 경위를 종종 만나며 언니가 요즘 누구를 만났는지, 달라진 게 없는지 등을 말해주며 범인을 잡는 데 협조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경찰이 언니를 죽인 사람을 잡지 못하자 노라는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직접 찾아보기 시작했다.

 

 

 

언니 레이첼이 살해당한 사건을 목격한 동생 노라의 시점으로 진행된 소설은 시작부터 왠지 모를 스산함이 느껴졌다. 문체 자체가 건조한 탓도 있겠지만, 노라가 뿜어내는 분위기가 뭔가 묘했다. 소설이 흐를수록 그런 느낌은 더욱 강해져서 노라의 시선을 따라가긴 했으나 그녀를 믿지는 않았다. 믿을 수 없는 화자에게 뒤통수를 맞은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첼 살해 사건이 벌어진 현재를 주로 보여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가 종종 등장했다. 10대 시절 레이첼은 노라와 함께 친구네 파티에 가서 술을 마시며 놀고선 동틀 무렵에 혼자 집으로 돌아가다가 낯선 사람에게 폭행을 당해 팔이 부러지고 복부와 가슴, 심지어는 얼굴까지 엉망이 됐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범인은 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폭행당한 언니에게 원인이 있다는 듯 굴었다.

당시에 술에 취해 친구네 집에서 자느라 언니를 집에 혼자 가게 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든 노라는 범인의 얼굴을 본 레이첼과 함께 그를 찾기 시작했다. 비슷한 범죄를 다시 저지를 거란 생각에 주변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신문을 통해 접했고, 어떨 땐 법대생이라 속이고 재판에 참석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그 일을 했음에도 범인을 찾지는 못했었다. 그래서 노라는 당시 폭행범과 현재 언니를 살해한 범인이 동일 인물일 수도 있고, 그가 언니를 찾아다녔을 수도 있으며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는 여러 생각을 가졌다.

 

오래전 경험으로 경찰에 대한 신뢰를 잃어 혼자 범인을 찾던 노라는 마을에 사는 배관공 키스를 의심했고, 이후 경찰에게서 레이첼이 노라에게조차 말하지 않고 이사를 하려고 했던 사실을 듣게 된다. 그리고 중반 이후에는 노라가 의심되는 개인적인 문제와 사건이 등장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노라가 내내 이상했고 레이첼을 죽일 동기도 있었기 때문에 의심했었는데, 한 번 언급된 것 외에 드러나지 않던 사람이 범인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좀 당황스러웠다. 여기저기에 의심될만한 폭탄을 심어두고선 전혀 다른 데서 폭발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상과는 다른 결말이라 그런지 실망하기도 했다. 소설 분위기만 보면 일관성이 있기는 했지만 썩 마음에 드는 결말은 아니었다. 소설 뒤편에 <나를 찾아줘>가 언급됐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혹시나 했다가 역시나로 끝났다. 인기를 끌었던 소설이 언급되면 대체로 실망하게 된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 아무래도 내가 반전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읽은 탓도 있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잔잔한 소설이라 반전이 짜잔 하고 등장할 리 없었는데 말이다.

그보다는 과거의 사건으로 자매를 잠식했던 불안과 불행, 레이첼이 살해당한 사건으로 이제는 그것을 끊어내려고 하는 노라의 몸부림 정도로 보면 좋을 듯싶다. 하지만 이 와중에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던 레이첼의 행동이 있긴 했지만,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싶다.(나 같았으면 머리털 다 뽑고도 남았을 텐데.)

 

 

 

내가 찾고 있는 건 어쩌면 각기 다른 남성 세 명일지도 모른다. 스네이스에서 언니를 공격했던 남자, 산등성이에서 언니를 지켜보았던 남자, 그리고 언니를 살해한 남자. - P164

나는 그때 우리가 알아낸 사실들을 우리 둘 다 잊었으면 싶었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정말로 우리가 그 사실들을 잊었다는 듯이 굴었고, 그렇지 않다는 징후들은 모조리 무시해왔다. 언니가 저먼셰퍼드를 데리고 왔다는 것도, 내가 혼자서는 절대로 택시에 타지 않는다는 것도.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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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와 밤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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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유명한 소설가가 된 토마는 오랜만에 고향 코트다쥐르에 왔다.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의 개교 50주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지만, 진짜 목적은 체육관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지을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뉴욕에 사는 토마에게 그 소식을 메일로 알려 준 건 어릴 때부터 이웃에 살았고 같은 학교를 나와서 친했던 막심이었다. 체육관 공사가 시작되면 두 사람의 인생은 끝장이 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문제는 도무지 피할 수 없는 명백한 일이기도 했기에 더 두려웠다.

 

1992년.

고등학생인 토마는 학교 남학생들 모두 선망하며 사귀기를 간절히 바라는 빙카에게 푹 빠져있다. 남녀노소 모두가 빠져들 만큼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빙카는 똑똑하기까지 했다. 토마는 함께 있으면 즐겁고 대화가 잘 통하는 빙카를 자신의 운명의 상대라고 여겼지만, 그녀는 토마를 친구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빙카는 잘생기고 젊은 철학 선생 알렉시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토마는 질투심을 느꼈지만 도무지 승산이 없는 상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다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학생들 대부분이 집으로 돌아간 크리스마스 휴가 때 일이 벌어졌다. 교장이었던 부모 덕분에 관사에서 살았던 토마는 대입 준비로 학교에 남아있었고, 부모를 잃고 미국에 있는 조부모님 손에 자란 빙카 역시 기숙사에 있었다. 기숙사로 급하게 와달라는 빙카의 연락을 받고 달려간 토마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고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1992년 고등학생 때 벌어진 사건이 25년이 지난 2017년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이자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던 토마를 중심으로 내용이 흘러갔다. 오랜 친구인 막심도 연관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1992년 당시의 시점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단순히 연관된 게 아니라 우발적으로 일을 저지른 범인이라는 게 밝혀졌다. 빙카와 깊은 관계였다는 알렉시 선생을 토마가 죽기 직전까지 때리고 반격을 가하려는 그의 숨통을 막심이 끊어놓았다.

그 사실이 밝혀지는 장면에서부터 주인공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토마는 빙카를 사랑했기 때문에 알렉시를 미워할 수는 있었다. 사람의 감정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고, 가뜩이나 사춘기 10대 소년 시절이었으니 충분히 감정의 동요를 겪을 수는 있었다. 그리고 빙카가 고백한 그 사실로 인해 화가 나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사람을 죽을 만큼 때렸다는 게 과했고 막심은 친구를 돕겠다는 이유로 행동했지만 그 결과는 죽음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들에게 반감이 들었던 이유는 행동 자체에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현재 시점에서 사건이 밝혀질까 전전긍긍해하는 태도에 있었다. 이유가 어찌 됐든 그들은 살인자였다. 그 사실을 잊고서 여태 잘 먹고 잘 살아왔으면서 이제 와 범행이 알려져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할까 봐 어떻게든 덮으려고 하는 행동이 이기적이었고 불쾌하게 느껴졌다. 소설을 읽을 땐 대체로 주인공이나 화자에게 마음이 기울기 마련인데 이번만큼은 굉장히 냉정하게 상황을 보게 됐다.

 

그런데 소설이 중반 이후로 흘러가면서는 죄를 지은 사람이 토마와 막심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줬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알고 보니 진짜 범인은 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들은 모두 죄인이었다. 그들이 학생으로 다니고 교사, 직원으로 재직했던 그 학교 터가 안 좋은 것 같다는 미신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풍수지리설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1992년에 그 학교에서 있던 사람들은 뭔가에 씐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사람들이 죄다 그럴 수 있나 싶다.

 

아무튼 재미 삼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었지만, 후반에서는 또 다른 비밀이 드러나 뒤통수를 쳤다. 토마와 막심이 두려워했던 25년보다 훨씬 더 긴 세월 동안 간직한 비밀은 마치 아침 드라마를 보는 듯한 놀라움을 안겨줬고, 빙카와 관련해 드러난 반전은 역시 충격적이었다. 작가가 뭘 이렇게 많은 걸 넣어뒀는지 정신이 없었다. 비밀이 하나였어도 충분히 놀랐을 텐데 두 개나 되어 내가 뭘 본 건가 싶었다.

결국 불쌍한 사람은 알렉시였다. 그와 관련된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별말이 없는 걸로 봐서 뜬소문에 억울한 개죽음을 당한 것 같다. 진짜 너무 불쌍하다.

 

이러고선 결말은 너무나 잘 마무리가 되어 나는 또 한 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범죄자를 이렇게 끝내다니 납득할 수 없다.

오랜만에 읽은 기욤 뮈소의 책이라서 더 실망스러웠다. 기욤 뮈소의 소설은 초기작이 압도적이라 갈수록 실망만 하게 된다.(이 와중에 책 표지 예쁨.)

 

 

 

"사람은 손에 피를 묻히고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야." - P292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히려 빨리 늙고 싶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야 점점 과거로부터 멀어질 수 있으니까. 내게 지난날은 추억의 보고가 아니라 비극의 진앙이었고, 나는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살아왔다. - P43

사람들은 입만 열면 투명한 진실을 이야기하지만 ‘진실‘같아 보인다고 해서 다 진실은 아닌 법이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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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천문학 - 미술학자가 올려다본 우주, 천문학자가 들여다본 그림 그림 속 시리즈
김선지 지음, 김현구 도움글 / 아날로그(글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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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수학 쪽으로는 두뇌가 발달되지 못해 문과를 가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은 배웠었다. 대체로 문과반 아이들은 과학 과목을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은데 나는 상당히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생물은 암기만 잘 하면 돼서 잘했고, 수학과 별반 다르지 않게 계산과 공식 위주였던 물리나 화학도 나쁘지 않은 점수를 받았다. 그중에서 관심 있어서 좋아했던 과목은 지구과학이었다. 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는데, 태양계 행성을 배울 땐 정말 재미있어 했다. 물론 문과라 가볍게 배운 탓도 있을 듯하다.

 

그래서 이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했을 때 냉큼 집어 들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드물게 미술 관련 책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림과 관련된 천문학 이야기라니 흥미로웠다.

 

 

 

PART 1 그림 위에 내려앉은 별과 행성: 그리스 로마 신화 속 태양계 이야기

 

 

태양계 행성의 이름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12주신의 이름에서 따왔다. 행성 중 가장 큰 목성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신 주피터(Jupiter, 제우스), 달에 이어 두 번째로 밝은 금성은 미의 여신 비너스(Venus), 태양계 행성이었다가 2006년에 퇴출된 왜소행성 명왕성은 올림포스 12주신에도 들지 못하는 지하세계의 신 플루토(Pluto)이다. 움직임이 느린 토성(Saturn)은 늙은 신 사투르누스(Saturnus, 크로노스)의 이름을 붙였다. 푸른빛이 아름다운 해왕성은 넵튠(Neptune, 포세이돈), 토성보다 먼 행성인 천왕성은 크로노스에게 쫓겨난 우라노스(Uranus)가 떠오른다는 이유로 이름이 붙여졌다. 행성 중 공전주기가 88일로 가장 짧고 평균 궤도 속도는 48킬로미터인 수성은 머큐리(Mercury, 헤르메스), 산화철 때문에 붉게 빛나는 화성은 서양에서 피가 떠오른다 하여 전쟁의 신 마르스(Mars)라 불린다.

그리고 지구의 위성인 달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가진 디아나(Diana, 아르테미스)로 지칭된다고 한다. 태양은 올림포스 12주신 가운데 제우스를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신인 아폴로(Apollo)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각 행성의 특징을 뽑아내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 이름을 붙인 게 기발했다. 행성들의 영문 명칭은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설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있어서 재미있었다.

 

 

비너스는 미의 대명사라서 이 여신을 주제로 한 회화와 조각은 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시대마다 사조가 다르고, 화가 역시 표현하는 방법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림 속 비너스의 모습 역시 다양하다.

여러 그림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시대에 따라 비너스의 몸매 또한 다르다는 것이다. <메디치 비너스>나 <우르비노의 비너스>처럼 풍만한 몸매의 비너스가 있는가 하면, <밀로의 비너스>와 <비너스의 탄생>과 같이 현대의 미적 기준에 가까운 비너스가 있기도 하다.

남성 화가들이 그린 회화만을 주로 접했던 것 같은데, 책에 실린 여성 화가의 비너스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미의 여신이라는 명칭을 내세워 나체로 아름다움을 뽐내거나 상대방을 유혹하는 듯한 관능을 보여주는 게 아닌,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기만 하는 남자를 거부하는 그림을 그린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비너스는 신선했다.

 

 

토성은 지구 시간으로 29.5년에 한 번씩 태양을 돌기 때문에 대략 7년마다 계절이 바뀐다고 한다. 반면에 자전은 매우 빨라서 토성의 하루는 10시간 40분에 불과하단다. 공전은 느리고 자전은 빠르다니, 만약 토성에 외계인이 산다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해봤다.

 

로마 신화에서 사투르누스는 농경신인데, 그리스 신화에서 시간을 다스리는 크로노스와 동일시되는 신이라고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어서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쫓아냈던 일화가 떠올랐다. 하지만 크로노스 역시 제 자식에게 왕좌를 빼앗길 거라는 예언에 제우스를 비롯해 헤라, 포세이돈 등등의 신을 잡아먹었다.

그 신화에서 비롯된 그림이 루벤스와 고야가 각각 그린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이다. 다른 미술 책에서 여러 번 봤던 고야의 그림은 이미지 자체가 너무 강렬해서 인상에 남았다. 광기 어린 표정이 혐오스러울 지경이다. 루벤스의 그림은 이번에 처음 본 것인데, 사투르누스의 표정보다 뜯기는 아기의 가슴팍 살점과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 리얼해서 끔찍하다.

 

 

해왕성은 지구처럼 아름다운 푸른색이지만 실은 지옥의 행성이나 다름없다. 표면이 고체와 액체 상태의 질척한 메탄으로 이루어진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거라 추측한단다. 표면 위에는 1000기압 이상의 두터운 대기가 있어 햇빛이 전혀 통과할 수 없는 어두운 메탄 바다가 출렁이고, 초속 수백 미터의 태풍과 번개가 끊임없이 쳐댄다고 한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이미지에 왠지 딱 들어맞는 느낌이다.

그런데 반전은 해왕성의 바다가 알고 보면 다이아몬드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메탄이 엄청난 고온과 고압으로 인해 분해되어 탄소로 바뀌고, 다시 고온과 고압의 영향을 받아 다이아몬드로 변신한다고 한다.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갈 수 있는 우주선 기술이 개발된다면 가장 먼저 머나먼 해왕성으로 향하는 게 목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지구에서 육안으로 가장 크게 보이는 달은 과학기술이 발전하기 이전에는 신비로운 존재였을 것 같다. 물론 지금도 밤에 둥그렇게 뜬 보름달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들긴 한다.

 

이런 신비로운 이미지 때문인지 각 시대를 살아가던 유명한 여자, 마담, 정부(情婦)들은 자신을 디아나로 그린 회화와 조각상에 열광했다고 한다. 화가, 조각가의 작품 속에서나마 여신 디아나가 되고 싶은 열망이 이해가 된다.

 

 

태양계 내에서 진정한 의미의 별은 바로 태양이다. 내부 핵융합을 통해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 덕분에 외의 모든 천체가 반사해서 빛을 내기 때문이다. 태양의 질량은 지구의 약 33만 배로, 태양계 전체 질량의 99.9%를 차지한다. 태양 외 나머지 행성을 모두 합해도 0.1%가 되지 않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약 1억 5천만 킬로미터인데, 태양에서 출발한 빛은 8분 20초 후에 지구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태양 내부에서 핵융합을 통해 만들어진 빛이 반사되면서 태양 표면까지 도달하는 데는 대략 10만 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그 얘기는 우리가 지금 보는 태양빛은 약 10만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놀랍고 경이로운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공포스러운 느낌도 든다.

 

아폴로는 이성과 지성을 겸비한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인지 미술 작품 속에 표현된 그는 잘생긴 꽃미남이 대부분이다. 그런 이유로 여자들에게 디아나가 로망이었다면, 남자들의 로망은 태양신 아폴로였다. 가장 유명한 건 스스로를 "태양왕"이라 칭한 루이 14세다. 아폴로 마니아로 궁정에서 공연을 할 때 아폴로 역할을 맡기도 했단다. 그리고 왕족 일가를 고대 신화 속 주인공들로 그린 그림을 보면 자아가 어지간히 강했던 것 같다.(뭐, 왕이니까.)

 

 

 

PART 2 그림 속에 숨어있는 천문학: 별, 우주, 밤하늘을 그린 화가들의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까마득히 먼 과거에 그려진 그림들 속에서 UFO의 흔적이 발견되어 신기하기만 했다. 우주선을 탄 사람을 그린 그림이 있는가 하면, 성모 마리아의 머리에 광선 같은 것을 쏘는 비행접시 그림도 있었다.

책을 쓴 저자는 현대의 시선으로 그림을 보기 때문에 UFO로 보일 수 있지만,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의 시선으로 본다면 다른 의미일 거라고 말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내 눈엔 영락없이 UFO로만 보인다.

 

 

르네상스를 지나 현대에 가까이 오면서 화가들의 그림 역시 상당히 바뀌었다. 신화와 종교적인 그림이 아닌, 과학의 발전에 걸맞게 그림도 조금은 과학적이었다.

 

소개된 그림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루벤스가 그린 <달빛 풍경>이라는 그림의 밤하늘에 담긴 별자리였다. 그림 속에 담긴 별자리는 루벤스가 살았던 플랑드르 지방에서 같은 날 밤에 동시에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고 한다. 루벤스는 자신이 눈으로 본 별자리를 기억해뒀다가 한꺼번에 그려 넣었다.

이렇게 별자리의 모양을 정확하게 그릴 수 있었던 이유는 루벤스가 아마추어 천문학자와 교류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의 집에 사설 관측소를 만들 정도로 천문학에 빠져 있던 니콜라 페이레스크가 천체를 관측하다 오리온성운을 발견해 루벤스에게 알려주었고, 덕분에 오리온성운을 그렸다는 일화가 흥미로웠다.

 

 

밤과 별을 유난히 사랑한 고흐 역시 등장했다. 미술 관련 책을 읽을 때마다 빠지지 않던 고흐라 이제는 그의 그림이 너무나 익숙했지만, 해류의 움직임을 이미지화한 그림이나 우주의 자기장 촬영 사진을 보니 뭔가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관심이 있는 천문학과 그림을 말하는 이 책은 읽는 내내 즐거웠다. 좋아하는 천체에 아직은 조금은 낯선 그림이 접목되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행성 이름에 관한 것에서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신들, 그림이 그려지던 시대에 관한 부분까지 모두 흥미로웠다. 이 책처럼 좋아하는 분야에 낯설지만 알고 싶은 분야가 접목된 책이 있다면 읽고 싶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지식의 1+1 느낌이 나는 책이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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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남
슈노 마사유키 지음, 정경진 옮김 / 스핑크스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는 "나"는 매스컴에서 떠들어대는 연쇄살인범 가위남이다. 두 명의 여학생을 각기 다른 곳에서 끈으로 목을 졸라 살해한 뒤, 문구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가위를 목에 꽂았다. 그래서 가위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번에 내가 타깃으로 삼은 사람은 명문 사립고에 다니는 다루미야 유키코라는 학생이었다. 학교에서 미인으로 유명하다고 소문이 난 그녀의 집이 어딘지 먼저 찾아가 보고, 유키코가 평일엔 몇 시에 끝나는지, 어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지 조심스레 미행했다. 그리고 주말에는 무엇을 하는지도 쫓아다녔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이제 그녀를 살해하려고 마음먹은 날, 나는 유키코가 사는 집 건물 옆에 몰래 숨어있었다. 하지만 해가 떨어져 캄캄한 밤이 되어도 유키코가 나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가는 길에 유키코의 집 근처 공원 풀숲 밖으로 웬 다리가 뻗어 나와 있는 게 이상해서 살펴보니 내가 오늘 죽이려던 그녀가 죽은 채 누워있었다. 죽은 그녀의 목에 가위가 꽂혀 있는 걸 보고 놀라서 도망치려는 찰나, 누군가가 나타나 어쩔 수 없이 경찰에 신고를 해달라고 소리치게 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가위남 살인사건의 사체 발견자가 된다.

 

후배 덕분에 말단 딱지를 이제 막 뗀 경찰 이소베는 유키코 살해 사건을 수사하게 된다. 연쇄살인사건이라 수사에 합류한 범죄심리분석관 호리노우치가 이소베를 콕 집으며 현장에서 보고 들은 모든 정보를 넘겨달라고 직접적으로 지시하면서 그는 더욱 의욕이 넘쳐흐른다.

하지만 가위남은 치밀한 범죄자라 단서를 남기지 않았다. 여고생을 상대로 한 살인 사건임에도 성폭행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단서를 남기지도, 지문이나 체모도 없었다. 수사가 지지부진한 와중에 이소베는 유키코의 장례식에 갔다가 그곳에 사체 발견자가 참석한 걸 보고는 자꾸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연쇄살인범 가위남의 1인칭 시점과 경찰 이소베의 3인칭을 오가며 진행됐다. 처음엔 그렇게 설정한 게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니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느꼈다. 이 소설의 반전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장치와 같았다.

 

가위남은 연쇄살인범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시키는 일을 묵묵히 해냈고, 정직원이 될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받을 정도로 일도 잘 했다.

하지만 그곳을 제외하면 가위남에게 인간관계는 전무했다. 가족과 살지 않았고 친구를 만나지도 않았으며 이웃이나 말을 섞는 사이가 아무도 없었다. 가위남이 대화하는 상대는 딱 한 명, "의사"라 부르는 머릿속 또 다른 인격이었다. 처음엔 이 인격이 가위남을 조종해 살인을 저지르도록 하는 게 아닐까 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고, 가위남이 매주 다양한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해 깨어났을 때 나타나 비아냥거렸다. 열받아서 죽지 못하게 만드는 또 다른 자아 같기도 했다.

가위남이 왜 죽고 싶어 하는지는 나오지 않았는데 그가 저지르는 살인과는 관련이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유가 있어서 살인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죽이고 싶은 대상은 뚜렷하게 정해져 있다는 게 약간 특이한 점이었다.

 

수시로 살인을 하는 게 아닌, 목표를 탐색하다 결정한 뒤 목표물의 행동반경과 동선을 파악하고 마침내 살인을 하기 때문에 가위남은 치밀했다. 허점이나 단서를 남기지 않아서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세 번째 살인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누군가에게 순서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것도 자신의 살인 방법을 모방한 가짜에게 말이다. 하필이면 유키코를 죽이려던 날이라 집 근처에 있었다는 게 문제가 됐고, 더 나쁜 건 범행 장소에서 사체 발견자 신분이 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위험했던 건 범행을 위해 가방에 담아 온 가위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위남은 순발력으로 가위를 처리하고 진술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오지만, 누가 유키코를 죽인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자신이 미행하면서 유키코가 누구를 만났고 어디를 갔는지 떠올려보게 됐고, 나중엔 기자 행세까지 하면서 사건을 파헤쳤다.

 

누군가를 만나 탐문을 하는 데에 한계가 있던 가위남과는 달리 경찰들은 공개적으로 사건을 조사할 수 있었지만 가위남에 대해 도통 알아낼 수가 없었다. 가위남의 윤곽을 잡아낸 것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만큼 가위남은 평범한 사람들 속에 녹아들면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사람이었고, 흔적을 잘 숨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계속 머리를 굴리면서 소설을 읽었다. 가위남은 스스로를 뚱뚱하다고 여겼는데 그런 것치고 그림자같이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라 그 부분이 좀 의아했다. 두 가지의 경우의 수를 생각했는데, 하나는 말이 안 되는 것이라 패스했고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근데 흘러가는 상황이나 소설 속 문장을 읽고 있으면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정말 긴가민가했다. 그러다 중간에 어떤 장면에서 확신을 가졌다. 그 장면에서는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거는 아는 사람은 확실히 아는 그런 것(?)이었다. 아무래도 경험의 차이 덕분에 범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

작가가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게끔 서술해서 깜빡 넘어갈 뻔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나 머릿속에 고정관념으로 못 박힌 것은 때로 실제와 완전히 다를 수도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읽은 일본 추리 소설은 도서관이 재개관하여 신나게 갔는데 이 책이 신간 라인에 꽂혀 있어서 빌려오게 됐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이 책을 블로그 이웃님이 언급하셨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영화로 만들 수 없다는 대화를 나눴던 걸로 기억하는데, 2004년에 일본에서 영화로 제작됐다고 한다. 책을 다 읽은 후라서 그런지 그 반전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왠지 알 것도 같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던 소설이다. 서술 트릭의 재미에 흠뻑 빠지게 만들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다루미야 유키코를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루미야 유키코는 가위남에게 살해당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 P76

"너는 이번 사건이 진짜 가위남의 범행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 세상에 딱 두 명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야. 네가 찾지 않으면 누가 찾지?" - P100

가위남. 잔악무도한 살인마. 소녀를 교살하고 목에 가위를 꽂는 연쇄살인범.
매스컴에서 떠들어대는 그런 선정적인 표현들이 그를 잡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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