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장소 잘못된 시간
질리언 매캘리스터 지음, 이경 옮김 / 시옷북스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핼러윈데이를 앞두고 있던 새벽.

젠은 호박을 파내는 중이었고 남편 켈리는 아들 토드의 행방을 물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제 막 18살 성인이 된 토드의 통금 시간이 새벽 1시였기에 곧 들어올 거라 여기고 부부는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다 창밖으로 토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토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 남자를 보며 발걸음을 멈추고 그와 몸싸움을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젠과 켈리는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토드는 품에서 칼을 꺼내 그 남자를 찔렀다. 켈리가 토드를 진정시키는 사이에 젠은 의문의 남자의 몸에서 솟구치는 피를 막아보려 했지만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이내 출동한 경찰에게 토드는 순순히 자백을 했고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젠은 이혼 전문이긴 하나 그래도 변호사이기에 어떻게든 방법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토드는 변호사가 필요 없다고 했다는 말을 출동했던 경찰이 전해주었다. 늘 온화하던 켈리는 불같이 화를 내며 욕설까지 내뱉었다.

부부는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토드가 없는 집에서 아들 걱정을 하며 젠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깨어난 젠은 켈리와 상의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토드의 목소리가 방에서 들려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엄마를 마주하고 있는 토드에게 왜 여기에 있냐며, 경찰서 이야기를 꺼내지만 아이는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믿을 수 없게도 젠은 토드의 사건이 있기 이틀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젠은 자신이 아들의 살인을 막아야 한다 생각하고 무언가를 알아내고 해내려고 한다. 하지만 자고 일어날 때마다 시간은 자꾸만 거꾸로 흘러 과거로 향해 간다. 그날 하루만 살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젠은 무언가를 알아내고자 한다.




아들이 눈앞에서 사람을 죽였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엄마의 심정이 어떨지 감히 헤아릴 수 없다. 난생처음 보는 그 남자와 아들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토드는 입을 다물며 변호사조차 필요 없다고 했단다. 엄마가 변호사인데 변호사가 필요 없다니 사람을 죽인 죄를 그냥 받겠다는 건데, 영문을 모르니 젠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화도 났을 터였다.

경찰서에 구금된 토드를 위해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태라 켈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젠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고 이튿날 일어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틀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타임슬립이 젠에게 일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하루 동안 알아낼 수 있는 건 다 알아내려고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러고선 잠이 들었을 때 다시 같은 날을 살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젠이 깨어난 건 3일 전이었고, 4일 전, 8일 전을 거슬러 올라가 점점 과거로만 향해갔다.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슬립물이 익숙한데, 이 소설처럼 과거로만 향해 가는 건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하루나 이틀, 일주일 등 가까운 과거라면 기억이 날 테지만, 점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나중에는 몇 년 단위로 뛰어넘는 걸 보며 대체 어디까지 향해 가는 건지 두려울 정도였다. 여기에 젠은 깨어난 단 하루만 살 수 있다는 한계가 있었기에 토드의 살인사건과 관련된 단서를 찾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살인을 저지른 18살의 토드를 막기 위해 13살 토드, 3살 토드에게 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젠이 과거로만 향해 가고 있을 때 일단은 관련이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중요한 연관성이 밝혀질 캐릭터 라이언의 이야기가 따로 진행되었다. 라이언은 이제 막 경찰이 된 신입이었는데, 자잘한 업무를 수행하다 리오라는 상관에게 발탁되어 마약 거래와 차량 절도를 일삼는 거대한 조직을 수사하게 된다.

과거로만 향해 가며 눈을 뜬 그날 딱 하루만 살 수 있었던 젠은 이 상황이 어느새 익숙해졌고, 꽤나 많은 것들을 알아냈다. 그러나 그렇게 모은 정보를 토드의 살인사건과 관련짓는 건 쉽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메워지지 않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보를 알아내기까지는 꽤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으나 젠은 더더욱 혼란에 빠졌다. 젠의 인생 절반이 크나큰 거짓말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사자가 아니기에 젠이 알아낸 사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지만, 당사자인 그녀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터였다. 젠이 느낄 감정이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됐을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소설은 계속해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마침내 실마리를 모두 풀고 산뜻한 해피엔딩을 맞이했다.


5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의 소설은 읽는 동안 뭐가 계속 밝혀져서 몇 번이고 놀랐다. 최소 5번 정도 감탄사(어? 헉! 헐! 엥? 등)를 내뱉게 했을 정도로 뒤통수를 계속해서 쳐댔다. 어느 정도 알아챈 반전도 있었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비밀이 밝혀지기도 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여러 번의 반전과 비밀을 유기적으로 잘 연결시킨 작가의 역량이 놀랍다. 순수한 재미와 즐거움을 준 책이었다.

"이건 시간여행도 아니고 과학도 수학도 아니에요. 당신에게는 범죄를 막을 수 있는 지식과 사랑이 있어요. 그거면 되지 않을까요?" - P139

"만약 타임슬립에 갇히면 어떻게 할 거야?"
젠이 묻자 토드가 무심히 말했다.
"음, 그런 경우 대부분 사소한 게 중요하더라고요."
"무슨 뜻이야?"
"나비효과 있잖아요. 아주 작은 것이 미래를 바꾸는 거죠." - P76

우리가 어떻게 혹은 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신경 쓰는 사람이 있을까? 어둡거나 조심스럽거나 웃기거나, 뭐가 됐든 오직 지금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 아닐까? - P491

우리는 운 좋게 우리를 스쳐 지나간 일보다는 운이 나쁘게 닥쳐온 일들만 생각한다.
(……중략)
앤디가 말했듯이 모든 것 아래에는 깊은 지식이 있다. 그녀는 인생을 한 번 살았고 모든 걸 놓쳤지만 그녀의 현명한 마음과 잠재의식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준비가 됐다. - P4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어 와이프 - 어느 날 나는 사라졌다 한때 사랑했던 남자에게서
킴벌리 벨 지음, 최영열 옮김 / 위북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부터 베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기로 한 여자는 선불폰과 지도만 가지고 무작정 도망을 쳤다. 한때는 사랑했지만 이제는 자신에게 폭력과 억압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베스는 남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통장에 있는 돈은 사용하지 않는 대신 자잘한 돈을 오랫동안 빼돌렸고 몇천 달러를 모아 도망친 것이었다.

베스는 집에 돌아온 남편이 자신을 곧 찾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장거리 이동이 많은 닉이라는 남자를 고용해 자신의 카드를 주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소액씩 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집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된 그녀는 남편이 좋아했던 갈색 긴 머리카락을 대충 짧게 자르고 잿빛 금발로 염색했다. 그러고선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 사는 모건 하우스라는 하숙집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제프리는 출장을 다녀온 뒤 집에 돌아왔다. 공인중개사로 일하는 아내 사빈은 오늘 고객에게 집을 보여줄 예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돌아올 시간이 지나고, 밤이 지나도 사빈이 돌아오지 않았다. 사빈의 쌍둥이 언니 잉그리드는 제프리에게 전화를 걸어 사빈을 찾았지만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자 집에 쳐들어왔다. 제프리를 대놓고 싫어하는 잉그리드는 그가 사빈에게 폭력을 가했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하며 그 때문에 사빈이 사라진 거라 여긴다.

결국 두 사람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할 수밖에 없었고, 형사 마커스가 사건을 맡게 된다.




너무나 사랑해서 결혼을 했는데 그 사람이 어느새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다면 누구라도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도망을 칠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을 터였다. 폭력을 가한 배우자가 너무나 미안해하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둥 변명을 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시작이 어려울 뿐 그 이후로는 너무나 쉬울 게 당연해서 폭력을 사랑의 표현이라고 하거나 더러는 맞는 상대의 탓을 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폭력을 쓰는 배우자에게서 벗어나기란 어려워져 체념하고 만다. 시작부터 가명이라는 걸 밝힌 베스는 그런 여자처럼 될 뻔했다. 폭력을 쓰는 남편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해 체념했고, 가족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베스는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스스로 남편을 벗어났다. 그가 금세 따라올 거란 사실을 인지하고 움직였던 게 시간을 벌 수 있게 해줬다.

한편, 아내 사빈이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어 걱정을 하는 제프리는 딱 봐도 의심스러운 남편이었다. 제프리가 사빈에게 폭력을 썼던 사실을 사빈의 쌍둥이 언니 잉그리드가 알고 있었다고 하며 그를 마치 살인범처럼 몰아붙였다. 앞서 언급했듯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너무나 쉬웠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제프리는 사빈이 사라지던 날 당일 공항에서 집에 오기까지 몇 시간의 공백이 있었다. 형사 마커스가 추궁을 해도 제프리는 공원에서 책을 읽었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의심을 자초했다.


소설 초반에는 베스가 도망을 치는 것을 시작으로 집에 돌아온 제프리가 아내 사빈이 사라진 걸 알고 초조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마커스가 수사를 시작하면서 각 캐릭터의 시점으로 나뉘어 진행되며, 찾아야 하는 사빈을 쫓고 언젠가는 잡힐 거라 예상하며 쫓기는 베스의 추격전이 벌어졌다.

소설이 진행되는 중간쯤에 사빈에게 애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놀라움을 안겼다. 그 사실을 안 제프리는 사빈의 애인인 트레버를 찾아가 사빈의 행방을 물으며 난동을 피우는 일도 있었다. 마커스는 형사의 감 때문인지 남편인 제프리의 곁을 맴돌며 그를 압박했다. 제프리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표해도 믿을 수 없었던 건 소설 속에서 그런 남자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아내를 죽여놓고 아니라고 발뺌하는 전형적인 타입의 남자일 거라 여겨졌다.

그러는 한편 베스는 하숙집에서 가까워진 마르티나에게 소개받은 이를 통해 가짜 신분증을 만들었고, 마르티나가 일하는 성당의 청소부로 취직해 일을 시작했다. 도망칠 때 가지고 나온 돈을 허리춤에 차고 다닐 수밖에 없었던 베스는 도움을 준 마르티나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마르티나도 베스에게 완벽히 진실을 말한 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감이 오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 이런 타입의 소설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혹시나 싶었던 부분이 있었고, 이후 확신을 갖게 해준 장면이 있었다. 감을 잡고 읽어나간 소설은 예상한 대로 결말에 다다랐다. 어쩐 일로 추리가 성공했는데, 사실 이 소설은 힌트가 참 많아서 반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결말은 우려스러울 뻔했지만 베스는 이미 각오를 하고 도망치며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쟁취한 삶을 지켜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큰 용기를 낸 베스의 해피엔딩이 참 다행이었다.

자신의 결혼생활이 끝장났음을 인정하는 여자는 없다. 우리는 한때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을 계속해서 사랑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그 후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꿈꾼다. - P341

떠나는 것만으로는 폭력을 저지할 수도 없고, 자유를 보장받지도 못한다. ‘저 여자는 왜 저 남자를 떠나지 않는 걸까요?‘ 이 나라 곳곳의 가정이나 법정에서 흔히 나오는 질문이다. ‘왜 저 남자는 저 여자를 못 가게 할까요?‘가 더 나은 질문일 것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난 답을 알아냈다.
당신은 나를 보내주느니 죽이고 말 거야. - P95.96

난 분노를 느낀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입에 총구를 쑤셔 넣지 않아. 뼈가 부러질 때까지 목을 조르지도 않지. 난 태연하게 한 인간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고 보니 지난 10개월에 걸친 준비 괴정 동안 나는 태연한 것과는 참 거리가 멀었다. 이제는 죽느냐, 죽이느냐의 문제다. 당신, 아니면 나. 방아쇠를 당길 준비는 충분히 돼 있어. - P3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리스마스 캐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7
찰스 디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크리스마스 캐럴   에버니저 스크루지는 7년 전 동업자 제이콥 말리를 떠나보냈었다. 워낙 구두쇠로 유명한 스크루지였기에 장례식도 간소하게 치렀었다. 7년이 지난 현재 크리스마스이브에 구빈원에서 스크루지를 찾아와 기부를 원하는 게 영 마뜩잖다.

크리스마스이브이긴 하지만 평소와 똑같이 일하고 집에 돌아온 스크루지 앞에 죽은 말리의 유령이 나타난다. 당황한 스크루지를 향해 말리는 그에게 유령 셋이 올 거라고 하면서 그의 인생은 자신처럼 되지 않을 기회라고 말했다.


유령에 홀린 남자와 유령의 거래   화학 교수 레드로는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싶다. 아끼고 아꼈던 여동생을 일찍 떠나보냈고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는 등 잊고 싶은 기억뿐이었다. 그런데 이때 유령이 그의 앞에 나타나 '망각'을 선물해 줬다. 심지어 그 망각이 레드로가 얼굴을 마주하는 다른 사람에게도 이어질 거라는 저주 아닌 저주를 받는다.





스크루지의 이름이 주는 특정 이미지는 너무나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스크루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마침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에 출간되어 읽어보게 되었다.

스크루지가 죽은 동업자의 장례를 아주 간소하게 치러냈고, 동업자가 떠났음에도 회사 이름을 바꾸지 않고 7년째 사용하고 있다는 데서부터 그의 구두쇠 기질을 헤아릴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도 하나뿐인 직원 밥 크래칫을 제시간까지 일을 시켰고, 기부를 부탁하며 찾아온 구빈원 사람들을 매몰차게 돌려보냈다.

그런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자신을 찾아온 죽은 동업자 말리의 유령에게 언질을 받았다. 그에게 곧 과거, 현재, 미래의 크리스마스 정령이 찾아올 거라는 걸 말이다. 스크루지는 과거의 정령을 통해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다시 되새겼다. 현재의 정령을 만난 스크루지는 직원 밥 크래칫이 얼마나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럼에도 스크루지를 전혀 원망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줬다. 그리고 미래의 정령을 통해 죽은 뒤의 자신을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미리 내다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과거, 현재를 직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잘못 살고 있는지 깨달았고, 미래를 통해 죽은 뒤에는 타인의 손가락질과 지독한 쓸쓸함만 남은 걸 보며 지난날을 반성했다. 스크루지가 이렇게 깨달음을 얻어 다행이었다. 남은 인생은 180도 달라진 사람으로 살아갈 덕분에 미래 정령이 보여준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유령에 홀린 남자와 유령의 거래>는 후회되는 과거가 있는 레드로가 망각이라는 선물을 받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였다. 그가 만나는 사람에게도 망각이 선물 아닌 선물로 주어졌지만, 잊는다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라는 걸 말하는 내용이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익숙한 이야기니만큼 흥미롭게 읽었으나 <유령에 홀린 남자와 유령의 거래>는 썩 재미있게 읽지 못해서 조금 아쉽다.

"나는 오늘 밤 자네에게 아직까지는 나와 같은 운명을 피할 기회와 희망이 남아 있음을 알려 주려고 이곳에 온 거야. 내가 마련해 주는 한 번의 기회와 희망일세, 에버니저." <크리스마스 캐럴> - P39

"사람이 자신의 인생길을 끝까지 계속해서 간다면 그 길이 바로 그들이 어떤 종착점에 이르게 될지 가르쳐 주는 법이죠." <크리스마스 캐럴> - P135

"난 그걸 잊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어! 나 혼자만 이런 생각을 한 걸까? 아니면 대대로 몇백만 명이 이런 생각을 해온 걸까? 모든 인간의 기억에는 슬픔과 고뇌가 가득해. 내 기억도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 마찬가지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이런 선택권이 없지. 그래, 거래를 마무리하자. 그래! 내 슬픔과 잘못과 고뇌를 잊어버릴 테다!" <유령에 홀린 남자와 유령의 거래> - P1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더스트생태연구센터에서 일하는 아영은 강원도 해월의 폐허에서 유해 잡초가 이상 증식 현상을 보인다는 다른 관련 부처의 보고를 받았다. 아영은 그쪽에서 보내준 샘플을 분석하는 일을 하는데, '모스바나'라고 불리는 이 잡초에 대해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현장으로 직접 채취를 하러 간다.

그러던 중에 아영은 모스바나가 어릴 적 잠깐 살던 동네에서 괴짜 취급을 받던 희수 할머니가 키우던 잡초라는 걸 알게 된다. 신비로운 푸른빛으로 빛나는 풀이라고 말이다.


더스트 폴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을 때 더스트 내성종이던 나오미와 내성이 전혀 없던 언니 아마라는 실험을 당하던 연구소에서 도망쳐 입소문으로 전해지는 도피처를 찾아다녔다. 돌아다니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도 제대로 본 적이 없기에 그 도피처는 낙원처럼 여겨졌다.

도피처를 찾아 헤매던 자매는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빛을 보고 발걸음을 옮겼다. 자매는 그렇게 '프림 빌리지'에서 생활하게 됐다.




소설의 현재 시점은 대재앙이 종식된 이후의 지구였다. '더스트 폴'이라 지칭된 재난 시기에 인체에 유해한 먼지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나마 내성이 있는 자들은 연구소에 붙잡혀 실험을 당했다. 인간의 경중을 따지며 주요 인물들은 먼지로부터 안전한 '돔'에 우선 거주권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런 현실에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이들을 처리하고 해결하는 일을 맡은 공헌자는 더스트 폴이 종식된 이후 혜택을 받았다.

소설에 등장한 주인공 나오미와 아마라 자매는 더스트 폴이 일어날 당시 10대 중후반 소녀들이었다. 나오미는 먼지에 강한 내성종이었으나 아마라는 동생보다 조금 취약했는데, 현 사태를 해결하려는 이들로 인해 붙잡혀 실험을 당하곤 했다. 그리고 더스트 폴이 완전히 종식된 현재 시점의 아영은 더스트 시기와 종식 이후의 생태에 관해 연구를 하는 센터의 일원이었다.

그런 그들이 만나게 된 건 강원도 어느 폐허에 나타난 잡초 '모스바나' 때문이었다. 처음에 아영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식물에 대해 별 감흥이 없었으나 어릴 때 본 신비로운 푸른빛을 내던 그 식물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모스바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을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했다. 학회는 물론이고 인터넷 게시판까지 찾아서 겨우 만나게 된 사람은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버린 나오미였다.

나오미는 아마라와 함께 도피처인 '프림 빌리지'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영에게 들려주었다. 어렵게 찾아낸 프림 빌리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지수 씨라고 불리는 리더가 사람들을 통솔했고, 그 규칙을 기꺼이 따르며 저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리고 마을에서 조금 동떨어진 곳에 유리로 된 온실에는 레이첼이 살아가며 식물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자신들만의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던 프림 빌리지는 더스트 폭풍을 대비하고자 레이첼이 준 식물을 숲에 심게 되면서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폭풍이 지나간 후 그 식물 모스바나가 식용 작물들까지 못 쓰게 만들어버린 후 분열되어 하나둘 프림 빌리지를 떠났다. 그런 사람들에게 지수 씨는 더스트로부터 지켜줄 거라고 하며 모스바나를 떠나는 이들에게 안겨주었다.

모스바나가 발견되고 수소문을 하는 아영과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오미, 그리고 다시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그간의 이야기를 알게 된 아영이 남겨진 이에게 대신 마음을 전하는 결말까지 이어졌다. 살고 싶고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레이첼의 존재가 무엇인지 밝혀졌을 때 깜짝 놀랐는데, 그 덕분에 프림 빌리지 사람들이 꽤 오랜 시간 동안 더불어 살아갈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지수 씨와의 관계로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 했고, 결말에 이르렀을 때 전하지 못했던 지수 씨의 마음과 단언할 수 없던 레이첼의 감정이 맞닿았어야 했다는 게 드러나 서글퍼졌다. 그제야 끝을 맺으려 한 레이첼의 홀가분함이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김초엽 작가의 단편 소설을 한 권 읽은 이후 처음 읽는 소설이다. 그동안 왜 안 읽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디스토피아와 재건 이후를 배경으로 현실과 맞닿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SF 장르라 상상력이 돋보였고, 엔딩은 감성적이라 좋았다.

"이 시대에도 불행한 일들만 있지는 않았다는 걸 사람들도 알게 되겠지. 우리에게도 일상이, 평범한 삶이 있었다는 거 말이야." - P177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식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식물들은 동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종의 번영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언제나 지구라는 생태에 잠시 초대된 손님에 불과했습니다. 그마저도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위태로운 지위였지요. - P365

"마음도 감정도 물질적인 것이고, 시간의 물줄기를 맞다 보면 그 표면이 점차 깎여나가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어떤 핵심이 남잖아요. 그렇게 남은 건 정말로 당신이 가졌던 마음이라고요. 시간조차 그 마음을 지우지 못한 거예요." - P3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려한 유괴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탐정 사몬지와 아내이자 비서인 후미코가 36층 탐정 사무실을 열고 한 달이 되었지만 파리만 날렸다. 무료하기도 해서 두 사람은 같은 건물 2층에 있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인기가 많아 만석이었던 카페의 어느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마시던 커플이 갑자기 쓰러졌다. 사몬지는 그들의 상태를 보고서 독을 마신 거라 예측하고 구급조치를 지시하며 신고를 했지만 그들은 이내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사몬지와 후미코는 아는 형사인 야베와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야베는 그들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하며 비밀을 지켜달라 부탁했다.


사흘 전 총리 공관으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고 당연히 비서관이 받았다. 전화를 건 상대방은 자신들이 '블루 라이언스'라고 하며 현재 일본 국민 1억 2천만 명을 납치했다고 말했다. 비서관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기가 찼는데, 상대방은 몸값 5천억 엔을 사흘 안에 준비하라고 했다. 여의치 않으면 보수당이 기부하는 정치 자금 5백억 엔도 괜찮다고 했다. 만약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일본 각지에 퍼져 있는 블루 라이언스가 시민들을 죽일 거라고 했다.

카페에서의 독살은 그 시작이었고, 이후 여러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지만 범인이 누군지 예측조차 할 수 없다.




자칭 유괴범들인 블루 라이언스의 첫 번째 살인이 일어난 후 사흘 전의 전화를 통해 밝힌 이야기는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들렸다. 블루 라이언스가 몇 명이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1억 2천만 명이나 되는 일본 국민을 모두 납치했다니 기가 찰 얘기였다. 장난 전화 걸지 말라고 쓴소리를 하는 게 당연하게 보였다. 그러나 도쿄 카페에서의 사건 이후 삿포로에서 한 남자가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고, 나중엔 여객기가 폭발, 추락해 승무원과 승객 전원이 사망하면서 보이지 않는 적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일본 전역에서 대중없이 일어난 사건이라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고, 경찰 병력을 지원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 사몬지와 후미코 부부가 경찰보다는 좀 자유롭게 사고하며 범인의 윤곽을 잡아나갔다. 제약이 없던 그들이 다다른 곳은 일본 영재 센터였다. 똑똑한 이들이 저질렀을 법한 범행이라 생각해 일본의 영재들을 관리하는 곳을 찾았고 덕분에 어느 정도 감을 잡지만, 한차례 예상이 어긋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사몬지는 포기하지 않고 천재가 단서라는 걸 확신하고 그곳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중 블루 라이언스가 직접 성명을 발표하며 상황이 반전되었다. 총리로부터 자금을 확보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국민들에게 알리는 선택을 한 것이다. 어느 계좌로 1인당 5천 엔을 보내면 안전이 보장되는 와펜을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와펜을 단 사람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면서 말이다. 어느 범죄자가 이런 기발한 짓을 저지르는 건지 혀를 내둘렀다. 와펜 제작자인 계좌 주인이 의심스러웠는데,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박한 노인이라 천재와의 접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경찰은 경찰 나름대로 바쁘게 돌아다니며 일을 처리했고, 사몬지는 그 나름대로 추적을 한 결과 의심스러운 인물들을 추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증거가 없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똑똑한 사몬지가 역습을 한 덕분에 범인들을 잡을 수 있었다.


요즘에는 과학 기술과 통신이 발달해 이런 범인을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을 테지만, 소설은 일본에서 1977년에 출간됐다고 하니 그 시대에는 어려웠을 게 당연했다. 그런 부분들을 감안하고 읽어서 그런지 꽤 흥미로웠던 추리 소설이었다.

천재들도 허점은 있기 마련이고, 천재만큼이나 똑똑한 사몬지의 활약이 대단했다.

우리 블루 라이언스는 현재 일본 전 국민을 납치했다. 오직 그뿐이야. 아, 물론 납치했으니 몸값은 요구해야지. 그리고 그걸 요구할 상대는 일본을 대표하는 사람이자 모든 일본인 안전의 최고 책임자인 총리니까 지금 그쪽에 이렇게 전화를 한 거고. 우리는 1억 2천만 명에 대한 몸값으로 총 5천억 엔을 요구하려고 해. - P28

"사람들이 정말 몸값을 낼까?"
"그들은 낼 것으로 계산했을 거야. 난 천재들의 이 예측이 정말로 들어맞을지 굉장히 기대돼. 사람들이 5천 엔으로 안전을 살 수 있다면 과연 싸다고 느낄까 하는 것도." - P2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