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와 밤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2017년.

유명한 소설가가 된 토마는 오랜만에 고향 코트다쥐르에 왔다.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의 개교 50주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지만, 진짜 목적은 체육관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지을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뉴욕에 사는 토마에게 그 소식을 메일로 알려 준 건 어릴 때부터 이웃에 살았고 같은 학교를 나와서 친했던 막심이었다. 체육관 공사가 시작되면 두 사람의 인생은 끝장이 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문제는 도무지 피할 수 없는 명백한 일이기도 했기에 더 두려웠다.

 

1992년.

고등학생인 토마는 학교 남학생들 모두 선망하며 사귀기를 간절히 바라는 빙카에게 푹 빠져있다. 남녀노소 모두가 빠져들 만큼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빙카는 똑똑하기까지 했다. 토마는 함께 있으면 즐겁고 대화가 잘 통하는 빙카를 자신의 운명의 상대라고 여겼지만, 그녀는 토마를 친구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빙카는 잘생기고 젊은 철학 선생 알렉시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토마는 질투심을 느꼈지만 도무지 승산이 없는 상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다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학생들 대부분이 집으로 돌아간 크리스마스 휴가 때 일이 벌어졌다. 교장이었던 부모 덕분에 관사에서 살았던 토마는 대입 준비로 학교에 남아있었고, 부모를 잃고 미국에 있는 조부모님 손에 자란 빙카 역시 기숙사에 있었다. 기숙사로 급하게 와달라는 빙카의 연락을 받고 달려간 토마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고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1992년 고등학생 때 벌어진 사건이 25년이 지난 2017년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이자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던 토마를 중심으로 내용이 흘러갔다. 오랜 친구인 막심도 연관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1992년 당시의 시점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단순히 연관된 게 아니라 우발적으로 일을 저지른 범인이라는 게 밝혀졌다. 빙카와 깊은 관계였다는 알렉시 선생을 토마가 죽기 직전까지 때리고 반격을 가하려는 그의 숨통을 막심이 끊어놓았다.

그 사실이 밝혀지는 장면에서부터 주인공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토마는 빙카를 사랑했기 때문에 알렉시를 미워할 수는 있었다. 사람의 감정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고, 가뜩이나 사춘기 10대 소년 시절이었으니 충분히 감정의 동요를 겪을 수는 있었다. 그리고 빙카가 고백한 그 사실로 인해 화가 나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사람을 죽을 만큼 때렸다는 게 과했고 막심은 친구를 돕겠다는 이유로 행동했지만 그 결과는 죽음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들에게 반감이 들었던 이유는 행동 자체에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현재 시점에서 사건이 밝혀질까 전전긍긍해하는 태도에 있었다. 이유가 어찌 됐든 그들은 살인자였다. 그 사실을 잊고서 여태 잘 먹고 잘 살아왔으면서 이제 와 범행이 알려져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할까 봐 어떻게든 덮으려고 하는 행동이 이기적이었고 불쾌하게 느껴졌다. 소설을 읽을 땐 대체로 주인공이나 화자에게 마음이 기울기 마련인데 이번만큼은 굉장히 냉정하게 상황을 보게 됐다.

 

그런데 소설이 중반 이후로 흘러가면서는 죄를 지은 사람이 토마와 막심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줬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알고 보니 진짜 범인은 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들은 모두 죄인이었다. 그들이 학생으로 다니고 교사, 직원으로 재직했던 그 학교 터가 안 좋은 것 같다는 미신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풍수지리설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1992년에 그 학교에서 있던 사람들은 뭔가에 씐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사람들이 죄다 그럴 수 있나 싶다.

 

아무튼 재미 삼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었지만, 후반에서는 또 다른 비밀이 드러나 뒤통수를 쳤다. 토마와 막심이 두려워했던 25년보다 훨씬 더 긴 세월 동안 간직한 비밀은 마치 아침 드라마를 보는 듯한 놀라움을 안겨줬고, 빙카와 관련해 드러난 반전은 역시 충격적이었다. 작가가 뭘 이렇게 많은 걸 넣어뒀는지 정신이 없었다. 비밀이 하나였어도 충분히 놀랐을 텐데 두 개나 되어 내가 뭘 본 건가 싶었다.

결국 불쌍한 사람은 알렉시였다. 그와 관련된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별말이 없는 걸로 봐서 뜬소문에 억울한 개죽음을 당한 것 같다. 진짜 너무 불쌍하다.

 

이러고선 결말은 너무나 잘 마무리가 되어 나는 또 한 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범죄자를 이렇게 끝내다니 납득할 수 없다.

오랜만에 읽은 기욤 뮈소의 책이라서 더 실망스러웠다. 기욤 뮈소의 소설은 초기작이 압도적이라 갈수록 실망만 하게 된다.(이 와중에 책 표지 예쁨.)

 

 

 

"사람은 손에 피를 묻히고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야." - P292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히려 빨리 늙고 싶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야 점점 과거로부터 멀어질 수 있으니까. 내게 지난날은 추억의 보고가 아니라 비극의 진앙이었고, 나는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살아왔다. - P43

사람들은 입만 열면 투명한 진실을 이야기하지만 ‘진실‘같아 보인다고 해서 다 진실은 아닌 법이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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