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션 일레븐 스토리콜렉터 45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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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공화국에서 강력한 신종 독감이 유행한다는 뉴스가 보도된 다음 날, 지반은 의사인 친구의 전화를 받는다. 친구는 모스크바에서 출발해 캐나다로 들어온 비행기를 타고 온 환자가 독감 증세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고 했다. 오전에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12명의 환자가 병원을 찾았으며, 오전부터 한밤중인 지금까지 독감으로 입원한 환자가 200명이 넘고 그중 15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조지아 독감이라고 불리는 이 증세는 너무나도 짧은 잠복기와 99.9%의 치사율로 전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을 사망에 이르게 해 세상은 순식간에 멸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20년 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하는 유랑극단은 2년 전 임신한 동료 부부가 남기로 했던 마을을 다시 찾았다. 유랑극단의 커스틴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며 친구를 찾았지만 그들이 떠났다는 답만 듣는다. 하지만 마을 한구석에 친구 부부의 무덤이 아닌 묘비만 남아있었다.

의문을 품고 마을에서 셰익스피어의 공연을 끝낸 직후, 정리를 하는 그들 앞에 예언자라 불리는 남자가 나타나 극단의 16살짜리 소녀를 두고 가라고 한다. 그 제안이 불쾌했던 극단 사람들은 한밤중에 그곳을 떠나 소문만 무성한 문명 박물관이 있는 공항으로 향한다. 

 

 

 

소설은 조지아 독감 환자 보균자가 비행기를 탄 당일, 토론토에서 상영되는 연극 장면으로 시작됐다. 리어 왕 역할을 맡은 유명 영화배우 아서가 공연 도중 무대에서 심장을 움켜쥐고 쓰러지자, 그 모습을 본 응급구조사 교육을 받은 지반이 무대 위로 올라가 심폐소생술을 실시한다. 하지만 아서는 이내 사망하고, 지반은 곁에서 울고 있던 어린 소녀 커스틴을 달래주게 된다.

20년 후, 커스틴은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남아 유랑극단을 가족으로 여기며 살고 있었다. 아서의 옛 친구 클라크는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목적지가 아닌 어느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로 인해 많은 사람들과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다.

이들은 아서와 그의 첫 아내 미란다가 그린 만화책 "스테이션 일레븐"으로 조금씩 연결되어 있었다.

 

문명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나이 든 사람들은 마을을 꾸려 자급자족으로 생활하며 많은 사람들과 규칙을 지키며 살았고, 또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이전의 시대를 가르치기도 했다. 핸드폰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통화를 했다는 것과 책이라는 게 뭔지, 나라와 국경이 뭔지 등 온갖 것들을 가르쳤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전화, 인터넷 등으로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부터가 그랬는데, 조지아 독감 이후에 태어난 20세 미만의 아이들은 그런 것들이 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들에겐 지금 살고 있는 시대가 문명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전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사무치는 그리움이 느껴졌다. 마지막 날의 아침 식사, 커피와 신문, 마지막 통화 같은 것 등이었다. 그 모든 게 마지막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지막을 그리워하긴 했지만 그것에만 매달리지는 않았다. 그리움은 마음속에 묻어두고 가끔씩 꺼내보며 현재의 삶을 살았다. 이런 상황에도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되기 마련이었다.

 

조지아 독감 이전의 세상과 20년 후의 현재를 오가며 진행되는 소설은 종말이라는 거대한 절망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는데도 비슷한 배경의 다른 소설들처럼 건조하거나 끔찍하게 표현되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상황으로 당장 생존 앞에 내던져졌어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삶의 길을 걸었고, 낯선 타인을 악의 없이 선한 마음으로 대했다. 물론 예언자같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어린 여자애들을 아내로 삼으려는 미친 자가 있긴 했지만, 그 사람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아닌 선한 사람들의 시점으로 진행된 소설이라 평화롭고 때로는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절망의 끝에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미래를 향한 희망적인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게 사람들에게, 혹은 이 상황에 얼마나 큰 기적을 일으키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랬기에 예언자 무리들과는 다르게 커스틴, 클라크, 지반 등은 새로운 문명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읽는 내내 소설에 푹 빠져서 시야가 좁아졌었던 것 같다. 상황에 대한 묘사가 리얼해서 책을 읽다가 잠깐 고개를 들면 왠지 멍해졌었다. 그만큼 소설이 주는 매력이 와닿았다. 절망적이지 않은,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신선함과 인간다운 선함, 그리고 때때로 등장한 그리움이 좋았던 책이었다.

기억 속의 인생이란 일련의 사진들과 끊어지는 단편 영화들의 모음이었다. - P378

인간이 거의 모두 사라진 세상의 아름다움. 타인이 지옥이라면, 사람이 거의 없는 세상은 뭘까? 머지않아 인류가 멸종되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커스틴은 슬프기보다는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 P201

부서지고 무너지고 낡아버린 주변 풍경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었다. 햇빛이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진입로의 자갈 사이로 튀어 올라온 꽃들을 비췄고, 앞 베란다는 이끼가 잔뜩 깔려 밝은 초록색으로 변했으며, 흰 꽃이 핀 관목에는 나비들이 날아들었다.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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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be00 2019-12-23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스틴이 인터뷰어에게 냉장고에 대해서 묻는 부분도 찡~하더라구요...그래..빛이 있었지.

syunni1225 2020-01-08 15:54   좋아요 0 | URL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이렇게 서정적이고 아름답게 표현한 책은 처음이었습니다.
중간중간 울컥하고 찡해지는 부분이 있었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