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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니시드
김도윤 지음 / 팩토리나인 / 2023년 2월
평점 :
정하는 딸 하원이와 아들 상원이, 그리고 가족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남편 원우와 함께 살고 있다. 22평 아파트에 전세로 살며 백 원단위로 아껴가며 사는 정하는 원우가 일찍 들어오든 말든 신경 안 쓴 지 오래다. 그녀는 아이들만 잘 키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파트 주민들과 왕래가 거의 없는 정하는 자신의 집에 커피를 마시러 오는 수다쟁이 아줌마 자영이 엄마에게서 이런저런 소문을 듣지만, 그녀의 방문이 달갑지는 않다. 자영이 엄마는 60평에 사는 사모님의 집에 다녀왔다고 떠들어댔는데, 정하는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마다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는 60평의 그 여자가 껄끄럽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나처럼 원우가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고 선잠이 든 정하가 눈을 떴다. 정하와 침대를 같이 쓰기보다는 거실의 좁아터진 소파에서 씻지도 않고 자는 그가 웬일로 욕실에서 아주 오래 씻고 있어서 이상하게 여긴 그녀는 살짝 열린 욕실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벌거벗은 남편은 핏물이 빠져나오고 있는 양복을 빨고 있었고 변기 위에는 부러진 칼이 놓여 있었다. 놀란 정하는 침실로 살며시 돌아와 자는 척을 했다. 이튿날, 남편은 평소처럼 출근을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부터 일찍 들어오기 시작했다.
얼마 뒤 호프집 살인사건이 보도되고, 용의자를 찾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 후 탐문을 통해 용의자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다는 보도가 나온 뒤, 남편은 여느 때처럼 출근한 후에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결혼을 해서 두 살 터울의 아이들과 함께 사는 전업주부인 아내, 외벌이인 남편의 삶은 정하와 원우 부부와 큰 차이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이들이 아직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아니라서 유치원과 놀이방 등에 보내고 난 후에 정하는 좁긴 해도 가족의 보금자리인 집을 정리하고 꾸려나가는 일을 했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집에 돌아왔고, 수다쟁이 아줌마의 방문도 이어졌으며, 늦은 시각에 돌아오는 남편의 식사를 챙길 때도 있었다.
정하와 원우는 어린 자식들을 보살펴야 해서 바쁘다 보니 부부가 조금은 내외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애정이라는 건 손톱만큼도 없었다는 걸 원우가 사라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시작부터 잘못된 관계였지만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결혼을 했고, 첫아이인 하원이를 낳았다. 2년 뒤 상원이가 태어났을 때에는 발을 빼기엔 너무 늦어버린 부부, 가족이 되었다.
이들 부부의 관계가 처음부터 명확했기 때문인지 호프집 살인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 뒤에 그들이 각자 향해야 할 방향 역시 분명했다. 원우는 처음부터 이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사람이라 사라지는 선택을 했다. 납치가 됐다거나 누군가에게 끌려가서 죽었다거나 했을 수도 있겠지만, 정하는 적어도 그가 가족을 위해 떠났다고 믿고 싶어 했다. 원우와는 다르게 두 아이들과 남겨진 정하는 욕실에서 핏물이 밴 옷을 빨던 남편을 본 이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그게 자신은 물론이고 앞날이 창창한 어린 두 아이들을 지키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한 명은 자신을 위해 도망치고, 한 명은 자식을 지키기 위해 남는 걸 보면서 답답함과 짜증이 밀려온 건 당연했다. 원우의 일기장인지 뭔지 모를 노트가 발견된 이후에 그가 얼마나 야비하고 비겁한 인간인지 낱낱이 드러나서 더욱 화가 났다. 상황을 알고는 있지만 어찌 됐든 정하는 남편의 실종 신고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그 모든 걸 떠안아야 하는 현실도 암담했다.
정하가 실종 신고를 하고 3개월이 지났을 때 일명 앞 동 사모님, 쓰레기장에서 정하를 노려보던 60평 여자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남편이자 종종 인사를 나누고 정하의 아이들에게 치킨을 사다 줬던 우성은 장례를 치렀고, 정하를 비롯한 아파트 주민들이 참석해 조의를 표했다.
이후 우성은 정하와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녀가 만들어준 반찬을 우성의 아이들이 잘 먹는다며 감사를 전했고, 우성이 아파트 사람들과 치킨 반상회를 열어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13년이 흘러 소설은 또 다른 관점으로 모든 걸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는 전개이긴 했다. 정하에게 숨기는 게 많았던 원우가 있었고, 정하 역시 원우의 사건을 눈감아줬기 때문에 우성에게도 반드시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작가의 필력이 좋은 탓인지 다음에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이야기들 속에서 캐릭터들이 왜 그런 태도를 보인 건지 헤아려 보는 재미가 있었다.
결국 소설 속에 등장한 여러 캐릭터들은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선택을 했던 걸로 보였다. 원우가 제 안위만을 걱정해 도망치는 선택, 혹은 부득이한 태도를 보였다면 정하는 아이들을 위해 도망치지 않고 숨기는 선택을 했다. 그건 우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성에게도 고등학생인 자녀가 있었기에 아내로부터 그 아이들을 지키고 보살피기 위해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그들의 아이들 역시 각자 선택을 했다는 데서 부모의 성격을 일부분 물려받은 거라고 보였다. 하원이와 상원이의 선택이 달랐고, 우성의 두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전쟁을 치러왔기에 같은 선택을 했다. 지키기 위한 그들의 선택이 어떻게 보면 소름이 끼치는 한편으로 애정을 바탕으로 한 보호였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소설 <배니시드>에 대한 칭찬을 종종 들었었는데 이제야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400페이지가 넘는 책인데 하루 만에 다 읽었을 만큼 흡인력 있고, 재미도 있는 소설이었다. 때때로 어떤 상황이나 캐릭터의 모습에 등골이 오싹해지기도 했다.
드라마로 나와도 재미있을 것 같다.
남편이 밖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든 위험이 나와 아이들에게까지 미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고민은 불과 몇 초였다. 난 그 몇 초의 마지막 초침이 채 움직이기도 전에 결심했다. 모르는 척을 하기로. 내가 모르고 아이들이 모르면 아무도 모르는 거다.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그건 남편 혼자만의 일이었다. 혹시나 경찰이 들이닥쳐도 ‘우리는‘ 모른다. 남편을 제외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 - P57
"당신과 함께 살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생각이었어. 얼마의 시간이 흐르든 어떤 일을 겪게 되는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각오를 하고 열심히 연구했지. 그리고 결국 꿈을 이루었어. 지금 당신과 한집에 있으니." - P272
우리는 서로를 위해 서로를 외면했고 서로를 위해서 숨고 숨겼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서로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서로를 위한답시고 했던 행동들이 결국 각자의 길을 걷게 한 것은 아닐까.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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