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돌아가셨다. 나이 든 엄마는 아버지가 수술해도 식물인간일 거라는 말에 수술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엄마의 결정에 따른 의사는 그래도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반나절도 안 되어 돌아가셨다.
연락을 받고 고향 구례로 부랴부랴 내려 간 '나' 아리는 상주가 처음인 무남독녀 외동딸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행히 아버지의 술 친구들, 빨치산 전우들이 장례 일정이며 연락까지 모두 알아서 했다. 마치 아들처럼, 친척처럼 말이다.
평생을 빨치산의 딸로 살아왔던 나는, 나를 이렇게 살게 만든 아버지를 향한 깊은 원망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그 원망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3일간 장례를 치르면서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아버지가 전봇대에 왜 머리를 박게 되었는지 이유 같은 건 알 수 없었다. 그저 나이가 들어 치매 증상이 있던 아버지가, 평생을 빨치산으로 손가락질 당하며 위장 자수로 감옥에도 다녀왔을 정도로 굳은 신념이 있던 아버지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모순이라 느껴졌다.
사회주의자로 사느라 숨어 다니고, 고문을 당해 눈이 사시가 되었으며, 후유증으로 자식을 가질 수 없었을 정도였던 아버지가 기적적으로 얻은 유일한 자식이 딸 아리였다. 아버지의 딸로,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 평생을 원치 않은 수식어를 달고 살아야 했던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에서 오는 슬픈 감정을 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녀 역시 환갑이 다 된 나이였지만 부모 장례식의 상주는 처음이라 어쩌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버지의 신념으로 인해 작은아버지와는 오랫동안 등을 졌고, 친척 언니들은 칠순이 다 되어 그녀를 아기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또한 엄마 역시 나이가 들어 온몸이 아파 문상 온 손님들에게 인사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 어찌 됐든 자식인 그녀가 모든 걸 처리해야만 했다.
나이 든 이들이 그러하듯 정치적 신념이 다르면 척을 지기 마련인데, 구례는 좁은 동네이고 오지랖 넓은 아버지였던 터라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들이 많았다. 장례식장의 사장도 그렇고, 아버지의 정치적 동료인 동식씨는 모든 걸 알아서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아리와 또래인 학수는 마치 아들처럼 장례식을 챙기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아버지의 마지막 길에 인사를 건네러 온 여러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 구례 사람들은 아버지의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받았다.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아버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듯 여러 사람들의 사건사고, 대소사를 챙겼다.
그중에는 아버지와 담배 친구가 된 17살 노란 머리 소녀도 있었다. 양심이 있으면 다른 옷을 입고 담배를 피울 것이지 교복을 입고 담배를 피운다며 꾸지람을 들었다는 노란 머리 소녀의 일화는 웃겼고,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아리가 노란 머리 소녀를 보자마자 편견을 가졌던 것과 다르게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정치적 동료였다는 이들 중 아직 생존해 있는 사람들도 장례식장을 방문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누군가는 뒤늦게 연락을 받은 이와 동행해 몇 번이고 문상을 오기도 했다.
그리고 연좌제로 인해 육사에 떨어졌던 큰집 길수오빠의 사연이나 현재 상태는 애처롭고 슬프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어서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기분이었다. 길수오빠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작은아버지의 과거 이야기가 등장했는데, 모든 일에 대해 아버지 탓을 하던 작은아버지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밝혀지며 이 역시 참 아프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작은아버지가 유일하게 남은 형제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찾아와줄지 그게 제일 간절했다.
장례식장을 찾아온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딸 아리와 관련된 아버지의 이야기도 이어나갔다. 어렸을 때에는 엄마보다 더 좋았던 아버지였지만, 위장으로 자수해 감옥에 간 아버지가 몇 년 만에 출소했을 때에는 사춘기 딸이 되어 그동안의 벽을 허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리가 60살이 다 되어서도 말이다. 데면데면하긴 했어도 무시하는 관계는 아니었다는 게 다행이지만, 그래도 유일한 부모 자식 관계라는 걸 생각하면 섭섭하기도 하다. 물론 아리 역시 자신의 선택이 아님에도 수식어를 달고 살아야 했던 평생의 세월이 억울하고 갑갑했다는 게 이해가 되었다. 또한 아버지와 엄마의 관계도 이야기하며 때때로는 웃어도 되나 싶을 만큼의 코믹함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를 새롭게 바라보고 알게 되는 건 너무 늦긴 했다. 그래도 3일 동안의 장례에서 아리가 아버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이 과정을 웃기게 그리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불쑥 감동과 슬픔이 밀려와 눈물이 나게 만들기도 했다.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닌데 불쑥불쑥 가슴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올라 당황스러운 한편으로 소설을 읽는 재미에 푹 빠지게 만들었다. 또한 사투리의 묘미를 최대한 살린 문장들이 입으로 오물오물 따라 읽어보게 했을 정도로 생생함이 짙게 다가왔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랫동안 올라 있던 이 소설을 이제야 읽어보게 되었는데, 왜들 그렇게 좋은 평을 했는지 뒤늦게 알게 되었다. 너무 늦게 읽어서 후회되고, 이제라도 읽어서 다행인 마음이 들게 한 좋은 소설이었다.
아버지는 선택이라도 했지, 나는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빨갱이가 되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겠다 선택하지도 않았다. 태어니보니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을 뿐이다. 선택할 수 있다면 누군들 빨갱이의 딸을 선택하겠는가. - P76
한때 적이었던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살아가는 아버지도 구례 사람들도 나는 늘 신기했다. 잘 죽었다고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과 아버지는 어떻게 술을 마시며 살아온 것일까? 들을 수 없는 답이지만 나는 아버지의 대답을 알 것 같았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 P137.138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 P249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이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