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톡 7 - 안녕, 조선 패밀리 조선왕조실톡 7
무적핑크 지음, 와이랩(YLAB) 기획, 이한 해설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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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니 <조선왕조실톡> 시리즈 6권을 작년 봄에 읽었다. 소설이든 아니든 시리즈로 된 책은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눈에 띄면 곧장 대출해서 읽는 편인데, 이 시리즈는 후반으로 가면서 읽을 마음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조선의 마지막이 비극으로 끝난다는 걸 국사를 배운 모든 사람이 알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긴 해도 패망의 역사를 되도록이면 미뤄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물론 마지막 시리즈를 읽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성격상 무지하게 재미가 없지 않는 이상은 끝까지 봐야 한다는 이상한 고집이 있어서 1년 반이 지나서야 마지막 이야기를 읽었다.

 

 

 

순조(1800~1834년 재위)

헌종(1834~1849년 재위)

철종(1849~1863년 재위)

 

 

 

정조는 세자를 김조순의 딸과 혼인을 시키기로 약조하였는데, 그 사이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래서 김조순은 혼약이 취소된 줄 알았지만 정순왕후는 주상의 마지막 뜻이라며 일을 진행시킨다. 왕가에서 벌어지는 흔한 혼인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혼인의 특이점은 김조순이 그 유명한 안동 김씨, 즉 세도정치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시작됐다는 점이다. 혼인 정도는 취소해도 됐었을 텐데 아깝다.

 

위대하신 세종대왕님 다음으로 존경받는 정조는 백성을 사랑했다. 노비까지도 제 자식이라며 끌어안는 포용력은 임금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덕목과도 같지만, 조선 임금 중에 자기만 아는 인물들이 꽤 돼서 그런가 세종과 정조의 애민사상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세종은 아기를 낳은 노비 부부에게 출산 휴가를 줬었는데, 정조는 공노비와 사노비를 혁파했다. 정조가 훙하고 난 뒤에 수렴청정을 했던 정순왕후가 노비안을 불태우라고 지시한 것은 정말 화끈하시다.

 

 

홍경래의 난과 김삿갓이 이렇게 연결될 줄은 몰라서 이 부분을 읽으며 깜짝 놀랐다. 국사 시간에는 홍경래를, 문학 시간에는 김삿갓을 배워서 서로 연결을 못 시켰나 보다. 아무튼, 과거 급제를 했는데 때려치우고 방랑을 하셨다는 김병연, 일명 김삿갓의 결단력과 의지가 대단하다.

 

세종에겐 장영실이 있듯, 정조의 짝꿍이나 마찬가지인 정약용은 거의 20년가량 유배를 갔었다. 근데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성격에다 궁금한 걸 참지 못하고, 기록하는 것도 좋아했던 덕분인지 유배 생활 동안 500권 이상의 분량이 되는 책을 남겼다고 한다. 잡학다식의 대명사였다.

근데 특이한 건 실록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세종대왕님만큼이나 존경을 받는 이순신 장군님이 실록에 남겨진 기록이 없다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볼 수 있단다.(아... 선조 정말...) 그래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알려져서 참 다행이다.

 

 

열녀비가 짜여진 각본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죽은 남편을 따라서 죽는 여자들이 그렇게 많았을 리가 없는 게 당연했다. 오직 여자에게만 이렇게 정절을 강요하게 된 것은 잘못된 유교사상의 말로였다. 열녀비가 세워진 고을에는 세금 감면 혜택이 있었다고 하니 이런 뭐 같은 경우 때문에 살고 싶었던 여자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자결로 알려졌다는 게 원통하다.

그리고 죽었어야 하는데 아직 안 죽은 사람을 미망인으로 부른다. 이게 무슨 개 짖는 소리인가 싶다. 단어의 뜻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소설 같은 걸 읽을 때 해당 단어가 표시되면 리뷰를 쓸 때 그대로 지칭하기도 했었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고종(1863~1907년 재위)

흥선대원군(1820~1898년 생몰)

명성황후(1851~1895년 생몰)

강화도령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한 후, 신정왕후는 정조의 이복동생으로 제주도에 유배를 가서 죽은 은신군의 양자이자 인평대군의 후손인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을 다음 왕으로 지목해 그가 고종이 되었다. 인평대군이 언제 적 인물인지 검색해보니 1600년대 중반으로 나왔다. 왕가에 대를 이을 사람이 얼마나 없으면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야 했을까 싶다. 물론 철종의 이복형제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병인양요로 인해 외규장각 의궤가 프랑스에 도둑맞은 사건은 알고 있어도 뼈저리게 안타깝다. 우리의 문화재산인데 프랑스 소유라 영구 대여를 해왔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나마 박병선 역사학자가 아니었다면 찾아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라가 나서서 한 일이 아니라 개인이 나선 일이라니 더 대단해 보인다.

 

이후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러 사건들을 나열하면서 그 속에 숨어있던 일화들을 보여주었다.

 

 

동학으로 만난 김구 선생님과 안중근 의사의 만남도 어디선가 봐서 알고 있었으나, 역시나 인연은 인연이다 싶다.

 

 

 

 

비극으로 끝이 날 줄 알았는데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책이 끝나서 다행이었다. 물론 그 이후엔 일제강점기라는 분노와 서글픔으로 점철된 역사가 이어졌긴 하지만 말이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건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일 뿐이지만 조선 후기를 읽으면 언제나 만약을 생각하게 된다. 정조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효명세자가 왕위에 올랐더라면 하는 것들이다. 비극적인 사건을 되짚어보며 역사가 번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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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러블리 와이프
서맨사 다우닝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시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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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기고 체격 좋은, 매력적인 보조개까지 있는 남자가 바에서 어떤 여자에게 관심을 보인다. 남자는 핸드폰에 할 말을 적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자신은 토비아스이고 청각장애인이라고 쓰여있었다. 페트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미안한 표정을 짓지만, 토비아스는 괜찮다는 듯 핸드폰을 이용해 대화를 이어갔다. 말이 잘 통했는지 페트라는 토비아스를 집에 데려가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낸다.

 

토비아스는 페트라의 집에서 나와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남자의 이름은 토비아스가 아니고 당연히 청각장애인도 아니다. 페트라에게 말한 내용 중 진실은 하나도 없다. 남자의 집에는 결혼한 지 15년이 된 아름다운 아내 밀리센트가 기다리고 있다. 남자는 아내에게 오늘 만난 상대가 적당하지 않다는 말을 한다. 두 사람은 타깃을 물색하고 정해서 여자들을 살해하는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마지막까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남편과 아내 밀리센트는 쿵짝이 잘 맞는 커플이었다. 10년이 넘도록 결혼생활을 하고 10대 초반의 아이가 둘이나 있었어도 신혼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였다. 거기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미쳤다고 생각할만한 살인을 함께 저지르고 있었다. 여자들을 찾아내는 건 남편의 일이었고, 남편이 찾아낸 여자들을 죽이는 건 밀리센트의 몫이었다. 살인을 하면 할수록 부부관계가 더 돈독해지는 걸지도 몰랐다.

그들의 첫 살인은 밀리센트의 언니 홀리였다. 어렸을 때부터 밀리센트를 괴롭히고 상처를 냈지만 부모는 어린 딸이 부주의한 탓이라 여겼는데, 10대 중반에 몰래 차를 끌고 나가 조수석에 앉은 동생을 죽이려 했다는 증거가 밝혀져 정신병원에 갇혀있던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사회에 나올 수 있게 된 홀리가 밀리센트를 찾아 집에까지 오자 가정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그녀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첫 살인 이후 두 사람은 맛이 들렸는지 그렇게 살인을 이어나갔다.

 

태까지는 들키지 않았지만 1년 전 실종된 여자가 최근에 발견되면서 긴장하게 만들었고, 그 여자가 최근까지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남편은 밀리센트가 이제껏 알던 사람과는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을 거라 의심한다. 작은 의심이 돈독하게 쌓아올렸던 두 사람의 관계에 금이 가게 만든 것이었다. 한 번 시작된 의심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고,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커져만 갔다.

이 와중에 자신들의 살인을 과거에 사라졌던 연쇄살인범에게 뒤집어 씌운 부부의 계획은 딸 제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아들 로리는 이따금 밤중에 나가는 아빠가 바람을 피우고 있는 거라 의심하기도 했다. 오로지 흥분, 아드레날린의 분출이라는 흥미로 시작된 살인이 가족을 붕괴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처음에 남편이 토비아스, 청각장애인, 회계사라고 하며 여자들을 물색하는 모습에서 언젠가는 들킬 거라고 생각했다. 이름이나 직업으로 사람을 찾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굳이 청각장애라는 잊기 어려운 특징을 이용하여 여자들에게 다가갔기 때문이었다. 토비아스가 접촉한 여자들이 청각장애인이라고 하면 경계심이 허물어졌기 때문에 그랬던 걸 수도 있지만, 혹시라도 들켰을 때를 예상했다면 그래선 안 됐었다.

아니나 다를까 후반에는 당연히 그 특이점이 남편의 발목을 잡았는데, 그걸 이용한 사람의 정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헉 소리가 절로 났다. 한편으로는 홀리가 등장했을 때 예감하던 부분도 있었다. 스릴러 소설을 제법 읽어서 그런가 머리가 좋은 나쁜 인간은 결말 직전까지는 내내 들키지 않으며 진짜 속내를 모두에게 숨긴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의심이 현실이 되어 위기가 있었으나 어쨌든 결말은 잘 끝났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을 읽고선 이 인간도 제정신이라고 볼 수는 없구나 싶었다. 역시나 쿵짝이 잘 맞았던 관계였다. 초록은 동색이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책을 읽기 전 니콜 키드먼이 이끄는 제작사에서 영화화를 결정했다고 한 걸 알게 됐는데, 그래서인지 읽는 내내 니콜 키드먼을 상상했다. 소설 속 밀리센트와 나이대는 다르긴 하지만 아름다운 살인자라는 설정에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가 밀리센트 역할을 할지, 이름도 모르는 남편은 누가 맡을지는 모르겠지만 잘 만들면 흥미롭고 섹시한 스릴러가 될 것 같다.

 

 

 

"이제 와서 양심이 생겼어?"
"난 항상 양심이……."
"아니.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또 그녀의 말이 옳다.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려 했을 때, 나는 양심이 없었다. - P52

이상했다. 로빈의 살해 장면을 머릿속으로 되돌려 볼 때의 느낌도 그랬다. 그럴 때마다 그날이 너무나 환상적이었다는, 우리가 하나가 되어 우리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일을 멋지게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근사했다. - P142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너무나 많다. 내게도 비밀이 있다. 밀리센트라고 비밀이 없으라는 법이 있나?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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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의 일
김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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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회사 현장팀에서 26년 동안 일한 "그"는 한 달 전에 새로 온 부장의 호출을 받았다. 부장은 그가 저성과자로 분류되어 재교육 대상자가 되었다는 말을 꺼냈다. 이번까지 세 번째 재교육 대상자가 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퇴직 제안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지만, 다시 교육을 받기로 결심했다. 재개발 예정지에 대출을 끼고 산 주택의 이자를 부담해야 했고, 아들 준오가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양가 어르신들의 노환으로 정기적으로 나갈 병원비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재교육을 받고 난 이후에 그의 행동을 일일이 기록한 보고서가 부장의 손에 들어간 것을 보니 회사에서는 아무래도 그가 나가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그는 버티고 또 버텼다. 출퇴근을 하기엔 너무나 멀어 사택에서 거주해야 하는 지역에 발령이 나도 그는 묵묵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흐르고 흐르다 보니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버티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50대쯤 되었을 주인공 "그"의 이름은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물론이고 아들, 조카, 그만둔 동료들의 이름은 모두 등장했는데, 마지막까지 그의 이름만은 밝혀지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가장으로 보편화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름보다는 회사의 직급, 누구의 아빠로 불리는 게 이제는 익숙해진 사람의 모습이었다. 청춘이라 불릴 한창나이는 지났지만 그렇다고 노인이라고 하기엔 젊은, 그래서 퇴직을 하기엔 아직 이른 남자를 이 소설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요즘엔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희미하다. 나만 해도 한 직장에 계속 다니기보다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하거나 나를 좋게 본 사람의 부름에 여러 번 응답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소설 속 그가 계속 직장에 남으려고 하는 걸 조금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이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20년이 넘도록 다닌 직장이기 때문에 애사심이 남다른 건가 싶기도 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기에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무슨 일이든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내가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이력서를 넣어볼 기회가 있었고, 퇴사 후에 부동산으로 대박이 났다던 동료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자리를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계속 남아있고자 하는 회사에서 굴욕과 모욕을 느끼는 것보다 한순간 쪽팔리고 마는 게 훨씬 나았을 터였다. 그가 지방으로 발령이 나서 원래의 업무가 아닌 일을 떠맡고 이런저런 일로 인해 그곳의 책임자에게 추궁을 당하는 일의 연속은 읽고 있는 내가 다 스트레스였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해서 버텨냈다. 나중엔 오기로 남아있는 거라 느껴지기까지 했다.

 

왜 그렇게 한 직장에만 매달려야 했을까. 처음에 퇴직과 재교육 중에 선택을 했더라면 적당한 퇴직금을 받아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해볼 생각을 했을 수도 있는데, 왜 굳이 버텨야만 했는지 솔직히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출금, 나이 든 부모의 병원비, 아들의 교육 자금 등을 방패 삼아 새로운 도전을 회피하려는 것만 같았다. 그가 조금은 고지식한 면이 있었던 탓인 듯하다. 아마도 평생을 그렇게 곧게 살아왔을 그의 인생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버티는 그를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소설이 진행되면서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 꾸중을 듣고 자꾸만 더 먼 곳으로 좌천되는 그의 심정만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낭떠러지에 밧줄 하나에만 의지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회사가 시키는 일이 부당하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곧이곧대로 하는 그가 요령이 없는 것 같다가도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입장이라는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가 끝까지 버티고 버틴 끝에 아들 준오의 대학 합격 소식을 듣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이 외면했던 회사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 결말이 왠지 모르게 조금은 슬펐고, 한편으로는 섬뜩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동안 본인의 의지로 버텼다기보다는 내면의 무언가가 그를 버티게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마지막이 되어서야 조금은 후련하기도 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의 상황에 자꾸만 빠져들어 가슴이 답답해질 지경이었다. 책을 읽는데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에 몰입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단순한 문장은 건조함이 물씬 풍겼는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게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다. 소설 속 캐릭터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경우는 드물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살아있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왠지 현실적이라 생생하게 느껴졌다.

가장의 어깨에 놓인 책임감의 무게를 새삼스레 생각해보게 됐다. 자존심이 상하고 모욕을 느끼는 데도 그들을 참게 하고 버티게 하는 무언가의 가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여기 와서 아무것도 할 줄도 모르는 바보 천치 등신이 됐어요. 그게 왜 내 탓이야? 그게 내 잘못이에요? 바보 천치 등신이 되라고 사람을 이런 곳에다 처넣은 인간들 잘못 아니에요? - P170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왜 이 일을 지속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매번 오기가 살아나고 끝장을 보려는 심정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점점 다른 사람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 P169

그가 회사에 기대한 건 마땅히 자신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들이었다. 존중과 이해, 감사와 예의 같은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바란 것뿐이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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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체인 아르테 오리지널 12
에이드리언 매킨티 지음, 황금진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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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 카일리는 이른 아침 버스 정류장에서 스쿨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카일리 앞에 복면을 쓰고 총을 든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카일리에게 눈가리개를 쓰라고 준 뒤, 앞에 나타난 차에 올라타라고 말했다. 카일리가 차에 올라타자 어딘가로 향했다. 겁이 난 카일리는 자신의 엄마에게 돈이 없다고 말하지만, 운전석에서 들려온 날선 여자의 목소리가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렇게 누군지도 모르는 아줌마, 아저씨에게 납치를 당한 카일리는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 지하실에 감금된다.

 

카일리의 엄마 레이철은 유방암 재발 검사 결과 때문에 병원에 가던 길이었다. 암이 재발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을 애써 떨쳐버리며 학교에 도착했을 카일리에게 농담 삼아 문자를 보내지만 답이 없다.

그러다 알 수 없는 발신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음성 변조된 목소리는 "체인"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끊는다. 곧바로 다시 걸려온 알 수 없는 발신자는 이번엔 겁에 질린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자신이 레이철의 딸 카일리를 납치했다고 말했다.

 

 

 

아침까지 평범했던 한 가족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멀쩡히 학교에 간 줄 알았던 딸이 납치됐다는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유괴 사건이 일어날 경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것이고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의 돈을 요구할 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체인은 대출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비트코인으로 바꿔 입금할 것을 레이철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당연히 경찰에 신고를 하면 카일리를 죽일 거라고 말했다.

한 가지 예상을 빗나가는 것은 레이철에게 적당한 표적을 찾아 납치하라고 한 점이었다. 딸을 위해 돈을 마련하고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을 수는 있었으나, 다른 누군가를 납치해야 된다는 건 도무지 못할 짓이었다.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 있기에 다른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을 납치해야만 하는 것, 그게 바로 체인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원리였다. 피해자 신세였다가 졸지에 가해자가 되어야만 하는 게 너무 끔찍했다. 그러나 끔찍하다고 해서 그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목숨보다 사랑하는 자기 자식이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 부모는 못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2012년 멕시코시티에서 실제로 일어난 피해자 교환 납치 사건에서 착안해 쓰인 책이라고 한다. 비슷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무시무시했다. 세상엔 머리 좋은 나쁜 놈들이 너무나 많았다.

 

레이철은 전남편 마티와 이혼 후 이제 막 대학 강사 자리를 얻어 준비 중이었는데, 암이 재발했을지도 모를 불길한 상황에 카일리까지 납치되어 구렁텅이에 처박혔다. 마티에게 의논을 해야 했지만 그의 성격상 경찰에 신고하려고 할 게 뻔해서 레이철은 체인의 허락을 받아 마티의 형 피트의 도움을 받았다. 카일리와 피트가 서로 각별한 조카, 삼촌 사이였다는 이유 때문도 있지만, 그가 과거에 해병이었기에 마티보다는 큰 도움이 될 듯싶어서였다. 체인에 대해 들은 피트는 당연히 레이철을 돕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은 피트가 마약중독자라는 데에 있었다. 그 사실을 레이철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상태는 심각한 것 같았다.

 

암 재발 환자와 마약중독자의 동행은 고비가 있긴 했지만 카일리가 풀려나도록 체인의 어려운 요구를 모두 수행했다. 마침내 카일리를 품에 안은 두 사람의 모습이 소설 중반쯤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풀려났다 싶었는데, 이후엔 세 사람의 트라우마를 보여주며 체인을 고안해낸 사악한 인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역시나 사이코패스였다. 어릴 때부터 조짐을 보였던 그 사람은 똑똑했기 때문에 체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처음엔 행운의 편지와 같은 방식의 장난으로 시작됐지만 그 시스템이 굉장한 부를 가져다주고 본인들에게 흥미로운 결과를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그 사람은 떼어낼 수 없는 체인의 순환 고리를 만들었다.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는 것이 끔찍했는데, 영원히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무시무시했다.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을 뒷받침해서 쓴 소설이라 그런지 읽는 내내 무서워서 몸서리쳤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싶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랑하는 가족을 담보로 벌이는 범죄라 때려죽여도 해야만 했던 상황이 가혹했다.

 

여성 캐릭터 레이철이 주인공이라 돋보였지만 엄마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강한 엄마 캐릭터를 다른 소설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예상을 벗어났던 건 연약한 소녀인 줄 알았던 카일리가 보기보다 강단이 있었다는 점이다. 열세 살이면 너무나 어린 나이라 납치당하면 울면서 벌벌 떨기만 할 것 같은데, 카일리는 머리를 쓰고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체인에 납치됐었던 것을 발판 삼아 도약한 후반 장면도 퍽 인상적이었다.

한 가지 좀 의문이었던 건 레이철과 피트의 관계였다. 그럴 리 없을 거라 여겼는데 그런 관계가 된 게 놀랍기도 하고 서양은 역시 쿨하구나 싶기도 했다. 여러모로 굉장한 부분이었다.

 

실화에서 착안한 설정이 잔인했으나 소설은 흥미진진했다. 결말이 통쾌한 인과응보라 마음에 들었다.

 

 

 

"체인은 당신이나 당신 가족은 안중에도 없어요. 체인이 염두에 두는 건 오로지 체인의 안위밖에 없어요.
(……중략)
내가 지금 당신한테 하듯 당신도 당신 표적한테 해야 한다고요. 당신이 몸값을 지불하고 누군가를 납치하자마자 내 아들은 풀려날 거예요. 당신의 표적이 몸값을 지불하고 누군가를 납치하자마자 당신 딸도 풀려날 거고요. 간단해요. 그게 바로 체인이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이어지는 방식이에요." - P24.25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한 아이의 엄마에게, 한 가족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사악한 짓이다. 그때 어떤 미친 여자의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는 카일리가 떠오른다. 가장 사악한 짓은 맞지만 저지를 수밖에 없다. - P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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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연애소설
이기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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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대놓고 연애소설이라는 걸 밝히는 이 책은 단편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짧은 이야기들이 여러 편 실려 있었다. 나이도 초등학생부터 사회 초년생, 사회에 익숙해진 직장인, 40~50대는 물론이고 70대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도 있었다. 모두들 각자의 이름이 있었고 사연 또한 가지각색 정말 다양했다. 풋풋한 사랑을 이제 막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고, 기다림에 지쳐 이별을 고할 때도 있었다. 때로는 시작도 하기 전에 파투가 난 사람들이 있었고, 진짜로 헤어지나 싶었는데 그럴 일은 없다는 걸 보여준 커플도 있었다.

 

어쩌면 우리 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상황이나 감정적인 면에서 공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친구에게서 들었다거나 혹은 전 연인과의 일화가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길을 지나가다가 무심코 마주친 사람들에게서 이 소설에 담긴 짧은 이야기들 중 비슷한 것을 언뜻 들었을 수도 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오래된 옷을 말도 없이 버렸다는 것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사건으로 당장 집을 나가 대학가 근처에 싼 원룸을 얻은 아버지를 찾아간 자식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됐는데, 짧은 페이지가 흐르는 동안 어머니, 아버지가 서로에게 얼마나 깊은 애정이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는 두 분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70대의 사랑이란 이런 거라고 보여줬다.

 

초등학교 첫사랑과 재회한 50대의 이야기는 웃으면 안 되는데 웃긴 상황이었다. 극장에서 데이트를 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갔을 줄은 몰랐을 거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주인공만 억울한 상황이 됐다.

 

웃기고 재미있는, 그리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적으로 흐르지만 그 깊이가 늘 같은 건 아니다. 오랜 연인 사이도 그랬고 부부 관계도 그랬다. 무심함을 바탕으로 깊이가 달라지는 감정의 골은 한쪽만 느끼는 것이라는 게 왠지 씁쓸했다. 말을 해줘도 모르는 타입의 사람들이라 답답하기도 했다.

 

 

 

짧은 이야기만 여러 편 담겨있어서 틈날 때마다 한두 편씩 읽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도 킥킥 웃으며 읽다 보니 순식간에 다 읽어버렸다. 가볍게 읽을거리가 필요한 사람에게 딱 좋은 책이었고 여러 번 웃게 만들었지만, 때로 무게감 있는 내용도 있었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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