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라
타키스 뷔르거 지음, 유영미 옮김 / 황소자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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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스위스인 사업가의 아들 프리츠는 독일인 어머니에게서 그림을 배우며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일곱 살 때 지나가던 마부에게 모루로 맞아 뇌를 다쳐 색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이후, 어머니는 프리츠를 더 이상 사랑해 주지 않았다. 그로 인해 그는 만성적인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프리츠가 사는 스위스에도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다. 베를린에서 나치가 유대인을 잡아간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에 호기심이 동한 프리츠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일로 향했다. 스위스 여권을 가지고 있는 프리츠는 그곳에서 큰 불편 없이 지냈다.

그러다 미술학교에서 누드모델로 일하는 크리스틴을 만나게 됐다. 프리츠는 그녀에게 단번에 빠져들었고, 크리스틴 역시 프리츠를 좋아하는 듯했다. 어느 날부터 크리스틴이 프리츠를 만나러 오지 않다가 며칠 만에 갑자기 나타났다. 누군가에게 맞은 듯 엉망인 상태였다. 그제야 프리츠는 크리스틴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무한한 사랑을 받는 게 당연했던 어린 시절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색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이후 사랑을 받지 못한 프리츠는 결여된 부분이 생겨났다. 프리츠의 엄마 입장은 도통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기에 프리츠를 가여워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 입장에서는 엄마에게 왜 자신을 예전처럼 사랑해 주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프리츠를 한없이 사랑하긴 했지만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그와 교류하는 시간이 엄마보다는 적었기에 프리츠는 그 결여된 부분을 채워주지 못했고, 그는 그렇게 성인이 되었다.

결여에 조금은 비뚤어진 구석이 있었던 모양인지 프리츠는 베를린의 유대인들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듣고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빠는 반대했지만 스위스인이었기에 어느 정도의 안전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렇게 향한 베를린의 호텔에서 머무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직업도 없는 스무 살의 청년 프리츠는 아빠가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을 하며 제3자의 시선으로 전쟁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만난 크리스틴과 단번에 사랑에 빠져 때때로 만나다가 나중엔 매일 그녀가 호텔로 찾아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며칠 동안 사라졌다 돌아온 크리스틴에게서 고문당한 흔적을 발견한 뒤에 그녀가 유대인인 스텔라 골트슐라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탓에 크리스틴이 실존 인물인 스텔라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누드모델과 클럽의 가수, 그리고 라틴어를 가르쳤던 스텔라는 프리츠와 있지 않을 때에는 같은 유대인을 고발하는 일을 했다. 순전히 나치에게 잡힌 부모를 빼내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 그녀에게 그 일은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프리츠가 그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스텔라는 조금씩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순수한 청년의 시선에 스텔라 스스로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이후 소설은 두 사람의 헤어짐을 깔끔하게 그려냈지만 마지막에 프리츠가 오랫동안 스텔라를 사랑했다는 걸 보여줬다. 지울 수 없는 사랑을 한 프리츠였고, 자신이 한 일을 죽을 때가 되었을 때 돌려받은 스텔라였다. 안타깝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는 삶이었다.


소설 <스텔라>는 실존 인물인 스텔라 골드슐락에 관한 사실에 픽션을 가미했다. 사랑 이야기였지만 온전히 그 장르로만 즐길 수 없었기에 책을 읽는 내내 동정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양가적 감정이 들었다.

외투 깃 위에서 그녀의 밝은색 머리카락 한 올을 발견했다. 나는 곧장 머리카락을 제거해 버리는 대신 이것으로 무얼 할지 반나절 동안 생각했다. 그런 다음 머리카락을 입속에 넣고는 코냑으로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겼다. - P147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배신하는 게 잘못된 일일까?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배신하는 게 옳은 일일까?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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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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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동성 애인인 T를 죽이고 교도소에서 복역을 마친 천톈홍이 고향 용징으로 돌아왔다. 소설가로 이름을 알리고 독일까지 간 톈홍이 돌아올 곳은 누나들이 있는 고향뿐이었다.


과묵한 아버지, 말을 옮기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어머니 사이에서 누나들 다섯이 태어났고, 이후 형과 막내 톈홍이 태어났다. 이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가족을 떠났으며 형은 톈홍처럼 감옥에 갔다. 누나들은 각자 결혼을 해서 용징에 살기도 했고, 타이베이에서 사는 누나도 있었다. 그리고 누나들 중 한 명은 귀신이 되어 가족의 곁을 맴돌았다.



톈홍은 개천에서 용 난 스타일이었다. 지도에서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마을 출신에서 나고 자라 그가 쓴 책이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 신문에 났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거기다 독일로 유학까지 떠나게 되었으니 그보다 더 큰 출세는 없었다.

그럼에도 톈홍은 엄마에게 외면을 당했다. 어렸을 적 근처에 사는 과수원 집 둘째 아들 징쯔총과 함께 있었던 사건으로 애지중지해야 마땅했을 막내아들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성인이 된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러 왔을 때에는 쫓겨나고 말았다. 그로 인해 톈홍은 독일에서 복역을 마치고 오갈 데 없는 상황에서도 집으로 돌아오는 걸 주저했을 터였다. 다행히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집을 나가 이제는 큰누나가 그 집을 지키고 있었다.

가만 보면 톈홍만 말 못 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아니었다. 큰누나 수메이는 첫째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 공장에 취업해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했지만, 그가 도박에 빠져 돈을 몽땅 날리고 말았다. 둘째 누나 수리는 공무원으로 평탄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얼마 전에 사건이 터져서 인터넷을 달구는 주인공이 됐다. 셋째 누나 수칭은 공부도 잘하고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현재는 앵커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며 살고 있었다. 넷째 누나 쑤제는 다섯째 만메이의 혼처로 예정되어 있던 왕 씨 집안의 첫째 아들과 결혼해 용징에서 '백악관'이라 부르는 대저택에 살고 있는데, 정신적인 문제가 생겨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웠던 건 문제가 있던 사람들이 비단 살아있는 사람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소설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귀신, 죽은 자들 역시 저마다의 이유로 용징에 머물고 있었다. 톈홍은 물론이고 누나들도 용징에 다시 돌아오기 싫어했는데 돌아왔듯, 귀신들 역시 비슷한 이유로 그곳에 머물고 있는 거라 사료됐다.


소설은 동성 연인을 살해한 톈홍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후반에 완전히 밝혀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 그 사이에 가족 간의 관계라든지, 남아선호사상 중심의 가정에서 딸로 살아가는 고충도 말하고 있었고, 여성의 도구화와 가정 폭력 등 소외된 이들에 대해 두루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귀신들도 거기에 목소리를 보탰다는 게 특이점이었다.

후반에서야 톈홍의 이유가 밝혀지긴 했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꽤나 지루하고 시점이 오락가락하여 읽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종의 의식의 흐름 기법이었는데, 이런 방식이 익숙하지 않은 터라 조금은 아쉬웠다.

방금 큰언니가 전화를 걸어 네가 돌아왔다고 말해 줬어.
언니가 전화로 네가 돌아왔다고 말했어. 언니가 그랬어. 톈홍이 돌아왔으니까, 쑤제 너도 빨리 나와. 톈홍이 독일에서 돌아왔다고.
이 바보야. 뭐 하러 돌아왔어? 이 귀신들의 땅에 와서 뭘 하겠다는 거야? - P174

어른이 된 그는 귀신을 믿지 않게 되었고 두려워하지도 않게 되었다. 귀신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가장 잔인한 것은 인간이었다.19

오늘 그는 돌아왔다. 그에게는 해답이 없었다. 사람은 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어디가 집인가? 그가 돌아온 것은 속죄를 위해서도 아니고 참회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해답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귀향은 의무였다. 귀향은 그를 질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돌아와야 했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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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날 정해연의 날 3부작
정해연 지음 / 시공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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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아내 현아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종현은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현아를 찾아 헤매다가 경찰에 신고까지 하지만, 경찰은 단순 가출이라고 했다. 종현의 전화는 받지 않던 현아가 경찰의 연락을 받고는 곧 이혼을 할 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종현은 현아가 이혼 얘기를 꺼냈다는 사실도 믿을 수가 없다. 현아가 떠나기 직전까지 두 사람의 사이는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다. 그게 벌써 5개월 전이었다.


그리고 현재, 종현의 집에 웬 거구의 남자 고구남이 쳐들어와서는 김실자라는 여자에게 2억 원을 빌려줬다고 하며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했다. 종현이 그런 사람 모른다고 하자 나가려던 구남이 두 사람의 결혼사진을 보며 현아가 김실자라고 말했다. 현아가 왜 김실자라는 이름으로 돈을 빌렸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되던 종현은 일단 그녀가 가출했다는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구남은 돈을 받아야겠다며 그때부터 종현의 집에 눌러앉았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뉴스에서 웬 임산부가 6살 박아영 어린이를 납치했다는 사건이 보도되었다. CCTV에 찍힌 흐릿한 정지 사진만 봤는데도 종현은 납치범이 현아라는 걸 알고 너무 당황스럽기만 하다.




가출한 현아를 향한 종현의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었나 보다. 현아를 찾느라 회사도 때려치우고 엄마를 포함해 지인들이 이제 그만 잊고 새 출발을 하라고 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걸 보면 말이다. 소설 시작부터 등장한 중요한 문제는 결혼하고 1년 뒤에 발기 부전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아는 그런 종현을 다독이며 응원해 줬을 만큼 마음씨도 넓은 아내였었다. 종현은 혹여 남성성의 문제로 인해 현아가 가출했고 이혼하려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에 병원까지 다녔고 현아가 떠나기 전에 챙겨준 비타민도 꼬박꼬박 복용했다. 크게 나아진 건 없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 종현 앞에 구남이 나타나면서 자신이 알던 현아가 진짜였는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구남이 현아를 김실자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것에서부터, 김실자가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고 돈을 만들어오라고 했기에 구남을 찾아왔다고 하는데, 종현은 누구를 때리기는커녕 맞을 것만 같은 캐릭터였다. 그뿐만 아니라 뭔가를 알고 있는 듯 구남은 현아가 챙겨준 비타민을 대뜸 먹지 말라고 말했었다.

종현이 이상함을 느끼고 구남을 추궁하자 이 집이 종현과 현아가 마련한 자가가 아니라 월세라는 게 확인됐다. 또한 가계 경제는 모두 현아가 맡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저축한 게 없었고 통장 계좌에는 마이너스 5천만 원이라는 거액이 찍혀 있었다. 거기다 종현은 침대 밑 깊숙한 곳에서 두 줄짜리 임신 테스트기를 발견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종현의 멘탈이 박살 나다 못해 가루가 되어 흩어졌을 것만 같은데, 아직 큰 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바로 현아가 임신을 한 몸으로 여자아이를 납치했다는 뉴스였다.

너무나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내가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게 밝혀질 때마다 종현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구남조차 말리지 못할 정도로 폭주하며 날뛰는 종현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됐다.

이후 소설은 종현과 구남이 현아를 경찰보다 먼저 찾자는 합심으로 흘러가면서 묘한 관계로 시작한 이 사건이 나름의 스릴과 소리 내어 웃을 정도로 코믹한 전개로 이어졌다. 평범하기만 한 종현이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다잡는 마음이 있었고, 조금은 혹은 많이 나쁜 놈이었지만 그래도 후회하고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는 구남이 있었다.

그리고 현아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며 일말의 동정도 느끼지 않게 만들었다. 이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악당에게 안타까운 서사 따위 부여하지 않는 작가의 선택이 좋았다.


정해연 작가의 소설 <선택의 날>은 '날 시리즈'라고 불리는 세 작품 중 하나다. 시리즈로 묶여있긴 하지만 서로 연관성은 전혀 없다. 재미있게 읽은 <유괴의 날>만큼이나 통통 튀는 재미와 코믹함이 즐거움을 주었다. 이번에도 재미있었던 책이다.

현아는 어느 날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떠나 버렸다. 이혼하겠다며 경찰과 통화했다는 현아는 그가 알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모르는 다른 모습도 있지 않을까? - P31.32

종현은 차현아가 미웠다. 그러나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 즉시 그는 이미 아버지가 되었다. 조금 전까지 한 여자를 찾는 미션으로 불타올랐던 종현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지금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 아이를 지키고, 만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유괴된 아이와 그들의 부모가 떠올랐다. 아이의 생사는 아직 확인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존재가 이렇게 마음을 힘들게 하는데, 유괴된 아이의 부모 마음은 어떨까를 생각하면 괴로웠다. - P105

구남은 이제 두 가지에 대해 확실히 깨달았다. 하나는 모든 어머니에게 모정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선천적으로 짐승보다 못한 인간도 있다는 사실. - P265.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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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7
정용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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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고위급 인사, 현직 국회의원 등 12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혐의로 붙잡힌 남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살인자임을 부정하지 않았고 혐의를 모두 인정했으며 재판 후에 사형 판결이 내려졌을 때 예의 항소를 하지 않았다. 그는 가슴에 빨간 딱지가 붙은 수형복을 입고 474번으로 불렸다.

474번의 담당 교도관 윤은 그가 궁금해진다. 보통의 죄수들처럼 억울하다는 항변 한 번 하지 않고 묵묵히 교도소 생활을 하는 그의 삶에서부터 모든 것이 알고 싶어졌지만, 다른 이들처럼 가볍게 그에게 다가가지 않으며 상황만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 474번에게 신해경이라는 이름의 중년 여성이 면회를 요청하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짧은 소설은 교도관 윤의 시점으로 시작되었다. 윤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474번이 여느 죄수들과 다르다는 걸 분명히 느꼈기에 그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을 것이다. 살인을 으스대지도 않고 그렇다고 억울하다고 항변하지도 않는, 그저 이 생활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흘러가게 두는 사형수 474번은 내가 봐도 뭔가 달라 보였다. 윤의 선배 교도관은 죄수에게 함부로 호기심을 가지고 친절하게 대하면 안 된다고 충고했지만 윤은 궁금한 걸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474번은 사형수라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듯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때를 기다리며 발톱을 숨기고 있는 맹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민번호도 없어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남자라는 기이한 특징 외에 교도소 생활로만 봤을 때는 평범하게만 여겨졌다.

왠지 모르게 때를 기다리는 것만 같던 두 남자의 사이에 신해경이라는 면회 신청자가 나타나면서 과거의 이야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474번의 과거는 그와 비슷한 이들이 그러하듯 불우하기만 했다.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을 땐 어린 시절의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이런 삶을 살 수밖에 없었노라고 말하려나 했지만, 소설은 예상과는 다르게 그런 방향으로 노선을 틀지 않았다. 474번은 그저 덤덤하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윤은 처음엔 평범한 듯 보였지만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명백하게 밝혔다. 그는 범죄자를 교화하는 목적으로 운영되는 교도소의 교도관이라는 배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윤과 474번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일 뿐이었다. 그 부분이 너무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후 신해경이 어떤 사람인지 밝혀지면서 그녀 역시 평범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깨닫게 해 우리가 악인을 악인으로 규정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새삼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청부 살인자로 살며 거리낌 없이 사람들은 죽인 474번, 죽어가는 무언가를 지켜보며 호기심을 충족하던 윤, 증오하는 누군가를 죽이고야 만 신해경 등 저마다 이유는 있었지만, 교도소에 있는 사람은 474번뿐이었다. 윤의 동료와 474번의 상담 치료를 위해 교도소로 온 안은석 목사, 그리고 결말의 여러 단체까지 등장한 여러 캐릭터의 면면을 보면 저마다의 마음속에 악이 도사리고 있는 건 같았다. 그 악을 바깥으로 끄집어내 살인을 저질렀는데도 오직 한 사람만이 죄가 밝혀져 사형수가 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게 뭔가 모순적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사형 제도에 찬성인 입장이지만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의 부조리함을 보고 있으니 악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경계가 확실한 악도 있지만, 이 소설 속에 등장한 여러 캐릭터처럼 모두에게 악이 존재하면서도 그 악이 바깥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모호함이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사형 당하러 들어온 사람을 사형시키는 것이…… 뭐, 그 방법밖에 없겠지만 무력하군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모두가 합심하여 살인을 저지른 죄인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는 것 같아요. 마치 공범같이 말이죠. 죄를 짓고 그에 합당한 벌을 집행하는 게 법과 교도소의 존재 이유라면 이유일 텐데 이 경우엔 모두가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돕고 있는 셈이죠. 뭔가 속고 있는 것 같아요. - P93

그러니까 그는 누군가에게 자연 같은 존재입니다. 그는 의도를 품지 않아요. 죽이고 싶어 하는 욕망도 없고 그로 인해 얻는 쾌감도 원치 않아요. 그는 그냥 죽입니다. 그는 미워하는 사람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도 없어요. 따라서 복수도 없고 오해도 없지요. - P28

윤은 474번의 내면을 훔쳐보고 싶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지켜보고 싶었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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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여왕과 공주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Cha Tea 홍차 교실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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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PC주의다 뭐다 해서 어린이들이 보는 만화나 동화의 공주들이 내가 어릴 적에 본 공주들과는 조금 다르기도 한 모양이다. 가깝게 지내는 이들 중 여자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최근 몇 년 동안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봤을 때 달라진 걸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출판사에서 협찬을 받아 읽게 된 책은 현재까지도 입헌군주국을 유지하고 있는 영국의 여왕과 공주를 소개하고 있다. 1600년대 중후반에 영국을 통치한 찰스 2세의 왕비 브라간사의 캐서린을 시작으로 2022년에 타계한 엘리자베스 2세까지 여러 여왕과 왕비, 그리고 공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아는 사람은 다 알듯 왕실의 족보는 굉장히 복잡했다. 왕세자와 결혼을 약속했다가 왕세자가 급서하는 바람에 갑자기 왕위 계승권자가 된 차남과 결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독일 편 외전으로 소개한 팔츠의 조피는 후작 게오르크 빌헬름과 결혼을 약속했다가 천연두에 걸려 미모가 상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파혼을 당하고 동생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했다. 이후 빌헬름과 팔츠의 조피의 관계가 나빴던 건 당연했다. 팔츠의 조피의 아들이 빌헬름의 딸과 결혼하는 근친혼이 이어졌어도 여전히 서로를 냉대했다는 점이 인간다워서 재미있다가도 씁쓸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영국 왕실은 독일 유래의 가명인 작센코부르크고타가를 왕궁인 윈저성의 이름을 따 윈저가로 개칭했다. 보수적인 측면이 강한 왕실에서 유서 깊은 가문의 이름을 전쟁으로 인해 바꾼 건 신의 한 수였다고 보였다.

영국의 여왕과 왕비, 공주 등은 근대에 이르러 보수적인 성향에서 벗어나며 대외적인 활동을 활발히 하기도 하는 변화를 일으켰다.



내게는 옛 시대의 여왕이나 공주보다 뉴스에서 종종 접해서 익숙한 엘리자베스 2세와 다이애나 왕세자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자유분방했던 다이애나의 삶은 알고 있는데도 씁쓸했고, 영국 왕실 최초로 재위 70주년인 ‘플래티넘 주빌리’를 기념하고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가 국방의 의무도 이행했다는 사실을 알고 좀 놀랐다.




영국 왕실에 대한 책을 거의 안 읽어서 족보가 어질어질했지만 책을 읽으며 대략적인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여성의 삶이 그늘져 있었고 왕족이라도 크게 다를 바는 없었지만, 점점 변화하는 부분이 눈에 들어와 흥미로웠다. 그저 왕의 아내, 공주인 줄로만 알았던 그녀들의 삶을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좋았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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