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사람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해 이틀 전, 스웨덴의 어느 조용한 도시에서 인질극이 일어난다.
은행 강도는 스키마스크를 쓰고 은행에 들어가 6천5백 크로나(약 80만 원)를 요구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은행은 현금이 없는 은행이었다. 그 사실을 은행원에게 들은 은행 강도는 당황한 채 은행을 빠져나가다 경찰이 오는 소리에 놀라 가까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건물에서는 새해 이틀 전에 어울리지 않게 아파트 오픈하우스가 열리고 있었다. 스키마스크를 쓴 채 권총을 들고 현관에 들어선 은행 강도는 아파트를 사기 위해 구경을 온 여덟 명의 사람들을 얼떨결에 인질로 붙잡게 된다.

짐과 야크는 부자 관계이면서 같은 경찰서에서 일하는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자주 뜻이 맞지 않았는데, 이번에 벌어진 은행 강도 인질 사건 역시 삐거덕댔다. 은행 강도가 인질들을 무사히 풀어준 후, 아파트에 들어간 그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은행 강도를 찾기 위해 인질들을 한 명씩 불러 조사를 시작한다.



아파트 오픈하우스에서 일어난 인질극 사건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은행 강도가 왜 은행을 털려고 했는지, 그것도 인생을 역전할 만큼 어마어마한 금액이 아니라 고작 100만 원도 안 되는 돈을 필요로 했는지 먼저 밝혀졌다. 이후에는 인질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은행 고위 간부인 사라, 은퇴한 부부인 로게르와 안나레나, 임신한 율리아와 로 부부, 딸 대신 집을 보러 온 아흔 살의 에스텔과 뭐든 해주는 회사의 대표 레나르트, 그리고 부동산 중개업자가 있었다. 이들 외에 경찰 부자인 짐과 야크의 이야기가 등장했고, 사라의 심리 상담을 맡은 나디아 또한 한편에 등장했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너무나 많아서 헷갈릴 줄 알았는데, 본격적인 소설이 시작하기 전에 간략한 등장인물 소개가 있었고 워낙 개성이 강한 캐릭터들이라 인물들을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었다.

소설은 인질극이 벌어지는 시점과 각 인물들의 과거 회상 시점, 그리고 인질들이 풀려난 뒤 신문하는 경찰의 시점이 있었다. 그리고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깊은 연관이 있었던 다리 위에서 투신한 남자와 관련된 사건도 종종 등장했다.
보통 등장인물이 많고 개개인의 사연까지 세세하게 이어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소설은 각자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알고 싶었을 만큼 그들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여러 사건과 현재, 과거를 오가는 시점의 소설이었지만 그렇게 정신없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작가의 역량 덕분일 것이다. 각 캐릭터에 부여한 사연이 어찌나 좋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가진 편견, 선입견을 완전히 깨부수는 뜻밖의 캐릭터들이라 여러 번 놀랐다. 은행 강도부터 시작해서 로와 율리아 부부의 관계도 놀라웠고, 은퇴한 부부인 로와 안나레나 역시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한 충격을 줬다. 할머니 에스텔의 거짓말은 예상되는 부분이긴 했으나 그 또한 뭉클함을 안겼다. 그리고 경찰 아빠 짐은 너무나 따뜻한 사람이라 후반에 눈물이 나게 만들었고, 사라와 나디아의 관계나 야크의 과거 인연까지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게 밝혀져 소소한 충격을 줬다.

이렇게 캐릭터들에게 어울리는 과거 이야기를 부여한 작가는 인질극이 벌어지는 아파트 내에서의 상황을 통해 웃음과 감동을 줬다. 프레드릭 배크만 작가 특유의 웃음 포인트는 어김없이 이 소설에서도 등장했고, 언제나처럼 읽으면서 미소 짓게 만들었다. 제일 웃겼던 부분은 갑자기 인질이 된 사람들과 원치 않게 은행을 털게 됐는데 어쩌다 보니 인질까지 잡게 된 은행 강도였다. 다른 장르 소설이었다면 이들의 관계는 극도의 긴장감을 느끼게 만들었을 테지만, 언제나 따뜻하고 뭉클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의 소설이라 다소 허술한 면이 관계를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해 웃음을 줬다.
새해 이틀 전에 일어난 인질극이라는 기이한 사건이 등장인물의 마음을 허물어지게 만들었는지 서로에게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둔 이야기를 들려주며 감동을 줬다. 등장한 캐릭터들 모두 어른이었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심지어 거의 아흔 살이나 된 에스텔 할머니마저 이상적인 어른 같은 삶을 살지 않았다. 이런 점으로 인해 각 캐릭터가 들려주는 고민들에 공감하게 만들었고, 자연스럽게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이었기에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찾아보니 국내에 출간된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과 1권의 에세이까지 모두 읽었다. 매번 책을 찾아 읽게 만드는 이유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작가의 초기 소설은 얄미운 캐릭터가 알고 보니 너무나 좋은 사람이라는 반전 요소로 감동을 줬는데, 이후 여러 소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며 희망적인 결말로 감동을 줬었다. 작가의 소설은 뻔하지 않은 매력이 있어서 정말 좋다.
이 소설 또한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왠지 좋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는데, 역시나 푹 빠져서 읽고 말았다. 심지어 소설 후반에는 어김없이 눈물이 나려고 해서 꾹꾹 눌러 참았을 만큼 감동적이었고, 중간중간 위트 있는 상황도 즐거워서 너무 좋았다.
역시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건 은행 강도, 아파트 오픈하우스, 인질극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보다는 바보들에 대한 이야기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닐 수도 있다. - P151

"당신은 은행 강도로서 실력이 좀 별로야!"
그 말에 은행 강도는 권총을 흔들며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당신 입장에서는 다행이잖아!" - P194

"나는 당신이 이 집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당신이 마음에 들었어요. 권총이랑 뭐 그런 걸로 살짝 난장판을 만들긴 했지만 세상에 난장판 한번 안 만들어본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 P435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심지어 사람조차 바꿀 수 없을 때도 많지. 조금씩 천천히가 아닌 이상. 그러니까 기회가 생길 때마다 어떻게든 도우면 돼.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리면서. 최선을 다해. 그런 다음…… 그걸로 충분하다고 수긍하고 넘어갈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지. 실패하더라도 그 안에 매몰되지 않게." - P292.2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리즘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초등학교 교사 야마우라 미쓰코가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다. 처음엔 자살이라 여겼지만, 조사 결과 유리창이 유리칼로 잘려있었고 두 조각이 비어있던 초콜릿에서 수면제가 검출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녀의 위에서도 수면제가 나왔다. 유리창을 보면 강도 소행인 것 같지만 집에 누군가가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다만 그녀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골동품 시계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기에 경찰은 면식범의 우발적 범행일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수사를 시작한다.

이 사건은 당연히 그녀의 학교에 가장 먼저 알려졌고, 수업 시간이 되어도 선생님이 오지 않아 이상하게 여긴 반 학생들이 그다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후 야마우라 미쓰코의 사건을 그녀가 담당하는 5학년 반 학생 신지와 친구들, 동료 교사 사쿠라이, 그녀가 대학 때 만나던 남자 이즈쓰, 그리고 그녀가 가르치는 학생의 학부모이자 만나던 남자가 차례로 추리를 해본다.



젊고 예쁘고 다정한 선생님이 죽었다. 알고 보니 살해를 당한 것 같다. 의문스러운 마음이 든 신지가 앞자리 친구 시바노와 똑똑한 반장 야마나, 그리고 야마나와 친하게 지내는 무라세와 함께 추리를 하는 모습으로 본격적인 사건에 접어들었다.
사실 5학년 아이들이 사건에 대해 조사를 한다고 했을 때 너무 어린아이들이라 뭔가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책이나 애니메이션에서 본 것을 흉내 내며 탐정 놀이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네 명의 아이들 사이에 단연 똑똑하고 냉철한 야마나가 있었기 때문인지 의외로 날카로운 면이 종종 드러나 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본 시선에 충격을 준 셈이었다.

아이들은 야마우라에게 초콜릿을 선물로 준 난조 선생과 몰래 사귀었다는 사쿠라이 선생이 복수를 한 것이라 결론냈었다. 그리고선 아이들의 시점은 끝이 났고 바통을 사쿠라이가 이어받았다. 이전에 읽은 추리 소설과는 전혀 다른 진행 방식이 새로웠다.
사쿠라이의 시점을 읽으면서 이 소설은 범인을 찾는 게 아니라 살해당한, 혹은 사고사일지 모르는 야마우라가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 얼마나 다른 얼굴을 보여줬는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본 야마우라 선생님은 친절하고 예쁜 사람이었다. 그녀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많았을 만큼 돋보이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동료 교사 사쿠라이의 입장에서 본 야마우라 역시 아이들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너무 착하고 예뻐서 상대적으로 자괴감이 들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사쿠라이는 순간적으로 야마우라가 죽어서 이제는 안 봐도 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못난 생각을 바로 반성하고 사죄하기 위해 범인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였긴 하지만 말이다.
야마우라 미쓰코가 학교에서 보인 모습이 천사와 같았다면, 사귀는 남자에겐 완전히 팜므파탈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게 반전이었다. 대학 때 만난 이즈쓰는 그녀와 헤어진 지 좀 되었고, 현재 만나는 여자친구도 있었지만 미쓰코에게서 벗어나질 못했다. 미련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쿠라이는 그가 야마우라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시점의 주인공은 존재만으로도 충격을 안겼다. 학교 교사가 가르치는 반 학생의 아빠와 내연관계라니 너무 놀라웠다. 처음에 아이들의 시점으로 진행될 때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모습이라 반전이라고까지 느껴졌다.

여느 소설과는 달리 범인이나 반전에 포인트를 두지 않고, 한 사람의 여러 얼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프리즘이라는 소설의 제목을 아주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미쓰코를 완벽하게 파악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미쓰코는 때로는 다정했고 때로는 오만했으며, 때로는 풍부한 지성을 자랑했고 때로는 제멋대로였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미쓰코는 만날 때마다 다른 사람 같았다. - P245

도대체 누가 미쓰코를 죽였을까. 죽기 전에 미쓰코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는 나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다만 어렴풋이 미쓰코를 죽인 사람은 남자일 것이라는 감이 들었다. 한 번이라도 미쓰코의 매력에 사로잡힌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반드시 미쓰코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감정을 품기 마련이니까. - P1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량한 이웃들 - 우리 주변 동식물의 비밀스러운 관계
안드레아스 바를라게 지음, 류동수 옮김 / 애플북스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일 정원도서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저자의 책을 읽게 됐다. 원예학자로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과 동물, 곤충에 대해 말하며 잘못된 상식으로 퍼진 것들을 정정해 주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식물을 잘 키우는 방법, 동물이나 곤충을 죽이지 않고 자신의 마당에서 떠나게 하는 방법 등 또한 소개하고 있었다.






 

저자가 독일인이라 공감되는 부분이 없을 줄 알았으나 처음 들려준 이야기부터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만들었다. 무당벌레의 등에 난 반점으로 나이를 알 수 있다는 뜬소문이었다. 나도 어렸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외국에서도 도는 이야기인가 보다 싶어서 괜히 재미있었다.
무당벌레 등의 반점은 종에 따라 다르며 최소 두 개이고, 스무 개가 넘는 종도 있다고 한다. 독일에는 점 두 개와 일곱 개의 종이 가장 많다고 한다. 나는 다섯 개나 일곱 개 반점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는데, 우리나라에는 어떤 종이 가장 많을지 궁금해졌다.
꿀벌은 벌집 한 칸 안에서 살아가는지에 대해 말하던 단락은 아파트처럼 칸칸마다 벌이 살고 있는 삽화나 애니메이션을 본 기억 때문에 궁금했는데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않아서 아쉬웠다.

수컷 새들이 종족 번식을 위해 알록달록 예쁘고 고운 깃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자신의 몸을 지킬 수단이 없는 종류의 새는 적들의 눈을 피해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볼품없는 색을 타고난다고 한다. 알을 품고 새끼를 키워야 하는 암컷 새 역시 화사한 깃털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공작새를 집 마당에서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은 예상외로 그렇다는 답이라 좀 놀랐다. 다른 새들과는 다르게 자연에서 볼 수 없고, 동물원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종이라서 키울 수 없을 거라고 단정 지었었다. 그런데 공작은 생긴 것과 달리 강인하고 적응 능력이 뛰어나서 넓은 땅이 있다면 어렵지 않게 키울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까탈스럽게 생겼는데 춥지만 않으면 잘 적응하고, 먹이도 알아서 찾아 먹는다니 좀 의외였다. 다만 공작의 울음소리는 귀를 찌르는 소음이라 이웃과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끝을 맺었다.




 

아파트에서는 그럴 일이 드물 테지만 주택에 종종 둥지를 튼 새에 대해 말하고 있었고, 유리창으로 돌진해 목숨을 잃는 새에 관한 현실적인 문제 역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말하는 작가의 사려 깊음이 와닿았다. 참고로 유리창에 돌진하는 새를 막기 위해서는 밝고 어두운색이 교차되는 띠 모양이 가장 적합하다고 한다. 또한 새들은 오렌지색을 가장 잘 인식한다고 말했다.

말벌에 쏘였을 때 도움이 되는 방법, 어떤 벌레가 익충인지 해충인지 말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 비가 오면 땅에 기어 다니던 지렁이를 반으로 잘랐을 때 두 마리가 될까 하는 질문도 궁금했던 건데 이 책을 통해 해소되었다. 그리고 주택에서 사는 사람들을 위해 정원에 찾아오는 곤충과 야생 동물을 폭력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떠나게 하는 방법도 소개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워낙 공동 주택이 발달되어 있어서 실생활에 유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흥미로웠다.



아기자기한 삽화를 곁들여 여러 질문을 통해 궁금증을 해소하게 만든 책이었다. 식물을 키우는 정원을 통해 곤충, 동물과 함께 공존하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어서 유익했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금 비늘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다를 면한 별어마을에서 배를 타고 가면 나오는 섬 백어도에는 순하의 어머니 정심이 묻혀있다. 아버지에게 살해당하던 어머니가 곁에서 지켜보던 아들 순하에게 피를 쏟아내며 유언으로 남긴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기일이 아니어도 좋으니 1년에 한 번만이라도 가족 모두 자신을 보러 백어도에 와달라고 했다. 오지 않으면 뭍으로 보러 가겠다는 무서운 말까지 남겼기에 순하는 교도소에 간 아버지, 서울로 올라간 누나 대신 어머니를 백어도에 묻었다.
하지만 유언은 3년 동안 지켜지지 못했고, 4년째 되던 해에 조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마을 사람이 정심의 무덤 위에 하얀 형체가 떠있는 걸 목격한다. 그 사건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순하를 설득해 정심의 무덤을 이장하기로 한다. 마을 남자들이 모두 모여 백어도에 있는 정심의 무덤 뚜껑을 열었을 때, 순하는 어머니의 몸이 새하얀 비늘로 덮여있는 걸 보게 된다. 곁에 있던 사람들도 보고 깜짝 놀라자, 순하는 이장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바꾸며 무덤 뚜껑을 덮으려고 했다. 그때 어머니의 손에 덮여있던 하얗고 날카로운 비늘 몇 개가 순하의 손에 쥐여졌다. 마치 어머니가 주는 것인 듯 말이다.

용보는 마리를 처음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그래서 만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 청혼을 했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마리는 용보의 청혼을 받아들이며 새하얀 비늘을 하나 주었다. 용보와 결혼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고 하며, 자신이 준 이 하나 외에 다른 것을 탐내면 큰일이 난다고 경고를 했다. 용보는 당연히 귓등으로 들으며 알겠다는 대답을 했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고 딸 섬이 태어난 뒤, 용보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다. 그러던 중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심하게 훼손된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보다가 '백어석'을 언급하는 걸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마리에게 청혼했을 때 용보가 받은 게 바로 백어석이었기 때문이다. 희귀한 백어석은 부르는 게 값이라는 걸 알게 된 용보는 마리가 벽화를 그릴 때 재료로 쓰는 그것을 훔쳐 소금 사업을 하는 친구 준희에게 팔아 엄청난 돈을 손에 넣는다.



인어에 대한 이야기는 안데르센의 <인어공주>가 가장 유명하다. 왕자님을 보고 첫눈에 반해 마녀에게 목소리를 주는 대신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는 그를 만나기 위해 육지로 나가게 된다. 하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인어공주는 왕자에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결국 그는 다른 나라 공주와 결혼하는 바람에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인어공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럽의 인어 설화 '운디네'는 새드 로맨스라기보다는 스릴러 느낌을 준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인어공주보다는 운디네가 더 많이 떠올랐다.

소설에서 인어 대신 백어라 불린 존재는 온몸이 소금 비늘로 덮여있었다. 그들은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곤 했는데, 물에서 나와 처음 보게 된 남자를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그 남자를 따라갈 땐 자신의 소금 비늘 한 개를 징표로 주면서 말이다. 이 소금 비늘은 오묘한 빛을 내 계속 보게 되면 홀리게 만드는 묘한 성질이 있었다. 그래서 백어석을 계속 보면 자연스레 탐하게 되고, 백어의 비늘을 훔치면 큰 화를 당한다.
순하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살해를 당한 것도 그를 죽이지 않으려다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용보 역시 마리의 백어석을 훔치기 시작하면서 나쁘지 않던 인생이 내리막길로 기울었고, 나중엔 마리가 그를 죽일 수 없어 떠났는데도 찾아가고 만다.
사람을 홀리는 빛을 내는 소금 비늘, 부르는 게 값인 백어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건지 체감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그런 걸 테지만, 소설 속에 등장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저도 모르게 홀리게 된 걸 보면 굉장한 물건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이 백어석으로 인해 앞으로 모든 사건이 일어날 거란 사실도 확실했다.

소설은 어머니의 무덤을 열어본 뒤에야 자신이 백어의 자식이라는 걸 깨달은 순하와 인간과 사는 걸 택했지만 자신의 비늘을 탐낸 용보를 떠나는 마리, 그리고 용보와 마리를 소개해 준 준희의 시점을 오갔다.
자신의 비늘을 훔친 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백어의 운명을 타고난 마리가 뒤늦게 자신이 백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하가 만나 보여주는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이어져 애틋한 분위기까지 느껴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외롭게 살아온 존재였기에 둘의 인연이 이대로 끊어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용보는 탐욕스러움이 짙어져 제발 마리를 붙잡지 않기를 바랐는데, 백어석에 홀린 탓인지 떠난 마리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준희가 말리고 또 말렸지만 말을 듣지 않으며 죽음의 가장자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실 용보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별로 좋게 본 캐릭터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과응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겉으로는 냉정한 척하던 준희가 마지막에 제 속셈을 드러내는 걸 보며 그게 백어석의 환영인지 아니면 그의 진심인지 헷갈렸었는데, 역시나 용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백어라 불리는 인어와 인간의 탐욕을 결합한 독특한 판타지 미스터리 소설이었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로 인해 그동안 갖고 있던 인어에 대한 애틋한 이미지를 이 소설이 조금은 무시무시한 것으로 바꿔놓았다. 설정이 흥미로워서 재미있게 읽었다.



​​​​​​​

"백어의 비늘은 백어가 처음 한 번만 주는 거야. 그것만 행운이고 나머지는 전부 불운을 가져오지. 백어의 비늘을 훔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화가 난 백어가 자기 비늘로 소금 도둑의 목을 뎅강 잘라." - P63

인어가 사람이 되려면, 혹은 사람으로라도 환생하려면 먼저 영혼을 얻어야 해. 그 영혼을 얻는 데는 조건이 있어.
사랑, 모든 저주를 풀 마법의 열쇠.
그래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모든 이야기는 사랑을 얻거나 얻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 그 아이는 얻지 못했어. 공기와 함께 기약 없이 떠돌던 그 아이는 훗날 후회한다고 말했지. - P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틀 아이즈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엄지영 옮김 / 창비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날부턴가 반려 동물 로봇 '켄투키'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300달러에 가까운 금액에도 켄투키를 구입해 '주인'이 되거나 연결 암호 카드를 사서 켄투키가 '되기'를 바란다.
동물도 아니고 로봇도 아닌 켄투키가 인기를 끈 재미있는 요소는 눈에 달린 카메라로 켄투키를 조종하는 사람이 켄투키를 구입한 사람의 모든 생활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켄투키를 구입한 사람은 먹이를 줄 필요도 없고 배설물을 치우거나 목욕을 시키지 않아도 되고, 산책을 시킬 필요도 없는 반려 동물 로봇이 생겨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외로움을 덜기 위해 켄투키와 의사소통을 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는 주인도 있었다.

이렇게 켄투키가 어느새 사람들의 일상에 자리 잡았을 때 켄투키를 소유하거나 켄투키가 된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을 완전히 뒤흔들 사건을 겪게 된다.



켄투키가 된 사람은 이 로봇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파악했을 테니 켄투키를 구입하는 대신 연결 암호 카드를 샀던 것일 테고, 켄투키의 주인이 된 사람은 삶에 대한 결핍으로 인해 소유하는 것을 택했다. 충동적으로 구매한 알리나와 같은 몇몇 사람은 제외하고 말이다.

소설 초반을 읽어나가면서 켄투키에 대한 이런 설정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무렵, 이 반려 동물 로봇에 대해 든 생각은 단 하나 관음증이었다. 켄투키가 된 사람은 물론이고 소유한 사람까지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메라가 달린 눈으로 일상의 모든 것을 타인이, 그것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성별과 연령대마저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본다고 생각하니 너무 소름이 끼쳤다. 심지어 어떤 켄투키는 주인이 샤워를 하는 모습까지 훔쳐보려고 했고 유사 성행위를 시도하려고도 했기에 역겹기까지 했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쪽은 켄투키가 된 사람이었으나 켄투키를 산 사람 역시 이해가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소설은 몇몇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는 보통 소설과는 다르게 옴니버스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켄투키가 되거나 소유한 사람이 여럿 등장했고, 켄투키를 사업에 이용하려는 사람도 하나 있었다. 여러 사람이 켄투키와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긴 해도 몇몇 사람은 고정적으로 등장했다. 예술가 남자친구와 예술가 마을에서 권태롭게 지내는 알리나, 홍콩에 사는 아들이 켄투키 연결 암호 카드를 사서 보내준 덕분에 예쁜 독일 여자의 일상을 엿보게 된 페루의 나이 든 여자 에밀리아, 바쁜 아빠와 가정부만 있는 집에서 엄마를 그리워하다 노르웨이의 켄투키 용이 되어 눈을 만지러 떠나고 싶은 과테말라 소년 마르빈이었다. 그리고 랜덤으로 연결되는 켄투키의 특징으로 사업을 하게 된 그리고르도 있었다.
이들의 시선으로 켄투키가 되거나 켄투키를 바라보는 입장을 번갈아가며 보여줬고, 덕분에 켄투키의 장단점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켄투키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켄투키의 장점을 보여주기도 했다. 켄투키의 카메라로 지켜보던 사람이 갑자기 주인이 쓰러지자 신고를 해 목숨을 구해준 일이 있었다. 이 사건 이후에 일어난 또 다른 사건은 안타까운 끝을 맞이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여러 대의 켄투키로 사업을 하는 그리고르는 어떤 켄투키를 통해 세상을 보다가 납치된 소녀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해 목숨을 구해줬다. 하지만 이 사건 역시 안타깝게도 끝이 좋지 않았다.
켄투키의 설정에 대해 파악됐을 때부터 예상했던 대로 장점보다는 단점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래서 읽는 동안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만약 우리의 현실에 켄투키가 존재한다면 나는 절대, 죽어도 켄투키는 근처에도 두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켄투키를 소유하는 것은 물론이고 켄투키가 되고 싶은 마음조차 없다. 누군가가 내 삶을 엿보는 것만큼이나 누군가의 삶을 훔쳐보는 짓은 도무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통해 사람들이 숨기는 민낯을 본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내내 불쾌감이 들어 뒷맛이 씁쓸한 소설이었다.

켄투키의 "주인"이 기기를 구매한 뒤 처음 충전할 땐 무엇보다 "주인으로서의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켄투키가 중앙 서버에 연결되고 다른 사용자, 즉 다른 곳에서 켄투키가 "되기"를 원하는 누군가와 연결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중략)
그녀는 켄투키가 다른 사용자 "존재"의 명령을 받아 자동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직접 켄투키를 켜거나 끌 수는 없다는 건가? - P35

주인이 되는 것과 켄투키가 되는 것의 장단점을 두고 다들 이런저런 말들을 해댔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사생활을 드러내 보이려는 사람은 드문 반면, 다른 이의 삶을 엿보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 P1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