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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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런던에서 지내던 록우드는 히스클리프의 집 '드러시크로스'를 당분간 빌려 살기 위해 언덕 위에 있는 그의 또 다른 집 '워더링 하이츠'를 방문한다. 그와 계약을 맺은 록우드는 날씨가 좋지 않은 날 우연찮게 워더링 하이츠에 머물게 되는데, 그 집의 어느 방에서 캐서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쓴 글을 발견한 뒤 유령 비슷한 걸 목격한다.
이후 드러시크로스로 돌아온 록우드는 심한 몸살이 걸려 자리에 눕게 된다. 그러다 드러시크로스에서 집안일을 봐주는 딘 부인이 아주 오래전에 워더링 하이츠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녀에게 옛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수십여 년 전.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 언쇼 씨는 리버풀에 갔다가 집시처럼 까만 아이를 데리고 와 죽은 아들의 이름을 따 히스클리프라 부른다. 히스클리프를 보자마자 아들 힌들리는 싫은 기색을 내비쳤고, 딸 캐서린은 짐짓 무심한 척하다가 이내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된다.
이후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관계는 남녀 사이의 단순한 사랑이라고 표현하기에 부족한 격정적이며 폭풍과도 같은 애정과 미움을 갖게 된다.



15~16년 전에 두 달여 동안 읽었던 이 책을 최근에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다시 읽게 되었다. 처음 읽었을 때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언젠가 다시 읽으려고 다짐했던 책이었는데, 첫 독서의 기억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여태껏 미루고 있었다. 그래도 영화를 챙겨본 덕분에 잊지 말고 책을 꼭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은 그들의 시점이나 전지적 시점으로 진행된 게 아니라 곁에서 두 사람을 오랫동안 지켜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던 가정부 딘 부인의 입으로 전달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드러시크로스 저택을 빌려 살게 된 덕분에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에 대해 궁금해진 록우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말이다.

어렸을 적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처음 만나게 된 건 평범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서로에게 편견 없이 다가갈 수 있었다. 캐서린의 오빠 힌들리는 그래도 머리가 굵어졌다고 히스클리프를 천대하며 하인을 부리듯 했지만, 캐서린은 또래 친구로 여기고 가깝게 지냈다. 그러는 사이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었으나 한 집에서 남매처럼 지내왔기에 그런 감정을 깨달을 새가 없었다.
마침 드러시크로스에 이사를 온 에드거 린튼으로 인해 히스클리프는 질투라는 감정을 느끼고, 그처럼 용모를 단정하고 깨끗이 하여 캐서린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먹는다. 반면에 캐서린은 조금 변덕스러운 소녀였던 터라 새롭게 만난 친구인 에드거에게 단번에 빠져들었고, 그의 청혼을 깊이 고민해 볼 사이도 없이 받아들이게 됐을 땐 히스클리프에 대한 마음을 깨닫고 만다. 이 사건이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고, 청혼을 받아들였다고 했을 때 히스클리프는 워더링 하이츠를 떠났다.
사실 히스클리프와 에드거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다르다고 말하는 캐서린을 조금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는 게 당연하지만 캐서린이 말하는 사랑은 이기적인 것으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히스클리프의 자유를 위해 에드거를 이용하려던 마음이 특히 마음에 좋지 않게 남았다. 이로 인해 몇 년이 흘러 히스클리프가 다시 워더링 하이츠로 돌아왔을 때 결혼한 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놓아주질 못했다. 죽어서도 말이다. 히스클리프에겐 악만 남아 모든 걸 제 손에 쥐겠다는 과욕만을 부렸다.

초중반까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캐서린의 죽음으로 끝이 나버렸고, 이후엔 캐서린이 낳은 딸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와 에드거의 동생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난 린튼, 그리고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의 복잡한 관계가 이어졌다. 이 세 사람의 관계는 부모들에게서 이어져 내려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확히는 히스클리프의 욕심으로 인해 마구잡이로 휘둘린 가련한 아이들의 고난이 이어졌다.
아이들은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모양인지, 딸 캐서린은 린튼과 흡사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도 되는 듯 둘만의 애절한 사랑을 하다가 뒤늦게 캐서린이 진실을 깨닫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캐서린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던 헤어튼은 워더링 하이츠의 원래 상속자였지만, 제 아버지로 인해 히스클리프의 하인 노릇을 하고 있었기에 서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뒤늦게 깨달은 캐서린의 똑부러지는 성격 덕분에 모든 게 원래 자리로 돌아갔고, 비극적인 사랑이 대를 잇지는 않게 되었다.

처음 읽었을 때보다는 당연히 훨씬 빨리 읽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머릿속에도 잘 들어왔다.
그럼에도 이들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너무나 지독하고 집착적이며 파괴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어떤 건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랑을 잘못 배운 이들로 인해 그들의 아이들까지 불행해질 뻔했다는 게 참 안타깝다. 다행히도 그런 비극이 이어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저이는 잠시 동안이라도 나를 가엾게 여겨 살리려고 하질 않아. 내가 받은 사랑이란 저런 것이야. 하지만 괜찮아. 저런 것이 나의 히스클리프는 아니니까. 나는 그래도 나의 히스클리프를 사랑할 것이고, 저승까지도 데리고 갈 거야. 그는 내 마음속에 있으니까." - P216

by. 캐서린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돼서 나무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세월이 흐르면 그것도 달라지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애정은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에 있어.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그도 그저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야." - P136

by. 히스클리프
"난 그녀가 죽은 뒤로 미치광이처럼 밤낮으로 늘 그녀가 내게 돌아오기를 빌었어. 영혼이라도 돌아오라고 말이야." - P480

by. 캐서린의 딸 캐서린
"히스클리프 씨, 당신은 아무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아무리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아저씨의 그 잔인한 성격은 아저씨가 우리보다 훨씬 비참하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풀려요. 아저씨는 비참해요, 그렇지 않아요? 악마같이 외롭고 시기심이 많은 거죠. 아무도 아저씨를 사랑하지 않아요. 아저씨가 죽어도 아무도 울어주지 않을 거예요! 저는 아저씨처럼 되진 않을 거예요!" - P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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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클럽
팀 피츠 지음, 정미현 옮김 / 루페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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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산에 거주하는 중년의 소설가 홍원호는 고향 거제도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형 수호에게 연락을 받는다. 형은 집에 와 보라고 하며, 어머니가 바람을 피운 아버지와 이혼을 하시겠다고 집을 나가 무주 이모네에 가고 계신다고 했다. 아버지의 바람기는 거의 습관 같은 거라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았기에 굳이 가야 하냐고 물었지만, 이번에는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결정적 증거가 되는 망측한 종류의 그런 사진을 말이다.
원호는 마감을 코앞에 두고 있음에도 글이 잘 써지질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해외 출판사에서 그를 닦달해댈 거라는 생각에 거제도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고민을 하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향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은 여전했다. 누군가를 먹이는 일에 온 힘을 쏟아붓는 어머니,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되고도 남았지만 아버지 때문에 인생을 망친 수호 형, 원래의 얼굴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성형에 열정적인 여동생 부담이, 그리고 부담이의 미국인 남편 뚱땡이 미키까지 똑같았다. 알코올중독자에 오입쟁이 아버지도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이번엔 무슨 일인지 원호를 데리고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예전과 달랐다.
거제도 집에 가지 않으려 했던 원호가 어쩔 수 없이 고향을 찾았을 때 오랜만에 가족과 마주한 장면을 보고서 왜 그렇게 가기 싫어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싫은 구석이 있기 마련인데, 원호의 가족은 그냥 그 자체로 싫은 구석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이곳에 불러들인 형이나 아버지가 숱하게 바람을 피웠는데도 그 양반 끼니 걱정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싫었다. 그런가 하면 여동생 부담이가 자꾸 성형을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부담이의 남편 미키가 자신의 책을 가지고 사업을 할 계획을 짜고 있는 건 공연히 밥숟가락을 얹으려는 것 같아 끔찍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 원래부터 싫었던 아버지는 원호를 어떻게든 배에 태워 고기를 낚으러 가려고 했으니 거제도에 괜히 왔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싫은 가족들과 마주한 와중에 소설은 어느 순간부터 제목처럼 술 냄새를 풀풀 풍겨댔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원호는 어머니가 직접 빚은 막걸리를 그렇게 좋아했다. 비법으로 고구마를 넣은 막걸리가 자신의 속을 달래준다 여겼고, 슈퍼에서 파는 막걸리는 입맛을 버린다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삼 남매의 아버지는 소주를 그렇게 좋아했다. 친척뻘 되는 문씨 아저씨와 베프인 아버지는 로즈버드 다방에서 종업원들과 소주를 마셨고, 2차로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며 추태를 부렸다. 소설의 끝부분에 다다를 때까지 막걸리와 소주가 도배되다시피 해서 책을 읽는 동안 알코올 냄새가 느껴지는 듯한 묘한 경험을 했다.

금방 부산 집으로 돌아가려던 원호의 뜻이 무산된 후 거제도에 계속 머물게 되면서 주된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문씨, 임씨 아저씨와 배를 타고 고기를 낚으러 가는 계획에 원호가 무조건 포함되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던 것이다. 싫다는데 왜 그렇게 배에 태우려고 하는 걸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가뜩이나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던 아버지라서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원호는 어쩔 수 없이 배를 타게 됐고, 그로 인해 아버지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됐다. 뭍에서는 맨날 술에 절어서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가 바다에서는 고기잡이에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준 것이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원호의 아버지가 여태 해온 짓이 꼴사납고 추하게만 보였기에 그럼에도 좋은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지만, 원호는 그래도 아버지였기에 일정 부분 이해하고 싶었던 듯했다. 늙은 아버지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렇게라도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소설은 미국 작가가 쓴 한국 소설이라는 점에서 독특하게 다가왔다. 마치 한국 작가가 쓴 한국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제도를 배경으로 막걸리와 소주 냄새를 풍기며, 가정 내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그렸고, 그들의 자녀들을 통해 다분히 한국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신기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바람을 피우는 아버지나 소설 끝부분에서 원호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불편한 기분이 들어 그리 와닿지 않았지만, 색다른 독서 경험을 한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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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아버지를 좋아했던 적이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존경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바닷가 바위 위에서 한순간 가슴속에 어떤 날카로운 통증 같은 것이 밀려왔다. 밀물 썰물의 변화처럼 아버지의 행동과 처신에 일대 전환이 일어난다면 일말의 가능성이 싹을 틔울지도 모른다. 우리 관계에 커다란 전환이 생길 가능성이 저기 있는 것이다. - P188

술을 많이 마셨든 안 마셨든 상관없이 고기를 잡는 행위와 거리가 멀어질수록 아버지는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광포해졌다. 술 취한 사람의 특징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체현해냈다. 아버지의 몸은 바다와 멀어질수록, 당신이 사랑하는 것과 떨어져 있을수록 상태가 나빠졌다. 나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일면 죄책감을 느꼈다. 왜 이런 부분을 헤아리지 못했던가? 어머니는 왜 아버지를 그냥 바다에서 살게 하지 않았던가?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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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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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시 고등학교에 다니는 16살 홀든 콜필드는 퇴학을 당했다. 영어 외에 다른 과목의 성적이 낙제였기 때문이다. 홀든은 퇴학을 당한 걸 개의치 않아 했지만, 그걸 걱정하는 단 하난의 이유는 벌써 네 번째 퇴학을 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아시면 호되게 야단을 맞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다행히 퇴학을 알리는 교장의 편지가 뉴욕에 있는 집에 도착하기까지 아직 시간 여유가 있기 때문에 홀든은 잠깐 기숙사에서 지내다 짐을 빼서 돌아다닐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기숙사 룸메이트 때문에 짜증이 났고, 옆방에 사는 학생 역시 홀든이 못 견뎌하는 성격을 가진 자라 그는 한밤중에 짐을 싸서 기숙사를 나간다. 그러고선 뉴욕행 기차에 올랐고, 도착한 후에는 싼 호텔을 전전한다.
돈이 떨어지고 마침 여동생 피비가 보고 싶어 부모님의 집에 찾아가는 그 며칠 동안 홀든은 여러 사람을 만나 갖은 일을 겪는다.



16살밖에 되지 않은 고등학생 홀든이 네 번씩이나 퇴학을 당했다는 사실이 소설 초반에 밝혀졌다. 그래서 뭔가 대단히 큰 잘못을 한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성적이 좋지 않아 퇴학을 당한 것이었다. 성적이 나쁜 정도로 퇴학이라니 좀 과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홀든이 다닌 펜시 고등학교가 사립 명문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고등학생 입장에서 퇴학을 당한 건 정말로 큰일인데, 홀든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네 번째라 무뎌진 탓일 수도 있겠지만 정해진 교육 과정에 충실해야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영어 외에 모든 과목을 낙제점을 받았다니 성격도 확고해 보였고 말이다.
다만 그렇게 자유로운 성향임에도 아직은 아버지가 무서운 나이이긴 했다. 그래서 부모님이 퇴학 사실을 알게 되는 날까지 학교를 떠나 어떻게든 지내보려고 마음을 먹고 뉴욕으로 향한다.

그렇게 홀든은 며칠 동안 뉴욕에서 지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스치듯 지나간 인연 중에는 택시 기사나 호텔의 엘리베이터 보이, 콜걸 등이 있었고, 형 D. B.가 한때 만났었던 여자나 전에 다니던 학교의 선생님, 한때 친했던 친구도 있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는 홀든을 보며 아직 어린 나이인데 왜 이다지도 애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나 하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홀든이 하는 말이나 생각들은 그리 즐겁게 살지 않은 삶을 산 노인의 입에서 나올 법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온통 부정적인 생각과 말들이 홀든의 속에 넘쳐흐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형 D. B.의 행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뚜렷하게 제시했다. 작가로 글을 쓰는 형을 너무나 좋아했지만, 현재는 영화 산업에 뛰어들어 할리우드에서 지내고 있는 형은 세속적인 인간이라 여겼다. 그러면서 홀든은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보며 가짜라고 생각하며 무조건적인 비판을 했다.
이런 홀든은 부정적이었고, 염세적이었으며, 확증편향까지 가지고 있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홀든의 이 짧은 여정을 읽는 내내 불편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 같은 부담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더군다나 내가 긍정적인 편이라 그런지 모든 걸 나쁜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겨우 16살인 홀든이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주변의 환경이 홀든을 이렇게까지 만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의 고문 변호사로 일하는 아버지와 뉴욕 상류층 집안, 글을 쓰는 일을 버리고 성공을 좇아 할리우드로 간 형, 그리고 사랑했던 남동생이 어린 나이에 백혈병으로 떠난 사건 등이 지금의 홀든을 만들었다고 말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홀든은 회의적이고 염세적이며 부정적인 인간이 된 걸지도 모른다. 16살은 충분히 어린 나이지만, 환경으로 인해 성격과 인성이 확립되는 시기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게 보면 홀든은 참 안타까운 아이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만들어나간 게 아니라 타의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홀든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여동생 피비를 끔찍하게 여겼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다. 순수함의 상징인 피비를 위해 파수꾼이 되고 싶었을 만큼 말이다. 홀든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피비의 곁을 떠나는 게 최선이었지만, 피비 덕분에 홀든은 떠나지 않고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다행이다.

너무나 유명해서 손이 가질 않았던 책인데 더 이상 미루지 않기 위해 읽게 됐다. 언젠가는 읽겠다고 다짐한 책들은 간략한 줄거리 외엔 아무런 정보 없이 읽기 때문에 이 책 역시 성장 소설이라는 것만 알고 읽었다. 그래서인지 나와 반대되는 사람인 홀든의 짧은 여정을 읽는 내내 불편했고 힘들었다. 그래도 불안해 보였던 홀든이 마지막엔 우려했던 끝을 맞이하지 않았기에 안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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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들은 계속 그 자리에 두어야만 한다. 저렇게 유리 진열장 속에 가만히 넣어두어야만 한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 P165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유일하게 달라지는 게 있다면 우리들일 것이다. 나이를 더 먹는다거나 그래서는 아니다. 정확하게 그건 아니다. 그저 우리는 늘 변해간다. - P164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경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네가 그런 경우에 속하는 거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그냥 생각해 버리는 거야. 그리고는 단념하지. 실제로 찾으려는 노력도 해보지 않고, 그냥 단념해 버리는 거야.」 - P2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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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베토벤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4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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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이 전 세계에 뉴스로 보도된다. 일본에서 그 뉴스를 보고 있던 다카무라 요는 파키스탄 대통령이 쇼팽 콩쿠르에 참가한 일본인 미사키 요스케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란다. 그가 오래전 시골의 고등학교에 다닐 때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미사키와 함께 했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 동안 미사키는 다카무라는 물론이고 같은 음악과 학생들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겼다.

시골에 새로 생긴 고등학교에는 차별화를 두기 위해 음악과가 신설됐다. 나름 음악을 좋아하고 잘한다는 자부심을 가진 아이들이 모인 음악과에 미사키 요스케가 전학을 온다. 다카무라의 옆자리가 마침 비었기에 미사키와 짝이 되어 학교를 안내해 주는 역할을 맡게 됐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미사키가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피아노 실력이 알려지게 되면서 그는 경외의 대상이 된다.

여름방학이 시작됐지만 축제 준비를 위해 학교에 나온 음악과 학생들은 며칠째 퍼붓는 폭우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학교로 통하는 유일한 다리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고, 전기가 나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학교는 산을 깎아서 세워졌기 때문에 산사태의 위험에 직면해 있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 미사키는 마을에 내려가서 구조 요청을 하겠다고 했다. 다카무라가 따라갔다가 아이들에게 안내를 해주라는 미사키의 지시를 받고 돌아온 이후, 다행히 모두 구조가 되었다. 그런데 미사키가 같은 음악과 학생인 이와쿠라 도모키를 살해한 용의자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이번에는 미사키 요스케의 과거가 등장했다. 지난 시리즈인 <언제까지나 쇼팽>에서 일어난 사건이 뉴스로 보도되며 오래전 그와 함께 학교생활을 했던 다카무라 요의 회상으로 이야기가 전개됐다.

미사키는 고등학생 때에도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눈길을 끄는 깔끔한 외모에 음악과 관련된 것 아니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심지어 너무 둔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전학 온 미사키에게 반한 여학생들이 말을 걸어도 수줍어하면서도 두려워해서 다카무라가 보디가드처럼 막아줘야 했을 정도였다. 거기다 미사키는 공부도 잘했으니 선망의 대상이 될 만했다. 그러다 그의 피아노 실력이 드러난 이후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대상이 되었다.
평범하지는 않지만 조용한 전학생을 향한 아이들의 지대한 관심이 있었으나 미사키보다는 그의 가까이에 있던 다카무라가 그 변화를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미사키가 워낙 주변의 변화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반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다카무라는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사키에게 마음이 더욱 기울이게 됐다.

그러다 폭우가 연일 쏟아지던 날 이와쿠라가 뒤통수에 무언가에 맞아 죽은 것을 구조하러 마을에 내려갔던 미사키가 발견하게 되면서 한순간에 용의자가 됐다. 평소에 이와쿠라가 미사키를 괴롭히다 못해 폭력까지 저질렀다는 걸 반 아이들이 증언했기 때문이다.
이후 경외와 선망의 대상이었던 미사키가 경계의 대상이 된 건 당연했다. 반 아이들이 미사키를 대하는 변화의 시작은 경계였지만 나중엔 앞에서 험담을 하고 빈정거리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나락으로 떨어져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영 추하게만 보였다. 아직 어린 학생들이라서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죽어도 가질 수 없는 재능을 향한 비틀린 시기가 자리 잡았기 때문에 좋게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고선 음악가가 되기 위해 노력도 하지 않으니 당연히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다카무라의 마음이 이해가 되게끔 펼쳐졌다. 반 아이들의 감정에 공감하면서도 그는 동조하지 않았다. 미사키가 결백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재능을 향한 경외를 여전히 마음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이 후반으로 향해 가면서는 이전 시리즈처럼 미사키의 범인 찾기가 이어졌다. 이번엔 미사키의 결백을 증명해 보이는 게 중요했는데, 다행히 납득을 할 수 있을 만한 환경이 주어진 덕분에 사건의 정황을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그걸 보며 진범이 자백을 하기도 해서 미사키에겐 정말 다행이었다.
안타까운 건 미사키의 돌발성 난청이 이때에 생겼다는 사실이다. 어른스러우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 어린 학생인데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랬을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음악 천재이자 추리에도 재능을 가지고 있는 미사키 요스케는 어릴 때에도 발군의 모습을 보였다. 이전 시리즈와는 다르게 과거 회상에 관한 내용이라 미사키 요스케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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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미사키 요스케는 오래전부터 그랬다. 음악으로 다른 사람을 홀리는 마성의 매력과, 복잡하게 뒤얽힌 사안을 단숨에 해명하는 신비로운 재능을 전부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전적으로 그를 믿으면서도 한편으로 왠지 모를 두려움도 느꼈다. - P9

음악과에 있으면서도 음악이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음악이 안도감과 쾌감을 부른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허공에 흩뿌려지는 불안감과 도망치고 싶어질 정도의 절실함을 몸소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 P49

"왜 세상에는 이렇게 부조리한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왜 죄도 없는 사람이 아깝게 목숨을 잃어야 하는 걸까……. 난 항상 그런 생각을 해. 내가 베토벤을 연주할 때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내가 모차르트의 선율에 마음을 빼앗겨 있을 때도 누군가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정말 참담해져." - P235.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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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라이트
매튜 맥커너히 지음, 윤철희 옮김 / 아웃사이트(OUTSIGHT)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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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끄적거리곤 했다는 매튜 맥커너히가 50살이 되었을 때 인생을 되돌아볼 겸 이 회고록을 펴냈다. 회고록이라고 하면 딱딱하고 무거운, 성공한 사람들의 인생 스토리일 거라고 예상되는데, 매튜 맥커너히가 펴낸 이 책은 반쯤은 맞긴 했지만 절반은 예상을 벗어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 부모에게 어떤 가르침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삶의 다채로운 경험을 위해 호주로 교환학생을 가기도 하고 오지에도 여행을 갔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법대에 진학을 했다가 그가 쓴 글을 예술대학에 다니는 친구가 보고 해준 조언 덕분에 그의 관심이 영화로 바뀌어 우리가 알고 있는 연기파 배우 매튜 맥커너히가 되기까지의 과정 또한 그리고 있었다.

매튜 맥커너히의 부모님은 세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을 한 사람들이었다. 싸울 때는 피 터지게 싸웠지만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걸 두 번의 이혼으로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어찌 됐든 두 분은 부부였기에 매튜 맥커너히에게 가족이란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 듯했다. 여기에 큰형과 입양된 둘째 형과의 관계 또한 더없이 좋았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부모의 가르침이었다. 욕설을 하면 입에 비누칠을 당했다고 하는데, 욕보다 더 나쁜 말이 무엇인지 일찌감치 깨우쳤다. 나에게 해가 되는 말이나 듣는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그 가르침이 매튜 맥커너히의 가치관이 되었다. 정말 좋은 부모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매튜 맥커너히가 건강한 정신으로 삶을 살아온 것일 터였다.
특히 호주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 그를 받아준 가족이 예사롭지 않았고 솔직히 말하면 진짜 이상했는데, 매튜 맥커너히는 그들에게 상처가 될 말을 절대 하지 않았다. 자신의 상황이 아무리 부당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정말 바람직한, 모범적인 미국 청년의 모습이 절로 상상이 되었다.

이후 법대에 진학했다가 배우가 되기 위해 길을 바꾼 이야기는 몰랐던 부분을 알 수 있게 했다. 조연으로라도 출연하려던 그의 의지가 빛을 발했고, 그러는 와중에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던 이야기도 했다. 그러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 덕분에 이름을 알려 어디를 가든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로 가득했던 시절을 추억했다.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매튜 맥커너히의 모습이긴 했다. 그가 출연한 로맨틱 코미디를 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로맨틱한 남자의 이미지가 굳혀진 그는 진짜 하고 싶은 연기를 하기 위해 몇 백만, 몇 천만 달러의 출연료를 거절하고 영화 배역이 들어오길 기다렸다고 한다. 그것도 2년 가까이 말이다. 그때에는 당시엔 동거인이었던 아내 카밀라와 두 아이를 키우고 있었을 때라 일을 하지 않으면 나중엔 생계를 걱정해야 될 수도 있었는데, 카밀라는 그의 생각을 지지해 줬다고 한다. 그 부분을 읽으며 이혼과 불륜이 판을 치는 할리우드에서 매튜 맥커너히는 평생의 반려를 만난 것이란 생각을 했다.
가족의 지지로 매튜 맥커너히는 드디어 원하는 배역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 캐릭터들은 내게 너무나 친숙한 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열심히 활동을 한 덕분에 아카데미 수상이라는 영광이자 한때의 목표를 이루게 됐다.




에세이를 읽으며 피식피식 웃음이 나던 부분이 종종 있었다. 글 자체가 유쾌하고 삶을 바라보는 매튜 매커너히의 태도가 긍정적인 즐거움을 줬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삶에 대한 자세 또한 배울 점이 많아서 인상적인 글귀가 많았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배우 매튜 맥커너히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알게 된 시간이었다. 그의 삶과 영화 인생을 앞으로도 응원한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그린라이트는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옳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신호다. 승인이고 후원이고 칭찬이고 선물이고 우리가 피우는 불길에 붓는 기름이고 우리를 격려하고 우리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현금이고 탄생이고 봄날이고 건강이고 성공이고 즐거움이고 지속가능성이고 천진함이고 새로운 출발이다. 우리는 그린라이트를 사랑한다. - P22

당신은 당신 인생이라는 책의 저자다. 페이지를 넘겨라.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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