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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클럽
팀 피츠 지음, 정미현 옮김 / 루페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부산에 거주하는 중년의 소설가 홍원호는 고향 거제도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형 수호에게 연락을 받는다. 형은 집에 와 보라고 하며, 어머니가 바람을 피운 아버지와 이혼을 하시겠다고 집을 나가 무주 이모네에 가고 계신다고 했다. 아버지의 바람기는 거의 습관 같은 거라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았기에 굳이 가야 하냐고 물었지만, 이번에는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결정적 증거가 되는 망측한 종류의 그런 사진을 말이다.
원호는 마감을 코앞에 두고 있음에도 글이 잘 써지질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해외 출판사에서 그를 닦달해댈 거라는 생각에 거제도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고민을 하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향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은 여전했다. 누군가를 먹이는 일에 온 힘을 쏟아붓는 어머니,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되고도 남았지만 아버지 때문에 인생을 망친 수호 형, 원래의 얼굴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성형에 열정적인 여동생 부담이, 그리고 부담이의 미국인 남편 뚱땡이 미키까지 똑같았다. 알코올중독자에 오입쟁이 아버지도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이번엔 무슨 일인지 원호를 데리고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예전과 달랐다.
거제도 집에 가지 않으려 했던 원호가 어쩔 수 없이 고향을 찾았을 때 오랜만에 가족과 마주한 장면을 보고서 왜 그렇게 가기 싫어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싫은 구석이 있기 마련인데, 원호의 가족은 그냥 그 자체로 싫은 구석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이곳에 불러들인 형이나 아버지가 숱하게 바람을 피웠는데도 그 양반 끼니 걱정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싫었다. 그런가 하면 여동생 부담이가 자꾸 성형을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부담이의 남편 미키가 자신의 책을 가지고 사업을 할 계획을 짜고 있는 건 공연히 밥숟가락을 얹으려는 것 같아 끔찍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 원래부터 싫었던 아버지는 원호를 어떻게든 배에 태워 고기를 낚으러 가려고 했으니 거제도에 괜히 왔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싫은 가족들과 마주한 와중에 소설은 어느 순간부터 제목처럼 술 냄새를 풀풀 풍겨댔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원호는 어머니가 직접 빚은 막걸리를 그렇게 좋아했다. 비법으로 고구마를 넣은 막걸리가 자신의 속을 달래준다 여겼고, 슈퍼에서 파는 막걸리는 입맛을 버린다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삼 남매의 아버지는 소주를 그렇게 좋아했다. 친척뻘 되는 문씨 아저씨와 베프인 아버지는 로즈버드 다방에서 종업원들과 소주를 마셨고, 2차로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며 추태를 부렸다. 소설의 끝부분에 다다를 때까지 막걸리와 소주가 도배되다시피 해서 책을 읽는 동안 알코올 냄새가 느껴지는 듯한 묘한 경험을 했다.
금방 부산 집으로 돌아가려던 원호의 뜻이 무산된 후 거제도에 계속 머물게 되면서 주된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문씨, 임씨 아저씨와 배를 타고 고기를 낚으러 가는 계획에 원호가 무조건 포함되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던 것이다. 싫다는데 왜 그렇게 배에 태우려고 하는 걸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가뜩이나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던 아버지라서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원호는 어쩔 수 없이 배를 타게 됐고, 그로 인해 아버지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됐다. 뭍에서는 맨날 술에 절어서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가 바다에서는 고기잡이에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준 것이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원호의 아버지가 여태 해온 짓이 꼴사납고 추하게만 보였기에 그럼에도 좋은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지만, 원호는 그래도 아버지였기에 일정 부분 이해하고 싶었던 듯했다. 늙은 아버지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렇게라도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소설은 미국 작가가 쓴 한국 소설이라는 점에서 독특하게 다가왔다. 마치 한국 작가가 쓴 한국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제도를 배경으로 막걸리와 소주 냄새를 풍기며, 가정 내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그렸고, 그들의 자녀들을 통해 다분히 한국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신기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바람을 피우는 아버지나 소설 끝부분에서 원호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불편한 기분이 들어 그리 와닿지 않았지만, 색다른 독서 경험을 한 건 분명하다.
내 평생 아버지를 좋아했던 적이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존경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바닷가 바위 위에서 한순간 가슴속에 어떤 날카로운 통증 같은 것이 밀려왔다. 밀물 썰물의 변화처럼 아버지의 행동과 처신에 일대 전환이 일어난다면 일말의 가능성이 싹을 틔울지도 모른다. 우리 관계에 커다란 전환이 생길 가능성이 저기 있는 것이다. - P188
술을 많이 마셨든 안 마셨든 상관없이 고기를 잡는 행위와 거리가 멀어질수록 아버지는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광포해졌다. 술 취한 사람의 특징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체현해냈다. 아버지의 몸은 바다와 멀어질수록, 당신이 사랑하는 것과 떨어져 있을수록 상태가 나빠졌다. 나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일면 죄책감을 느꼈다. 왜 이런 부분을 헤아리지 못했던가? 어머니는 왜 아버지를 그냥 바다에서 살게 하지 않았던가?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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