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고려의 흥망성쇠를 결정한 34인의 왕 이야기
이동연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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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보다 성인이 된 후에 읽은 역사책이 훨씬 많다. 아무래도 공부를 해서 외운 다음 시험을 봐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학생 때는 시험에 꼭 나오는 것만 주로 공부하다 보니 전체적인 흐름을 읽기보다는 단편적인 사건에만 집중했기에 이해도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조선왕조실록을 시작으로 역사책을 읽기 시작하니 흐름이 어느 정도 보여 재미를 느꼈다. 워낙 조선사에 관한 책들만 읽은 탓에 그 이전의 한반도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고려왕조실록에 각 왕들의 심리를 곁들인 책이라 흥미로워 보였다.

책은 고려가 건국되기 이전에 궁예와 왕건의 일화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 나라를 건국한 왕이기 때문에 왕건에게도 당연히 건국 신화가 있었다. 무려 5대조인 호경부터 있었는데, 호랑이, 용왕, 용, 그리고 식량 등 당연히 신비롭고 영묘한 것들이 신화로 존재했다. 왕건을 어떤 인물로 비추고 싶었는지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했으나 미륵불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왕건에게 밀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궁예는 신라 경문왕의 궁녀 소생이라고 하는데, 왕비의 측근 세력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죽이라는 명을 받았다고 한다. 다행히 유모가 궁예의 목숨을 구한 덕분에 삶을 이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훗날 출생의 비밀이 밝혀져 버림받은 아이라는 상처가 내면에 생겨 스스로 자족하지 못하는 '유기 불안'이 생겼다고 말했다. 양육자와 교감하는 시기의 부재로 인한 내면의 트라우마가 여러 정신적 질환을 일으켰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고려 건국 이전 역사에 획을 그은 두 인물을 심리학적으로 바라보니 왕이 될 인재는 뭔가 남다른 배경이 있구나 싶었다. 물론 왕건이 고려를 세웠기에 그에게 신화적인 서사를 부여한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후 후대의 역사를 차례로 짚어나가면서 알 수 있었던 건 초기 조선사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호족들로 인해 여러 여인들과 혼인을 한 왕건은 당연히 수많은 자식들을 두었는데, 그가 세운 태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아들들끼리 싸움이 일어나 왕좌를 쟁탈하려는 모습은 조선 초기 '왕자의 난'과 닮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린 조카 헌종의 왕위를 탐내다 결국 자리를 빼앗은 숙종은 세조의 '계유정난'을 떠올리게 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이야기가 엇비슷하게 들어맞는 것 같았다.

외우려고 읽은 게 아니라 고려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싶어서 읽은 책이었다. 고려 건국 초중기의 왕위 쟁탈전 이후 정세가 안정되고 평안한 치세가 이어졌으나 어느 국가나 그렇듯 권력을 쥔 이들로 인해 쇠망의 길에 접어들었다. 원나라에 고개를 숙인 왕들은 묘호에 충(忠)이 들어갔고, 최 씨 집안의 무인정권으로 인해 왕은 허수아비일 뿐이기도 했다. 심리학과 결합한 역사지만 고려사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고려 왕들의 심리적인 부분에 대해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덕분에 고려사에 관한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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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 간 철학 - 중년의 철학자가 영화를 읽으며 깨달은 삶의 이치
김성환 지음 / 믹스커피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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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겠다고 다짐하는데, 결국 가장 많이 찾게 되는 건 소설 종류이다.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느끼는 재미를 도무지 놓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간혹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지어낸 각본으로 영화가 만들어진다. 만들어 낸 이야기 속에 담긴 여러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 사건 사고를 통해 인생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

그런 이유로 내가 좋아하는 영화와 내겐 너무나 낯설기만 한 철학이 만난 책을 읽게 됐다. 고등학교 때 특이하게 교과목으로 철학을 배운 적이 있어서 그렇게 낯설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깝다고 하기엔 너무나 먼 철학이다. 그래서 철학과 관련된 책은 읽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내가 좋아하는 영화과 접목했다니 쉽고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반가웠다.



 

제일 먼저 소개한 영화는 철학적인 SF 영화로 세기말에 깊은 인상을 준 <매트릭스> 시리즈였다. 뒤늦게 집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철학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으면서도 의미 있게 담아낸 것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잘 모르는 분야이긴 하지만 종교적인 의미도 담아낸 것 같다고 당시에 생각했었는데, 책에서 그 부분을 짚고 넘어갔다. 주인공 '네오'와 '트리니티', '모피어스'까지 기독교와 관련된 뜻이 있어서 역시 이런 부분을 알아야 더 많은 게 보이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신화와 관련된 부분도 이야기했는데, '오라클'은 신탁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네오가 오라클을 만나려고 찾은 부엌문 위에 '너 자신을 알라'의 라틴어 현판도 걸려 있다고 말하며 장면을 되새기게 했다.
<매트릭스> 시리즈는 자의식을 바탕으로 성 충동인 에로스(Eros)와 죽음 충동인 타나토스(Thanatos)가 작동하며 갈등하고 충돌하는 게 인생이라고 정리한 영화라고 했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1편이 워낙 인상적이었던 덕분에 후속작들은 갈수록 1편만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집중력이 떨어져서 깊이 있게 감상하지 못했었는데,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영화를 떠올리니 새삼 영화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첫 키스만 50번째>는 안 봤지만 내용을 아는 영화였다. 이 영화와 관련된 철학은 욕망이었다. 플라톤이 쓴 대화편 <향연>에서 소크라테스가 뭔가를 사랑하는 건 그 대상을 원하는 것이고 그 대상을 원하는 건 그 대상이 부족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욕망은 결핍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욕망이 결핍이라는 전통적인 견해를 뒤집은 건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였다. 욕망을 결핍으로 보면 부정적인 것이 되지만, 욕망을 생산적인 것으로 보면 긍정적인 것이 된다고 했다. <첫 키스만 50번째>의 주인공 헨리가 하루가 지나면 기억을 잃는 루시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하는 행위는 루시를 만나고 싶은 욕망을 채우고자 방법을 생산해 내는 거라고 말이다.
누군가에게 욕망은 결핍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생산이 될 수도 있는 듯하다.

전 세계 관객들에게 큰 재미를 선사한 마블 스튜디오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플라톤의 우주생성론과 관련짓는 게 놀라웠다. 타노스가 우주의 절반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모으는 인피니티 스톤으로 말이다. 우주의 탄생과 만물의 생성을 과학에 의존해 설명하며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과도 관련 있다고 했다. 단순히 재미를 위해 본 영화인데 철학적으로 접근해 놀라울 따름이었다.

2020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네 개 부문의 상을 수상한 뒤 기자회견에서 봉준호 감독님이 한 말을 통해 헤겔의 변증법을 이야기했다. 관련 전공자도 어렵다고 하는 헤겔의 철학이라고 하는데 너무 어렵지 않게, 영화 <기생충>에 빗대어 표현했다. 대충은 이해했지만 설명할 정도는 아니기에 아쉽다.

내가 좋아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 3부작을 이야기하며 여러 철학을 말했다.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 칸트의 법칙론, 마이클 샌델이 말하는 자유지상주의와 평등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샌델의 공동선 이론 등 정말 많은 사회철학이 등장했다. 히어로 무비를 만들어도 깊이가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나 보다.



영화를 철학적으로 접근한 이 책을 통해 이미 본 영화를 되새기게 만들었고, 못 본 영화는 궁금해지게 했다. 어렵기만 한 철학을 관심 분야와 연결하니 조금은 친근해진 것 같다. 물론 철학의 치읓 자도 모르는 걸음마 단계라 그래도 어렵긴 했지만 말이다.
이 책 덕분에 앞으로는 철학 관련 책을 심하게 경계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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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
리러하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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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에 매진하고 있는 서주는 출근 준비를 하려고 방에서 나왔을 때 부엌 식탁에서 웬 꾀죄죄한 남자가 양푼에 담긴 음식물 쓰레기 같은 걸 먹고 있는 걸 본다. 보는 것만으로도 울렁거리는 그걸 남자 역시 구역질을 하며 먹고 있었다. 남자가 빈 양푼을 들고 보일러실로 갔을 때 마땅히 보여야 할 보일러실이 아니라 이상한 환상을 목격했고, 살려달라 외치는 소리마저 듣는다. 자신이 제대로 본 게 맞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할머니가 다가와 보일러실 문을 닫았다. 자신이 본 것들을 얘기한 서주에게 할머니는 지옥과 계약을 했다고 말했다. 무슨 회사 이름 따위가 아니라 죽은 자들을 벌주는 진짜 지옥 말이다.
서주는 진짜 지옥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긴 했지만, 현실이 지옥이니 진짜 지옥도 있을 거라고 납득했다. 그리고 리모델링을 해도 소용없을 만큼 다 쓰러져 가는 언덕배기에 위치한 집이고, 할머니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집이니 그러려니 했다.

지옥이 임대한 집에서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지내던 서주는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늦게 돌아온 날, 머리에 작은 뿔이 달린 악마와 마주한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악마가 아니라 큰 키에 소년스러움을 지닌 악마였다.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할머니와 둘이 사는 서주는 사실 업둥이였다. 어쩌다가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건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제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던 그녀는 이제 친손녀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할머니의 자식들이 곁을 지키지 못할 저마다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서주라도 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큰아들은 경찰에게 끌려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들은 자기 어머니를 등쳐먹을 생각만 하고 있는 몹쓸 놈이었다.
어쩌다 보니 성인이 되어서도 할머니 곁을 지키고 있는 서주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유산 따위는 받을 수 없는 남이라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서주는 늘 할머니의 건강을 걱정하며 끼니를 챙기는 진짜 손녀와 같았다.

집에 하숙을 친 지가 꽤 되었는데, 집이 워낙 허름하고 오래되다 보니 하숙생이 쉽게 들어오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할머니가 받아온 세입자가 지옥이라니 말이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을 했다. 근데 진짜 지옥이 펼쳐졌다. 쓰지 않는 방과 창고를 지옥에게 세줬다고 했는데, 얼떨결에 문을 연 곳에 지옥이 있었고, 당연히 벌을 받는 망자도 존재했다. 이런 설정이 너무 재미있게 다가왔다. 지옥이 리모델링 중이라 세를 줬다니 말이다. 지옥에서 벌을 받는 망자들 중 단연 돋보였던 건 생전에 음식을 가지고 장난을 쳐서 죽은 뒤에 그걸 다 비벼서 먹는 자였다.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소설 속에 그대로 녹여낸 게 퍽 인상적이었다.
이런 설정들이 어느 정도 정립된 후에는 악마가 등장해 미묘한 로맨스 기류를 풍기기 시작해 몰입하게 만들었다. 서주에게 달콤한 미숫가루를 타주던 의문의 누군가가 악마라는 게 밝혀지면서 설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악마가 미소년이었고,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했기 때문에 가능한 분위기였다. 덕분에 풋풋한 설렘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렇게 악마까지 다 등장한 후에는 할머니와 둘째 아들에 관련된 사건도 함께 진행했다. 내놓은 자식이나 다름없는 둘째 아들이 서주가 일하는 먹자골목을 뒤지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었고, 집에 누군가가 침입해 서주의 옷 서랍에 칼을 놓아두기도 했다. 그러다 결말에는 악화된 할머니의 건강과 더불어 둘째 아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소설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다. 긴장감을 배가시킨 건 둘째 아들을 쫓는 빚쟁이의 등장이었고 말이다.
서주가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 펼쳐졌지만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던 건 악마의 존재 덕분이었다. 서주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악마답지 않은 말을 한 그가 있는 한 서주는 무사할 테니까 말이다.

기대 없이 읽은 소설인데 신선한 설정 덕분에 금세 재미있게 읽었다. 악마를 미소년으로 설정한 것이 재미에 큰 몫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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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 요새 리모델링하느라 죄인들 둘 데가 모자란대서 빈방이랑 남는 공간 빌려주기로 했다. 아까처럼 죄인들 좀 오갈 거야. 함부로 문 열면 험한 꼴 본다." - P13.14

그의 경쾌한 발걸음 아래 주황 불꽃이 발자국 모양으로 남았다. 나는 그 불꽃을 피하려 기묘한 스텝을 밟았지만, 때로 내 발이 발자국을 침범할 때마다 훅 올라오는 건 열기가 아니라 오렌지 향기였다. 연탄재로 얼룩진 벽은 은하수처럼 빛나고, 새콤달콤한 향기가 부드러운 불꽃의 길을 채운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데 너무나도 달라 보이는 풍경 너머, 악마는 때때로 내가 잘 쫓아오는지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 P89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난 당신이 좋아하는 걸, 당신을 웃게 할 수 있는 걸 전부 할 겁니다. 그게 당신을 파멸로 몰아간다 해도."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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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영 ZERO 零 소설, 향
김사과 지음 / 작가정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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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제 남자친구 성연우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그것도 오전 시간 도심의 스타벅스에서 말이다. 조용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드문드문 있는 스타벅스 안에서 성연우가 나에게 이별을 고하는 말들이 울려 퍼졌다. 주변 사람들은 짐짓 관심 없는 척하며 우리의 이별을, 성연우의 통보를 듣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성연우가 헤어짐에 원인이 있다고 말하는 나는 겉으로 보는 나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말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별을 당하는 약자의 입장이지만 이성을 유지하는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성연우 대신 다른 먹잇감을 발견한다. 같은 대학, 같은 과였지만 별로 친하지 않았던 이민희가 암 투병을 하게 되어 대신 교양 강의를 맡았는데, 그 강의를 듣는 박세영이 눈에 들어왔다.




화자이자 주인공 알리스 청이 하는 이야기를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땐 온전히 그녀의 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의 편에 서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상황이 펼쳐지고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성격이 파악된 뒤에는 마음이 다른 쪽으로 기울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소설의 도입은 알리스가 성연우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는 상황이었으니 더욱 그녀에게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게 밝혀졌다. 소설이 1인칭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심리가 가감 없이 드러난 덕분이었다. 알리스는 이별을 통보받는 처연한 여자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카페 안에 앉아있는 다른 사람이었고, 그녀는 이 무대의 원톱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완벽하게 자신의 역할을 소화해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만만히 볼 사람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깨달았다.

이후 소설은 현재 시점과 과거 시점을 오가며, 마치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현재의 그녀는 대타로 맡은 강의에서 먹잇감 세영에게 접근해 그녀를 비행기에 태웠다가 곤두박질치게 만들 계획을 차근차근 밟아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인물들을 통해 그녀의 과거를 보여줬는데, 아빠의 회사 일 때문에 가게 된 독일에서 만난 한국인 김명훈과의 일화가 있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아빠가 세상을 떠났을 때 무너져내린 엄마의 손발을 묶어버리고 정신병원에 가둬두기까지 한 패륜아의 모습을 보였다.
소설 도입에서부터 그녀가 정상은 아닐 거라 충분히 예상하긴 했지만, 알면 알수록 그녀의 기행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 입장에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망가뜨리려고 하는지, 심지어는 자신을 낳아준 엄마까지 무너지게 하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성연우에게서 걸려온 전화 내용과 알리스의 독일 시절의 진짜 이야기가 밝혀지면서 그녀가 왜 포식자가 되려고 하는지 이해하진 못해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독일 시절에 어린 그녀가 만난 어떤 포식자로 인해 인생관이라고 할 만한 것이 확립된 것으로 보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이해의 개념의 아니라 서로 사냥하는, 먹지 않으면 먹히고 마는 관계라고 말이다. 어렸을 때 목격한 그 먹이사슬로 인해 알리스는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들과 관계를 맺을 땐 늘 포식자의 위치를 차지하고자 했다. 필요에 의한 관계보다 더 나쁜, 누군가를 짓밟는 것 외에 그 무엇도 의미가 없는 관계였다.
이로 인해 알리스의 영혼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던 게 아닌가 싶다. 성연우가 말했듯 그녀의 안에는 영혼이라는 게 없었다. 공허하고 텅 빈, 이제는 그 무엇도 담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녀는 계속 그렇게 살 것이다. 영혼도 없고, 타인과 교감을 갖지 못해 텅 빈 삶을 살아갈 거란 생각을 했다.

짧은 이 책을 금세 읽고 난 후에 진이 빠져버린 건 사이코패스의 내면을 들여다본 느낌이 들어서일 것이다. 정상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의 내면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하고 혐오스러웠다.



​​​​​​​

─ 너는 영혼이 없어. 이해해? 젠장 어떻게 이해하겠어, 영혼이 없는데……. 너는 완전히 제로야. 완전히 텅 빈…… - P162

세상 사람들이 다 내 불행을 바란다.
그것은 진실이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유일한 진실이다. 김지영 선배는 미친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했다.
좀 더 정확하게 서술하자면, 사람들은 누군가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바란다.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커튼 삼아 자신의 방에 짙게 드리워진 불행의 그림자를 가리고자 한다. - P120

인간은 기본적으로 식인食人하는 종족이다. 일단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윤리와 감정에 앞서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세상은 먹고 먹히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를 잡아먹지 않으면, 네가 나를 통째로 집어삼킨다. 조심하고, 또 경계하라.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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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두 번째 밤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2
김보람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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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람 × 점 6평짜리 원룸에서 벗어나 임대 아파트로 이사 온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부부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정확히는 아내의 눈에만 얼굴에 검은 점이 가득한 남자 귀신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 남자가 보이기 시작한 뒤로 그 방에 곰팡이 같은 점이 점점 피어나 방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아내는 작업실로 쓰던 그 방을 벗어나 거실로 옮기지만, 어느 날부터인지 화장실에까지 그 남자가 침범하고 말았다.
아소 × 구조구석방원 남자인 '나'와 동기 여자애는 내기를 했다. 집 문을 잠그지 않고 창문도 활짝 열어놓은 채 일주일을 버티면 나에게 100만 원을 주기로 말이다. 동기는 집 문을 잠그지 못하게, 그리고 창문도 닫지 못하게 장비를 설치하곤 집 안에 네 개의 CCTV를 달았다. 비밀번호가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인터넷 방송에 올려 자신만 확인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내기는 어떤 남자가 창밖에서 나의 집을 올려다보는 것을 시작으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배명은 × 홍수
시골 마을에 홍수가 닥쳐 마을 어르신들이 모두 옆 마을 분교로 피했다. 은화는 노트북과 원서를 챙기려다 때를 놓치곤 불어난 물에 놀라 옥상으로 피했다가 쓰러졌다. 그렇게 정신을 잃은 은화를 어떤 남자가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 대화를 시작하게 됐는데, 가면 갈수록 이 남자가 이상하게 소름이 끼친다.
유아인 × 상어
할머니 집에서 지내는 '나'는 마을에 사는 장군이 할머니와 키가 2미터쯤 되어 보이는 까만 사람이 등장하는 꿈을 꾼다. 이튿날 깨어나니 할머니가 장군이 할머니의 부고를 알려줬다. 마을에 젊은 사람이 나뿐이라 며칠간 치른 장례식을 정신없이 끝내고 난 후, 또 장군이 할머니 꿈을 꿨다. 장군이 할머니가 우리 집 대문 바깥에서 폴짝폴짝 뛰어 안을 바라보는데, 대문 너머로 얼굴이 드러날 때마다 소름 끼치게 웃는 것이었다.

배상현 × 심해어
평소처럼 달리던 지하철이 갑자기 멈춰 섰다. 처음엔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화를 하며 곧 나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자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은 채 조용한 암흑 속에 잠겨버렸다.
전사라 × 공포의 ASMR
어느 직장 여성이 자기 전에 들은 이상한 ASMR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냐고 하면서 내용을 커뮤니티에 올린다. 학교에서 소외되던 여학생이 잘나가는 다른 여학생을 따라 한 사진을 SNS에 올리면서 주목받았지만, 실체가 폭로되어 인기가 떨어졌다. 그때부터 그 여학생은 자신을 폭로한 이를 찾아 복수하려고 한다.

이규락 × 아기 황제
'설영'이라는 곳에 데릴사위로 오게 된 최계영은 기묘한 인상의 장현죽을 아내로 맞는다. 처음엔 묘했던 아내의 인상은 점점 최계영의 마음속에 들어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계영은 이상하리만치 목이 긴 어떤 여인이 섬뜩하게 흐느끼다 웃는 꿈을 자주 꾸기 시작한다.
최정원 × 할머니 이야기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서 가족 모두 시골로 이사를 갔다. 증조부가 살던 집에서의 새로운 생활은 적응을 한 뒤에는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나'는 친구들과 아지트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하다가 마을에 떠도는 소문을 듣는다. 백발의 꼬부랑 할머니가 남자 앞에만 나타나 업어달라고 한다는 것인데, 할머니를 업은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는 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길에서 백발의 할머니를 마주한다.

효빈 × 처형학자
네세케네아 제국의 코르네스 장군은 '처형학자'라는 섬뜩한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전쟁에서 딱 99명의 포로를 잡아 자신의 시종까지 100명을 채워 가장 끔찍한 죽음에 대해 생각하라고 한 뒤에 순위를 매겨 본인이 낸 아이디어로 죽게 한다. 1등은 살아남아 코르네스의 시종이 되는데, 살리제르는 벌써 7번째 연속 우승을 하고 있다. 10번의 우승을 채우면 자유가 주어진다는 조건이 있기에 병사들까지 모두 기대를 하고 있다.
차삼동 × 검은 책
6학년 소희는 새로 전학 온 유리에게 질투를 하고 있다. 유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자신이 주목을 받았는데, 이제는 유리로 인해 아이들의 관심에서 2순위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앞 문구점에서 검은 책을 보고 홀려 구입하게 된다. 그 안에는 미운 사람에게 괴로움을 안기는 4단계 저주 의식이 쓰여 있었다. 고민을 하던 소희는 1단계부터 시작해 유리를 저주하기 시작한다.



가장 공포 소설답게 무섭게 읽은 이야기는 <상어>와 <할머니 이야기>였다.
<상어>는 장군이 할머니가 대문 밖에서 폴짝폴짝 뛰어 안을 바라보는 얼굴이 나타날 때마다 무섭게 웃고 있었다는 게 상상이 되어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열 개의 단편 중에서 그 장면이 가장 섬뜩했다. 나는 상상력이 정말 형편없는데 꼭 공포에 관해서는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하고 만다. 꿈속에서 본 할머니라 그런지 왠지 내 꿈에도 그런 장면이 나타날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리고 <할머니 이야기>는 남자들에게만 업어달라고 하는 할머니를 만난 뒤 죽음을 맞이한다는 설정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어린 주인공이 백발 할머니를 마주한 그 장면이 분위기 자체가 오싹해서 나도 주인공처럼 겁을 먹었었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슬픈 반전이 있어서 앞서 느꼈던 공포가 안타까움으로 변주되어 씁쓸함을 남겼다.
<구조구석방원> 또한 공포스러운 장면으로 치면 기억에 아주 오래 남을 듯하다. 닫을 수 없게 고정된 창문 너머로 주인공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 섬뜩했던 건 아무래도 귀신보다 사람이 무서운 현실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이 건장한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섭다고 했을 정도이니 그 눈빛에서 무엇을 읽었을지는 상상도 하기 싫다.

반전이 있던 단편도 있었는데, 별생각 없이 읽었던 <홍수>와 <공포의 ASMR>이었다. <홍수>는 정말 짧은 단편이었지만 후폭풍을 일으키는 반전이 있었다. 그리고 <공포의 ASMR>은 읽으면서 몰입하는 바람에 전개를 예상하지 못해 뒤통수를 맞은 경우였다.

재작년에 이 책의 첫 번째 시리즈를 아주 무섭게 잘 읽었다. 여름에 읽었어야 했는데 2월에 읽었더랬다. 그런데 이번에도 두 번째인 이 책을 비슷한 시기에 읽고 말았다. 그래서 더 오싹하게, 많이 추워하면서 읽었다.
편차가 조금씩 있긴 했으나 그래도 공포라는 장르에 잘 어울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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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대문 너머에서, 무언가 펄쩍 뛰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조금 더 기다리자 한 번 더 펄쩍. 한 번 더 펄쩍.
장군이 할머니가 펄쩍펄쩍 뛰면서 우리 집을 훔쳐보고 있었다. 나는 몸을 숨겨 밖을 빼꼼 바라보았다. 장군이 할머니는 저번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유아인 <상어> - P98

솔직히 옛날에도 이런 글은 종종 봤습니다. 다 장난인 줄 알았어요. 인터넷이니까 별것도 없는 것들이 허세에만 절어서는. 칼은 무슨 과일도 안 썰어봤을 것 같은 놈들이 인터넷에서는 다 연쇄살인마인 척이야. 이랬습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정말 만약에 저게 딱 하나라도 진짜면 어떡합니까? 아소 <구조구석방원> - P53

검은 형체의 사람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큰 키로 구부정하게 서서, 나를 향해 있는, 보랏빛 핏줄이 만연한 두 눈. 그가 씩 웃자 시뻘건 입속이 훤히 벌어졌다. 유아인 <상어>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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