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
리러하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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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에 매진하고 있는 서주는 출근 준비를 하려고 방에서 나왔을 때 부엌 식탁에서 웬 꾀죄죄한 남자가 양푼에 담긴 음식물 쓰레기 같은 걸 먹고 있는 걸 본다. 보는 것만으로도 울렁거리는 그걸 남자 역시 구역질을 하며 먹고 있었다. 남자가 빈 양푼을 들고 보일러실로 갔을 때 마땅히 보여야 할 보일러실이 아니라 이상한 환상을 목격했고, 살려달라 외치는 소리마저 듣는다. 자신이 제대로 본 게 맞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할머니가 다가와 보일러실 문을 닫았다. 자신이 본 것들을 얘기한 서주에게 할머니는 지옥과 계약을 했다고 말했다. 무슨 회사 이름 따위가 아니라 죽은 자들을 벌주는 진짜 지옥 말이다.
서주는 진짜 지옥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긴 했지만, 현실이 지옥이니 진짜 지옥도 있을 거라고 납득했다. 그리고 리모델링을 해도 소용없을 만큼 다 쓰러져 가는 언덕배기에 위치한 집이고, 할머니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집이니 그러려니 했다.

지옥이 임대한 집에서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지내던 서주는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늦게 돌아온 날, 머리에 작은 뿔이 달린 악마와 마주한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악마가 아니라 큰 키에 소년스러움을 지닌 악마였다.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할머니와 둘이 사는 서주는 사실 업둥이였다. 어쩌다가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건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제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던 그녀는 이제 친손녀나 다름없이 지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할머니의 자식들이 곁을 지키지 못할 저마다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서주라도 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큰아들은 경찰에게 끌려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들은 자기 어머니를 등쳐먹을 생각만 하고 있는 몹쓸 놈이었다.
어쩌다 보니 성인이 되어서도 할머니 곁을 지키고 있는 서주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유산 따위는 받을 수 없는 남이라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서주는 늘 할머니의 건강을 걱정하며 끼니를 챙기는 진짜 손녀와 같았다.

집에 하숙을 친 지가 꽤 되었는데, 집이 워낙 허름하고 오래되다 보니 하숙생이 쉽게 들어오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할머니가 받아온 세입자가 지옥이라니 말이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을 했다. 근데 진짜 지옥이 펼쳐졌다. 쓰지 않는 방과 창고를 지옥에게 세줬다고 했는데, 얼떨결에 문을 연 곳에 지옥이 있었고, 당연히 벌을 받는 망자도 존재했다. 이런 설정이 너무 재미있게 다가왔다. 지옥이 리모델링 중이라 세를 줬다니 말이다. 지옥에서 벌을 받는 망자들 중 단연 돋보였던 건 생전에 음식을 가지고 장난을 쳐서 죽은 뒤에 그걸 다 비벼서 먹는 자였다.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소설 속에 그대로 녹여낸 게 퍽 인상적이었다.
이런 설정들이 어느 정도 정립된 후에는 악마가 등장해 미묘한 로맨스 기류를 풍기기 시작해 몰입하게 만들었다. 서주에게 달콤한 미숫가루를 타주던 의문의 누군가가 악마라는 게 밝혀지면서 설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악마가 미소년이었고,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했기 때문에 가능한 분위기였다. 덕분에 풋풋한 설렘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렇게 악마까지 다 등장한 후에는 할머니와 둘째 아들에 관련된 사건도 함께 진행했다. 내놓은 자식이나 다름없는 둘째 아들이 서주가 일하는 먹자골목을 뒤지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었고, 집에 누군가가 침입해 서주의 옷 서랍에 칼을 놓아두기도 했다. 그러다 결말에는 악화된 할머니의 건강과 더불어 둘째 아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소설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다. 긴장감을 배가시킨 건 둘째 아들을 쫓는 빚쟁이의 등장이었고 말이다.
서주가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 펼쳐졌지만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던 건 악마의 존재 덕분이었다. 서주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악마답지 않은 말을 한 그가 있는 한 서주는 무사할 테니까 말이다.

기대 없이 읽은 소설인데 신선한 설정 덕분에 금세 재미있게 읽었다. 악마를 미소년으로 설정한 것이 재미에 큰 몫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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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 요새 리모델링하느라 죄인들 둘 데가 모자란대서 빈방이랑 남는 공간 빌려주기로 했다. 아까처럼 죄인들 좀 오갈 거야. 함부로 문 열면 험한 꼴 본다." - P13.14

그의 경쾌한 발걸음 아래 주황 불꽃이 발자국 모양으로 남았다. 나는 그 불꽃을 피하려 기묘한 스텝을 밟았지만, 때로 내 발이 발자국을 침범할 때마다 훅 올라오는 건 열기가 아니라 오렌지 향기였다. 연탄재로 얼룩진 벽은 은하수처럼 빛나고, 새콤달콤한 향기가 부드러운 불꽃의 길을 채운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데 너무나도 달라 보이는 풍경 너머, 악마는 때때로 내가 잘 쫓아오는지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 P89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난 당신이 좋아하는 걸, 당신을 웃게 할 수 있는 걸 전부 할 겁니다. 그게 당신을 파멸로 몰아간다 해도."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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