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영 ZERO 零 소설, 향
김사과 지음 / 작가정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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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제 남자친구 성연우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그것도 오전 시간 도심의 스타벅스에서 말이다. 조용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드문드문 있는 스타벅스 안에서 성연우가 나에게 이별을 고하는 말들이 울려 퍼졌다. 주변 사람들은 짐짓 관심 없는 척하며 우리의 이별을, 성연우의 통보를 듣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성연우가 헤어짐에 원인이 있다고 말하는 나는 겉으로 보는 나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말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별을 당하는 약자의 입장이지만 이성을 유지하는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성연우 대신 다른 먹잇감을 발견한다. 같은 대학, 같은 과였지만 별로 친하지 않았던 이민희가 암 투병을 하게 되어 대신 교양 강의를 맡았는데, 그 강의를 듣는 박세영이 눈에 들어왔다.




화자이자 주인공 알리스 청이 하는 이야기를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땐 온전히 그녀의 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의 편에 서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상황이 펼쳐지고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성격이 파악된 뒤에는 마음이 다른 쪽으로 기울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소설의 도입은 알리스가 성연우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는 상황이었으니 더욱 그녀에게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게 밝혀졌다. 소설이 1인칭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심리가 가감 없이 드러난 덕분이었다. 알리스는 이별을 통보받는 처연한 여자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카페 안에 앉아있는 다른 사람이었고, 그녀는 이 무대의 원톱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완벽하게 자신의 역할을 소화해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만만히 볼 사람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깨달았다.

이후 소설은 현재 시점과 과거 시점을 오가며, 마치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현재의 그녀는 대타로 맡은 강의에서 먹잇감 세영에게 접근해 그녀를 비행기에 태웠다가 곤두박질치게 만들 계획을 차근차근 밟아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인물들을 통해 그녀의 과거를 보여줬는데, 아빠의 회사 일 때문에 가게 된 독일에서 만난 한국인 김명훈과의 일화가 있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아빠가 세상을 떠났을 때 무너져내린 엄마의 손발을 묶어버리고 정신병원에 가둬두기까지 한 패륜아의 모습을 보였다.
소설 도입에서부터 그녀가 정상은 아닐 거라 충분히 예상하긴 했지만, 알면 알수록 그녀의 기행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 입장에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망가뜨리려고 하는지, 심지어는 자신을 낳아준 엄마까지 무너지게 하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성연우에게서 걸려온 전화 내용과 알리스의 독일 시절의 진짜 이야기가 밝혀지면서 그녀가 왜 포식자가 되려고 하는지 이해하진 못해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독일 시절에 어린 그녀가 만난 어떤 포식자로 인해 인생관이라고 할 만한 것이 확립된 것으로 보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이해의 개념의 아니라 서로 사냥하는, 먹지 않으면 먹히고 마는 관계라고 말이다. 어렸을 때 목격한 그 먹이사슬로 인해 알리스는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들과 관계를 맺을 땐 늘 포식자의 위치를 차지하고자 했다. 필요에 의한 관계보다 더 나쁜, 누군가를 짓밟는 것 외에 그 무엇도 의미가 없는 관계였다.
이로 인해 알리스의 영혼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던 게 아닌가 싶다. 성연우가 말했듯 그녀의 안에는 영혼이라는 게 없었다. 공허하고 텅 빈, 이제는 그 무엇도 담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녀는 계속 그렇게 살 것이다. 영혼도 없고, 타인과 교감을 갖지 못해 텅 빈 삶을 살아갈 거란 생각을 했다.

짧은 이 책을 금세 읽고 난 후에 진이 빠져버린 건 사이코패스의 내면을 들여다본 느낌이 들어서일 것이다. 정상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의 내면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하고 혐오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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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영혼이 없어. 이해해? 젠장 어떻게 이해하겠어, 영혼이 없는데……. 너는 완전히 제로야. 완전히 텅 빈…… - P162

세상 사람들이 다 내 불행을 바란다.
그것은 진실이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유일한 진실이다. 김지영 선배는 미친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했다.
좀 더 정확하게 서술하자면, 사람들은 누군가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바란다.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커튼 삼아 자신의 방에 짙게 드리워진 불행의 그림자를 가리고자 한다. - P120

인간은 기본적으로 식인食人하는 종족이다. 일단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윤리와 감정에 앞서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세상은 먹고 먹히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를 잡아먹지 않으면, 네가 나를 통째로 집어삼킨다. 조심하고, 또 경계하라.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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