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베토벤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5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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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 끝에 사법 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아모 다카하루는 그곳에서 한동안 같이 공부하게 될 조를 만난다. 제비뽑기로 만난 조원은 경리로 일하다 내부 고발로 해고된 와키모토 에나미, 전직 자동차 제조업체에서 일했던 하즈 고로, 그리고 이번 사법 시험에서 수석 합격을 했다는 미사키 요스케였다.
소문이 무성했던 수석 합격자, 심지어는 거의 만점에 가까웠다는 미사키 요스케는 보기보다 수줍음이 많았을뿐더러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 모습으로 인해 아모는 미사키가 조금은 못마땅하게만 보였다.

마침 기숙사 옆방에서 지내게 된 아모와 미사키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아모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치며 음악의 길을 가려고 했으나 자신보다 뛰어난 천재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법조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 이후로는 클래식을 듣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미사키가 클래식을 보통 사람보다 훨씬 꺼려 한다는 걸 알고는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베토벤 음악회에 데리고 가게 된다.



이번 시리즈는 전작 <어디선가 베토벤>에서 고등학생이던 미사키 요스케가 사법 시험을 치르고 연수원에 들어온 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음악을 향한 열정이 꺾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미사키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법 시험을 볼 수밖에 없었던 건 전작에서 생긴 돌발성 난청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한쪽 귀가 들리지 않을지 알 수 없는 미사키 입장에서는 음악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그렇게 사법연수원에 들어와 만나게 된 사람이 이번 소설의 화자인 아모였다. 아모는 미사키처럼 음악의 길을 걷다가 법조의 길로 틀었다는 점에서 닮은 꼴이었다. 물론 미사키만큼 천재적인 음악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스스로 깨달은 후에 방향을 튼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부족함을 깨닫고 스스로 음악을 포기했기 때문인지 아모는 클래식을 즐겨 들었다. 취미로나마 음악을 곁에 두었던 것이다. 반면에 미사키는 닿고 싶지만 차마 닿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인지 일부러라도 음악을 멀리했다. 그런 미사키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당연했다. 에이스 검사인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고 싶지 않았던 미사키는 음악을 너무나도 사랑한다는 게 느껴졌는데, 돌발성 난청으로 인해 음악과 멀어져야 했으니 말이다.
그런 미사키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아모는 그를 놀려주기 위해 음악회에 데리고 가게 된다. 미사키의 과거를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아모가 얄미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모의 입장에선 미사키를 골려주고 싶었을 것 같기도 했다. 수석 합격한 미사키를 사법연수원 교수이자 현직 검사인 간바라가 벌써부터 섭외하려고 애를 쓸 만큼 불세출의 천재이면서 외모까지 훌륭해 연수원 내에서 눈독을 들이는 여자들이 많았다. 거기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무구함을 가졌으며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지 않는 모습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조금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을 듯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미사키가 각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어쩌면 좋은 시도였다고 볼 수 있었다.

이런 한편으로 사법연수원에서 벗어나 조원들과 함께 검찰청에서 실무 연수를 시작하게 됐다. 검찰로 송치된 사건을 연수원생들이 훑어보는 시간이 있었는데, 미사키는 동화 작가와 그림 작가 부부의 사건에 집중하게 된다. 남편 작가가 칼에 찔려 사망했고, 그림 작가인 아내가 용의자로 지목되어 수사 중인 사건이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사건을 보는 미사키였기에 간바라 검사나 조원들이 집중하지 않는 부분을 의심스럽게 여기며 사건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미사키는 어느 순간부터 아프다는 이유로 검찰청에 나오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역사에 길이 남을 음악가인 베토벤이 미사키에게 각성을 일으키게 되는 건 운명이라고 느껴졌다. 작곡가에게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건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으나 베토벤은 그런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훌륭한 곡을 남겼다. 아모가 미사키를 데리고 간 음악회에서 베토벤의 곡이 연주된 건 미사키에게 음악의 길은 필연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덕분에 깨달음을 얻고 법률가의 길에서 벗어나 음악가의 길을 걷기로 다짐한 것이었다. 천재적인 두뇌로 무엇이든 잘 해냈을 미사키지만, 그에겐 피아니스트가 제일 잘 어울린다.

이번 소설도 재미있게 잘 읽었다. 언제나처럼 미사키를 향한 예찬이 과도하긴 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익숙해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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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융통성이 없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전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것을 동경하는 경향이 있고 그러니 법조계에 별 매력을 못 느끼는지도 모르겠네요." - P92

"그 녀석은 분명 우리와 달라.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지만 어떨 때는 그냥 재미 삼아 사법연수원에 들어온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어. 하지만 우리와 다른 게 비난받을 이유는 되지 않잖아." - P280

진정한 미사키는 지금 무대 위에 있는 저 남자다. 손가락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며 긴장과 평안, 통곡과 환희를 원하는 대로 부르는 마술사가 바로 미사키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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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영원한 우정으로 1~2 세트 - 전2권 스토리콜렉터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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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연구소장이 본업인 헤닝 키르히호프는 얼마 전에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 시리즈를 펴내서 인기를 얻고 있다. 새로운 시리즈를 내서 이제 곧 바빠질 예정인 그가 전 부인이자 강력반 형사인 피아에게 연락을 한 것은 자신의 에이전트인 마리아 하우실트의 친한 친구인 출판사 편집자 하이케 베르시가 연락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피아는 성인이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경찰에 알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지만, 마침 헤닝에게 부탁할 게 있기도 해서 들어주기로 한다.
하이케 베르시의 집으로 찾아간 피아는 집 앞에서 마리아를 만났는데, 그녀는 자신의 친구가 이렇게까지 연락이 안 되는 게 이상하다고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어찌어찌해서 집으로 들어간 피아는 집 위층에서 발목에 사슬이 묶인 노인을 발견한다. 하이케 베르시의 아버지인 그는 치매 환자였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수사를 시작했고, 곧바로 부엌에서 누군가가 피를 잔뜩 흘린 흔적을 발견했다.

하이케 베르시는 30년간 몸을 담았던 빈터샤이트 출판사에서 갑자기 해고되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출판사를 세우기 위해 직원과 작가들을 빼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는 방송에도 종종 출연해 새로운 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일삼던 사람이라 적이 너무나 많았다. 대학시절부터 친했던 그녀의 오랜 친구들은 하이케의 그런 성격을 알고도 30년 가까이 이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는 게 특이점이었다.



친구가 사라졌다고 경찰에 연락을 하는 건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 입장에서는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며칠 동안 연락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하이케를 찾는 마리아는 친한 친구가 연락도 없이 사라져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았지만, 정작 하이케의 집 안으로 들어가 치매 아버지를 발견했을 때는 놀라고 말았다. 집에 아버지를 모셔뒀다는 얘기를 하이케에게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친하다고는 하는데 그런 사실조차 몰랐다니 뭔가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다.
하지만 사라진 하이케에 대해 밝혀지면서 그녀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녀에 의해 책이 난도질당한 작가들은 물론이고, 얼마 전에 해고된 출판사 직원, 그리고 이웃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누가 하이케를 해쳤을지 찾아내는 게 관건이었지만 너무나 많은 등장인물로 인해 범인을 쉽게 예상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실종 상태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시신이 발견된 하이케 사건을 시작으로 출판사 직원이자 하이케의 오랜 친구들 중 한 명인 알렉산더 로트가 길에서 자전거를 타다 쓰러져 혼수상태가 된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망하게 되는데, 알코올중독자였다가 겨우 술을 끊은 그가 최근에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거기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그 사실을 알고 알렉산더가 마시는 술병에 메탄올을 넣었다는 정황까지 드러나 본격적으로 살인사건 수사가 시작됐다.

이렇게 수사를 하는 와중에 피아와 보덴슈타인의 개인적인 이야기 또한 함께 진행됐다.
보덴슈타인은 재혼한 카롤리네의 딸 그레타와 관계가 너무 안 좋았다. 참고 넘기려고 애를 썼지만 자신의 딸 소피아에게까지 악의를 드러내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카롤리네가 그레타를 감싸고 돌기만 해서 관계 개선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와중에 전 부인인 코지마가 간암에 걸렸는데, 마침 보덴슈타인의 간이 그녀에게 이식하기 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와서 수술 날짜를 잡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아는 전 남편 헤닝이 쓴 소설 때문에 남편 크리스토프가 화가 나서 곤란해졌다. 헤닝이 쓴 소설은 하필이면 피아와 보덴슈타인 콤비가 해결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실제 주인공과 다른 이름으로 바꾸긴 했어도 크리스토프라는 걸 뻔히 알 수 있는 상황을 묘사했기 때문이었다. 그 상황이 크리스토프에겐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는 게 화를 돋우게 했다.

시리즈의 두 주인공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이번 사건의 수사가 언제나처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며 진행됐다. 그리고 추리력이 없다시피한 나는 늘 그렇듯 이번에도 범인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소설이 흐르는 대로 이 사람인가, 아니면 저 사람인가 하고 따라가기만 했다. 그러다 우정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이들의 비밀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충격을 줬다. 그들을 뭉치게 한 건 우정이 아니라 이기적인 욕심과 누군가가 아니면 절대 손에 넣을 수 없는 보장된 미래였다. 가지지 못한 자의 추함이 적나라해서 혐오감이 들었다.

늘 등장인물이 많은 소설이지만 언젠가부터 주요 인물들을 표기해 줘서 이 사람이 누군지 페이지를 넘겨 찾으면서 읽지 않아도 돼서 좋다. 벌써 10번째 시리즈라 피아와 보덴슈타인에게 정이 많이 들어 친밀감까지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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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는 비난을, 특히 친구의 입에서 나오는 비난을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게 의심스러웠다. 우정은 솔직하지 않음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가 많았다. 진실을 말한다면 대부분의 우정은 금방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1권 - P312

"제 남편에게 출판사와 영원한 친구들은 언제나 우리보다, 가족보다 더 중요했어요. 두 분도 저 위에서 보셨잖아요. 거긴 폐쇄된 회원제 클럽이에요." 1권 - P303

그들은 학창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고 연락이 끊어지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관계가 지속됐다. 무엇이 그들을 묶어뒀을까? 함께한 젊은 날의 추억은 평생 지속되는 우정의 기초로 충분할까, 아니면 그들은 자신의 과거를 예찬해 주는 오래된 지인에 더 가까울까? 그런데…… 왜 묶여 있을까? 1권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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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 있잖아 오늘의 젊은 작가 28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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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중학생 '나'는 심한 말더듬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웅변 학원에도 다녀봤지만 도무지 고쳐지질 않았다. 하도 말을 더듬어서 친구도 사귈 수 없었고, 국어 선생은 말을 더듬는 나를 고쳐주겠다며 아이들 앞에서 망신을 주는 것만 같다.

이번에 엄마가 보내준 곳은 언어 교정원이었다. 덩치가 큰 남자 원장님이 나를 상담해 줬고, 곧바로 그곳에 다니는 사람들과 만나게 됐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본명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말하기 어려운 단어를 이름 대신으로 불렸다. 나는 무연중학교에 다닌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워서 이름이 '무연'이 됐다. 그곳에서 나는 같은 학교 3학년 누나인 '루트'와 비슷한 나이의 '곰곰이', 그리고 나중엔 이모라 부르게 된 '처방전', 소설가 '마야코프스키', '할머니' 등의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본명이 등장하지 않는 소년 무연은 심한 말더듬증으로 인해 아이의 사회생활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학교에서 외면을 받았다. 같은 반 아이들에게는 물론이고, 선생마저 무연의 말더듬증을 놀리는 것만 같았다. 변명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건 말을 시작했을 때 또 버릇처럼 말을 더듬게 될까 봐 그랬다. 그래서 무연은 자신의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마음속에는 상처가 자꾸만 생겨나고 있었다.

말더듬증을 고치기 위해 엄마는 무연을 여기저기 보냈던 모양인데 다 잘 안된 듯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잘 안될 거라 여겼지만, 언어 교정원은 뭔가 달랐다. 독특하면서도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다니던 그곳에서 언어 교정 수업을 통해 무연은 말더듬증을 고치는 것보다 일단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자신도 모르게 배우게 된 것 같았다. 말을 더듬어서 시작조차 해볼 수 없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그곳의 사람들은 기다려줬고 소리 내지 않고 응원을 해주는 것처럼 느껴져서 무연은 조금씩 말을 먼저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단번에 그 일이 일어난 건 아니었던 터라 수업의 일환으로 거리로 나가 모르는 사람에 말을 걸거나 스피치 같은 걸 해야 했지만 점점 발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런 동시에 무연의 가정 내에서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상황으로 인해 또 다른 고통에 처해 있었다. 때때로 술을 마시면 괴로워하고 상처 주는 말을 꺼내는 엄마에게 무연은 애증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가 만나는 남자친구는 모두 제대로 된 사람들이 없었기에 그것 또한 무연에게 괴로움을 안겨줬다. 이전에 만났던 쓰레기가 다시 집에 들어와 함께 지내게 되면서 무연은 집보다 교정원이 더 편안할 지경이었다.

무연을 중심으로 교정원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가면서 언어적 교감과 비언어적 교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모든 이들은 대부분 언어를 통해 생각과 감정을 나누고, 상대를 파악하기 마련이다. 비언어적 교감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표정을 통해 상대가 나에게 호감이 있는지 아니면 싫어하는지 판단할 수도 있다.
이 소설 속 교정원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헤아리는 방법을 터득한 듯싶었다. 물론 언어나 기록이라는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 마음을 전달할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말하지 않아도 먼저 헤아리고 이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말이 상처를 줄 때도 많다는 걸 알고 있기에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거라고 말이다. 아무래도 그들이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들리는 말이 아닌 마음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과정이 이 소설만의 방식으로 그려졌다. 소설 후반엔 큰 사건이 일어나 어떻게 될지 걱정됐지만, 어느새 진심을 나누게 된 관계 덕분에 무사히 해결되어 다행이었다.

짧은 소설이었지만 이 속에 담긴 관계와 언어, 진심 등이 마음에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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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시키지 않으면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나는 이제 괴롭힘조차 당하지 않는 존재감 없는 존재가 됐다. 투명 인간처럼,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사람이 됐다. 꼼짝도 않고 서 있는데 걸어가는 사람들 중 누구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 P36

왜 사는 걸까. 생각하고 또 해 봐도 살 이유를 찾지 못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죽고 싶지 않은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살아갈 이유도 없는데 살고 싶고 죽고 싶지 않은 이유도 없는데 죽고 싶지 않다니. 왜 나는 이유 없이 이렇게 사는 걸까?
(……중략)
왜 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냥. 그냥 살아.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 그래. 그냥 사는 게 사는 데 있어 가장 큰 이유야. 다른 이유는 없어. - P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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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숨
김혜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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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않은 미래 동화 작가 여경은 전통주 빚기 취미반에서 민서를 만났다. 동화를 쓰고 싶다는 민서와 가까워지게 된 여경은 부다페스트에 갈 예정이었는데, 마침 민서가 남자친구 진수가 그곳에 있다며 도움을 받으라고 하며 소개해 주었다. 부다페스트에서 진수와 가까워진 후 귀국한 여경은 민서, 진수를 만나 시간을 보낸다.
가만히 바라보면 요가원 강사인 '나'는 허리를 다쳐 요가 수업을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몸을 담고 있는 요가원에서는 나의 편의를 봐주지 않아 일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통증이 줄어들 때쯤 태국 파타야로 떠나왔다. 더운 그곳에서 한동안 지내던 나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트랜스젠더 잠과 가까워진다.

아버지가 없는 나라
한아를 '해나'라고 부르는 아진이 한국에 다시 왔다. 한국인이지만 미국으로 입양된 아진은 생물학적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이곳에 오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준비를 하던 아진은 그에게서 메시지를 받는다. 번역기를 이용한 그 메시지는 찾아오지 말고 연락도 하지 말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모니카
일 때문에 뉴욕을 찾은 정지은은 20년 전 미국에 왔을 때 만난 모니카가 떠오른다. 택시를 운전하던 일본계 미국인 모니카를 만난 이후 어학연수를 마치고도 미국에 눌러앉아 딸 한아를 낳았을 만큼 그녀를 사랑했다. 20년 만에 다시 미국을 찾은 정지은은 모니카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두려움을 안고 있다.

비터스윗
요가 강사인 진아는 다정하고 잘 챙겨주는 진 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하다. 그녀와 함께 요가원을 차리는 미래를 그리지만, 진 언니의 아들 제이슨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진아의 남자친구 준과의 관계 또한 점점 버거워진다.
레드벨벳
'나'는 소설로 영어 토론 수업을 하는 원어민 강사 해럴드와 어쩌다 함께 차를 마시게 된다. 그와 대화했던 시간은 나에게 편안하고도 즐거운 시간이라 그와 함께 다시 차를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해럴드는 자신의 아내에게 미안하다며 차를 마시자는 나의 제안을 거절했다.
코너스툴
40대 소설가 이오진은 6살 때 만난 예지가 어느덧 성인이 되어 베스트셀러 작가로 나타난 걸 보며 20여 년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예지의 아빠이자 독립서점을 운영하던 박호산 씨와 함께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눴던 시간은 어느 날 이후 완전히 단절되었다.




<아버지가 없는 나라>와 <모니카>가 서로 조금 관련 있던 것만 제외하면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단편집이었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나를 돌아보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아버지가 없는 나라>는 입양된 한국인 아진을 통해 한아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있었다. 생부에게 버림받은 아진이 끝끝내 생모를 만나고선 자신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다. 그녀와 동행했던 한아는 20여 년 전에 미국에서 엄마, 모니카와 살 때가 떠올랐다. 한아는 모니카를 너무나 좋아했지만 자신을 버렸다고 여겨 내내 인정하기 두려웠던 감정을 마침내 받아들이자 그녀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아진과 동행하면서 한아는 두려움과 보고 싶은 양가적 마음 역시 자신의 것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가 없는 나라>에 이어 곧바로 등장한 <모니카>는 한아의 엄마 지은의 시점으로 진행됐다. 지금보다 더 보수적인 시절에 미국에서 모니카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자신의 잘못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다시 미국을 찾게 된 후 모니카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한아의 엄마라 그런지 지은 역시 양가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레드벨벳>과 <코너스툴>은 겉으로는 결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부분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레드벨벳>의 '나'는 그저 친구로서 해럴드와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상대에 의해 그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로 인해 마음이 상했는데, 도리어 해럴드가 나를 놓지 못하는 듯 느껴졌다. 한국인 아내, 감당하기 버거운 딸로 인해 정서적 교감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였다.
그런가 하면 <코너스툴> 역시 유부남 박호산과 소설가 이오진의 관계를 보여줬는데, 박호산의 아내의 오해로 관계가 절단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오진은 이성적인 감정이 생겨날 수 없는 박호산과 친구로 지내고 싶었지만, 세상의 시선으로 인해 자신을 숨기는 선택을 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20여 년이 지난 후에야 그 진실을 드러냈는데 어쩌면 너무 늦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만나 관계를 이어가면 당연한 기대가 생기기 마련인가 보다. 그 관계가 좋지 않다면 더는 이어가지 않고 끊으면 그만일 테지만, 상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가 더는 그 관계를 지속할 수 없을 땐 아쉽기만 하다. 그 과정에서 나를 돌아보고 스스로 일어서는 사람도 있었고, 아쉬운 마음을 뒤늦게 어떤 방법으로든 고백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무엇보다 나라는 존재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에게 의존하고 기대는 것보다 나를 우선시하는 것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끊을 때, 혹은 끊어질 때 자존감을 잃지 않고 스스로를 좀먹지 않는 방법인 듯하다.


"내 과거를 찾아야만, 내 친부모를 찾아야만 내가 완전해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단지 내 망상에 불과했어. 그래. ‘나‘라는 존재는 어느 누구에게서 발생한 게 아니고, 어느 누구에게 속해 있지도 않았어. 나는 그저 존재할 뿐이지. 마치 그날 바라본 친어머니의 눈처럼, 그 속에 담긴 하나의 영혼처럼, 나도 그저 존재하고 있어. 내가 잃어버린 퍼즐 조각은 나의 친부도 친모도 아닌, 나 자신이었어. 내가 찾아야 할 존재는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진실." <아버지가 없는 나라> - P138.139

두려웠다. 내가 저지른 행동을 그가 되돌려줄까 두려웠고, 비극이 재현될까 두려웠다.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피하고만 싶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알고 싶었다. 결국 비극이 도래할지라도 아직 보지 못한 결말을 향해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모니카> - P178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모두에게서 등진 채로 떠나면, 우리가 꿈꾸던 진실한 삶이 그곳에 있을 것 같아? 그럴 수도 있겠지. 그곳에 진짜 내가, 진짜 내 삶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꿈을 이루면 영원한 행복에 이르러 두 번 다시 불행과 불안을 느끼지 않으며 살 수 있을까? 너는 정말로 그렇게 믿어? <비터스윗>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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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원더 아르테 오리지널 14
엠마 도노휴 지음, 박혜진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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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8월.
영국인 리브 라이트는 일하는 병원 수간호사에게서 어떤 환자의 곁을 2주 동안 지키는 일을 제안받는다.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그 환자를 관찰만 하면 된다는 그 일의 보수는 생각보다 굉장했다. 거기다 아일랜드를 오가는 비용과 생활비까지 주는 일이라 한편으로는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리브는 일을 수락하고 아일랜드로 향했다.

아일랜드에 도착한 리브는 2주 동안 머물 식료품점의 숙소에 짐을 풀고 돌봐야 할 환자인 오도널 가족의 주치의인 맥브리어티 선생을 따라간다. 리브의 동행길에는 수녀 미카엘도 함께였다. 리브와 미카엘이 시간을 정해 번갈아가며 환자를 돌봐야 된다는 사실을 그들을 마주하고서야 알게 됐다.
오도널 가족의 집을 찾은 리브와 일행은 환자인 애나를 만난다. 애나는 4개월 전인 11살 생일에 성체를 먹은 뒤 그 어떤 음식도 먹지 않고 여태껏 지내고 있었다. 찻숟가락으로 하루에 몇 모금의 물만 마시는 애나는 4개월 동안 굶은 것치고는 너무나 생기발랄한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리브는 단번에 거짓이라 의심하고 진실을 밝혀낼 거라고 다짐한다.
그때부터 리브와 미카엘 수녀는 하루에 8시간씩 애나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일을 시작한다.



사람은 음식을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며칠 혹은, 극한에 몰린다면 기적적으로 1~2주까지 살 수도 있을 테지만 아마 아사 직전에 이른 상태이지 않을까 싶다.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생명을 이어가는 데에 중요한 행위 중 하나이고, 성인이 아닌 유아, 어린이, 청소년 등에게는 특히나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관찰 대상인 11살 애나는 무려 4개월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먹지 않아도 괜찮다는 애나는 음식을 보고도 그 어떤 욕망을 느끼지 않는 듯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부모나 가족에 의해 억지로 굶는다면 태연한 척해도 막상 음식을 마주하면 정신을 차리지 못할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거기다 생각보다 혈색이 좋았으니 리브가 의심하는 게 당연했다.

소설은 이렇게 리브의 시점으로 진행되며 오롯이 그녀의 감정에 따라가게 만들었다. 음식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주장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그녀처럼 애나를 의심했다. 그러다 가족들이 독실한 신자임이 밝혀지면서 부모인 맬러키와 로절린을 의심하게 됐다. 아이가 먹지 않겠다고 아무리 말해도 부모라면 제 자식의 입에 뭐라도 넣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할 텐데, 그들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기적을 보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을 반기며 신에게 기도를 했고, 손님들이 나갈 땐 기부를 한다는 명목으로 돈을 두고 가는 걸 용납했다. 아무리 봐도 부모, 특히 엄마 로절린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로절린은 신을 믿지 않는 리브를 대놓고 경계했으니 바른 눈으로 그녀를 볼 수가 없었다.
의심의 방향이 애나에서 로절린으로 향하면서 리브가 머무는 숙소에 기자 윌리엄 번이 나타나 취재를 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리브가 애나를 위해 다른 손님을 들이는 걸 막은 탓이라 그는 애나를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땐 생기 넘치던 애나가 눈에 띄게 쇠약해지고 죽어가는 게 자신의 눈에도 보이게 된 리브는 관찰이라는 원래의 목적은 버려두고 아이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여태껏 밝혀지지 않은 비밀이 드러나 충격에 빠뜨렸다. 그 비밀이 애나의 입을 통해 드러났을 때 너무나 추악하고 역겨워서 책을 읽는 도중에 욕설이 튀어나왔다. 안 그래도 이전에 등장한 중의적인 문장으로 인해 뭔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예감이 적중해 너무나 화가 났다. 그로 인해 벌어진 일들은 모두 어른들의 탓이라 애나가 짓지도 않은 죄를 짊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가엽기만 했다. 이제는 친구가 되어 진심으로 애나를 걱정하며 제발 뭐라도 먹어달라고 청하는 리브의 말을 거부하는 모습이 너무나 답답했다. 이러다가 애나가 진짜로 죽을 것만 같아서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다행히 리브의 기지가 빛을 발해 죽음의 강을 건너기 직전이었던 애나를 구원해냈고,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던 윌리엄 또한 애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선택을 했다.

19세기 아일랜드에서 실제로 있었던 '단식 소녀'를 모티브로 지어낸 소설이었다.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온갖 욕구 중에 먹는 게 가장 중요한 내 입장에서는 추체험을 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던 책이다. 거기다 비밀이 밝혀진 이후에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거짓과 기만으로 점철된 인간들에게 신의 기적 따위는 없으니 주변을 제대로 좀 봤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결말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험난했지만 이제는 편안하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해피엔딩이라 마음을 놓았다. 애나에게 리브가 구원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리브에게도 애나를 통한 구원이 이루어진 이야기라 둘의 관계성이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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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주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함께하며 그분께 애도를 표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식은 유용한 속죄의 방식이 될 수 있어요."
"스스로 벌을 주면 죄가 용서된다는 뜻인가요?" 리브가 물었다.
"다른 이의 죄가 용서되기도 하죠." 수녀가 나직이 말했다. - P36

"어제로부터 4개월 전인 4월 7일. 그날 아침부터 주님의 물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어요."
리브는 역겨움에 속이 울렁거렸다.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어떻게 엄마라는 사람이 이렇게 신나서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 P42.43

문득 리브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지금 던져야 할 질문은 아이가 이런 사기를 어떻게 저지르느냐가 아니라 왜 저지르느냐이지 않을까? - P139

"우리는 아무 짓도 안 하고 있어요!"
"우리는 매 순간 감시를 하고 있어요. 아이를 나비처럼 핀으로 고정해둔 거라고요."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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