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큼 가까이 - 제7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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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파주의 황량한 동네에서 '나'와 송이, 찬겸, 수미, 민웅이 늘 함께 다녔고, 머나먼 인도에서 서울도 아닌 이곳으로 전학을 온 주연이까지 합류해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늘 같은 버스를 타는 멤버였던 그들은 누가 누구를 좋아했고, 좋아하던 애가 학교 최고의 퀸카와 사귀어 관계가 껄끄러워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모종의 일로 가출을 한 친구를 관심 없는 것 같던 다른 친구가 잡아온 사건도 있었다.

물론 늘 즐겁기만 한 일만 있던 건 아니었다. 저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들을 숨기고 살았고, 지울 수 없는 큰 사건으로 여섯 친구 중 한 명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그랬던 시절을 현재 영화미술을 하는 내가 회상하며 친구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낸다.




마지막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는 화자는 그냥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국수 가게를 하는 집의 딸, 놀 거리가 없는 파주에서 산다는 점 외에는 특별할 게 없었다. 친구들 역시 저마다의 특색이 있긴 해도 학창 시절에 한 번쯤 친하게 지냈을 친구들 타입이었다. 시대를 앞서가는 패션 센스를 지녔던 친구가 있었고, 친구들과 늘 같은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도 공부만 했던 아이가 있었다. 화자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과수원 집 아들이 있었으며, 유일하게 외국물을 먹고 온 주연이가 있었다.

그들이 함께 어울려 노는 과정 역시 평범했다. 시내라고 부르는 곳에 나가 놀고, 짝사랑 실연의 상처를 입은 친구를 달래주기 위해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일도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왠지 나와 비슷한 시대에 학교를 다닌 것 같아 공감대가 형성되어 몰입해서 책을 읽었다.

그때의 아이들에게는 사랑이 퍽 중요했던 게 어쩌면 당연했을지 몰랐다. 친구지만 어느새 마음을 품은 아이에게 차마 고백은 하지 못하고 티 나게 마음을 표현하는 게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엽기도 했다. 고백을 하면 끝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안쓰러웠다. 주인공인 화자 역시 사랑을 하고 있었다. 주연이의 오빠 주완이였는데 그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집에서 온갖 영화들을 보는 취미가 있었다. 그런 그에게 빠진 화자는 먼저 입술을 맞대기도 하고, 데이트 신청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외사랑이 아닌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10대의 사랑이 그러하듯 끝이 좋지가 않았다.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아도 접을 수 없는 마음들은 새 종이에 남은 자국과도 같았다. 특히 화자의 사랑이 그랬다. 책을 읽으며 단순하게 흘려넘겼던 부분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기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화자가 상실감과 죄책감으로 마음의 병까지 얻게 됐던 걸 보며 어렸을 그 나이에 일어난 사건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첫사랑은 잊을 수 없다는데, 화자에게 첫사랑은 아픈 조각으로 남아 그 아픔을 언제까지고 품어야 할 터였다.


고등학생 때 많은 일을 겪은 후에 성인이 된 그들은 소원할 때도 있었지만, 현재는 모일 때마다 예전처럼 깔깔거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시간에는 그때와 다르게 알코올이 있었고 모두 경제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대화의 깊이가 조금은 달라지긴 했지만 마음만은 그 시절이었다.

이들의 관계가 읽는 내내 무척이나 부러웠다. 그 시절 내게도 네다섯 명의 친구들과 늘 어울리며 즐거운 때를 보냈었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이제는 이름마저 희미해져버린 이들이지만, 그때는 그 친구들이 중요했고 또 좋아했기에 소중한 시절로 남아 있다. 그 시절이 현재까지 이어진 인연이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에 화자와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잊을만하면 읽고서 좋았다는 감정을 남기는 정세랑 작가의 소설 <이만큼 가까이>는 역시나 좋았다. 이렇다 할 줄거리가 딱히 없어서 처음엔 붕붕 떠다닌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부유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그 시절의 한순간을 붙잡아 이야기하고서 다시 기억 속으로 놓아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추억의 일부분을 들춰내는 것 같은 표현이라 좋았다.

정세랑 작가의 엉뚱하고도 따뜻한 이야기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번 소설은 비슷한 청소년기라는 느낌이 들어 감정적으로 몰입해서 읽었다. 정세랑 작가만의 유머와 아픔과 따뜻함이 참 매력적이다.

어떤 땅은 살아도 살아도 설다. 풍경이 아름다운 것과는 별개로 설다. 설어서 아름다울 때도 있다. 아이고, 설어라. 나는 할머니를 흉내 내며 속으로 말했다. 설어서 서러운가. - P246

정말로 놀라운 건, 종종 내 친구들과 똑같안 얼굴의 아이들과 마주친다는 것이다. 친척도 아니고 아무도 아니다. 아무 관계도 없이 그렇게나 똑같은 얼굴로 태어난다. 누군가 이 세계에 우리와 똑같은 얼굴들을 계속 채워 넣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두려운 것은 그 똑같은 얼굴 뒤의 거의 다르지 않을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유일하지도 않으며 소중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대체된다. 모두가 그 사실에 치를 떨면서. - P10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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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씨의 눈부신 일생
앤 그리핀 지음, 허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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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살의 모리스 해니건은 한때 지역 유지의 저택이었다가 지금은 호텔이 된 그곳의 바에 앉아 지난날을 회상한다.

모리스가 어렸을 때 부모보다 더 의지했던 형 토니가 있었고, 고작 15분의 기적이었던 몰리가 있었다. 처제 노린, 아들 케빈, 그리고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내 세이디에 대해 차례로 떠올린다.


그리고 그는 호텔 바를 떠나 어디론가 향한다.




소설은 독특하게 서간체 형식으로 쓰여 있었다. 모리스가 호텔 바에 앉아 아들인 케빈에게 말을 거는 듯, 편지를 쓰는 듯한 형식의 문장이었다. 그래서 여느 소설보다는 문체가 부드러워서 읽기 수월했지만, 내용은 그다지 편하지만은 않았다.


모리스는 2년 전에 아내 세이디를 떠나보내고 혼자 사는 삶에 점점 회의를 느껴 지금에까지 온 것 같았다. 어떤 각오를 한 듯한 그는 종종 들르곤 했던 호텔 바에 앉아 술을 마시며 과거에 젖어들었다.

처음엔 어릴 적 이야기였다. 이곳이 호텔이 되기 전에 마을의 큰 농장주 돌러드의 대저택이던 시절 모리스는 엄마와 함께 이 집 일을 했었다. 돌러드 씨만큼이나 악랄했던 아들 토머스는 모리스가 또래라서 그런지 심심하면 폭행을 했고, 나중엔 얼굴에 큰 상처가 남아 지금까지 흉이 졌을 만큼 때리고 또 때렸다. 그러던 중에 창 밑에 떨어진 금화를 주운 사건 이후 돌러드 집안의 후계자 토머스의 삶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러면서 늘 믿고 의지했던 형 토니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였다.

몰리는 세이디와 결혼한 후 어렵게 가진 아이였지만 모리스가 자책을 하게 만든 비극이 있었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처제 노린과의 이야기는 어떤 부분에서 보면 조금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반짝이는 것만 좋아하던 노린을 회상하며 모리스는 지난날의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었던 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아들 케빈과 아버지 모리스의 관계는 여느 부자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뒤늦게 후회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사랑하는 아내 세이디는 모리스의 전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모리스가 살면서 만난 사람들 중 중요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후회가 느껴졌다. 케빈은 일 때문에 미국으로 간 것이었지만 어찌 됐든 그들 모두는 모리스의 곁을 떠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이 떠난 뒤에야 모리스가 깊이 후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리스의 곁에 있을 때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소중함이 떠난 뒤에야 폐부를 찌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그러면서 각 장마다 건배를 외쳤던 그들 모두가 모리스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얼마나 사랑하는 존재인지 깨닫게 했다. 비록 마음을 다해서 표현하지 않았던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들 덕분에 모리스의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고 충만한 사랑을 느끼며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런 모리스의 회고를 읽으며 '눈부신'이라는 형용사에 어울리는 인생은 아니라고, 후회 많은 인생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삶을 살아온 당사자인 모리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삶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운을 남겼다.

이제 다섯 번 중에서 첫 번째 건배를 할 준비가 됐다. 다섯 번의 건배, 다섯 명의 사람, 다섯 개의 기억. - P38

나에게도 너무 벅찬 일이었다. 네 살짜리 아이는 고사하고 마흔세 살인 남자도 세이디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어. 자신을 사랑하라고?
(……중략)
세이디가 너에게 그런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을지 궁금하구나. 그래서 지금의 네가 된 걸까? 삶을 굳게 믿고 만족하는 사람이? - P214.215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 전까지는 아무도, 정말 아무도 상실을 몰라. 뼈에 달라붙고 손톱 밑으로 파고드는 마음 깊이 우러나는 사랑은 긴 세월에 갈쳐 다져진 흙처럼 꿈쩍도 안 한다. 그런데 그 사랑이 사라지면…… 누가 억지로 뜯어간 것 같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드러낸 채 빌어먹을 고급 카펫에 피를 뚝뚝 흘리며 서 있는 거야. 반은 살아 있고 반은 죽은 채로, 한 발을 무덤에 넣은 채로 말이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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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번의 세계가 끝날 무렵
캐트리오나 실비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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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퀼른의 한 대학에 입학한 소라 리슈코바는 신입생들의 친목을 다지는 행사가 즐겁지가 않다. 행사 장소를 빠져나와 시계탑 광장으로 향한 그녀는 풀밭에 누워 있는 다른 학생을 만난다. 자신과 같이 외국인 유학생인 산티아고 로페즈 로메로였다. 소라와 산티는 이런 행사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나눈 후에 함께 시계탑에 올랐고 연락처를 교환한 뒤에 헤어졌다.

소라는 산티가 궁금했지만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 주일 후에 산티가 시계탑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난 시간을 후회한다.


이후 소라와 산티는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나이대, 각양각색의 관계 속에서 둘만의 인연을 이어나간다. 그러다 두 사람이 퀼른이라는 이 도시에 영원히 갇혔다는 걸 깨닫게 된다.




퀼른에 유학생으로 온 소라와 산티의 첫 만남은 운명인 것 같았지만, 그 이후에 연락하기를 주저한 소라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시계탑에서 떨어져 죽은 산티로 인해 그렇게 끝이 날 줄만 알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으로 넘어갔을 때 이 소설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깨달음을 줬다. 다음 장에서 산티는 25년 차 과학 교사였고 소라는 갓 입학한 7살 어린이였다. 둘은 이 우주에 대해 자기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소라의 부모가 아이를 전학시키면서 둘의 관계는 끊어졌다.

이후로 소라와 산티는 여러 삶 속에서 관계를 맺어나갔다. 연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관계가 있었고, 산티와 아내 엘로이즈가 보육원에서 소라를 입양하는 삶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쌍둥이 남매로 태어나기도 했고, 물리치료사와 나이 든 노인, 교수와 대학원생, 경찰 선후배도 있었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산티와 소라는 점차 서로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고, 이 세계가 어떻게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건지 의문을 품게 됐다. 두 사람이 이전까지 다른 곳에서 살 때는 인지하지 못했는데, 퀼른에 오면 이전 생들과 서로에 대해 기억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퀼른으로 오면 서로를 찾았고 반드시 만났다. 물론 이전 생의 마지막에 싸우고 헤어졌다면 일부러 찾지 않기도 했으나 그들은 어떻게든 만나게 됐다.

이 세계가 돌아가는 여러 규칙 중 한 사람이 먼저 죽고 다른 사람이 나중에 죽으면 다음 생에서 그만큼의 나이 차이가 존재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죽었을 때는 동갑내기로 태어났다. 그리고 산티와 소라에게는 각자 인연을 맺는 존재들도 있었다. 산티의 연인, 아내는 늘 엘로이즈였고, 누나 아우렐리아, 고양이 펠리세트, 친구 하이메가 있었다. 소라는 친구나 동료 릴리가 나타났고,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줄스였다.

이런 관계 속에서 여러 번의 삶을 되풀이하며 저마다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다 벗어날 수 없는 반복된 삶이라는 걸 깨달은 이후 그들은 이 세계를 벗어나 진짜 자신의 삶을 찾으려 했다. 소라는 퀼른의 경계를 넘어 다른 도시로 가려고 시도했지만 늘 기차가 고장이 나 특정 경계선 밖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산티는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서로 의견이 달라 감정적으로 치달아 소중한 존재들을 없애기까지 했던 그들은 마침내 진실을 찾게 되었다. 소설이 1/3 정도 지났을 때 갑자기 나타난 파란 외투 남자가 묘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후 다시금 그가 나타나면서 이곳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파란 외투 남자를 단서로 찾아낸 진실은 생각지도 못했던 거라 좀 놀라웠다. 진실을 알고 난 후에 약간은 안심이 되었지만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서 산티와 소라는 선택을 해야만 했고 그 결과는 의외로 이어져 다시금 안타까운 마음을 남겼다.


처음엔 로맨스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던 이야기다. 약간 김이 새는 것도 없지 않아 있는데, 수십 어쩌면 수백의 삶을 살아오며 이어져 온 관계가 알고 보니 별거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읽을 만했다고 생각한다.

"현실이 가끔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게 참 희한하죠? 원래 그러면 안 되잖아요. 우린 현실을 어디에 비교하면 좋을까요?"
"우리가 기억 못 하는 더 현실적인 것과 비교해야죠." - P20

모든 삶, 자신의 모든 버전으로 살고 싶은 욕구를 다른 사람들도 느낄까. - P147

소라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며, 이 별자리를 닻 삼아 살고 있는 걸 어떻게 설명할지 궁리해 본다. 소라는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눈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10여 개의 별자리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럴 때면 이 별자리표를 보면서 혼란을 가라앉힌다. ‘이게 네가 사는 세상의 별자리야. 여기가 네 삶이야. 네가 선택한 삶이라고.‘ - P151

‘별들의 위치가 계속 바뀌고, 도시가 끝없이 되풀이되며, 여기 진짜로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이 대답이 목까지 올라오지만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소라가 말할 때마다 변함없는 상수적 자아라는 그의 망상이 무너지고 있다. 어쩌면 그도 이 세상처럼 비현실일 수도 있지 않나? 그는 계속 변화하는 백 명의 소라의 꿈에 나오는 존재, 즉 또 다른 꿈이지 않을까? - P171.172

"어디서든 우리의 본질은 같아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린 늘 같은 사람이에요."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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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해피엔딩
조현선 지음 / 북로망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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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 연소미는 두 달 전부터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낯선 도시의 원룸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다. 가족도 없이 연고지도 아닌 곳에서 어린 그녀가 살게 된 건 삼촌, 남동생과 살던 집이 화재로 몽땅 타버렸다는 것인데, 그 화재로 인해 삼촌과 남동생 역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소미는 교도소에 드나드는 엄마는 기억나지 않을 정도라 살을 맞대고 사는 삼촌, 남동생과 가까워야 했지만 그들의 죽음이 그렇게 슬프지도, 그렇다고 잘 됐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그저 무덤덤할 뿐이다.

장원일 형사는 화재가 난 날 소미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곧장 오지 않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끼리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가 뒷산에서 잠이 들었다는 걸 의심했다.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잘 내려놓고 뒷산에서 잠든 그녀가 발견되기까지 40분이라는 시간의 공백을 소미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의심의 대상이 됐다. 형사의 의심에도 소미는 자신이 불을 지른 게 아니라는 걸 확신했기에 오랫동안 살았던 곳을 떠나 도시로 온 것이었다.


소미에게는 굉장히 특이한 친구가 하나 있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올 만큼 작은 곰 인형이었는데, 그 곰 인형이 말을 하며 소미와 대화한다는 사실이다. 소미는 중학생 때부터 곰이와 대화하며 지낸다는 걸 비밀로 했다. 곰이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소미는 그런 소중한 친구 곰이의 몸에 얼룩이 져 지워지지 않는 걸 보곤 근처 장난감 가게로 갔다. 중고 장난감을 팔거나 수리하는 곳이었는데, 그곳 사장인 우신과 친구이자 동업자인 민호가 소미를 반겨주었다. 소미는 장난감 가게에 드나들며 사장님들과 친해졌고, 그곳 덕분에 여러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성인이긴 해도 21살이라는 너무나 어린 나이의 소미가 혈혈단신으로 낯선 도시에 와서 사는 건 어려울 것만 같았다. 친구도 별로 없었고 이제는 가족조차 없어진 상황이 막막할 듯했지만, 소미는 조금 소심하긴 해도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잘 살아가고 있었다. 소미에게 가족인 삼촌과 남동생이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홀가분해 보였다. 소미의 엄마가 동생인 삼촌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가버린 이후 소미는 온갖 집안일을 다 해야만 했다. 남동생은 선천적으로 청각이 좋지 않아 말을 해도 잘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미는 음식과 빨래, 남동생의 뒤치다꺼리는 물론이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보태야 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정을 붙일 수 없던 게 당연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소미에게는 말하는 인형 곰이가 있었으니 삼촌, 남동생과 살던 막막한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고, 그들이 세상을 떠난 지금은 곰이와 알콩달콩 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곰이의 몸을 씻겨주고자 장난감 가게를 방문하면서 소미는 세상에 말하는 장난감, 물건이 곰이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장난감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중고 장난감, 중고 물건들은 저마다 소리를 내며 소미에게 말을 걸었다. 말이 명확하게 들리던 목소리도 있었고, 그저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린 경우도 있었다. 가게가 이렇다 보니 소미는 사장님들 역시 이런 소리를 듣는다는 걸 알게 되어 그곳을 편하게 드나들었다. 나중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신비로운 장난감 가게 덕분에 소미는 여러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소미가 사는 원룸의 앞집에 새로 이사 온 지희는 동갑내기 또래라 금세 가까워졌다. 옆집에 사는 강용수 아저씨와는 친해지지 못했지만, 그가 기타 연습을 엄청 열심히 하고 또 작곡도 잘 한다는 걸 지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생 철웅이는 우연히 곰이가 말하는 걸 본 이후 공부도 잘하고 멋진 친구 연우에게 그 사실을 말한 바람에 연우가 장난감 가게로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리고 서울로 이사를 갔다가 찾아온 10살 예림이는 여전히 소미를 의심하는 장원일 형사와 만나 가까워졌다.

장난감 가게가 주요 배경이다 보니 곰이처럼 말하는 중고 물건들이나 말을 하지 않아도 원래 주인과 깊은 유대를 형성한 물건들을 통해 저마다의 사연이 풀어지는 과정을 보여줬다. 나이 차이가 좀 나는 언니와 갑자기 사이가 안 좋아진 지희는 화해를 하기 위해 애를 썼고, 강용수는 장난감 가게에서 산 기타를 통해 좋은 인연을 맺게 됐다. 소미가 사는 원룸의 주인 할머니의 이야기는 먹먹한 여운이 남게 했다. 어리지만 똑 부러지는 연우와 예림이의 이야기는 흐뭇하게 끝나 안도했다.

그런 와중에 장난감 가게의 주인인 우신과 민호의 이야기도 나왔는데, 예상치 못한 흐름으로 이어져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장원일 형사에게 내내 용의자로 의심받던 소미가 결백하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등장한 숨겨진 이야기는 그야말로 크나큰 충격을 안겼다. 민호와 소미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에게 왜 말하는 물건, 무언가가 나타나고 곁을 지키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서글프지만 고마웠다.


소설 <두 번째는 해피엔딩>은 SNS에서 우연히 알게 되어 찜해둔 책이다. 마침 도서관 신착 코너에 있어서 빌려 읽었는데, 아기자기한 판타지 소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즐겁고 흐뭇했다. 물론 숨겨진 이야기로 인해 입이 떡 벌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소미와 그녀의 곁을 지키는 친구 곰이가 오랫동안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짙게 남았다.

"이 아이들은 애정에 반응해서 숨을 쉬기 시작해. 네가 어떤 존재에게 아낌없이 마음을 주면, 그리고 운 좋게 그 녀석들에게 힘이 있다면, 숨을 쉬면서 존재하기 시작하지." - P229

"네가 가진 나쁜 기억과 감정, 내가 가져갈게.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 P48

낡고 닳아빠진 물건들에는 기억이 고여 있다. 사람은 물건에게 애정을 주며 자신의 감정을 쏟아 붓는다. 그리고 희박한 확률로 그들이 깨어나서 주인의 소망을 이루어주려 노력한다. - P15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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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거시제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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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곡선의 수호자   심해 도시 건설 프로젝트 실사 현장을 담당하는 유희는 문득 어떤 쾌감, 희열을 느끼곤 그 감흥을 이어나가기 위해 휴가를 냈다. 자신이 휴가를 낸 사이에 연락을 받거나 잡다한 일을 처리해 줄 AI 마사로를 찾아냈지만, 그는 일을 하지 않았다. 마사로는 세상의 경제 구조를 하기 위해 돈을 쓰는 업무를 맡은 AI라는 걸 알게 된다.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파열음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파열음이 존재하는 시대의 인물을 연기하게 된 배우가 있다.

미래과거시제   은경은 튀르키예인 교수의 강의를 통해 오래전에 함께했던 사람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 이상한 구조의 건물 안에서 길을 잃었다가 만난 강은신이었다. 그는 미래의 일을 과거에 겪은 것처럼 말하는 잘못된 언어 습관이 있었는데, 은경은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깨닫게 된다.


접히는 신들   은경은 화성을 향해 가던 우주선 안에서 학생 때 같은 반이었던 서소희를 우연히 만난다. 소희는 종이접기를 굉장히 잘 했었는데, 알고 보니 지금도 그 종이접기 덕분에 정보기관 등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주선 안에서 가까워진 이후 은경은 소희를 통해 종이접기와 관련된 비밀을 알게 된다.

인류의 대변자   어느 날 외계인이 나타나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잠실의 타워를 우주선의 부두 접안 시설로 쓰고 있다. 우주군 소속 외계 대응 담당관인 은수는 중차대한 문제로 아침 브리핑을 위해 잠실로 향한다.

임시 조종사   로봇 조종술 재능이 있는 지하임은 드디어 취직을 하게 됐다. 로봇 전투를 하기까지의 전과정을 판소리로 그려냈다


홈, 어웨이   소설이 안 써져서 슬럼프에 빠진 은경에게 친구 한먼지가 찾아와 어떤 프로그램이 설치된 노트북을 주고 갔다. 홈팀인 흰색 유니폼을 고르라는 먼지의 말을 따른 이후, 은경은 그 프로그램을 통해 소설을 뚝딱 써냈다. 문장을 쓸 때마다 호응해 주는 응원 덕분이었다. 프로그램의 덕을 본 은경은  자신을 라이벌로 여기는 서소희에게도 소개해 준다.

절반의 존재   지하임은 비행기 추락 사로고 신체 절반을 잃었다. 상반신을 잃은 바람에 하임의 상체는 기계, 하체는 하임 자신의 것이었다. 아버지는 하임에게 기계를 이식하도록 결정했고, 어머니 안세미 씨는 그런 하임을 자신의 딸이라 여기지 않는다.

알람이 울리면   아내는 스토리 생성기라는 장치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맡고 있었다. 동면 중인 사람의 의식을 보다 안정적인 상태로 만드는 장치였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접한 '나'는 문득 미시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여러 편의 짧은 단편 소설 중에서 웃기면서 귀여웠던 건 <인류의 대변자>였다. 외계인이 잠실 롯데타워 위에 정박하고 있는 신기하고 무시무시한 상황에 브리핑이 있어 참석한 은수의 안건은 누군가에게는 의문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앞으로의 인생이 걸린 중요한 문제였다. 유니폼까지 챙겨 입고 브리핑에 참석한 중차대한 상황이 조금은 귀여웠다.

이야기가 독특하게 느껴졌던 건 <차카타파의 열망으로>였다. 파열음이라고 하는 센 소리의 한글이 전혀 쓰이지 않는 먼 미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이유는 코로나19 이후 비말 감염에 관한 상상을 이어가다 쓴 소설이라고 했다. 한글이 위대해서 파열음이 쓰이지 않는 단어도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들을 수 있어 신기했고 감탄했다.

소설 형식 자체가 특이했던 건 <임시 조종사>였다. 판소리 형식으로 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읽기는 어려웠지만 말이다.

<절반의 존재>와 <알람이 울리면>은 뭉클한 감정을 남겼다. <절반의 존재>는 비행기 사고로 크게 다쳤지만 목숨을 부지한 지하임이 상체는 기계로, 하체는 여전히 인간으로 존재하게 되면서 인간의 본질이 어디에 있느냐에 관한 의문을 남겼다. 그리고 <알람이 울리면>은 엔딩이 애틋했다.


앤솔러지 소설로 만난 적이 있는 작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 책으로 처음 배명훈 작가의 책을 처음 읽게 되었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였던 SF 소설집이었다.

"나는 행복하게 잘 살았어."
그 사람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우주를 건너, 혹은 나무의 나이만큼 오랜 시간을 넘어, 긴 잠에 빠진 나에게로 전해졌다.
"당신도 잘 살아, 어떤 세상에서 깨어나든. 그리고 잘 자, 부디." <알람이 울리면>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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