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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가까이 - 제7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파주의 황량한 동네에서 '나'와 송이, 찬겸, 수미, 민웅이 늘 함께 다녔고, 머나먼 인도에서 서울도 아닌 이곳으로 전학을 온 주연이까지 합류해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늘 같은 버스를 타는 멤버였던 그들은 누가 누구를 좋아했고, 좋아하던 애가 학교 최고의 퀸카와 사귀어 관계가 껄끄러워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모종의 일로 가출을 한 친구를 관심 없는 것 같던 다른 친구가 잡아온 사건도 있었다.
물론 늘 즐겁기만 한 일만 있던 건 아니었다. 저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들을 숨기고 살았고, 지울 수 없는 큰 사건으로 여섯 친구 중 한 명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그랬던 시절을 현재 영화미술을 하는 내가 회상하며 친구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낸다.
마지막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는 화자는 그냥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국수 가게를 하는 집의 딸, 놀 거리가 없는 파주에서 산다는 점 외에는 특별할 게 없었다. 친구들 역시 저마다의 특색이 있긴 해도 학창 시절에 한 번쯤 친하게 지냈을 친구들 타입이었다. 시대를 앞서가는 패션 센스를 지녔던 친구가 있었고, 친구들과 늘 같은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도 공부만 했던 아이가 있었다. 화자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과수원 집 아들이 있었으며, 유일하게 외국물을 먹고 온 주연이가 있었다.
그들이 함께 어울려 노는 과정 역시 평범했다. 시내라고 부르는 곳에 나가 놀고, 짝사랑 실연의 상처를 입은 친구를 달래주기 위해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일도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왠지 나와 비슷한 시대에 학교를 다닌 것 같아 공감대가 형성되어 몰입해서 책을 읽었다.
그때의 아이들에게는 사랑이 퍽 중요했던 게 어쩌면 당연했을지 몰랐다. 친구지만 어느새 마음을 품은 아이에게 차마 고백은 하지 못하고 티 나게 마음을 표현하는 게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엽기도 했다. 고백을 하면 끝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안쓰러웠다. 주인공인 화자 역시 사랑을 하고 있었다. 주연이의 오빠 주완이였는데 그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집에서 온갖 영화들을 보는 취미가 있었다. 그런 그에게 빠진 화자는 먼저 입술을 맞대기도 하고, 데이트 신청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외사랑이 아닌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10대의 사랑이 그러하듯 끝이 좋지가 않았다.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아도 접을 수 없는 마음들은 새 종이에 남은 자국과도 같았다. 특히 화자의 사랑이 그랬다. 책을 읽으며 단순하게 흘려넘겼던 부분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기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화자가 상실감과 죄책감으로 마음의 병까지 얻게 됐던 걸 보며 어렸을 그 나이에 일어난 사건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첫사랑은 잊을 수 없다는데, 화자에게 첫사랑은 아픈 조각으로 남아 그 아픔을 언제까지고 품어야 할 터였다.
고등학생 때 많은 일을 겪은 후에 성인이 된 그들은 소원할 때도 있었지만, 현재는 모일 때마다 예전처럼 깔깔거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시간에는 그때와 다르게 알코올이 있었고 모두 경제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대화의 깊이가 조금은 달라지긴 했지만 마음만은 그 시절이었다.
이들의 관계가 읽는 내내 무척이나 부러웠다. 그 시절 내게도 네다섯 명의 친구들과 늘 어울리며 즐거운 때를 보냈었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이제는 이름마저 희미해져버린 이들이지만, 그때는 그 친구들이 중요했고 또 좋아했기에 소중한 시절로 남아 있다. 그 시절이 현재까지 이어진 인연이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에 화자와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잊을만하면 읽고서 좋았다는 감정을 남기는 정세랑 작가의 소설 <이만큼 가까이>는 역시나 좋았다. 이렇다 할 줄거리가 딱히 없어서 처음엔 붕붕 떠다닌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부유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그 시절의 한순간을 붙잡아 이야기하고서 다시 기억 속으로 놓아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추억의 일부분을 들춰내는 것 같은 표현이라 좋았다.
정세랑 작가의 엉뚱하고도 따뜻한 이야기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번 소설은 비슷한 청소년기라는 느낌이 들어 감정적으로 몰입해서 읽었다. 정세랑 작가만의 유머와 아픔과 따뜻함이 참 매력적이다.
어떤 땅은 살아도 살아도 설다. 풍경이 아름다운 것과는 별개로 설다. 설어서 아름다울 때도 있다. 아이고, 설어라. 나는 할머니를 흉내 내며 속으로 말했다. 설어서 서러운가. - P246
정말로 놀라운 건, 종종 내 친구들과 똑같안 얼굴의 아이들과 마주친다는 것이다. 친척도 아니고 아무도 아니다. 아무 관계도 없이 그렇게나 똑같은 얼굴로 태어난다. 누군가 이 세계에 우리와 똑같은 얼굴들을 계속 채워 넣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두려운 것은 그 똑같은 얼굴 뒤의 거의 다르지 않을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유일하지도 않으며 소중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대체된다. 모두가 그 사실에 치를 떨면서. - P10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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