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번의 세계가 끝날 무렵
캐트리오나 실비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일 퀼른의 한 대학에 입학한 소라 리슈코바는 신입생들의 친목을 다지는 행사가 즐겁지가 않다. 행사 장소를 빠져나와 시계탑 광장으로 향한 그녀는 풀밭에 누워 있는 다른 학생을 만난다. 자신과 같이 외국인 유학생인 산티아고 로페즈 로메로였다. 소라와 산티는 이런 행사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나눈 후에 함께 시계탑에 올랐고 연락처를 교환한 뒤에 헤어졌다.

소라는 산티가 궁금했지만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 주일 후에 산티가 시계탑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난 시간을 후회한다.


이후 소라와 산티는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나이대, 각양각색의 관계 속에서 둘만의 인연을 이어나간다. 그러다 두 사람이 퀼른이라는 이 도시에 영원히 갇혔다는 걸 깨닫게 된다.




퀼른에 유학생으로 온 소라와 산티의 첫 만남은 운명인 것 같았지만, 그 이후에 연락하기를 주저한 소라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시계탑에서 떨어져 죽은 산티로 인해 그렇게 끝이 날 줄만 알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으로 넘어갔을 때 이 소설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깨달음을 줬다. 다음 장에서 산티는 25년 차 과학 교사였고 소라는 갓 입학한 7살 어린이였다. 둘은 이 우주에 대해 자기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소라의 부모가 아이를 전학시키면서 둘의 관계는 끊어졌다.

이후로 소라와 산티는 여러 삶 속에서 관계를 맺어나갔다. 연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관계가 있었고, 산티와 아내 엘로이즈가 보육원에서 소라를 입양하는 삶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쌍둥이 남매로 태어나기도 했고, 물리치료사와 나이 든 노인, 교수와 대학원생, 경찰 선후배도 있었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산티와 소라는 점차 서로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고, 이 세계가 어떻게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건지 의문을 품게 됐다. 두 사람이 이전까지 다른 곳에서 살 때는 인지하지 못했는데, 퀼른에 오면 이전 생들과 서로에 대해 기억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퀼른으로 오면 서로를 찾았고 반드시 만났다. 물론 이전 생의 마지막에 싸우고 헤어졌다면 일부러 찾지 않기도 했으나 그들은 어떻게든 만나게 됐다.

이 세계가 돌아가는 여러 규칙 중 한 사람이 먼저 죽고 다른 사람이 나중에 죽으면 다음 생에서 그만큼의 나이 차이가 존재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죽었을 때는 동갑내기로 태어났다. 그리고 산티와 소라에게는 각자 인연을 맺는 존재들도 있었다. 산티의 연인, 아내는 늘 엘로이즈였고, 누나 아우렐리아, 고양이 펠리세트, 친구 하이메가 있었다. 소라는 친구나 동료 릴리가 나타났고,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줄스였다.

이런 관계 속에서 여러 번의 삶을 되풀이하며 저마다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다 벗어날 수 없는 반복된 삶이라는 걸 깨달은 이후 그들은 이 세계를 벗어나 진짜 자신의 삶을 찾으려 했다. 소라는 퀼른의 경계를 넘어 다른 도시로 가려고 시도했지만 늘 기차가 고장이 나 특정 경계선 밖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산티는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서로 의견이 달라 감정적으로 치달아 소중한 존재들을 없애기까지 했던 그들은 마침내 진실을 찾게 되었다. 소설이 1/3 정도 지났을 때 갑자기 나타난 파란 외투 남자가 묘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후 다시금 그가 나타나면서 이곳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파란 외투 남자를 단서로 찾아낸 진실은 생각지도 못했던 거라 좀 놀라웠다. 진실을 알고 난 후에 약간은 안심이 되었지만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서 산티와 소라는 선택을 해야만 했고 그 결과는 의외로 이어져 다시금 안타까운 마음을 남겼다.


처음엔 로맨스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던 이야기다. 약간 김이 새는 것도 없지 않아 있는데, 수십 어쩌면 수백의 삶을 살아오며 이어져 온 관계가 알고 보니 별거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읽을 만했다고 생각한다.

"현실이 가끔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게 참 희한하죠? 원래 그러면 안 되잖아요. 우린 현실을 어디에 비교하면 좋을까요?"
"우리가 기억 못 하는 더 현실적인 것과 비교해야죠." - P20

모든 삶, 자신의 모든 버전으로 살고 싶은 욕구를 다른 사람들도 느낄까. - P147

소라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며, 이 별자리를 닻 삼아 살고 있는 걸 어떻게 설명할지 궁리해 본다. 소라는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눈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10여 개의 별자리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럴 때면 이 별자리표를 보면서 혼란을 가라앉힌다. ‘이게 네가 사는 세상의 별자리야. 여기가 네 삶이야. 네가 선택한 삶이라고.‘ - P151

‘별들의 위치가 계속 바뀌고, 도시가 끝없이 되풀이되며, 여기 진짜로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이 대답이 목까지 올라오지만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소라가 말할 때마다 변함없는 상수적 자아라는 그의 망상이 무너지고 있다. 어쩌면 그도 이 세상처럼 비현실일 수도 있지 않나? 그는 계속 변화하는 백 명의 소라의 꿈에 나오는 존재, 즉 또 다른 꿈이지 않을까? - P171.172

"어디서든 우리의 본질은 같아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린 늘 같은 사람이에요." - P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