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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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뉴욕.

'나'는 법을 이용해 소유권을 양도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대고모의 집을 불법 전대해 지내며 컬럼비아 대학에서 문예 창작 워크숍을 듣고 있다. 학비와 집세, 생활비 등은 이혼 후에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아버지가 대신 내주고 있다. 덕분에 나는 물가가 미친 듯이 비싼 뉴욕에서 돈 걱정 없이 지내고 있다.


그렇게 소설가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던 나는 합평 수업에서 모든 학생들에게 비평을 듣는데,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빌리만이 내가 쓴 소설을 지지해 주었다. 빌리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나 역시 그의 소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교열을 봐주었다.

내 소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서 시작된 빌리를 향한 호감은 이내 그의 문학적 재능으로 이어졌다. 빌리가 술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곳 창고에서 지내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빈 방에 들어와 함께 살자고 제안한다.




처음부터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 누구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던 소설 속 화자는 24살의 젊은 남자였다. 소설가를 꿈꾸며 워크숍 프로그램에 등록한 그는 처음엔 그저 집 때문에 혼자라고 생각했다. 맨해튼의 무슨 법으로 인해 불법 전대해 살고 있다는 걸 관계당국에 들키면 집에서 쫓겨날뿐더러 벌금까지 맞아야 했으니 미국에서 흔히 여는 파티는 물론이고 집에 누구도 데려오지 못했으니 말이다. 조심해야 했으니 어쩔 수 없는 듯했다.

그런데 빌리와 가까워지면서 그런 법적인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여겨졌나 보다. 재능 있는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물가가 비싼 뉴욕에서의 생활을 견디고 있는 걸 안타까워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버느라 글을 써야 했던 빌리의 재능을 화자는 알아본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에게 아파트에서 룸메이트로 함께 지내는 걸 제안했을 터였다.


빌리는 본인 말대로 촌구석 출신이었는데,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하면 다들 비웃을 동네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뉴욕으로 왔지만 엄청난 물가로 인해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화자처럼 뉴욕의 비싼 아파트를 빌려줄 대고모가 없었고, 학비와 생활비 등의 비용을 전부 대줄 아버지도 없었다. 빌리는 혈혈단신으로 이 모든 걸 견뎌내야 했던 것이다.

그때 화자가 내밀어 준 룸메이트 제안은 굉장히 솔깃한 것이었을 게 분명했다. 지출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게 당연히 도움이 되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집세에 대한 파격적인 제안이었으니 말이다. 화자가 그저 청소만 해주고 요리를 못하는 자신 대신 음식을 만들어 주는 걸로 생활비와 집세는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빌리는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 어떻게든 화자에게 보답을 하려고 했다.


처음에 두 사람의 관계는 너무나 이상적이었다. 화자가 말했던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처럼 서로에게 문학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도움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생활면에서도 건강한 친구 사이로 수업 시간은 물론이고 여가시간 또한 함께 즐겁게 보냈다.

그런데 사실은 처음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한쪽으로 극명하게 기울어져 있다고 보였다. 자신의 것이 아니지만 일단은 주인이나 다름없는 화자가 빌리보다 권력의 우위에 있었다. 화자가 가진 것에 대한 힘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해도 빌리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는 한편으로 화자가 빌리의 남성성에 묘한 시선을 던지던 장면이 종종 등장했던 걸로 봐서 그가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 부분은 내가 오해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결말의 암시로 보아 오해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무튼 이 부분을 빌리도 눈치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중반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사건이 하나 일어나면서 화자에게 기울어져 있던 권력은 빌리에게로 옮겨갔다. 화자가 갖고 있던 것처럼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친구 사이이긴 해도 그 관계에 목을 매는 자가 약자가 되는 권력이었다. 여태껏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없는 듯했던 화자가 매달리는 꼴이 된 건 당연했다. 그리고 이 관계가 완전히 소원해지기 직전에 일어난 집과 관련된 사건으로 끝내 파국이 찾아왔다.

순식간에 끝나버린 관계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되새기고 곱씹었을 만큼 화자에게는 아쉬운 나날들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동시에 현재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화자가 변하지 않은 걸 보며 그는 여전히 많은 것을 놓치며 자기만의 세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순전히 화자의 입장에서만 진행된 소설이라 그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빌리의 입장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던 걸 보면 이 미묘한 관계를 한쪽의 말만 듣고도 이해하게끔 잘 표현했다고 본다.

그때까지, 나는 거의 모든 사람이 내면에 일정량의 외로움을 품고 살고, 그건 그냥 평생 동안 하나의 육체와 정신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 인간의 조건이며, 그러니 내가 느끼는 어떤 고립감이든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거라고 여겨왔다.
(……중략)
내 고립감에 남들과는 다른 특징이 있으며, 그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고 독특하고 괴상하다는, 외로움 중에서도 외로운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103.104

전에는 그저 그의 동료 수강생이 되어 서서히 영향을 받으며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뻤지만, 이제는 이것이 대학원 생활이 내게 선사하길 바랐던 친밀하면서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예술적으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내가 늘 생각해온,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처럼 상호보완적인 한 쌍의 관계로 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 P48

"나한테서 뭔가가 빠져 있다고?"

"아니면 너의 어떤 부분이 네 소설에서는 빠져 있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빌리가 말했다. "네 글에는 네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가 항상 드러나지는 않잖아. 그리고 모두들 얘기하는 건 네가 집어넣은 다른 요소들이, 반전이나 암시나 뭐 그런 것들 말이야, 약간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는 느낌이라는 거야." - P222

그는 어떤 승부에서든 이겼다. 글쓰기, 여자, 친구 모두 다. 빌리가 혜택받지 못한 환경 출신일지는 몰라도, 그와 마주치는 모든 사람은 어떤 이유로든 그가 그 환경을 극복하도록 돕고 싶어했고, 겉으로는 정부의 무료 지원에 반대하면서도 그는 그들이, 혹은 내가 후하게 베푸는 것들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일은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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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5 - 완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5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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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일으키려는 친구들에게 동참한 마리우스는 경찰과 대치 상태에 있다. 그런 와중에 자베르는 혁명 일당들에게 붙잡혀 자신의 앞날을 알 수 없게 되었고, 마리우스가 코제트에게 보낸 편지를 받아든 장 발장은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와 그들의 편에 섰다. 그리고 어린 가브로슈는 공격을 받고서 누나 에포닌을 따라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경찰들에게 공격을 받은 마리우스의 친구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마리우스 역시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장 발장이 죽어가는 그를 데리고 지하 하수도로 향했다.




드디어 기나긴 이야기의 끝에 다다랐다. 코제트가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를 떠날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마리우스는 좌절한 나머지 혁명을 일으키려는 친구들의 편에 섰다. 그러면서도 코제트가 걱정할까 봐 그녀에게 마지막을 암시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 편지는 장 발장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전까지 마리우스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긴 장 발장이었으나 무슨 영문인지 그는 바리케이드 안에 들어가 그들의 편에 섰다. 장 발장은 그들에게서 건네받은 총을 들고 있긴 했으나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그러다 마침 그곳에 붙잡혀 있던 자베르를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한 뒤에 거짓으로 총을 쏜 뒤 풀어주었다. 끈질기게 자신을 추적하며 법의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경찰을 풀어줌으로써 용서를 건넨 것이었다.

이후 마리우스가 숨이 끊어지려 할 때에 장 발장은 그를 데리고 바리케이드를 탈출해 지하도로 내려갔다. 오물이 들어찬 공간에서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건 개의치 않고 마리우스를 어떻게든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한 장 발장의 희생정신이 눈물겨웠다. 그의 숨이 아직은 붙어있는 동안 제 집에 데려다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 하수도에서 장 발장은 테나르디에를 마주하게 됐고, 하수도를 빠져나온 직후에는 끈질긴 자베르와도 대면하게 되었다. 장 발장의 부탁으로 마리우스를 할아버지 질노르망의 집에 데려다주었고, 이후 마지막으로 코제트를 보려고 하는 청 역시 자베르는 들어주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베르는 장 발장이 코제트를 보러 들어갔을 때 홀연히 사라져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부분이 가장 의외였던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했다. 자베르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살아온 인생이 부정당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장 발장을 쫓는 자베르가 없어졌고 죽을 줄만 알았던 마리우스는 노인 질노르망의 헌신적인 보살핌 덕분에 회복되었다. 그로 인해 결혼 허락까지 받게 되어 코제트와 행복해질 날만 남았다.

그러나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지 못했던 장 발장의 고백으로 인해 마리우스는 그를 멀리하게 되었고, 아내가 된 코제트 또한 아버지 장 발장의 갑작스러운 냉대로 인해 서서히 멀어졌다. 그로 인해 장 발장이 마음의 병이 커져만 가서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던 찰나 기회주의자 테나르디에 덕분에 마리우스는 모든 진실을 알고 코제트와 함께 용서를 빌러 간다. 덕분에 장 발장은 사랑하는 코제트의 곁에서 마음의 짐을 덜어버리고 행복하게 눈을 감았다.

기나긴 소설을 읽고 나니 장 발장이 너무나 가엽고 안타까운 인생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카들을 먹이기 위해 빵 하나를 훔치고 탈옥 시도를 하다 19년이나 감옥살이를 했고, 세상으로 나온 뒤에는 사람들의 냉대를 받았다. 그러다 마들렌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을 땐 자신보다는 다른 이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으며 이후엔 코제트를 위한 인생의 길을 걸었다. 이런 와중에 자베르는 계속해서 장 발장을 쫓았으니 그는 평생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었던 게 당연했다. 마지막엔 코제트를 결혼시킨 이후에도 가슴 앓이를 하다 극적으로 슬픔을 떨쳐내고 세상을 떠나 애처로웠다. 회개한 이후에는 온전히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았으니 장 발장은 성인이 맞았다.


긴 소설을 드디어 끝내서 후련하기도 하고 결말로 인해 헛헛한 마음도 든다.

"옛날에는 살기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쳤는데, 오늘은 살기 위해 이름 하나를 훔치고 싶지 않소." - P381

"내가 이 아이를 결혼시킨 날, 일은 다 끝났소. 나는 그녀가 행복한 것을 보았고,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있고, 거기에 착한 노인 한 분이 계시고, 두 천사들의 부부가 있고, 그 집에 온갖 기쁨이 있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다 잘 된 것을 보았으며, 나는 생각했소. ‘너는 들어가지 마라.‘라고." - P375

"그녀의 행복, 그것은 내 인생의 목적이었다. 이제 하느님은 나에게 퇴출을 허락하셔도 좋다. 코제트, 너는 행복하다. 내 시대는 끝났다."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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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되어 줄게 문학동네 청소년 72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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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010년생 중 1 강윤슬은 엄마와 도통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기만 하다. 꼭 입고 가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던 맨투맨을 엄마가 빨아놓지 않아 살짝 짜증을 냈더니 돌아온 엄마의 반응이 워낙 커서 도리어 윤슬이가 당황했을 정도다. 언제나 다정한 엄마지만 때때로 윤슬이는 깐깐한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다.

1980년생 최수일이 보기에 요즘 애들은 정말 편하게 학교 다니는 것만 같다. 딸 윤슬이만 봐도 자신이 일일이 다 챙겨주고, 요즘 학교는 체벌도 없어서 수일이 학교 다니던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거기다 조금 자랑 같지만 수일은 자신이 좀 괜찮은 엄마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윤슬이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은데 딸은 그게 아닌가 보다.


그렇게 엄마와 딸의 갈등이 깊어져 가던 중에 술에 취한 아빠를 데리러 다녀오겠다던 엄마 수일이 사고를 당했다. 윤슬이는 방에서 자고 있다가 눈을 떴는데 그 몸에서 깨어난 건 엄마 수일이었다. 그리고 윤슬이는 30년 전 처음으로 가출을 한 엄마 수일의 몸에서 눈을 뜬다.




딱 서른 살 차이가 나는 엄마 수일과 딸 윤슬의 세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수일이 학교를 다닐 때에는 당연히 교칙이 엄하고 체벌도 있던 시절이라 선생님 말씀이라면 꼼짝도 못 했다. 그에 비해 윤슬이 학교에 다니는 현재는 교칙이 좀 자유로웠고 체벌이 없어서 선생님도 다정한 분들이 많았다. 이렇게 겉으로만 봤을 때에는 수일이 입장에서 윤슬이가 편하게 사는 것 같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시험 기간이 끝난 뒤에 틀린 문제 개수 대로 손바닥을 맞거나 반 전체가 혼이 날 때 발바닥을 맞거나 심하면 자를 세워서 손가락을 맞았던 때에 학교를 다녔던 나는 당연히 수일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두 모녀에게 공감했던 건 '나중에 꼭 너 같은 딸 낳아 봐라'라는 엄마의 단골 대사 같은 멘트였다. 나도 엄마에게 그런 말을 들었던 적이 몇 번 있었기에 이 부분에서는 윤슬이에게 공감이 됐다.


이렇게 시작부터 윤슬과 수일 모두에게 조금씩 다른 공감을 느꼈던 소설은 두 사람의 몸이 바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저 몸만 바뀐 게 아니라 중1이라는 나이는 그대로 세월을 뛰어넘었다. 윤슬이는 엄마가 중1이었을 93년에서 눈을 떴고, 엄마는 현재의 윤슬이 몸에서 눈을 떴다. 수일과 윤슬에게 30년이라는 격차가 있었기에 서로 소통할 방법이 없이 당장 눈앞의 현실을 살아야 했다.

윤슬이는 엄마에게서 얼핏 듣긴 했지만 93년이 진짜로 이렇게 무시무시할 줄은 몰랐다. 그저 엄마가 과장을 조금 보탰겠거니 했는데, 지난 시험과 비교해 떨어진 점수 대로 맞았고 전교 1등부터 석차를 차례로 적힌 대자보를 붙여 놓은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엄마의 말에 과장은 하나도 없었다는 걸 윤슬이는 직접 경험하고서야 알게 됐다.

그런가 하면 수일은 현재의 중학교 1학년을 만만하게 봤었는데, 그게 또 아니었다. 태블릿으로 진행하는 수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 사실 이 부분은 나도 대체 뭔 말을 하는 건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또한 수일은 윤슬이의 몸으로 축제 참가를 위한 춤 연습을 해야 했는데, 이게 너무나 어려웠다.

'라떼는 말이야'라고 농담으로 얘기하는 자신의 과거가 제일 힘들고 제일 고단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직접 경험해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수일과 윤슬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의 미묘한 애증을 해소하는 과정도 있었다. 둘째로 태어난 수일은 엄마가 언니 수영만 이뻐하는 거라 여겨 가출을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윤슬이 몸에 들어갔을 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수일은 잠깐 동안 윤슬이로 살아가며 딸의 고충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딸의 친구들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기도 했는데, 이 부분이 참 따뜻하기도 하면서 웃겼다.


딸 입장에서는 상상만 했던 엄마와 몸이 바뀌는 게 이 소설에서 유쾌하고 재미있게 이어져서 즐거움을 줬다.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 또한 기분 좋은 먹먹함을 남겨 마지막까지 흐뭇한 감정을 품고 읽었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아무리 엄마와 딸이라도 매일 매 순간 좋을 수는 없지 않을까. 나는 우리가 서로를 좋아한다고 믿게 됐다. 그거면 됐지. - P192.193

by. 윤슬
엄마가 나를 가르치고 도와주고 잘 키우는 것 말고,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 P15

by. 수일
왜 하필 윤슬이가 됐을까. 종종 윤슬이에게 ‘나도 내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윤슬이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고, 말 그대로 나에게도 나 같은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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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최애에게
류시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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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최애에게   '나'는 최애 아이돌 '크레스타'의 2집 쇼케이스를 보기 위해 제주도에서 서울로 왔다. 행사장에서 버벅대는 내게 옆자리에 앉은 초록 머리가 도움을 준 덕분에 노래도, 의상도 별로이긴 했지만 그래도 쇼케이스를 무사히 볼 수 있었다. 이후 초록 머리와 나는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좋아하는 아이돌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다.

인물과 식물   소형은 남편 원재와 함께 이사 갈 집을 구한다. 저렴한 가격에 전세로 나온 15층 아파트가 왠지 꺼림칙하고 방 하나는 너무 깨끗해서 누군가가 죽었을 거라 확신하지만, 원재는 그런 부분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이후 그 집으로 이사한 뒤 소형은 마음을 주고 기르는 침엽수 화분을 버리게 된다.


유료 분량   신영은 웹툰, 팬픽, 에세이 등을 자유롭게 게시하고 때에 따라서는 유료분도 구매할 수 있는 온라인 사이트에서 마음이 가는 웹툰의 미공개 그림을 구매했다. 그날 이후 사이트에 다시 들어가자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었기에 의아하게 여기며 본인 인증을 받아 비밀번호를 바꾸지만, 곧장 다시 비밀번호가 바뀌었다. 해킹을 당한 것이었다. 결국 신영은 회원 탈퇴를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계정을 해킹한 사람으로부터 메일을 받는다.

나나   나나는 '나'에게 갑자기 길에서 구하게 된 어린 고양이 나나를 맡기고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함께 살며 의지하던 나나의 죽음은 내게 이유를 되짚는 과정이 된다.


레티 흐엉   아내인 베트남 여자 레티가 사라졌다며 남동생이 찾아왔길래 '나'는 모르는 척하며 친정에 보내줬다고 말했다. 이후 남동생은 레티를 찾아 베트남으로 갔지만 연락이 끊겼다. 그러자 이번엔 엄마가 내게 전화해 동생을 찾아보라고 닦달하는 바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레티의 친정으로 향한다.

배우 수업   배우 지망생인 '나'의 프로필 사진을 찍어줬던 사진작가 효민과 함께 어울리며 잘 놀던 날들이 지나고 효민은 몽골에 갔다. 몽골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까지만 해도 효민과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고선 효민에게 갑자기 연락이 와서 병원에 있다고 하며 올해를 넘기지 못할 거란 말을 했다.


밤과 감   유전으로 인해 갑상샘 항진증을 앓고 있는 길범은 회사와 연계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은퇴를 앞둔 노의사는 어렸을 적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의사로 일했던 일화 등을 들려준다.

숨 쉬는 것부터 인간   호석의 아내 해원은 명절에 남편의 집에서 고되게 일하다 뱃속의 둘째를 잃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난 후에 성인이 된 딸 수아를 잃었다. 최근에는 호석이 재혼 상대인 남 선생과도 헤어졌다. 이 모든 걸 겪으며 해원과 호석은 여전히 무언가를 하기 위해 서로에게 손을 내민다.




여덟 편의 이야기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유료 분량>이었다. 무료분이 아닌 유료분, 그것도 겨우 200원짜리를 결제한 걸로 계정이 해킹됐다는 걸 알게 됐고, 해킹한 도둑놈은 자신이 그 사이트에서 72만 원어치를 구매했다고 하며 탈퇴한 신영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해킹범이 구매한 내역은 아마 모든 사이트에서 검열 당할 거라 예상되는 단어들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평생 쓰지도 않을 것 같은 단어였기에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싶었다.

그 고소로 인해 신영은 난생처음 경찰에게 참고인 조사를 받기도 했고, 이래저래 많은 걱정을 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잘 끝나려는 듯싶다가 스릴러로 방향을 틀었는데, 여기서 예상치 못한 문장으로 깜짝 놀라게 함과 동시에 기발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다른 이야기들은 대체로 돌보는 일에 마음을 쓰는 내용이었다. 표제작 <나의 최애에게>는 갑작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리고 다친 자신의 마음을 위로해 준 아이돌을 덕질함으로써 위안을 얻었다. <레티 흐엉>은 남동생과 결혼한 베트남 여자를 애처롭게 여기며 도와주는 시누이의 이야기라 왠지 마음이 아팠다. <배우 수업> 또한 돌봄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마지막이 영 씁쓸한 맛을 남겼다.


짧은 단편들로 이루어진 책이라 금세 읽을 수 있었다. 여운을 남겨 왠지 모르게 쓸쓸한 이야기였다.

나나는 분명 알고 있었어. 언제나 다 알고 있다는 눈으로 나를 지켜봐왔지. 나는 나나가 나 없이는 살 수 없는 불구라고 여겨왔는데, 나도 다르지 않았던 거야. 나나는 내가 알아채길 바라지 않았지. 그래서 쉼 없이 손 가는 것들을 내 곁에 두고 내가 아프지 않기를 바랐어. <나나>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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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의 거짓말
엘리자베스 케이 지음, 김산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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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은 11살 때 처음 만난 마니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단짝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자신이 어둠이라면 마니는 빛이었기에, 그리고 서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많은 친구 사이였기에 이 관계가 오래도록 이어질 거라 믿었다.


마니와 결혼한 찰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찰스는 잘생기고 능력 있는 남자이긴 했다. 그래도 제인의 눈에는 마니의 짝으로는 한참 부족해 보였다. 찰스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와 만난 이후 왠지 모르게 자신이 마니에게 두 번째가 된 것 같아 불만스럽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니의 곁에서 찰스를 영원히 치워버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제인은 소설 도입부부터 찰스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마니와 이미 결혼한 시점에서 소설이 시작되긴 했지만, 찰스에 대한 증오 내지는 혐오가 결혼 이전부터 시작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제인은 그에 대한 경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순전히 마니를 위해서 속내를 감출 뿐이었다.


이후 제인과 마니가 언제 처음 만나서 어떻게 가까워졌는지, 10대 시절에 마니가 사귀었던 남자를 제인이 어떻게 치워버렸는지 밝히며 둘의 관계가 굉장히 깊다는 걸 보여줬다. 물론 제인의 시점으로만 이루어진 소설이었기에 그녀 혼자만의 의견일 수 있겠지만, 마니 역시 제인을 친한 친구라고 여기는 듯했다. 제인만큼 집착하는 건 아니었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아빠의 오랜 바람으로 인한 이혼 이후 제인은 의지할 데가 없어 마니에게 집착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제인보다는 여동생 에마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그녀는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환경에 처한 마니를 가족처럼 여겼다. 마니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인상에 남을 정도로 밝혀지진 않았으나 그래도 화목한 가정은 아니었던 걸로 보였다. 그래서 10대 시절에 두 소녀는 서로를 의지하고 챙겨주며 특별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 관계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져 제인과 마니는 함께 살기까지 했는데, 마니가 여러 남자를 만나고 제인 역시 조너선을 만나 결혼하게 되면서 특별한 친구 사이는 조금 기운을 잃은 듯했다.

그러다 조너선이 교통사고를 당해 제인의 눈앞에서 사망하면서 그녀는 상실감에 빠졌고, 이후 마니에게 더욱 집착하게 된 것으로 보였다. 마니에게는 완벽한 짝이었을 테지만, 제인의 눈에는 형편없는 남자로만 보인 찰스를 못마땅하게 여겨 두 사람을 어떻게든 갈라놓으려고 했는데 그건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니의 미움을 사지 않고 찰스를 떼어놓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으나 결국 갈등이 생기고 말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인 입장에서는 절호의 찬스가 왔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너무 태연해서 섬뜩했던 그 일을 제인은 아무렇지 않게 해치우고서 마니 앞에서도 전혀 모르는 척 연기를 했다. 제인에게 마니의 존재가 그토록 컸던 건가 싶어 너무 소름이 끼쳤다. 찰스의 죽음으로 제인은 마니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자가 두 사람을 괴롭히자 제인은 집착적인 성격을 그 기자의 뒤를 쫓는 데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퍽 조심하면서 말이다.

이후 소설은 모든 비밀이 밝혀졌지만 개운치 않은 결말로 끝을 맺어 영 찝찝한 기분을 남겼다. 나쁜 사람이 벌을 받는 통쾌한 결말은 없었고, 집착 역시 끝을 모르고 이어져서 마지막까지 일관적인 모습을 보였다.


페이지가 술술 잘 넘어가긴 했지만 주인공 캐릭터가 너무 무섭고 끔찍해서 마음이 가지는 않았던 책이다.

지금도 난, 그녀가 알고 있었길 바란다. 우리의 뿌리가 서로에게 너무 단단히 들러붙어 있어서 절대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 그녀가 깨달았기를 바란다. 가장 단단하게 들러붙은 곳에서 더 두껍고 거친 껍질이 벌어져 살과 살이 맞닿았음을, 그때 우린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나‘와 ‘영원히‘에 헌신적이었음을 알았기를 바란다. - P89

마니와 나는 사랑 때문에 멀어졌다. 이제 그 벌어진 틈은 텅 비어서, 새로 채워지고 보수될 일만 남았다. 결국 그 틈은 전혀 존재한 적 없던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었다. 내가 그 기회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고통과, 앞으로 그녀가 겪을 일들을 생각하면 슬퍼졌다. 그렇다고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다. 주로 안도감을 느꼈다. - P204

어린 소녀일 때부터 알아온 한 여성이 어머니가 되기까지 지켜본다는 건, 아름답기도 하면서 무척 이상야릇했다. 그 성장의 단계마다 나는 그녀를 보호했다. 맨 처음에는 부모로부터, 그다음에는 남자친구들로부터, 그다음에는 상사로부터. 마지막으로 경멸스러운 남편으로부터.
그리고 늘, 심지어 지금도, 진실로부터.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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