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짓는 사람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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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명의 소방관은 '아지카와 강'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현장에 가 보니 엄마인 듯한 여자와 어린 여자아이가 물에 흠뻑 젖은 채 발견되었는데, 웬 남자가 인공호흡을 하며 두 사람을 살리려 하고 있었다. 소방관과 동료가 확인해 보니 두 사람 모두 이미 심장이 멈춘 상태였다.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옮기려는데 곁에서 인공호흡을 하던, 역시나 옷이 흠뻑 젖은 남자가 냉정한 눈빛을 띠고 있던 게 소방관의 기억에 남았다.

이후 '아지카와 강 사건'이라 명명된 이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는 게 밝혀졌다. 근처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며 배달을 가던 중이었다던 목격자가 없었더라면 범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익사사고로 남았을 것이다.


여자와 아이를 죽인 사람은 놀랍게도 두 사람의 남편이자 아빠인 니토 도시미였다. 그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형 은행에서 근무하는 미남이었고, 주변 평가 또한 너무나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아내와 딸을 죽인 이유는 집에 책을 놓을 공간이 없어서라고 했다.




살인의 이유는 평범하지 않지만 추리 장르인 이 소설은 독특하게도 논픽션 형식을 띠고 있었다. 자신을 소설가라 지칭하는 화자가 니토 도시미가 살인을 한 이유에서부터 시작해 그가 왜 살인을 저질렀을지, 현재 관계를 맺고 있던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대학생, 고등학생을 거슬러 초등학생 때까지 그와 인연이 있었던 사람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형식으로 인해 소설이라기보다는 실제 사건과 관련된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니토가 아내와 딸을 살해한 이유는 가히 충격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놓을 공간이 부족해 사랑하는 이들을 죽였다는 게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인생에서 무엇이 우선순위를 차지하는지 사고체계 자체가 무너진 것처럼 여겨졌다. 놀랍게도 니토가 선선히 자백한 것이었기에 더욱 경악스러웠다. 이 자백으로 인해 화자인 소설가가 그에 대해 파헤쳐 볼 생각이 든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소설가는 일단 니토가 다녔던 은행 동료들을 만났다. 인터뷰를 꺼리는 이들은 가명을 사용했고 더러 실명을 사용한 사람이 있음을 밝혔다. 니토의 직장 동료들은 입을 모아 그를 좋은 사람이라 말했다.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 그렇게 반듯하고 신사적인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며 경찰이 엄한 사람을 붙잡고 있는 거라 말하는 이도 있었다.

대학생 때는 물론이고 고등학생 때, 심지어는 초등학생 때 부모와 함께 살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웃들까지 니토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부분으로 인해 니토가 대외적인 이미지를 정말 잘 만들어 놓았든지 아니면 한 번씩 초점이 나가는 그런 타입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가 취재를 하면서 가끔씩 니토의 주변에서 의심스러운 사망 사건이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됐다. 같은 은행에서 일하다가 2년 전에 실종됐다가 최근에 백골이 발견된 가지와라 게이지로가 있었다. 대학 시절에는 트럭 바퀴에 깔려 사망한 마쓰야마 아키라가 있었는데, 그보다 한참 전인 니토가 중학생 때 이웃 남자가 트럭 바퀴에 치여 죽은 똑같은 사망 사건을 알게 된다. 또한 초등학생 때는 죽인 아내 쇼코와 이름이 똑같은 같은 반 여학생 쇼코의 의붓아버지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사망한 사고도 있었다.

뒤늦게 니토의 주변에서 일어난 사망 사건, 혹은 사고로 보이는 이 죽음들에는 '책 놓을 자리가 없어서'와 비슷하게 어처구니없는 이유의 죽음도 존재했다. 그로 인해 이 사망 사건과 연관 지어 니토의 심리를 파헤치려고 하는 노력들이 있기도 했다.

그러다 후반에 초등학생 때 가까웠던 쇼코와 관련된 사람의 증언이 밝혀지고서 니토의 심리에 대해 납득을 한 이후에 뒤통수를 치는 결말로 인해 묘한 감정을 느꼈다. 주변의 가까운 이의 마음도 알지 못하는데, 기묘한 동기로 살인을 저지른 이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이러한 것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논픽션 스타일의 추리 소설이라 읽는 내내 독특한 느낌을 받았다. 일반적이지 않은 전개 방식 덕분에 실화 같다는 인상을 받아 더욱 몰입감이 있었다.

사람은 타인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하는 줄 알지만 실은 무엇 하나 모르는 것 아닐까. 당신의 이웃이 니토와 같은 심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정체를 알아낼 방법은 없다. 알았을 때는 이미 일이 터져 버린 뒤다. - P12

니토는 터무니없는 동기로 살인을 저질렀으면서 그 터무니없는 동기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거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동기로 저지른 범죄라면 체포할 수 있는데 동기가 별나면 체포도 못 하다니 커다란 모순입니다. - P211.212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해한 척하며 살고 있다. 자신들이 이해한 척한다는 사실조차 보통은 잊고 있다. 안심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바로 불안해지니까.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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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남자
정은수 지음 / 엘릭시르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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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 임연지는 꽤 알려진 대기업을 오랫동안 다니고 있다. 같은 팀 팀원들과 가깝게 지내며 연애에 관한 얘기를 나누지만 연지는 할 말이 별로 없다. 그녀는 애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회사 내에서 모든 여성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기획팀 김준영 과장을 연지 역시 때때로 훔쳐보며 확실하진 않지만 좋아하는 것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다 준영이 연지에게 말을 걸기 시작해 퇴근 이후에도 종종 만나는 관계가 되는데, 이게 사귀는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연지에게 12년 전 대학 시절 동아리 회원들과 찍은 사진이 택배로 도착했다. 발신인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이 사진을 벌써 세 번째 받는 거라 분명한 의도가 있다는 걸 연지는 알고 있다. 동아리 회원 중 1, 2학년들 8명이 술자리에서 찍은 이 사진 속 한 사람이 사진 촬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땐 내가 어쩐 일로 이런 스타일의 소설을 보겠다고 메모해뒀을까 생각했다. 로맨스 소설은 거의 안 읽는다고 볼 수 있는데, 직장 내 연애, 대학 시절의 연애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뤄서 약간 당황했다. 근데 남의 연애가 재미있어서인지 그만두지 않고 계속 읽어나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릴러가 끼어들었다. 대학 시절 동아리의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였다. 그제야 이 소설이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후부터는 로맨스와 스릴러의 결합을 기쁘게 받아들여 쭉쭉 읽어가기 시작했다.


현재의 연지가 같은 회사의 준영과 썸을 타는 내용은 어른의 사랑 그 자체였다. 굉장히 쿨해 보여서 이 사람들이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지 아닌지 헷갈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확실히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느꼈다. 연지는 약간 모호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연지는 과거 회상인 대학생 때도 사랑에 있어서 모호하게 행동했다고 보였다. 만인의 연인 타입인 동아리 회장 제국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다가도, 9월에 동아리에 들어온 동갑내기 상호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기는 듯 보이기도 했다. 마음이 분명하게 보이는 행동도 있었는데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해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이렇게 연지의 현재와 과거의 연애 아닌 연애를 보여주고 있는 와중에 과거 동아리 회원이 죽은 사건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고 있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의 죽음은 처음엔 타살을 의심했으나 정황상 사고사로 결론이 내려졌다.

하지만 현재의 연지에게 누군가가 몇 번이고 사진을 보내면서 사고사가 아니라는 의심으로 11년 만에 사건을 파헤치게 된다. 때로는 그때의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준영이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길을 잡아줬고, 현재 변호사가 되어 다시 만난 상호와 여러 인물들이 도움을 주기도 했다. 알리바이를 맞추기도 했고 또 다른 단서들이 의외로 풀려나가기도 해서 범인을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의외의 벽에 가로막혀 이대로 끝날 것 같다 싶었는데, 역시나 의외의 행동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게 했다. 이 부분에서 캐릭터의 변화가 좀 당황스럽긴 했는데, 가볍게 읽기 좋은 소설이니 그런가 보다 했다.


약간 애매하긴 했으나 로맨스와 스릴러가 결합되어 무난하게 읽기 좋았던 소설이었다.

"그 애는 어린애같이 착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했을 뿐이야. 걔 주변을 둘러싼 우리들이 속물이어서 멋대로 판단한 거지."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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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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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와 나쓰코, 일명 낫 짱은 아주 오래전부터 함께였다. 사에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특히 남자친구 문제에 관해 나쓰코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며 그녀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갔다. 두 사람 사이에 두터운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사에와 나쓰코는 서로를 베스트 프렌드라 여기며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올 수 있었다.


현재.

나쓰코는 리리를 키우며 가정주부로 살고 있다. 미용 학교에 다니다 다카오를 만나 사귀면서 임신이 되어 그녀는 곧바로 결혼을 해 육아와 집안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에, 오로지 다카오가 벌어오는 수입으로 생활하고 있었기에 육아를 비롯한 모든 집안일은 전적으로 나쓰코의 몫이었다.

사에는 조산사인 동생 마리에가 일하는 조산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있다. 그녀 역시 결혼해 남편 다이시와 살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몇 년째 아기를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도통 생기질 않는다. 그러다 사에는 다이시가 바람을 피우고 있는 걸 알게 되고, 비밀이 없는 나쓰코에게 그 사실을 말한다.




나쓰코와 사에는 굉장히 친밀한 친구 사이처럼 보였다. 고등학생 때뿐만 아니라 그 이전인 초등학생 때의 이야기도 나왔던 걸로 봐서 두 사람의 우정은 웬만한 친구들이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듯했다. 그로 인해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한 현재까지도 둘의 관계는 돈독했고, 각자의 남편보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각자의 남편과 알게 된 시간보다 사에와 나쓰코가 서로를 알고 지낸 시간이 훨씬 더 길었으니 말이다.

다만 두 사람 사이에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사에는 아기를 갖고 싶어서 갖은 노력을 하고 있어도 임신이 되지 않는 반면에 나쓰코는 임신으로 결혼에 성공한 케이스라 그녀에게는 쉬워 보였다는 것이다. 그 임신이라는 부분으로 인해 두 사람의 사회생활 경험에 대한 유무도 나뉘고 있었다. 그 점만 아니면 두 사람의 관계는 너무나 좋아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서로에게 말하지 않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게 있기도 했다.

사에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것까지 나쓰코에게 말했는데, 사회생활의 어려움 같은 건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쓰코는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자신에게 공감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쓰코 또한 사에에게 말하지 않았던 게 있었다. 리리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 독박 육아로 인해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조차 모르겠지만, 사에에게는 얼른 아기를 낳아야 한다고 긍정적인 방향의 얘기만 했다.

두 사람은 너무나 가까워 보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상대를 향한 부정적인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이 관계가 조금은 위태롭게 느껴졌다.




그러다 바람을 피운 사에의 남편이 죽으면서, 하필이면 나쓰코와 마주 앉아 있을 때 죽게 되면서 상황은 묘하게 흘러갔다. 그 상황만 놓고 봤을 땐 나쓰코가 사에의 남편을 죽인 걸로 보였다. 눈앞에서 그가 죽어가는데도 나쓰코는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고, 그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뒤에는 사체를 처리할 생각만 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이라 상황 파악이 잘되지 않아 소설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처음부터 당연하게 여겼던 무언가를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게 밝혀져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전에 읽은 몇 권의 일본 소설이 떠오르게 하는 그런 반전이 뒤통수를 때렸다.

그렇게 뒤통수를 맞고 난 후에는 놀라움이 차츰 가라앉으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했다. 처음부터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관계, 가깝지만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관계의 이면에 사랑과 헌신이라는 당연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전 소설이지만 씁쓸함까지 덤으로 안긴 책이었다.

이 아이의 앞길에 행복만 있기를.
나쁜 것이 오지 않기를. - P325

by. 나쓰코
아이를 낳기만 하면 엄마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자기 자신보다 아이를 먼저 챙기고, 그러한 삶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는 존재. 나도 연애나 일을 질릴 만큼 하고서 이제는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싶어 심사숙고한 끝에 아이를 낳았다면 좀 더 예뻐할 수 있었을까. 분명 그럴 것이라는 확신과, 몇 살을 먹어도 변함없을 것이라는 체념이 동시에 들었다. - P13

by. 사에
농담과 잡담을 섞어가며 걸핏하면 출산을 강조해 온 나쓰코의 말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일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주제에 잘난 척은, 하고 겨우 깔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허무함이 솟구쳤다. - P15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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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가족
한요셉 지음, 박지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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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서 태어난 그레이스 조는 이곳으로 이민을 온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얼마 전까지 오빠 제이컵도 부모님의 음식점 '델리카트슨'을 도우며 함께 살았었지만, 6개월 전 부모님의 고향인 한국으로 가 영어 강사를 하겠다고 떠났다. 결국 델리의 일손을 돕는 건 그레이스의 몫이 되어 그녀는 답답하기만 하다.

그러던 중에 한국의 뉴스를 보게 되었다. DMZ에서 웬 미국계 한국인 남성이 북으로 가려다가 붙잡혔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조 씨 가족의 아들 제이컵이었다.


그레이스와는 다르게 제이컵은 한국어를 잘 하지 못했다. 스스로를 숨기는 성격으로 인해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는 어느 날 문득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한국에는 엄마의 가족인 정 할머니와 정 이모가 있었기에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어 학원에 강사로 일하면서도 여전했던 제이컵은 어느 날 갑자기 죽은 할아버지 혼령을 보기 시작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태우라는 이름을 가진 그 할아버지가 제이컵의 몸 안에 들어와 마음대로 행동하게 된다.




소설은 혼령인 태우의 시점으로 시작되었다. 나이가 많은 그는 교회 주차장의 주차 요원으로 일하다 갑자기 쓰러져서 깨어났는데, 몸과 분리된 것을 보고서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죽는 건 너무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테지만, 죽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향인 북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태우는 북으로 가기 위해 전망대에 올랐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태우가 북쪽으로 가는 걸 막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실향민 혼령들을 모아 벽을 뛰어넘기 위해 수백 명의 목말을 태워 보았지만 넘을 수가 없었다.


이후 그레이스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환되었다. 그녀의 가족은 외국인의 입맛에 맞는 한식을 파는 델리를 운영하고 있었다. 조 할아버지가 가게를 시작했고, 아빠가 물려받아 자식들인 그레이스와 제이컵이 돕고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점은 부모와 제이컵은 한국에서 태어나 이민을 왔지만, 그레이스는 하와이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가족 중 유일하게 현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는데 그녀는 여전히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거기다 델리 일에 지쳐가고 있었던 상황에 오빠마저 떠나버려서 가족과 가족의 일이 모두 그녀의 어깨 위에 놓였다. 가족이 분명 하와이에 사는 주민이었지만 한국인의 특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레이스의 고충이 피부로 와닿았다.


한편 한국에 있던 제이컵은 할아버지인 태우의 혼령을 보게 된 이후 그에게 몸을 내어주게 된다. 계속해서 나타나서 자신을 괴롭히게 두기보다는 원하는 게 있으면 몸에 들어와 빨리 해치우고 떠나라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게 북으로 가는 것일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할아버지 태우의 행동이 너무 민폐라 불쾌하기까지 했다. 북에서 결혼 후 가족을 남겨두고 남으로 와서 정 할머니와 결혼해 두 딸을 낳았고, 그런 가족을 다시 버리고 나가 세상을 떠난 태우였다. 그래놓고 손자의 몸을 빌려 북으로 가려고 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내 기준에서 고향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인지 태우의 행동이 이기적으로만 보였다. 그리고 그 결과 DMZ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붙잡혀 오랫동안 취조 비슷한 걸 당해야 했던 제이컵의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보상해 주지도 못할 할아버지로 인해 화가 나기도 했다.

다행히 제이컵은 한국으로 돌아와 가족의 품에서 이전과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가족들 역시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결말을 맺어 다행이었다.

실향민인 태우 할아버지, 언제까지나 이방인 취급을 받는 조 씨 가족들 사이에는 확실한 연결고리가 있긴 했다. 고향을 떠나왔다는 점, 쉽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 그랬다. 태우는 죽어서도 고향에 갈 수 없었기에 그리워했으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게는 고향이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게 아니기에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 번이나 가족을 버린 이가 고향만큼은 그리워했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여겨졌다. 결국 내가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던 건 그레이스였다. 해외에 거주하지만 영락없이 한국인 가정의 딸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그녀의 스트레스가 와닿았다.

서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가족이 마지막엔 함께 웃어서 다행이었다.

"우리들 중에는 미련을 버리고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할머니가 제이컵에게 말했다. "절대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 하지만 시간이 끌고 가기 때문에 나아가는 거야." - P274

문제는 태우가 남쪽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산 자들의 정치와 죽은 자들의 법에 따르면, 그는 북쪽에서 죽을 수 없었고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 P21.22

나를 관광객으로 오해하지 말아요. 난 관광객이 아니라 현지인이니까. 난 당신들과 같은 사람이에요. - P324

그레이스는 이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그들이 음식을 함께 먹고 아파트 벽에 바싹 붙어서 전자 담배를 나눠 피우고 웃음소리가 연기와 함께 피어오르는 동안 계속되었다. 그들은 평소 조용했던 가족이 만들어낸 갑작스러운 소음에 마음이 활짝 열렸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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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루비
박연준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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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에 다니는 여름이는 피아노 학원을 하는 고모네 집에서 지냈다. 아빠는 가끔씩만 고모네 집에 들어왔고 엄마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래서 여름이의 교육은 고모의 몫이었는데, 고모는 예의 바른 걸 중시하는 사람이라 여름이는 늘 꾸중을 들으며 혼이 나야 했다. 그리고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는 고모로 인해 여름이는 동시를 베껴 쓰거나 책을 읽는 등 조용히 지내야 했다. 고모에게 혼이 날 때면 사촌 언니인 겨울이가 편이 되어주어 다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함께 살 단칸방을 구했다고 하며 여름이를 데리고 갔다. 새엄마도 함께 살았는데, 새엄마는 여름이를 몹시 미워하며 타박했지만 여름이는 그럴수록 더욱 아무렇지 않은 듯한 태도를 보였다.

겨울이 언니도 없이, 그리고 사랑하는 할머니도 미국으로 떠난 이후 곁에 아무도 없던 여름이에게 루비가 나타났다. 좋아하는 남자애가 자신을 꼬집는 걸 가만히 참고 있던 여름이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나서준 친구였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를 것 같지만 다 알고 있었다. 오히려 더 잘 아는 경우가 있다. 여름이처럼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온 아이는 더욱 그랬다. 고모가 통화하는 내용으로 아빠가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고 때려치우고선 현재는 여러 여자들이나 만나고 다니는 걸 알았고, 나중엔 루비의 엄마가 동네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알았다고 해도 어딘가에다 말하지는 않았기에 어른스럽게만 보였다. 그 어른스러움은 어린아이가 살면서 터득한 삶의 방식이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어른스러운 여름이가 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 루비와 우연찮게 가까워졌다. 루비는 여름이와는 다르게 친구가 별로 없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해서 그랬다. 남자애들은 루비의 집을 알아내기 위해 따라다니며 뒤에서 놀려대기도 했지만 루비는 그런 걸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친구가 없어도, 아이들이 놀려대도 자존감이 높아서 그런 듯했다.

반면에 여름이는 학교 안에서 루비와 말을 섞지 않았다. 하교 후에는 루비네 집에 자주 놀러 갔음에도 학교 안에서, 혹은 거리에 다른 아이들이 있을 때면 루비를 외면했다.




아무래도 여름이는 어렸을 때부터 온전히 편이 되어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엄마는 없었고 아빠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할머니는 여름이를 너무나 사랑했는데, 때때로 할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당해 넋이 나가 있을 때가 있었고 나중에는 미국으로 가버렸다. 겨울이 언니도 여름이를 아끼고 챙겨줬지만 고모에게 혼날 때는 똑같은 처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온전히 사랑받지 못해서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도 어려웠던 여름이가 안쓰러웠다. 루비를 친구로서 사랑하지만 몇 년에 걸쳐 가까워지고 나니 나중엔 다른 태도를 보여 결국 친구를 잃고 말았으니 말이다. 물론 루비는 엄마를 따라 떠난 거지만 관계는 그 이전에 한 번 끊겼기에 여름이가 애처롭게 여겨졌다.


어른스러운 아이가 주인공이라 읽는 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속이 깊어진 게 환경의 영향이 커서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이 생이 주는 가혹함에 대해 생각했다. 아직 십 년도 채 안 살았는데 삶이 바닥을 보여주다니. 단맛, 짠맛, 신맛 따위는 있으나 마나. 내겐 씁쓸함과 아린 맛, 혹은 무미, 그런 게 다였다. - P109

나는 깜빡인다, 세상에서, 아주 작은 점처럼 깜빡이며 존재한다. 늘 존재할 수는 없다. 욕심쟁이들만 늘 존재한다. 나는 존재하는 것을 깜빡 잊는다. 잊는다는 것을 또 잊는다. 자주 울고, 웃는 걸 잊었다고 생각할 때만, 잠깐 웃는다. 사람들은 나를 고장 난 신호등을 보듯 바라본다. - P19.20

나는 친구가 많았고 루비는 나 말고는 친구가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비밀 속에서만 친했다. 너무 오랫동안 루비는 내 삶의 내벽을 이루며 커졌다. 밖에서 루비는 늘 혼자이고 침울하고 두려움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걸 모른 척, 보이지 않는 척했다. - P192

어둠 속에서, 내가 홀로 언덕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뒷문에 서 있던 루비가 엎드린 내 언덕을 바라보다 천천히, 자기 언덕으로 돌아가는 풍경이 보였다. 나는 혼자였다. 이제 루비가 없는 이 언덕을 내려가야 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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