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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루비
박연준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7월
평점 :
유치원에 다니는 여름이는 피아노 학원을 하는 고모네 집에서 지냈다. 아빠는 가끔씩만 고모네 집에 들어왔고 엄마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래서 여름이의 교육은 고모의 몫이었는데, 고모는 예의 바른 걸 중시하는 사람이라 여름이는 늘 꾸중을 들으며 혼이 나야 했다. 그리고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는 고모로 인해 여름이는 동시를 베껴 쓰거나 책을 읽는 등 조용히 지내야 했다. 고모에게 혼이 날 때면 사촌 언니인 겨울이가 편이 되어주어 다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함께 살 단칸방을 구했다고 하며 여름이를 데리고 갔다. 새엄마도 함께 살았는데, 새엄마는 여름이를 몹시 미워하며 타박했지만 여름이는 그럴수록 더욱 아무렇지 않은 듯한 태도를 보였다.
겨울이 언니도 없이, 그리고 사랑하는 할머니도 미국으로 떠난 이후 곁에 아무도 없던 여름이에게 루비가 나타났다. 좋아하는 남자애가 자신을 꼬집는 걸 가만히 참고 있던 여름이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나서준 친구였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를 것 같지만 다 알고 있었다. 오히려 더 잘 아는 경우가 있다. 여름이처럼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온 아이는 더욱 그랬다. 고모가 통화하는 내용으로 아빠가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고 때려치우고선 현재는 여러 여자들이나 만나고 다니는 걸 알았고, 나중엔 루비의 엄마가 동네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알았다고 해도 어딘가에다 말하지는 않았기에 어른스럽게만 보였다. 그 어른스러움은 어린아이가 살면서 터득한 삶의 방식이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어른스러운 여름이가 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 루비와 우연찮게 가까워졌다. 루비는 여름이와는 다르게 친구가 별로 없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해서 그랬다. 남자애들은 루비의 집을 알아내기 위해 따라다니며 뒤에서 놀려대기도 했지만 루비는 그런 걸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친구가 없어도, 아이들이 놀려대도 자존감이 높아서 그런 듯했다.
반면에 여름이는 학교 안에서 루비와 말을 섞지 않았다. 하교 후에는 루비네 집에 자주 놀러 갔음에도 학교 안에서, 혹은 거리에 다른 아이들이 있을 때면 루비를 외면했다.
아무래도 여름이는 어렸을 때부터 온전히 편이 되어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엄마는 없었고 아빠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할머니는 여름이를 너무나 사랑했는데, 때때로 할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당해 넋이 나가 있을 때가 있었고 나중에는 미국으로 가버렸다. 겨울이 언니도 여름이를 아끼고 챙겨줬지만 고모에게 혼날 때는 똑같은 처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온전히 사랑받지 못해서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도 어려웠던 여름이가 안쓰러웠다. 루비를 친구로서 사랑하지만 몇 년에 걸쳐 가까워지고 나니 나중엔 다른 태도를 보여 결국 친구를 잃고 말았으니 말이다. 물론 루비는 엄마를 따라 떠난 거지만 관계는 그 이전에 한 번 끊겼기에 여름이가 애처롭게 여겨졌다.
어른스러운 아이가 주인공이라 읽는 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속이 깊어진 게 환경의 영향이 커서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이 생이 주는 가혹함에 대해 생각했다. 아직 십 년도 채 안 살았는데 삶이 바닥을 보여주다니. 단맛, 짠맛, 신맛 따위는 있으나 마나. 내겐 씁쓸함과 아린 맛, 혹은 무미, 그런 게 다였다. - P109
나는 깜빡인다, 세상에서, 아주 작은 점처럼 깜빡이며 존재한다. 늘 존재할 수는 없다. 욕심쟁이들만 늘 존재한다. 나는 존재하는 것을 깜빡 잊는다. 잊는다는 것을 또 잊는다. 자주 울고, 웃는 걸 잊었다고 생각할 때만, 잠깐 웃는다. 사람들은 나를 고장 난 신호등을 보듯 바라본다. - P19.20
나는 친구가 많았고 루비는 나 말고는 친구가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비밀 속에서만 친했다. 너무 오랫동안 루비는 내 삶의 내벽을 이루며 커졌다. 밖에서 루비는 늘 혼자이고 침울하고 두려움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걸 모른 척, 보이지 않는 척했다. - P192
어둠 속에서, 내가 홀로 언덕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뒷문에 서 있던 루비가 엎드린 내 언덕을 바라보다 천천히, 자기 언덕으로 돌아가는 풍경이 보였다. 나는 혼자였다. 이제 루비가 없는 이 언덕을 내려가야 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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