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푸른숲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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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사르다 가족의 막내딸 17살 아나가 끔찍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아나의 몸은 토막이 나 있었고 그 토막 난 신체 곳곳에 불에 탄 흔적이 있었다. 누가 아나의 몸에 이런 짓을 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의문스럽게도 너무나 빠르게 종결되었다.


사르다 가족 모두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아나의 사건으로 둘째 리아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것도 아나의 장례식이 열리는 성당에서 말이다. 엄마는 기함하며 난리를 쳤고 첫째 카르멘은 언제나 동생들에게 그랬듯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버지 알프레도만이 리아를 이해하며 그녀를 다독였다.

아나와 유독 친밀하고 다정한 사이였던 리아는 더는 가족들과 함께 살 수가 없어서 돈을 모아 아르헨티나를 떠나 스페인으로 떠났다. 순례자의 길이 끝나는 지역에 서점을 연 그녀는 오로지 아버지와만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나의 사건 수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언니 카르멘과 언니와 결혼한 훌리안이 찾아온다. 아버지가 리아의 주소를 절대 알려주지 않았을 게 당연하기 때문에 어떻게 자신을 찾아온 건지 의문스러웠다. 카르멘이 찾아온 이유는 자신의 아들 마테오가 사라졌다고 하며, 마지막으로 리아의 서점에서 카드가 사용됐다는 걸 알렸다. 그러면서 마테오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들이 다시 이곳을 찾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언니와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리아는 알겠다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는데, 떠나려던 카르멘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유골재를 건네주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편지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는 죄책감과 이제 아나의 죽음을 밝힐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책임감이 리아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소설의 중심이 되는 사건은 30년 전에 일어난 아나의 죽음이었다. 고작 17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가 몸이 토막 나고 불에 그을린 채 발견됐다는 사실은 가족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작은 마을에서 이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적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더욱 오랫동안 이 사건을 기억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빠르게 수사가 종결되었다는 게 의심스러웠다.

아나의 죽음을 중심에 두고 여러 사람의 시점으로 사건에 대해, 그리고 비밀과 진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첫 번째로 등장한 사람은 아나의 죽음 이후 신이 없다고 믿게 된 둘째 언니 리아였고, 그다음은 카르멘과 훌리안의 아들 마테오였다. 마테오는 독실한 신자인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무신론자인 할아버지 알프레도와 가깝게 지내면서 신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되었다.

아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던 마르셀라는 친했던 친구이니만큼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었다. 심지어 가족들, 언니들조차 모르는 아나의 비밀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건 아나가 말하지 않았다. 또한 아나는 마르셀라의 무릎에서 숨을 거뒀는데, 이후 사람들을 부르러 가려던 그녀의 머리에 성당의 대천사상이 떨어지는 바람에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말았다. 엘메르는 아나를 첫 사건으로 맡았던 법의학자였었다.

그리고 후반으로 가면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훌리안과 카르멘의 이야기가 펼쳐져 충격을 줬다. 에필로그에서는 알프레도가 딸 리아와 손자 마테오에게 남기는 편지가 등장했다.


초반에 리아의 시점에서 등장한 아나의 사건은 그 자체만으로 너무나 끔찍하고 안타까운 것이었다. 독실한 가족들 사이에서 신은 없다고 선언한 리아가 이해가 될 정도였다. 아버지 역시 종교적 믿음에 자유로운 편이었는데, 나중엔 리아처럼 무신론자로서 그녀의 견해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정말 든든했다. 여기에 알프레도에게 영향을 받은 마테오는 스스로 종교적인 믿음에 대해 선택하는 현명한 모습을 보여 리아와 잘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프레도 역시 그런 걸 느꼈기에 두 사람이 함께 보라며 편지를 남긴 것일 터였다. 진실을 모두 다 알고 난 후에 알프레도가 두 사람에게 편지를 남긴 심정이 이해가 됐다. 두 사람이 함께라면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절망으로 쓰러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을 향해 한 발자국씩 가까워지면서 예감되던 게 있었는데 역시나 어긋나지 않았다. 아나와 관련된 사건 두 가지 중 한 가지는 명백하게 그를 의심했기에 놀랍지 않았지만, 아나를 그렇게 만든 자가 누구였는지 밝혀졌을 때 혐오스러움에 몸서리가 처졌다. 신을 믿는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고도 천벌을 받지 않은 건가 싶어 불쾌함이 하늘을 찔렀다. 독실한 신자의 모순이 노골적이라 혐오스럽고 역겹기까지 했다. 자기만의 정의에 빠져 있는 것 또한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결말에 가능성으로 열어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 말마따나 신이 있다면 당연히 천벌을 받을 거라고, 제발 그들에게 지옥과도 같은 벌을 내려주기를 빌었다.


범죄 스릴러를 기본으로 하고 신에 대해서 말하는 책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노골적으로 말하든, 아니면 돌려 말하든 사람들은 무신론자를 좌절한 군상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급기야 종교적 믿음을 갖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악이 어느 정도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예단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신도 믿지 않는 사람은 결코 선량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논리다. - P18.19

내 믿음이 두려움과 내 주변 사람들이 떠받드는 하느님─혹은 다른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으면 나쁘고 끔찍한 일, 즉 세상의 종말이 올 수도 있다는 가정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이처럼 하느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갖도록 교육받고 자랐다. 하지만 어떤 자들이 내 동생을 죽인 것도 모자라 시신을 불태워 없애버리려고 하다가 결국 토막까지 내고 말았다. 내가 믿음을 버린대도 얼마나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 P21

여성들은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싸워오지 않았던가? 임신중지는 자기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내가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는 거지? 그들은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한다. 일단 결정을 내린 이상, 여자들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아나는 결정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느님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 것뿐이다. - P324.325

어쩌면 믿음이라는 건 순진한 속임수일지도 몰라. 적어도 여러 가지 소박한 속임수에 의해 지탱되는 삶에서 말이다. -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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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자이언트 픽
이유리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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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 ×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성재가 떠난 뒤 수진에게 남은 건 아픈 반려묘와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그런 수진에게 20년 지기 친구 영인이 그녀의 감정을 사겠다고 말했다. 영인의 남편이 어플로 조건만남을 한 이후 둘의 관계가 이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골치 아픈 감정에 더 이상 휘둘리기 싫었던 수진은 영인과 함께 감정전이센터를 방문해 적합도 검사를 받고 기준치에 도달했다는 연락을 받은 뒤 자신에게 남은 감정을 영인이에게 전이했다.


김서해 × 폴터가이스트   고등학생 세인이에게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엄마는 세인이를 데리고 여러 병원, 심지어는 무당까지 찾았지만 소리를 없애지는 못했다. 그렇게 익숙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소리와 살아가던 세인에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전학생 정현수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로 친구가 없는 세인이를 현수는 왠지 재미있어하며 다정하게 대했고, 세인이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어릴 적 사고에 대해 털어놓았다.


김초엽 ×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나'는 인공장기 배양회사에서 일하다 눈알 공포증으로 그만두고 인공피부를 만드는 '솜솜 피부 관리숍'에 취직했다. 그곳은 스스로를 동물이나 물고기라고 생각하는, 혹은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인공피부를 만드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아주 잘 적응을 하며 우수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사장이 질색하는 의뢰 신청자 수브다니가 찾아온다. 사장이 몇 번이고 거절했는데 매번 찾아오는 수브다니는 자신의 신체를 금속으로 바꾸고 싶다고 했다. 금속 느낌이 나는 재질이 아닌 금속 자체로 바꾸길 원해서 사장은 늘 거절을 한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수브다니는 인간화를 한 안드로이드였다는 게 밝혀졌다.


설재인 × 미림 한 스푼   고등학교 신입생 주경은 학교에 가게 되면 야간 자율 학습을 신청하겠다 다짐했다. 가정 폭력을 견딜 수가 없었기에 집에 되도록이면 늦게 오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새 학기가 시작되는 당일 새벽,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기화했다. 주경은 더 이상 학교에 갈 수가 없어 폭력에 내몰린 상황이 됐다. 사람들이 기화하는 이유는 외계 존재 '솜새끼'가 지구 운영을 종료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솜새끼는 특별히 누군가는 살려주겠다고 하며 여러 작가를 모아 종말에 관한 글을 쓰게 하는 서바이벌을 열었다. 그리고 주경은 아무도 내려가지 않은 빌라의 지하층에서 미림을 만났다.


천선란 × 뼈의 기록   장의사 안드로이드 로비스는 유가족 없이 홀로 생을 마감하는 노인, 혹은 생전에 로비스에게 염을 맡긴다는 의사를 남긴 이들의 마지막 길을 도왔다. 로비스는 고인을 존중하며 그들의 몸을 보며 삶을 반추했다. 로비스는 89살의 노인, 항공우주군 대위의 첼의 여동생, 로봇을 좋아했던 어린 소년 등을 차례로 떠나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비스는 매일 잠깐이나마 앉아서 대화를 나눴던 청소부 모미를 스테인리스 침대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다섯 작가의 짧은 이야기가 담긴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당연히 천선란 작가의 <뼈의 기록>이었다. 천선란 작가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마음을 울리기에 이번에도 기대가 됐는데 어김없이 나를 울컥하게 만들고 말았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 속에서 장의사 안드로이드 로비스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에게 염을 맡긴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헤아리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러다 로비스가 가깝게 지낸 모미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마치 인간과도 흡사한 감정으로 모미의 죽음을 애처롭고 안타깝게 여겼다. 어릴 적 화재로 인해 모미의 몸에 화상 흉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로비스는 그녀를 화장시킬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처음으로 규칙을 위반하는 선택을 한다.

천선란 작가의 책 <랑과 나의 사막>과 비슷하게 미래를 배경으로 안드로이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그런지 비슷한 결의 감정을 느꼈다. 감정이 없어야 마땅하지만 가깝게 지낸 이의 죽음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슬퍼하고 애도하는 안드로이드의 이야기가 사람의 그것보다 더 감정적이고 애틋해서 먹먹한 여운이 남았다. 엔딩은 자못 쓸쓸했지만 그럼에도 로비스가 의연했기에 오히려 내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표제작인 이유리 작가의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이별 뒤에도 여전히 남은 사랑의 감정을 필요한 다른 이에게 이식하는 감성 SF에 관한 이야기였다.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이별이 고통스러운 이에게 이보다 더 좋은 기술은 없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소설 속 수진과 영인이 처한 상황에서 감정이 꼭 들어맞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감정을 무사히 전이하고 나서 영인의 남편이 가지는 의문에 나도 모르게 공감이 되었다. 그리고 후반에 등장한 어떤 캐릭터의 감정 전이 시술에 관한 견해나 행동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한때 깊이 빠져들었던 감정을 완전히 소거했을 때 과거의 사랑을 과연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의문을 남겼다.

<폴터가이스트>의 두 고등학생의 이야기는 처한 상황이 끔찍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귀여운 느낌이 있었다. <수브다니의 여름휴가>는 신선한 소재에 안드로이드를 연결 지어 흥미를 느끼게 했다. <미림 한 스푼>은 그럼에도 인간은 마지막까지 서로를 사랑하며 자신도 모르게 구원하는 이야기라 좋았다.

아기자기한 제목의 책 안에 담긴 여러 이야기들이 공통의 장르 안에서 다양한 재미를 줘서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그 순간 로비스는 이제 죽음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죽음이란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에게 다르며, 볼 수 없는 존재의 삶을 끊임없이 보고 있는 뼈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이로구나. 천선란 <뼈의 기록> p.277

"감정이라는 게, 무슨 장기 이식하듯이 누구 것을 빼서 다른 누구에게 넣는다고 그게 진짜 자기 것이 될까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이유리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p.30

종말을 바란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통증이라고는 없는 마지막을 원했다. 주경 역시 그랬다. 종말은 부드러워야 했다. 종말이 아프다면, 자신을 멸시하며 덜 아픈 현재를 꾹 참아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설재인 <미림 한 스푼>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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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
타키스 뷔르거 지음, 유영미 옮김 / 황소자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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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스위스인 사업가의 아들 프리츠는 독일인 어머니에게서 그림을 배우며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일곱 살 때 지나가던 마부에게 모루로 맞아 뇌를 다쳐 색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이후, 어머니는 프리츠를 더 이상 사랑해 주지 않았다. 그로 인해 그는 만성적인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프리츠가 사는 스위스에도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다. 베를린에서 나치가 유대인을 잡아간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에 호기심이 동한 프리츠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일로 향했다. 스위스 여권을 가지고 있는 프리츠는 그곳에서 큰 불편 없이 지냈다.

그러다 미술학교에서 누드모델로 일하는 크리스틴을 만나게 됐다. 프리츠는 그녀에게 단번에 빠져들었고, 크리스틴 역시 프리츠를 좋아하는 듯했다. 어느 날부터 크리스틴이 프리츠를 만나러 오지 않다가 며칠 만에 갑자기 나타났다. 누군가에게 맞은 듯 엉망인 상태였다. 그제야 프리츠는 크리스틴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무한한 사랑을 받는 게 당연했던 어린 시절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색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이후 사랑을 받지 못한 프리츠는 결여된 부분이 생겨났다. 프리츠의 엄마 입장은 도통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기에 프리츠를 가여워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 입장에서는 엄마에게 왜 자신을 예전처럼 사랑해 주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프리츠를 한없이 사랑하긴 했지만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그와 교류하는 시간이 엄마보다는 적었기에 프리츠는 그 결여된 부분을 채워주지 못했고, 그는 그렇게 성인이 되었다.

결여에 조금은 비뚤어진 구석이 있었던 모양인지 프리츠는 베를린의 유대인들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듣고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빠는 반대했지만 스위스인이었기에 어느 정도의 안전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렇게 향한 베를린의 호텔에서 머무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직업도 없는 스무 살의 청년 프리츠는 아빠가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을 하며 제3자의 시선으로 전쟁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만난 크리스틴과 단번에 사랑에 빠져 때때로 만나다가 나중엔 매일 그녀가 호텔로 찾아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며칠 동안 사라졌다 돌아온 크리스틴에게서 고문당한 흔적을 발견한 뒤에 그녀가 유대인인 스텔라 골트슐라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탓에 크리스틴이 실존 인물인 스텔라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누드모델과 클럽의 가수, 그리고 라틴어를 가르쳤던 스텔라는 프리츠와 있지 않을 때에는 같은 유대인을 고발하는 일을 했다. 순전히 나치에게 잡힌 부모를 빼내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 그녀에게 그 일은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프리츠가 그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스텔라는 조금씩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순수한 청년의 시선에 스텔라 스스로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이후 소설은 두 사람의 헤어짐을 깔끔하게 그려냈지만 마지막에 프리츠가 오랫동안 스텔라를 사랑했다는 걸 보여줬다. 지울 수 없는 사랑을 한 프리츠였고, 자신이 한 일을 죽을 때가 되었을 때 돌려받은 스텔라였다. 안타깝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는 삶이었다.


소설 <스텔라>는 실존 인물인 스텔라 골드슐락에 관한 사실에 픽션을 가미했다. 사랑 이야기였지만 온전히 그 장르로만 즐길 수 없었기에 책을 읽는 내내 동정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양가적 감정이 들었다.

외투 깃 위에서 그녀의 밝은색 머리카락 한 올을 발견했다. 나는 곧장 머리카락을 제거해 버리는 대신 이것으로 무얼 할지 반나절 동안 생각했다. 그런 다음 머리카락을 입속에 넣고는 코냑으로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겼다. - P147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배신하는 게 잘못된 일일까?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배신하는 게 옳은 일일까?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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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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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동성 애인인 T를 죽이고 교도소에서 복역을 마친 천톈홍이 고향 용징으로 돌아왔다. 소설가로 이름을 알리고 독일까지 간 톈홍이 돌아올 곳은 누나들이 있는 고향뿐이었다.


과묵한 아버지, 말을 옮기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어머니 사이에서 누나들 다섯이 태어났고, 이후 형과 막내 톈홍이 태어났다. 이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가족을 떠났으며 형은 톈홍처럼 감옥에 갔다. 누나들은 각자 결혼을 해서 용징에 살기도 했고, 타이베이에서 사는 누나도 있었다. 그리고 누나들 중 한 명은 귀신이 되어 가족의 곁을 맴돌았다.



톈홍은 개천에서 용 난 스타일이었다. 지도에서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마을 출신에서 나고 자라 그가 쓴 책이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 신문에 났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거기다 독일로 유학까지 떠나게 되었으니 그보다 더 큰 출세는 없었다.

그럼에도 톈홍은 엄마에게 외면을 당했다. 어렸을 적 근처에 사는 과수원 집 둘째 아들 징쯔총과 함께 있었던 사건으로 애지중지해야 마땅했을 막내아들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성인이 된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러 왔을 때에는 쫓겨나고 말았다. 그로 인해 톈홍은 독일에서 복역을 마치고 오갈 데 없는 상황에서도 집으로 돌아오는 걸 주저했을 터였다. 다행히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집을 나가 이제는 큰누나가 그 집을 지키고 있었다.

가만 보면 톈홍만 말 못 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아니었다. 큰누나 수메이는 첫째 딸이라는 이유로 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 공장에 취업해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했지만, 그가 도박에 빠져 돈을 몽땅 날리고 말았다. 둘째 누나 수리는 공무원으로 평탄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얼마 전에 사건이 터져서 인터넷을 달구는 주인공이 됐다. 셋째 누나 수칭은 공부도 잘하고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현재는 앵커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며 살고 있었다. 넷째 누나 쑤제는 다섯째 만메이의 혼처로 예정되어 있던 왕 씨 집안의 첫째 아들과 결혼해 용징에서 '백악관'이라 부르는 대저택에 살고 있는데, 정신적인 문제가 생겨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웠던 건 문제가 있던 사람들이 비단 살아있는 사람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소설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귀신, 죽은 자들 역시 저마다의 이유로 용징에 머물고 있었다. 톈홍은 물론이고 누나들도 용징에 다시 돌아오기 싫어했는데 돌아왔듯, 귀신들 역시 비슷한 이유로 그곳에 머물고 있는 거라 사료됐다.


소설은 동성 연인을 살해한 톈홍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후반에 완전히 밝혀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 그 사이에 가족 간의 관계라든지, 남아선호사상 중심의 가정에서 딸로 살아가는 고충도 말하고 있었고, 여성의 도구화와 가정 폭력 등 소외된 이들에 대해 두루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귀신들도 거기에 목소리를 보탰다는 게 특이점이었다.

후반에서야 톈홍의 이유가 밝혀지긴 했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꽤나 지루하고 시점이 오락가락하여 읽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종의 의식의 흐름 기법이었는데, 이런 방식이 익숙하지 않은 터라 조금은 아쉬웠다.

방금 큰언니가 전화를 걸어 네가 돌아왔다고 말해 줬어.
언니가 전화로 네가 돌아왔다고 말했어. 언니가 그랬어. 톈홍이 돌아왔으니까, 쑤제 너도 빨리 나와. 톈홍이 독일에서 돌아왔다고.
이 바보야. 뭐 하러 돌아왔어? 이 귀신들의 땅에 와서 뭘 하겠다는 거야? - P174

어른이 된 그는 귀신을 믿지 않게 되었고 두려워하지도 않게 되었다. 귀신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가장 잔인한 것은 인간이었다.19

오늘 그는 돌아왔다. 그에게는 해답이 없었다. 사람은 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어디가 집인가? 그가 돌아온 것은 속죄를 위해서도 아니고 참회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해답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귀향은 의무였다. 귀향은 그를 질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돌아와야 했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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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날 정해연의 날 3부작
정해연 지음 / 시공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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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아내 현아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종현은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현아를 찾아 헤매다가 경찰에 신고까지 하지만, 경찰은 단순 가출이라고 했다. 종현의 전화는 받지 않던 현아가 경찰의 연락을 받고는 곧 이혼을 할 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종현은 현아가 이혼 얘기를 꺼냈다는 사실도 믿을 수가 없다. 현아가 떠나기 직전까지 두 사람의 사이는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다. 그게 벌써 5개월 전이었다.


그리고 현재, 종현의 집에 웬 거구의 남자 고구남이 쳐들어와서는 김실자라는 여자에게 2억 원을 빌려줬다고 하며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했다. 종현이 그런 사람 모른다고 하자 나가려던 구남이 두 사람의 결혼사진을 보며 현아가 김실자라고 말했다. 현아가 왜 김실자라는 이름으로 돈을 빌렸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되던 종현은 일단 그녀가 가출했다는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구남은 돈을 받아야겠다며 그때부터 종현의 집에 눌러앉았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뉴스에서 웬 임산부가 6살 박아영 어린이를 납치했다는 사건이 보도되었다. CCTV에 찍힌 흐릿한 정지 사진만 봤는데도 종현은 납치범이 현아라는 걸 알고 너무 당황스럽기만 하다.




가출한 현아를 향한 종현의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었나 보다. 현아를 찾느라 회사도 때려치우고 엄마를 포함해 지인들이 이제 그만 잊고 새 출발을 하라고 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걸 보면 말이다. 소설 시작부터 등장한 중요한 문제는 결혼하고 1년 뒤에 발기 부전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아는 그런 종현을 다독이며 응원해 줬을 만큼 마음씨도 넓은 아내였었다. 종현은 혹여 남성성의 문제로 인해 현아가 가출했고 이혼하려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에 병원까지 다녔고 현아가 떠나기 전에 챙겨준 비타민도 꼬박꼬박 복용했다. 크게 나아진 건 없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 종현 앞에 구남이 나타나면서 자신이 알던 현아가 진짜였는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구남이 현아를 김실자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것에서부터, 김실자가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고 돈을 만들어오라고 했기에 구남을 찾아왔다고 하는데, 종현은 누구를 때리기는커녕 맞을 것만 같은 캐릭터였다. 그뿐만 아니라 뭔가를 알고 있는 듯 구남은 현아가 챙겨준 비타민을 대뜸 먹지 말라고 말했었다.

종현이 이상함을 느끼고 구남을 추궁하자 이 집이 종현과 현아가 마련한 자가가 아니라 월세라는 게 확인됐다. 또한 가계 경제는 모두 현아가 맡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저축한 게 없었고 통장 계좌에는 마이너스 5천만 원이라는 거액이 찍혀 있었다. 거기다 종현은 침대 밑 깊숙한 곳에서 두 줄짜리 임신 테스트기를 발견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종현의 멘탈이 박살 나다 못해 가루가 되어 흩어졌을 것만 같은데, 아직 큰 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바로 현아가 임신을 한 몸으로 여자아이를 납치했다는 뉴스였다.

너무나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내가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게 밝혀질 때마다 종현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구남조차 말리지 못할 정도로 폭주하며 날뛰는 종현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됐다.

이후 소설은 종현과 구남이 현아를 경찰보다 먼저 찾자는 합심으로 흘러가면서 묘한 관계로 시작한 이 사건이 나름의 스릴과 소리 내어 웃을 정도로 코믹한 전개로 이어졌다. 평범하기만 한 종현이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다잡는 마음이 있었고, 조금은 혹은 많이 나쁜 놈이었지만 그래도 후회하고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는 구남이 있었다.

그리고 현아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며 일말의 동정도 느끼지 않게 만들었다. 이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악당에게 안타까운 서사 따위 부여하지 않는 작가의 선택이 좋았다.


정해연 작가의 소설 <선택의 날>은 '날 시리즈'라고 불리는 세 작품 중 하나다. 시리즈로 묶여있긴 하지만 서로 연관성은 전혀 없다. 재미있게 읽은 <유괴의 날>만큼이나 통통 튀는 재미와 코믹함이 즐거움을 주었다. 이번에도 재미있었던 책이다.

현아는 어느 날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떠나 버렸다. 이혼하겠다며 경찰과 통화했다는 현아는 그가 알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모르는 다른 모습도 있지 않을까? - P31.32

종현은 차현아가 미웠다. 그러나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 즉시 그는 이미 아버지가 되었다. 조금 전까지 한 여자를 찾는 미션으로 불타올랐던 종현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지금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 아이를 지키고, 만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유괴된 아이와 그들의 부모가 떠올랐다. 아이의 생사는 아직 확인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존재가 이렇게 마음을 힘들게 하는데, 유괴된 아이의 부모 마음은 어떨까를 생각하면 괴로웠다. - P105

구남은 이제 두 가지에 대해 확실히 깨달았다. 하나는 모든 어머니에게 모정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선천적으로 짐승보다 못한 인간도 있다는 사실. - P265.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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