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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ㅣ 자이언트 픽
이유리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월
평점 :
이유리 ×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성재가 떠난 뒤 수진에게 남은 건 아픈 반려묘와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그런 수진에게 20년 지기 친구 영인이 그녀의 감정을 사겠다고 말했다. 영인의 남편이 어플로 조건만남을 한 이후 둘의 관계가 이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골치 아픈 감정에 더 이상 휘둘리기 싫었던 수진은 영인과 함께 감정전이센터를 방문해 적합도 검사를 받고 기준치에 도달했다는 연락을 받은 뒤 자신에게 남은 감정을 영인이에게 전이했다.
김서해 × 폴터가이스트 고등학생 세인이에게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엄마는 세인이를 데리고 여러 병원, 심지어는 무당까지 찾았지만 소리를 없애지는 못했다. 그렇게 익숙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소리와 살아가던 세인에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전학생 정현수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로 친구가 없는 세인이를 현수는 왠지 재미있어하며 다정하게 대했고, 세인이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어릴 적 사고에 대해 털어놓았다.
김초엽 ×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나'는 인공장기 배양회사에서 일하다 눈알 공포증으로 그만두고 인공피부를 만드는 '솜솜 피부 관리숍'에 취직했다. 그곳은 스스로를 동물이나 물고기라고 생각하는, 혹은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인공피부를 만드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아주 잘 적응을 하며 우수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사장이 질색하는 의뢰 신청자 수브다니가 찾아온다. 사장이 몇 번이고 거절했는데 매번 찾아오는 수브다니는 자신의 신체를 금속으로 바꾸고 싶다고 했다. 금속 느낌이 나는 재질이 아닌 금속 자체로 바꾸길 원해서 사장은 늘 거절을 한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수브다니는 인간화를 한 안드로이드였다는 게 밝혀졌다.
설재인 × 미림 한 스푼 고등학교 신입생 주경은 학교에 가게 되면 야간 자율 학습을 신청하겠다 다짐했다. 가정 폭력을 견딜 수가 없었기에 집에 되도록이면 늦게 오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새 학기가 시작되는 당일 새벽,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기화했다. 주경은 더 이상 학교에 갈 수가 없어 폭력에 내몰린 상황이 됐다. 사람들이 기화하는 이유는 외계 존재 '솜새끼'가 지구 운영을 종료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솜새끼는 특별히 누군가는 살려주겠다고 하며 여러 작가를 모아 종말에 관한 글을 쓰게 하는 서바이벌을 열었다. 그리고 주경은 아무도 내려가지 않은 빌라의 지하층에서 미림을 만났다.
천선란 × 뼈의 기록 장의사 안드로이드 로비스는 유가족 없이 홀로 생을 마감하는 노인, 혹은 생전에 로비스에게 염을 맡긴다는 의사를 남긴 이들의 마지막 길을 도왔다. 로비스는 고인을 존중하며 그들의 몸을 보며 삶을 반추했다. 로비스는 89살의 노인, 항공우주군 대위의 첼의 여동생, 로봇을 좋아했던 어린 소년 등을 차례로 떠나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비스는 매일 잠깐이나마 앉아서 대화를 나눴던 청소부 모미를 스테인리스 침대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다섯 작가의 짧은 이야기가 담긴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당연히 천선란 작가의 <뼈의 기록>이었다. 천선란 작가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마음을 울리기에 이번에도 기대가 됐는데 어김없이 나를 울컥하게 만들고 말았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 속에서 장의사 안드로이드 로비스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에게 염을 맡긴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헤아리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러다 로비스가 가깝게 지낸 모미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마치 인간과도 흡사한 감정으로 모미의 죽음을 애처롭고 안타깝게 여겼다. 어릴 적 화재로 인해 모미의 몸에 화상 흉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로비스는 그녀를 화장시킬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처음으로 규칙을 위반하는 선택을 한다.
천선란 작가의 책 <랑과 나의 사막>과 비슷하게 미래를 배경으로 안드로이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그런지 비슷한 결의 감정을 느꼈다. 감정이 없어야 마땅하지만 가깝게 지낸 이의 죽음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슬퍼하고 애도하는 안드로이드의 이야기가 사람의 그것보다 더 감정적이고 애틋해서 먹먹한 여운이 남았다. 엔딩은 자못 쓸쓸했지만 그럼에도 로비스가 의연했기에 오히려 내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표제작인 이유리 작가의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이별 뒤에도 여전히 남은 사랑의 감정을 필요한 다른 이에게 이식하는 감성 SF에 관한 이야기였다.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이별이 고통스러운 이에게 이보다 더 좋은 기술은 없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소설 속 수진과 영인이 처한 상황에서 감정이 꼭 들어맞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감정을 무사히 전이하고 나서 영인의 남편이 가지는 의문에 나도 모르게 공감이 되었다. 그리고 후반에 등장한 어떤 캐릭터의 감정 전이 시술에 관한 견해나 행동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한때 깊이 빠져들었던 감정을 완전히 소거했을 때 과거의 사랑을 과연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의문을 남겼다.
<폴터가이스트>의 두 고등학생의 이야기는 처한 상황이 끔찍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귀여운 느낌이 있었다. <수브다니의 여름휴가>는 신선한 소재에 안드로이드를 연결 지어 흥미를 느끼게 했다. <미림 한 스푼>은 그럼에도 인간은 마지막까지 서로를 사랑하며 자신도 모르게 구원하는 이야기라 좋았다.
아기자기한 제목의 책 안에 담긴 여러 이야기들이 공통의 장르 안에서 다양한 재미를 줘서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그 순간 로비스는 이제 죽음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죽음이란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에게 다르며, 볼 수 없는 존재의 삶을 끊임없이 보고 있는 뼈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이로구나. 천선란 <뼈의 기록> p.277
"감정이라는 게, 무슨 장기 이식하듯이 누구 것을 빼서 다른 누구에게 넣는다고 그게 진짜 자기 것이 될까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이유리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p.30
종말을 바란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통증이라고는 없는 마지막을 원했다. 주경 역시 그랬다. 종말은 부드러워야 했다. 종말이 아프다면, 자신을 멸시하며 덜 아픈 현재를 꾹 참아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설재인 <미림 한 스푼>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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