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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최선
문진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평점 :
미노리와 테츠 '나'는 유치원 때부터 단짝인 수민과 일본에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방문한 가게 사장 부부 미노리, 테츠를 알게 된다. 붙임성과 밝음을 타고난 수민은 그들과 금세 가까워졌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SNS로 연락을 계속 이어나간다. 그런데 수민이 미노리와 테츠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노리가 SNS로 나에게 연락해 지금 한국에 있으니 둘이 만나자고 했다.
변산에서 '나'는 민주, 민주의 딸 수온과 함께 종종 여행을 떠나곤 한다. 이번 여행은 변산이었는데, 그곳을 여행지로 정한 건 나의 친구이자 민주의 남편 승민과의 기억 때문이었다. 즐거워야 할 여행은 세상에 없는 승민과 승민의 과로사 이후 산재를 인정받기 위한 지난한 소송으로 착 가라앉아 있다.
오! 상그리아 엄마는 '나'에게 아빠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스페인에 갔을 때 하룻밤을 보낸 남자라고 농담조로 이야기하는데, 알고 보니 엄마 역시 할아버지가 바깥에서 낳아 데리고 온 자식이었다. 할머니는 엄마가 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엄마를 아끼며 키웠고, 엄마가 역마살로 인해 매번 집을 나갈 때마다 돌아와야 하는 곳은 할머니가 있는 곳이라는 걸 깨닫게 했다.
내 할머니의 모든 것 할머니 배정심 여사는 40여 년 전에 엄마와 삼촌을 두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현재에 도달했을 때 엄마는 죽은 삼촌의 유산 문제로 할머니에게 연락을 했다. 1인분의 삶을 살아온 할머니 배정심 여사에게 괜히 마음이 기울어진 '나'는 그녀와 자주 만나게 된다.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끝내지 못하는 6년 동안의 연애를 제대로 끝내기 위해 '나'는 퇴사를 하고 인도로 떠났다. 그곳에서 나는 머무는 호텔 주인과 친하다는 남자 안와와 친구가 된다.
고래 사냥 '나'와 룸메씨는 어느 날 훌쩍 월미도로 바이킹을 타러 떠난다.
네버랜드에서 태국으로 가족 휴가를 온 '나'는 함께 오기로 했다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빠진 남자친구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던 중에 리조트의 스태프인 론과 인사하고 대화할 정도가 되면서, 그리고 결혼한 언니가 결혼 전의 언니와는 달라졌다는 걸 확실히 느끼면서 그들이 삶을 추구하는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를 갖는다.
지나가는 바람 '나'는 갭 이어를 갖겠다고 퇴사를 한 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저 나보다 먼저 퇴사한 입사 동기 민지씨의 열정적인 삶을 SNS로 훔쳐보며 감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전 회사 후배인 우림을 만나 저마다의 삶과 나의 삶에 대해 반추한다.
한낮의 빛 아르바이트생 주명이 '나'를 언니라고 부르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유영 언니가 떠올랐다. 오래전 우리 가족의 집에 잠시 머물렀던 유영 언니는 집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으로 인해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여러 이야기를 모은 단편은 모두 1인칭 시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중에서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대체로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나'를 중심으로 타인에 대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모두 비슷한 결의 사람들이라는 걸 느끼게 했다.
그 특징이 가장 도드라진 건 첫 번째 이야기인 <미노리와 테츠>였다. '나'와 오랜 친구인 수민은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 수민이 밝은 햇살을 잔뜩 머금어 모두에게 건강한 에너지를 나눠주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수민과는 반대되는 그림자와 같은 사람이었다. 회사 생활을 하고 있긴 하지만 사회성이 없다는 핀잔을 상사에게 들어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이제는 그림자의 삶이 익숙해졌다. 그러다 일본에서 알게 된 미노리가 더 가깝게 지냈던 수민은 빼고 '나'에게만 만나자고 한 이후 두 사람은 묘한 공감대를 느꼈다. 지나고 난 후에 그림자였다는 걸 깨달은 그들의 끝이 씁쓸하기만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자신의 이러한 삶의 방식을 유지할 거라고 보여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할머니의 모든 것>은 엄마와 삼촌을 두고 떠난 할머니에게 40여 년 만에 연락하게 되면서 손녀인 '나'와 인연이 맺어지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들의 관계가 이어지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을 정도로 드문 만남이었는데, 그러다 할머니가 다시 사라지게 되면서 '나'는 그녀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타인보다 자신을 우선하는 삶이, 그러면서도 뭔가를 이루며 살기보다 소박한 자신의 삶을 이뤄나가는 게 당신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하고 지키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남겼다.
<지나가는 바람>은 능력이 출중하고 삶에 열정적인 전 직장 입사 동기를 SNS로 염탐하며 자신의 삶을 축내고 있는 '나'를 이야기했다. 이런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는 와중에 전 직장 후배 우림과 만나 술을 마시게 되면서 그에게는 '나'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 결과 SNS를 끊고 자신의 삶을 이뤄나가려는 희망적인 끝을 맺어 응원하게 됐다.
<한낮의 빛>은 알고 보니 굉장히 화가 나는 심각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유영 언니가 '나'의 집에서 겪은 끔찍한 사건을 가족들은 아무렇지 않은 걸로 치부하는 걸 어릴 때는 별생각이 없었으나 머리가 크고 나니 너무 역겨웠다. 그로 인해 '나'가 어떤 병까지 얻어야 했고 결국에는 가족의 곁을 떠나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싶었다. 유영 언니가 받았을 상처로 스스로를 어둠에 가두려는 '나'를 양지로 이끌어준 주명의 손길이 괜찮다고 등을 쓰다듬어주는 것 같은 위로를 느꼈다.
그림자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잔잔하게 흘렀지만 때로는 마음을 깊이 찌르기도 했다. 9편의 단편을 읽은 후, 그들 삶의 그림자가 더는 짙어지지 않기를, 서서히 옅어진 그림자로 스스로를 미약하게나마 발하는 빛으로 이끌기를 바라게 되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어둠 속에 자신을 내버려둘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닐까. 너무 어두워서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가도, 시간을 견디면 결국에는 아주 느린 속도로 시야가 밝아지듯이. 캄캄한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 <변산에서> - P61
우린 아마 평생 이러고 살겠지. 갈대처럼 흔들리면서. 근데 갈대 괜찮지 않나. 지나가는 바람에 한껏 몸을 누이면 되니까. 한참 엎어져 있다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고, 또 엎어지고. 누가 누구를 일으켜줄 수는 없지만, 같이 엎어져 있는 건 참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우림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냥 속으로 생각만 했다. <지나가는 바람> - P225
눈을 감고 안대를 썼는데도 왜 어떤 잔상이 망막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걸까. 묻고 싶었다. 우리가 잠들 수 없는 것은 그래서일까. 우리가 우리에게서 빛의 기미를 완전히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한낮의 빛>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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