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원, 은, 원
한차현.김철웅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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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우리만 있으면 돼요. 중요한 건 우리 두 사람이에요. 그게 전부예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p.48




600일 넘게 사귄 여자친구 은원이 사라졌다. 차연은 그녀가 전화도 받지 않고 메시지도 읽지 않으며 집에도, 회사에도 없는 상황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로 인해 차연은 그녀와 제주 여행 후 돌아온 공항에서 헤어지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기도 했고, 은원과 처음 만났을 때는 물론이고 여러 만남과 데이트에 대해 기억해 보기도 했다.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연인이 갑자기 연락이 닿지 않을 때 평소처럼 무언가를 하느라 그런가 보다 생각하는 게 우선일 것이다. 차연 역시 그랬다. 은원이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두었을 거라고, 운동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걱정을 하며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싶어 기억을 되새기기도 했다. 그렇게 연락이 되지 않는 게 몇 시간에서 며칠로 이어지면서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라 단정 지었다. 잠깐 집 앞 편의점에 나간 듯 모든 게 그대로인, 사람만 쏙 빠져나간 은원의 집을 보며, 그리고 벌써 일주일째 회사에도 결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에 당연히 은원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다림은 은원을 향한 걱정과 미처 인지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 있었는지 되새기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물류센터에서의 묘한 첫 만남과 대화, 자꾸만 생각나는 그녀를 향한 감정으로 어렵사리 데이트 신청을 했던 오래전 과거를 떠올렸다. 그런가 하면 가장 최근이었던 제주도 여행과 그곳에서 돌아와 공항에서 헤어지기까지의 선명한 기억도 되짚었다.


차연이 가만히 기다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은원과 함께 있다가 몇 번 마주쳤던 그녀의 고등학교 동창 성이연을 찾아가 보기도 했고, 경찰에 신고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차연이 접한 건 기이함뿐이었다. 분명 은원의 친구라고 알고 있었던 성이연이 일하는 동물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자신이 알던 성이연과 다른 사람이 나타나 차연의 기억에 오류가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리고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을 땐 의심 어린 시선을 받게 되기도 했다.

그러다 은원이 돌아오면서,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의 어머니와 고모가 찾아와 은원이 어떤 상태인지 말해주면서 차연은 모든 것을 제쳐두고서라도,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서라도 은원을 여전히 사랑할 거라는 맹세 아닌 맹세를 했다. 그런 걸 차연을 보며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은원을 향한 마음이 깊어서 사랑을 견뎌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소설이 이어지며 또 다른 비밀이 드러났을 땐 사랑을 지키려던 굳건한 차연조차 이것만큼은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연뿐만이 아니라 세상 그 누구라도 세상 모든 게 완전히 뒤집힐 진실 앞에서 견디기란 어려울 거란 생각을 했다.

처음엔 평범한 연애소설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며 깜짝 놀라게 한 비밀이 드러난 이후 그들의 사랑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까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 긴장을 느끼게 했다. 그 상황에서 사랑을 택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의아했고, 차연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게 만들기도 했다. 작가의 말에 쓰여 있듯 연애소설이기에 차연과 은원의 사랑이 세상을 뒤집을 변수에도 이어져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남겼다.


영화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설정이 등장해 놀라움을 안기기도 했던 소실이다. 조금은 아쉽기도 했지만 그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사랑을 이야기한 소설을 가볍게 읽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우리만 있으면 돼요. 중요한 건 우리 두 사람이에요. 그게 전부예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 P48

비밀이 참 많은 사람 같아요. 은원은.
언젠가 어떤 와중이던가 차연이 대뜸 말했을 때 은원은 그게 무슨 말인가요, 묻지 않았다.
자신이 없어서 그래요.
응?
기억이 불편하고 자신 없어서. - P86

"많은 이들이 원치 않는 일이지만, 그 세계를 바로 접하고 온전히 이해해야 해. 그래야 은원이 네가 진정한 너로 다시 설 수 있어. 그래야 너의 한순간 한순간이 진정한 의미를 찾아갈 수 있어." - P155.156

"은원이를 사랑한다면, 차연 씨에게는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라면, 세상에 단 한 사람으로 족하지 않겠습니까."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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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선원 빌리 버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0
허먼 멜빌 지음, 이삼출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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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필경사를 두 명이나 둔 변호사는 업무가 한창 바빠져서 또 다른 필경사 바틀비를 채용한다. 기존의 필경사들이 감정 기복이 좀 있었던 것에 비해 바틀비는 그러지 않고 차분했고, 글씨도 단정해서 일을 맡기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서로 적응을 해나가던 어느 날, 변호사는 필사한 서류를 검토하기 위해 바틀비를 불렀는데, 그는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하며 거절을 했다. 변호사가 잘못 들은 줄 알고 재차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이후 바틀비는 필사 대조 작업은 물론이고, 그의 주 업무인 필사도 하지 않게 되었고, 사무실을 떠나달라는 말에도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대답하게 되는데...


선원 빌리 버드   선원 빌리 버드는 영국 해군 전함 벨리포텐트 함에 강제로 징집되어 갔다. 생각보다 적응을 잘해나가는 빌리 버드는 동료들에게 '멋쟁이 선원'이라고 불릴 만큼 인기가 좋았고, 골치 아픈 녀석들까지도 그의 말이라면 순한 양이 되었을 정도다.

하지만 선임 부사관인 클래거트만은 빌리 버드를 좋게 보지 않았다.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있던 클래거트는 빌리 버드를 적군의 스파이라고 비어 함장에게 보고를 하고, 함장에게 불려 온 빌리 버드는 당황스러워한다. 그러다 클래거트가 앞에 나서면서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일어나고 만다.




각 소설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바틀비와 빌리 버드는 주인공이었지만, 그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그들을 지켜본 자의 시선을 통해 두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처음엔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달랐던 게 눈에 들어왔다.


변호사의 필경사로 채용되어 조용히 자기 일을 하던 바틀비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본인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그렇다고 그만두지도 않으면서 사무실에 계속 있었고, 나중엔 그 무엇도 하지 않게 된 사람이라 솔직히 너무나 답답했다. 화자인 변호사는 훨씬 더 답답하고 그 상황 자체가 어이가 없었을 텐데, 그럼에도 그는 바틀비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었다. 마지막까지 이해가 안 되었을 텐데도 끝까지 바틀비를 찾았던 걸 보면 양심의 가책을 심하게 느끼는 사람, 어쩌면 책임감의 무게를 지고 있는 성격이라고 보였다.

클래거트의 고발로 인해 빌리 버드와 대화를 하게 된 비어 함장은 주변의 평판이 그러하듯 빌리 버드를 좋게 봤었다. 그런데 불려 온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이성과 감성의 판단이 흐려지는 태도를 보였다. 군법으로 봤을 때 빌리 버드는 명백한 죄인이었으나 비어 함장이 보지 않은 이면은 어떨지 알 수 없었기에 혼란스러워했다. 그런 혼란에도 불구하고 빌리 버드는 전함 내에서 죄를 지은 죄인이었기에 군법의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건지 알 수 없는 바틀비를 마지막까지 바라보던 변호사와 억울하게 누명을 쓴 빌리 버드가 취한 행동을 바로 앞에서 보고 그의 운명을 결정 내릴 수밖에 없었던 비어 함장의 시선을 통해 스스로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타인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 바틀비와 빌리 버드가 끝에 다다른 과정은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기에 변호사와 비어 함장은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였다. 그로 인해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가 사무치게 다가왔다.


<모비 딕>의 저자로 유명한 허먼 멜빌의 소설<필경사 바틀비·선원 빌리 버드>를 읽었다. 처음 읽는 작가의 소설은 짧은 이야기들이라 읽기 어렵지 않았는데,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책 뒤편의 설명과는 다르게 내게 와닿았다. 타인을 이해하는 건 지극히 어려운데 그들의 삶을 나로 인해 바꿀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끔찍하게 다가와 두려움을 남겼다.

저로서는 바틀비 군의 육체에는 자선을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틀비 군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육체가 아니었습니다. 고통받고 있는 것은 바틀비 군의 영혼이었죠. 영혼은, 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필경사 바틀비>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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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최선
문진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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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리와 테츠   '나'는 유치원 때부터 단짝인 수민과 일본에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방문한 가게 사장 부부 미노리, 테츠를 알게 된다. 붙임성과 밝음을 타고난 수민은 그들과 금세 가까워졌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SNS로 연락을 계속 이어나간다. 그런데 수민이  미노리와 테츠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노리가 SNS로 나에게 연락해 지금 한국에 있으니 둘이 만나자고 했다.

변산에서   '나'는 민주, 민주의 딸 수온과 함께 종종 여행을 떠나곤 한다. 이번 여행은 변산이었는데, 그곳을 여행지로 정한 건 나의 친구이자 민주의 남편 승민과의 기억 때문이었다. 즐거워야 할 여행은 세상에 없는 승민과 승민의 과로사 이후 산재를 인정받기 위한 지난한 소송으로 착 가라앉아 있다.


오! 상그리아   엄마는 '나'에게 아빠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스페인에 갔을 때 하룻밤을 보낸 남자라고 농담조로 이야기하는데, 알고 보니 엄마 역시 할아버지가 바깥에서 낳아 데리고 온 자식이었다. 할머니는 엄마가 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엄마를 아끼며 키웠고, 엄마가 역마살로 인해 매번 집을 나갈 때마다 돌아와야 하는 곳은 할머니가 있는 곳이라는 걸 깨닫게 했다.

내 할머니의 모든 것   할머니 배정심 여사는 40여 년 전에 엄마와 삼촌을 두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현재에 도달했을 때 엄마는 죽은 삼촌의 유산 문제로 할머니에게 연락을 했다. 1인분의 삶을 살아온 할머니 배정심 여사에게 괜히 마음이 기울어진 '나'는 그녀와 자주 만나게 된다.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끝내지 못하는 6년 동안의 연애를 제대로 끝내기 위해 '나'는 퇴사를 하고 인도로 떠났다. 그곳에서 나는 머무는 호텔 주인과 친하다는 남자 안와와 친구가 된다.

고래 사냥   '나'와 룸메씨는 어느 날 훌쩍 월미도로 바이킹을 타러 떠난다.


네버랜드에서   태국으로 가족 휴가를 온 '나'는 함께 오기로 했다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빠진 남자친구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던 중에 리조트의 스태프인 론과 인사하고 대화할 정도가 되면서, 그리고 결혼한 언니가 결혼 전의 언니와는 달라졌다는 걸 확실히 느끼면서 그들이 삶을 추구하는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를 갖는다.

지나가는 바람   '나'는 갭 이어를 갖겠다고 퇴사를 한 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저 나보다 먼저 퇴사한 입사 동기 민지씨의 열정적인 삶을 SNS로 훔쳐보며 감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전 회사 후배인 우림을 만나 저마다의 삶과 나의 삶에 대해 반추한다.

한낮의 빛   아르바이트생 주명이 '나'를 언니라고 부르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유영 언니가 떠올랐다. 오래전 우리 가족의 집에 잠시 머물렀던 유영 언니는 집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으로 인해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여러 이야기를 모은 단편은 모두 1인칭 시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중에서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대체로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나'를 중심으로 타인에 대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모두 비슷한 결의 사람들이라는 걸 느끼게 했다.

그 특징이 가장 도드라진 건 첫 번째 이야기인 <미노리와 테츠>였다. '나'와 오랜 친구인 수민은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 수민이 밝은 햇살을 잔뜩 머금어 모두에게 건강한 에너지를 나눠주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수민과는 반대되는 그림자와 같은 사람이었다. 회사 생활을 하고 있긴 하지만 사회성이 없다는 핀잔을 상사에게 들어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이제는 그림자의 삶이 익숙해졌다. 그러다 일본에서 알게 된 미노리가 더 가깝게 지냈던 수민은 빼고 '나'에게만 만나자고 한 이후 두 사람은 묘한 공감대를 느꼈다. 지나고 난 후에 그림자였다는 걸 깨달은 그들의 끝이 씁쓸하기만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자신의 이러한 삶의 방식을 유지할 거라고 보여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할머니의 모든 것>은 엄마와 삼촌을 두고 떠난 할머니에게 40여 년 만에 연락하게 되면서 손녀인 '나'와 인연이 맺어지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들의 관계가 이어지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을 정도로 드문 만남이었는데, 그러다 할머니가 다시 사라지게 되면서 '나'는 그녀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타인보다 자신을 우선하는 삶이, 그러면서도 뭔가를 이루며 살기보다 소박한 자신의 삶을 이뤄나가는 게 당신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하고 지키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남겼다.

<지나가는 바람>은 능력이 출중하고 삶에 열정적인 전 직장 입사 동기를 SNS로 염탐하며 자신의 삶을 축내고 있는 '나'를 이야기했다. 이런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는 와중에 전 직장 후배 우림과 만나 술을 마시게 되면서 그에게는 '나'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 결과 SNS를 끊고 자신의 삶을 이뤄나가려는 희망적인 끝을 맺어 응원하게 됐다.

<한낮의 빛>은 알고 보니 굉장히 화가 나는 심각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유영 언니가 '나'의 집에서 겪은 끔찍한 사건을 가족들은 아무렇지 않은 걸로 치부하는 걸 어릴 때는 별생각이 없었으나 머리가 크고 나니 너무 역겨웠다. 그로 인해 '나'가 어떤 병까지 얻어야 했고 결국에는 가족의 곁을 떠나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싶었다. 유영 언니가 받았을 상처로 스스로를 어둠에 가두려는 '나'를 양지로 이끌어준 주명의 손길이 괜찮다고 등을 쓰다듬어주는 것 같은 위로를 느꼈다.

그림자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잔잔하게 흘렀지만 때로는 마음을 깊이 찌르기도 했다. 9편의 단편을 읽은 후, 그들 삶의 그림자가 더는 짙어지지 않기를, 서서히 옅어진 그림자로 스스로를 미약하게나마 발하는 빛으로 이끌기를 바라게 되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어둠 속에 자신을 내버려둘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닐까. 너무 어두워서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가도, 시간을 견디면 결국에는 아주 느린 속도로 시야가 밝아지듯이. 캄캄한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 <변산에서> - P61

우린 아마 평생 이러고 살겠지. 갈대처럼 흔들리면서.
근데 갈대 괜찮지 않나. 지나가는 바람에 한껏 몸을 누이면 되니까. 한참 엎어져 있다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고, 또 엎어지고. 누가 누구를 일으켜줄 수는 없지만, 같이 엎어져 있는 건 참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우림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냥 속으로 생각만 했다. <지나가는 바람> - P225

눈을 감고 안대를 썼는데도 왜 어떤 잔상이 망막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걸까. 묻고 싶었다. 우리가 잠들 수 없는 것은 그래서일까. 우리가 우리에게서 빛의 기미를 완전히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한낮의 빛>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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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가장 위험한 곳, 집 앤드 앤솔러지
전건우 외 지음 / &(앤드)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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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우 × 누군가 살았던 집   '나'는 여자친구 J와 고향에서 도망쳐 서울로 올라왔다. 아는 형의 친구가 주식으로 대박이 났다는 말에 가족, 친구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돈을 빌려 자신도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맡겼다가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다.
모텔방을 전전하던 나는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나온 원룸 오피스텔에 들어가게 된다. J와 함께 하는 생활이 마치 신혼 같아서 즐거웠던 찰나가 지나고 집에서 수상한 분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J가 먼저 알아챈 화장실 환풍구의 이상한 냄새가 배수구를 타고 올라왔고, 나중엔 누군가가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이 뒤통수에 꽂혔다. 알고 보니 이전에 그 집에서 살던 여자가 모든 걸 두고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다.


정명섭 × 죽은 집   고등학교 동창 혜영과 유진은 각자 결혼생활을 하다 남편들의 바람으로 이혼을 했다. 유진이 재산분할 받은 돈으로 특수청소업체를 차렸고, 딱히 할 일이 없던 혜영이 직원으로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고독사한 사람들의 흔적을 치우는 일은 고됐지만, 산 사람이 더 무섭다는 걸 현장에서 경험했기에 두 사람은 서로를 지지하며 묵묵히 일을 해나갔다.
그러다 혜영이 빌라왕 때문에 전세 사기를 당하게 됐다. 같은 빌라 사람들과 공인중개사를 찾아가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어 평소처럼 일을 하던 그녀는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모아두는 남자의 집을 청소하던 중에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자신의 전세금을 떼먹은 빌라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유진과 함께 놈을 잡기로 하는데...


정보라 × 반송 사유   양현은 남편 오섬이 박사 논문 심사에 통과한 후 강의 때문에 이사를 하게 된다. 외진 곳에 있는 그 집은 버스도 드물게 다녀서 고립되어 있었다. 양현은 가계를 위해 일을 구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자꾸만 낚싯바늘이 떨어져 있어 다칠 뻔하기도 한다.
양현을 언니라고 부르며 잘 따르는 김혜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안부를 묻는데, 어느 순간부터 양현에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반려묘가 낚싯바늘을 삼켜 세상을 떠났고, 집에 놀러 온 김혜가 찍은 사진은 모두 까맣기만 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양현은 이상한 내용의 메일을 아는 사람들에게 보내게 되는데...


정해연 × 그렇게 살아간다   식도암으로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진혜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집을 떠나 살고 있는 오빠와 언니가 장례를 치르러 돌아온 후 집에 남은 사람은 간병으로 지친 진혜와 엄마뿐이었다. 어느 날부터 진혜는 삐쩍 마른 몰골을 한 아버지가 소름 끼치게 웃으며 같이 가자고 하는 악몽을 꾸게 되어 병원에 갔더니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엄마 역시 선잠이 들었을 때 아버지가 등장하는 악몽을 꾼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의 물건을 정리하던 진혜는 창고에서 아버지가 맞던 빈 수액 팩에 남은 액체가 갈색, 붉은색을 띠고 있는 걸 발견한다. 진혜가 그걸 들여다보고 있는 걸 발견한 엄마는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이 치우겠다고 말해서 의문이 들게 한다.



장르물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다진 전건우 작가의 단편이 도입을 장식했다. <누군가 살았던 집>이라는 제목은 신축 집이 아닌 이상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누군가가 살았던 집이라는 그 당연함이 주인공 '나'에겐 처음엔 두려움으로, 나중엔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반의 반도 안 되는 가격에 나온 집이라는 부분에서부터 의심해야 했지만 나와 J는 그러지 않았고, 또 전에 살던 누군가가 모든 짐을 그대로 두고 사람만 사라졌다는 것은 소름 끼치는 점이었으나 그때는 이미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정해연 작가의 <그렇게 살아간다>는 사람으로 인해 집이 두려워지는 점이 같았다. 안 그래도 꼬장꼬장했던 성정의 아버지가 아프고 나니 더욱 까탈스럽게 굴었던 건 당연하다. 엄마와 함께 간병의 고됨을 반으로 나누었지만 아버지의 투병과 죽음은 모녀에게 저마다의 죄책감을 남겼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진혜는 아버지의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의료진을 부르기를 망설였는데, 그 길로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마음의 짐이 생겼다. 그리고 엄마의 죄책감은 무엇이었는지 소설 후반쯤에 밝혀져 충격을 줬으나 진혜는 물론이고 책을 읽고 있는 나조차도 함부로 질타할 수가 없었다. 오랜 간병이 건강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해치는 걸 알고 있고, 또 엄마가 아버지로 인해 얼마나 괴로웠을지 세세하게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소설은 집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살아있는 사람, 남은 사람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이야기를 했다. 그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갈 사람들이 가여울 뿐이었다.


정명섭 작가의 <죽은 집>은 전세 사기와 특수청소업체라는 두 가지 설정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네 편의 이야기 중 가장 유쾌한 톤이었는데, 사실 소재 자체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보니 마냥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아이러니함이 있었다.
정보라 작가의 <반송 사유>는 여느 소설과 달리 등장인물들이 메일을 주고받는 형식을 띠고 있었다. 남편이 어느 대학 강의를 맡게 되어 외진 곳에 있는 집에 당분간 살게 된 양현과 그녀를 걱정하는 후배 김혜가 주고받는 메일이 주를 이뤘다. 양현이 사는 집이 기이하다는 건 낚싯바늘이 곳곳에 떨어져 있고 치워도 자꾸만 발견된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다 김혜가 놀러 왔다 간 이후 집에서 찍은 사진이 모두 새까맣다는 걸 확인하고 양현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메일이 등장했다. 양현 역시 이상한 말이 쓰인 메일을 보냈었는데, 소설 결말에 반전이 밝혀져 뒤통수를 쳤다. 기발한 구성과 반전이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가장 편한 곳이 가장 위험해졌을 때의 공포를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 앤솔러지였다. 짧지만 저마다의 이야기에 매력이 듬뿍 담겨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어쩌면 그때 마지막으로 심폐소생술이라도 요청했어야 했던 걸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음을 기다렸던 나를 아버지는 원망했던 걸까? 아니면 나의 죄책감 때문일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거의 매일 꿈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평화로운 꿈은 없었다. 그것은 악몽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정해연 <그렇게 살아간다> - P182

오래된 집일수록 그 내력을 가늠하기 어렵다. 몇 장의 서류만으로는 그 집에서 정말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거기에 도배며 청소까지 새로 해 버린다면 이전 거주자의 흔적은 말끔히 지워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끔히 단장한 채 순진한 이들을 기다리는 그런 괴물 같은 집들이 있다. 전건우 <누군가 살았던 집>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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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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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먼 친척 집에 여름 동안 잠시 맡겨졌다. 집안 일과 농장일, 다른 형제, 자매들까지 부모가 손이 갈 데가 많은 와중에 곧 또 다른 형제가 태어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소녀를 태우고 킨셀라 부부의 집에 도착해 잠깐 머물다 떠나버렸다. 소녀의 옷이 든 가방까지 가지고서 말이다.


늘 집에서 눈칫밥만 먹던 소녀는 킨셀라 아주머니, 아저씨 집에서 전에 없는 따스한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게 되는데...




마지막까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소녀는 말이 상당히 없는 편이었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은 형제자매가 있다면 시끄럽게 조잘거리고, 집이 아닌 다른 데에 가서도 끊임없이 떠들어댈 텐데 소녀는 말없이 차분하게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사실 분위기를 살피는 게 아니라 눈치를 보는 것에 가까웠다. 그로 인해 소녀가 집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예상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이렇게 주눅이 든 듯 말이 없는 거라 여겨졌다.


소녀가 킨셀라 부부의 집에서 보낸 첫날은 낯설어서 어색했으나 다행히 아주머니가 너무나 따스한 사람이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을 열 준비가 됐는지도 몰랐다. 소녀와 아주머니가 처음 만난 장면은 소설의 극 초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울컥 눈물이 나고 말았다.

이후 소녀는 아주머니, 아저씨와 함께 지내면서 집에서 배우지 못했던 것들을 익혔다. 아주머니에게서는 대답을 제대로 하는 법을 배웠고, 아저씨와 함께 책을 읽으며 발음이 어려운 단어를 익히기도 했다. 부부의 성격이 서로 닮아서 소녀가 무언가를 잘 하지 못해도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며 다독였다.

그렇게 두 사람과 함께 살던 소녀는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는데, 그때가 너무나 빨리 돌아오고 말았다.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자신의 생각은 뚜렷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소녀는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는데, 어떤 사건이 일어나 며칠 미뤄지고 말았다. 우연히 일어난 작은 사고였지만 덕분에 소녀는 자신을 살뜰히 보살펴주는 킨셀라 부부와 며칠 더 지내게 되었다. 소녀가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진짜 집을 떠나기 전과 돌아온 후의 소녀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는 게 눈에 띄었다. 말수가 없긴 했지만 그나마 하던 대답도 제대로 못 했던 소녀는 진짜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온 이후에 자신이 해야 할 말은 하게 되었다. 잠깐 사이에 킨셀라 부부의 애정을 듬뿍 받아 성장한 소녀의 모습에 뭉클해지는 한편으로 결말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속내를 또렷하게 이야기하며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들, 킨셀라 부부와 함께 지내면서 만난 수다쟁이 아줌마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며 소녀는 킨셀라 부부가 한 말에 관한 이야기를 깨닫고 마음에 새기게 되었을 것이다. 단지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상처를 헤집어 피를 흘리게 할 수도 있다는걸, 그 어떤 말보다 행동이 누군가의 마음을 안아주기도 한다는 걸 말이다. 짧은 보살핌이었지만 소녀에게는 오랫동안 기억될 다정한 따스함이었기에 작은 아이의 삶이 단단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작년에 영화 <말없는 소녀>를 보고 너무나 좋았는데 원작 소설을 이제야 읽게 되었다. 작가의 말과 옮긴이의 말을 제외하고 본편은 98페이지로 굉장히 짧지만 감동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영화를 먼저 본 덕분에 매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라 흐뭇함과 안쓰러움, 애틋한 감동을 느끼게 만들었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 P69.70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속을 스친다. 벽지에 그려진 남자아이, 구스베리, 양동이가 나를 아래로 잡아당기던 그 순간, 길 잃은 어린 암소, 젖은 매트리스, 세 번째 빛. 나는 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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