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건너 히치하이크 - 미국에 간 카티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강혜경 옮김 / 시공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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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라는 작가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전혀 없다.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의 원작가라는 설명에도 ‘아 옛날 텔레비전에서 했던 그 삐삐...’정도이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난 그 드라마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이상하게 양 갈래로 묶은 빼빼 마르고 주근깨 투성이였던 이국의 소녀 얼굴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 남들처럼 작가의 이름에서 아련한 어린 시절의 추억조차도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조국 스웨덴에서는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스트리드 린드그린 상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녀의 작품이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사전의 아무런 지식 없이 읽게 된 그녀의 소설. [바다 건너 히치하이크]

린드그렌이 동화 작가이고 제목 또한 다분히 동화적이라서 성인을 위한 동화 정도로 생각하고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책장을  덮은 뒤 나의 생각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왜 100개국이 넘는 나라에 80여 가지 언어로 그녀의 책이 소개되고 그녀에게 노벨상을 줘야 한다는 의견이 높았었는지 새삼 이해가 간다.




약 60여 년 전에 쓰인 작품이지만 지금 읽어도 별반 다르지 않은 미국 사회의 허와 실을 작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러나 글은 명랑하고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며) 콕 콕 잘 집어낸다. 비판을 비판에서 그치지 않고 생각을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자세. 나아가서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 성숙함을 배우게 해 주는 책이다. [바다 건너 히치하이크]




20대 초반의 주인공 카티가 생애 처음으로 외국여행을 간 곳이 미국이다.

최초의 외국여행을 하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 감각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를 바라보고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카티의 성숙함. 인종 차별에 대한 작가의 의식이 문장 문장마다 잘 녹아 있는 소설이다. [바다 건너 히치하이크]




이어지는 [베네치아의 연인]과 [아름다운 나의 사람들]에서 카티가 어떠한 여인으로 성장할 지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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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동안의 과부 2
존 어빙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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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치 않은 두께. 조금 특이한 제목. 잠 안 오는 긴긴 겨울밤을 함께 보내기에는 참 좋은 소설이다. 존 어빙의 [일년동안의 과부].

존 어빙이라는 작가를 처음 만나지만 ‘우리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찬사가 그의 이름 앞에 당당히 자리 잡은 것은 조금도 과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탁월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그의 입담과 섬세한 심리묘사가 아니라면 이야기는 그저 그런 외설적이고 통속적인 소설로만 보였을 테니까.




[일년동안의 과부]는 소설 속의 여러 주인공들이 교차적으로 화자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이 중 가장 중요하다면 중요하달 수 있는 메리언은 본인 자신은 화자로 등장하지 않고 다른 인물들의 상상과 나중에 작가가 되어 그녀의 소설로만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캐릭터가 [일년동안의 과부]를 이끌어 가는 원천이다. 그녀의 삶, 그녀의 고통, 그리고 그녀의 부재가 다른 주인공들의 삶의 방향을 이끄는 등대로 설정되어 있다.




[해나가 틀렸다는 걸 에디는 알았다. 시간이 멈추는 순간들은 있게 마련이니까.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지만.](2권 381쪽)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자신이 의식하고 있든 아님 의식하지 못하고 있든, 시간이 멈춰선 어느 한 순간에 의지해 일생을 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순간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앉아 나를 움직이고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이다. 존 어빙의 [일년동안의 과부]




[“너와 ‘진짜’인 것과 ‘꾸며낸’ 것.” 해나가 말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주제구나........”](1권 415쪽)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작가이다.

못 말리는 바람둥이로 묘사되어 있는 테드는 성공한 동화작가이고 그의 딸 루시 역시 나중에 작가로 성공한다. 모두의 곁에서 홀연히 사라진 뒤 소식이 없는 루시의 엄마 메리언도 캐나다에서 필명으로 작가로 활동한다. 그리고 열여섯의 나이에 서른아홉의 메리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평생을 그 사랑에 의지해 살아가는 에디 역시 나중에 작가가 된다.

그러나 그들이 쓰는 소설 혹은 동화는 모두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이 자신을 ‘진짜’와 ‘꾸며낸 것’으로 그려낼 뿐.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에 빠졌다고 상상하는 것을 어찌 구분할 수 있을까? 진실로 사랑에 빠지는 것도 상상의 행위가 아니던가.](2권 263쪽)




[열여섯 살 소년 에디는 메리언의 슬픔과 사랑에 빠졌던 것이니, 그 슬픔이야말로 어쩌면 아름다움보다 영원한 것인지 몰랐다.](2권 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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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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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직시라는 단어가 있다.

늘 잡아당겨진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을 바로 세우며 살고자 열망하지만 쉽지가 않은 것은 나, 혹은 이 땅의 여성들뿐만이 아닌가 보다.

한 때는 내가 처한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에 대하여 갖가지 이유를 대며 자위했던 적도 있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그것은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레이첼 커스크의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라는 소설을 이러한 결론 다음에 접한 것은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하겠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또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삶에 이리저리 휘둘렸을 테니까.




런던 근교의 가상도시 알링턴 파크는 중산층이 주로 밀집되어 있는 안락한 베드타운으로서 이곳에 거주하는 다섯 여자 줄리엣, 어맨다, 크리스틴, 솔리, 메이지의 평범한 어느 하루의 일상을 그린 것이 주된 줄거리이다.

30대로 예상되는 그녀들은 모두 기혼으로서 안정된 수입과 유치원 연령정도의 아이들을 두고 있다.




[머리를 헤치고 그에게 보여 주었을 때, 그때 깨달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 진정한 의미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제야 그녀는 그 의미를, 베네딕트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6쪽)




청춘의 한 시기를 마감하고 책임질 아이가 생긴 뒤

늘 그날이 그날 같던 따분한 일상의 연속이긴 하지만,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 슬그머니

비집고 들어선 삶의 남루함에 화들짝 놀라는 제스추어 대신 줄리엣은 알고 있었다. 라고 거듭 되뇌인다.

남자인 남편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음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며 아프게 새기지만 세상을 살아가기에 남자라고 녹록할까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을 보니 내가 이제는 많이 관대해진 모양이다.




[좋아하는 책들도 결국은 자신의 외로움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 책들은 야생의 황무지에 드문드문 세워 둔 작은 불빛들 같은 것이었다. 멀리서 보면 한데 모여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면 각각의 불빛들 사이엔 텅 빈 어둠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205쪽)




앞만 보고 달리던 그녀들이 적당한 시점에 멈춰 서서 자신의 삶을 정리해 보는 시간을 그린 소설. [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자신의 지금이 성공이라 느끼든가 아님 더 없는 불행이라 느낄지라도 우리의 주인공들은 그 순간을 딛고 굳건히 일어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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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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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먼 자들의 도시] 라는 제목은, 아직 이 책을 읽기 전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가벼운 심술이 느껴진다. 이 제목은 마치 책의 주인공이 눈 먼 사람이며, 눈 먼 자의 입장에서 내용이 전개되고, 눈 먼 자가 작가의 대변인이 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작품에서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사람인 의사의 아내에게 초점을 두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가벼운 심술에 미소 지으며, 책에 빠져 보자.

 이 작품에서 형식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인물들이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특정한 이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몰개성적이라는 이야기다. 작품 안에서 몰개성적인 인물은 그 인물이 가지고 있는 직업, 성격 , 특성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눈이 보이는 한 사람인 의사의 아내를 제외한다면, 작가는 이름을 가지지 않은 주변 몇 명에게 동일한 양의 관심을 주고 있다. 이로서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이나 특성을 가진 사람들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 전부를 상징하게 된다. 이러한 행위는 독자가 감정 이입을 쉽게 하고, 작품 내 인물들의 입장에서 고민하기 쉽게 됨으로서, 작품에 더욱 빠져들게 한다.

 이처럼 눈 먼 사람들의 입장에 공감하고 나서, 우리는 그들이 눈이 멀고 나서 겪는 것이 유사하고, 생각하는 것이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눈이 멀지 않은 유일한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게 된다. 아, 이 절망에 빠진 사람들 속에서, 이 타락해버린 사람들 속에서,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어떻게 행동하고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된다. 눈이 멀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엔 축복일, 눈이 멀지 않은 것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상처받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은 세계를 받아들이고 소통하는 수단이다. 그러한 눈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기에 소통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기만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눈 먼 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으나, 상대방은 자신을 볼 수 없기에, 혼자서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살고 있으며, 진실로 눈이 먼 유일한 사람이기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고통스러워한다.

 [눈 먼 자들의 도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명 백색 질병의 원인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아니 인간은 밝히지 못하고 지나갔다. 이 작품의 모든 백색 질병을 앓는 환자들은 갑작스럽게 시력을 잃는다. 그리고 다시 갑작스럽게 찾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작품의 후반부에서, 성당 안의 모든 성상과 모든 그림의 눈이 가려져 있는 충격적인 사건을 보게 된다. 그리고 눈을 잃었다가 다시 얻은, 이 백색 질병을 앓았다가 다시 나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을 보게 된다.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는 변하지 않았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 젊은 여자는 변했다. 우리는 여기에 주목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의사의 부인에 대해서만은,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의 범위 안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오고 가버린 백색 질병은 ,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한 병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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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밤
세사르 비달 지음, 정창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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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나름 고전문학에 흠뻑 빠져 지냈었다.

요즘 나오는 미니 북 중에서도 제일 작은 크기와 비슷하며, 세로로 깨알 같은 글씨가 촘촘히 박혀있는 삼중당 문고를 주로 이용했었다. 이유는 번역이 좋아서도 아니고, 특별히 그 출판사가 맘에 들어서도 아니고, 단지 가격 때문이었다. 당시 7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 버스비가 얼마였는지, 라면 값이 얼마였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으면서 삼중당 문고의 한권 값은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어떤 책은 정말 재미있어서 그 작가의 책을 모두 사 보려 노력하기도 하고, 어떤 책은 오기로 읽으려고 노력하다가 단 한권으로 끝내고 말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작가를 만나면 그 작가의 전작읽기를 시도하는 버릇은 그 때 생긴 듯하다. 그리고 나는 책읽기에 심한 편식증이 있어 고민인데 그 버릇 역시 아마도 그 때 시작되었을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워낙에 유명하고 고증된 작가이기에 그의 작품을 읽으려는 시도는 했었다. 하지만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에게 세익스피어의 작품은 영화를 보는 것만큼의 재미도 주지 못했다. 아마도 희곡이라면 고개를 흔들면서 멀리하고 보는 나의 못된 습관은 전적으로 그 때 읽은 세익스피어 작품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읽어보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보다가 포기하고, 세익스피어의 작품은 영화에 의존하기로 했다. 매주 토,일요일 밤이면 빼놓지 않고 보던 주말의 명화도 삼중당 문고만큼이나 그리운 것이다.




이제 불혹을 넘긴 나이에 새로이 세익스피어를 만나게 되었다.

세사르 비달의 [폭풍의 밤]으로.

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사실에 기반을 둔, 특히나 부인에게 두 번째 침대만을 남겼다는 유언장의 내용은 강력한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뭐라고, 도대체 왜?

세사르 비달의 [폭풍의 밤]은 이런 호기심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면서도, 마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새로이 세익스피어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곳곳에 세익스피어 원문의 대사를 그대로 사용한 듯 보이면서도 그 시절만큼 지루하지 않은 것은 세월이 지난 탓일까. 아님 세사르 비달이라는 작가의 힘일까.

세익스피어라는 멀게만 느껴지던 대작가에게 한발 다가 선 느낌이다.

이제 새롭게 용기를 내어 그의 희곡에도 도전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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